2013년 9월호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묵호의 냄새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13-08-22 14: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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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차가 대진항을 지나면서 갑자기 익숙한 풍경과 냄새가 떠올랐고 그것이 곧 어달동임을 확인했다.
    • 나는 도계를 나중 일로 미루고 묵호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묵호역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 있다. 북한강변의 도로. 이 길을 따라 동북 방면으로 줄기차게 달려가면 청평을 지나 가평, 그곳을 지나 남춘천, 또 거기를 우회도 하고 직진도 해가며 달려가면 인제다. 그쯤이면 욕심이 더 난다. 동북방의 제법 큰 도시 인제를 지나 원통이며 용대까지 가면 큰 고개를 넘고 싶어진다. 미시령이든 한계령이든, 그것을 넘어가면 동해다.



    열아홉 살 적 자전거 여행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 있다. 지금은 길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서울 동쪽의 미사리나 구리나 퇴계원에서 우편향(右偏向)을 지속하면 곧 동홍천까지 직진화한 고속도로를 달리게 된다. 그와 엇비슷하게 달리던 기찻길도 한 시간에 한 대 달리던 경춘선이 아니라 이제는 서울이 한 팔을 좀 더 길게 뻗은 듯한 느낌으로 변해버렸다. 구불구불, 북한강변의 낮은 자리로 달리던 열차는 사라지고 이제는 복선 전철로가 동북방의 산들을 관통하며 거의 직선으로 주파한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 있다. 그때도 뜨거운 여름이었다. 1986년이니 벌써 사반세기가 넘은 기억이다. 낭만적 시간 개념으로 오늘의 급변을 일부러 우중충하게 바라볼 마음은 없다. 변하는 것은 변해야 한다. 어쩌다 마음이 일렁거려 큰맘 먹고 경춘선 한번 타는 사람은 ‘느림의 미학’ 어쩌고 하면서 그것의 상실을 괜한 시름으로 여기겠지만, 서울과 춘천,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선 전철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재원과 에너지와 인력과 장비를 들여 이 동북방의 거친 산야를 직선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1986년의 여름도 무더웠고 2013년의 8월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덥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 있다. 그때 중고 자전거포에서 낡은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 별다른 장비도 챙기지 않고, 우선 집을 나서면 금세 돌아오기가 머쓱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대성리를 거쳐 가평으로, 또 그곳에서 춘천으로 양구로 인제로 그러다가 동해안의 양양, 울진을 거쳐 경북 내륙으로 들어가 상주, 대구 거쳐 경남의 마산이며 전남의 보성이며 끝내 목포까지 갔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나주 지나 광주에서 한 숨 고른 후, 모든 역에 다 정차하던 느리고 느린 비둘기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는 사이 자전거를 두 번인가 바꿀 수밖에 없었고, 버스정류장이며 짓다 만 가건물이며 어느 농막에서도 설익은 잠을 자곤 했다. 열아홉 살 적 일인데 그때의 도로 사정이며 자전거의 성능이며 주머니의 용돈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인연도 없는 농가에 불쑥 들어가 점심이며 저녁을 얻어먹으면서 며칠 다니기도 했으니 요즘 같으면 신고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의 협곡과 산모롱이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 있다. 인제군 남면 신남리! 그때는 며칠 동안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인제의 신남리에서 용대리에 이르는 길은 비포장이었다. 산의 중턱을 깎아 만든 도로는 끝도 없이 휘어졌다. 바로 눈앞에 도로가 보이지만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양호가 만든 물의 협곡 사이로 깊숙하게 들어갔다가 다시 거슬러 올라와야 했다. 그렇게 하여 다시 소양호에 가까이 다가서면 길은 산모롱이를 돌아나갔고, 그 길을 따라 돌고 나면 또다시 물의 협곡이 깊게 파여 있었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 있다. 소양호의 상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갈수록 길은 반듯해졌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소양호로 나왔다가 하는 고행의 페달링을 한나절이나 반복한 끝에야 겨우 용대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거기서부터는 비교적 길이 직선에 가까웠다. 그러나 다행이랄 것도 없는 것이, 그 길은 두 개의 높은 고개를 지향하고 있었다. 좀 더 위쪽으로는 마침내 속초에 이르게 될 미시령이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결국 양양에 다다르게 될 한계령이었다. 양양과 속초 사이에, 속초 쪽으로 더 가까운 곳에 물치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 ‘물치 삼거리’를 꼭 가보고 싶었다. 이제하의 소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에 그 지명이 나왔는데, 열아홉 여물지 못한 감각에 ‘물치 삼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꼭 가봐야 할 장소 같았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강원 강릉시 안목해변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안목해변 카페거리

    그러나 그렇게 하면 여정이 더 길어질 것이 염려돼 한계령을 넘기로 했다. 네댓 시간 정도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 한계령 휴게소에 이르러 물을 마셨다. 장비도 시원치 않고 무엇보다 요즘의 ‘자전거족’에게는 어림도 없는, 거의 가출 비행 청소년 수준에 땡볕에 그을려 완전 노숙자 꼴이 된 나는 휴게소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여자 대학생들이 하계 수련회 같은 이유로 여러 대의 관광버스를 타고 올라와 휴게소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중 몇 명이 재미 삼아 박수를 친 것이 번지고 번져서 갑자기 수십 명의 여대생이 나를 향해 박수를 치고, 꺄호호 환호성을 지르는 바람에 열아홉의 나는 갑자기 창피해져서 담배 한 대 피워 물 정도의 휴식도 없이 하행을 감행했다. 곧 양양이었다.

    지금, 서울의 동쪽에서 백담사가 있는 용대리에 이르는 길은 반듯하게 펴져 있다. 비포장길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경춘고속도로를 따라 동홍천까지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그 후로도 소양호를 내려다보는 교각의 연쇄에 의해 금세 설악산 아래까지 도달한다. 그런 직선의 길옆으로 자전거 도로까지 근사하게 펼쳐져 있어 울긋불긋한 차림에 안전한 보호장구까지 갖춘 자전거족이 날렵한 페달링으로 달려간다. 그 맵시 나는 행렬을 가만히 쳐다보니 불현듯 사반세기 전의 무모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이라도 낡은 자전거를 끌고 일부러 인제군 신남리 옛길을 찾아 달리고 싶다.

    기억의 길을 찾아서

    원래 8월의 여정은 강릉의 안목해변 커피거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한순간이나마 애틋한 장소에서 애틋한 감정을 되새기며 자기 마음의 여린 부분을 다독여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이 연재의 뜻이었고, 그것을 위해 우선 강릉을 생각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심산유곡의 오지도 생각했으나 누구나 찾아가는 대표적인 피서지로 방향을 바꾼 까닭은 손쉬운 곳에서 마음을 다스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강릉이라면 경포해변이 있고 그 위로 속초와 그 아래의 삼척까지 크고 작은 해수욕장과 항구가 줄지어 있다.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요즘 들어 크게 각광받고 있는 7번 국도의 중심이다. 피서철을 맞아 가족이 여행을 한다면 하루는 해수욕장에서 쉬겠지만, 날마다 바닷가에서 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양양의 낙산사나 삼척의 계곡도 찾을 만하거니와 특히 강릉의 커피거리라면 해 질 무렵 온 가족이 산책 삼아 나설 법한 장소라고 여겼다.

    그러나 강릉 안목해변의 커피거리는 다정하지 않았다. 피서철이라서 그런가. 저녁 산책을 하기에는 너무 시끄러웠고 차가 많았고 무엇보다 커피가 무르익지 않았다. 세 군데 카페를 들렀다. 서울 같은 대도시의 길목마다 난립해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 강릉의 커피거리에도 들어서 있었는데, 그것을 피해 세 군데를 들렀다.

    피서철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일까, 일하는 친구들의 손이 서툴렀다. 해변에 카페가 몰려 있을 따름이었다. 아늑한 장소는 없었다. 독특한 향기를 지닌 곳은 드물었다. 의자나 테이블이나 조명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다한 느낌은 부족했다. 무엇보다 커피 맛이 얕았다. 피서철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단위로 몰려드는 피서객들을 커피거리의 카페들은 수용하기 어려워 보였다. 아무래도 이 거리는 찬바람 분 다음이 제격일 것이다.

    아뿔싸,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이 취재의 목적은 커피거리를 시작으로 하여 가장 아늑하고 근사하고 기품 있는 카페를 찾아내고 그 맛과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었는데, 7월 말에서 8월 초에 걸쳐 있는, 연중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강릉의 해변에서는 그 일이 무망했다. 정성껏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그래도 꽤 수준 있어 보이는 어느 전문 카페에서조차 그 바리스타는 끝없이 몰려드는 피서객 때문에 도무지 짬을 낼 수 없어 보였다.

    나는 안목해변에서 벗어났다. 저녁은 곧 밤이 되어 있었다. 시내로 접어들어 강릉의 밤을 훑어보다가 오늘 밤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설국열차’를 보러 극장으로 갔다. 장안의 화제작인데다 언제고 볼 영화였으므로 이 텅 빈 시간을 활용하자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다. 그러나 영화의 첫부분에서, 열차 소리가 극장을 가득 채우자마자, 나는 생각했다. 강릉의 카페거리에서 일을 마무리 못한 것이 차라리 좋았다. 아, 그렇지, 열차를 타러 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스크린에서 열차는 달렸다. 논스톱으로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열차! 쉬지 않고 달린다. 물론 정치적 은유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열차를 물리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전문 비평가와 눈썰미 있는 팬들이 이미 말했듯이 이 영화에서 열차는 도무지 멈출 줄 모르는 거대한 약육강식의 세계를 뜻하기도 하고, 더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생태계적 재앙의 물신이기도 하고, 인간 군상이 뒤섞여 살아가는 이 사회의 압축판이기도 하다. 열차는 폭파나 탈선이 아니고서는 멈추지 않는다. 영화 속의 열차는 그러한 은유를 싣고 무한히 달린다. 뚜렷한 인생의 목적지도 없이 무한 경쟁으로 달려야만 하는 우리네 삶처럼.

    하여간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열차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 옛날, 1986년의 한여름에, 인제를 지나 한계령을 넘어 양양에 이르렀던 열아홉의 미성년이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페달을 밟았을 때, 갑자기 바로 곁에서 쿵쾅대며 달려가던 무궁화호 디젤 열차! 그 열차를 타기로 결심했다.

    정동진의 추억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그 무렵의 정동진은 지금과 같은 정동진이 아니었다. 정동진의 역사는 나름대로 오래되었으되 근자의 풍경이란 결국 드라마 ‘모래시계’ 이후의 결과다. 1986년의 정동진은 7번 국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해변의 작은 간이역이었다.

    그때 나의 자전거는 비포장도로를 연신 헤매고 있었다. 지금은 7번 국도마저 양양 거쳐 속초까지 확장하고 있는 동해고속도로에 그 속도와 수송의 임무를 차츰 넘기고 있지만 그 당시엔 고속도로가 강릉에 겨우 다다른 정도였다. 강릉∼옥계 탄전지대의 석탄 수송을 원활하게 하려고 건설한 동해고속도로는 1974년 3월 착공해 1975년 10월 개통했으며 내가 낡은 자전거로 해변을 달리던 1986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확장 공사에 나섰다. 그러니까 내 자전거는 확장공사 탓에 끊긴 7번 국도 안팎의 거친 대로를 피해 해안의 비좁고 낡은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진실로 아담하고 아름다운 역 하나를 만났다.

    인제에서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한계령 휴게소에서도 담배 한 대 제대로 못 피웠고 양양으로 내려오니 그래도 도시라서 회피하지 않을 수 없었고 포장공사 현장에서는 쉴 수도 없었던 몸이니, 그 아담하고 아름다운 기차역은 장거리 여행 중에 만난 최고의 쉼터였다. 그곳이 정동진역이었다. 발아래로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뒤로는 낡은 선로가 있었다. 역사는 작았다. 마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아마도 그 무렵의 정동진은 지금 같은 상가 지구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열차가 잠깐 머무는 정도의 작은 마을이었을 것이다.

    나와 자전거는 오랜만에 멈췄다. 소나무가 몇 그루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벤치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1995년 이후에 단장됐을 것이다. 그해 1월에서 2월 사이에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됐다. 최고 시청률이 무려 65%였다. 그래서 정동진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확한 문헌적 기록은 없지만 사람들이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 관광을 나선 첫 번째 사례가 바로 ‘모래시계’의 정동진일 것이다.

    사람들은 정동진으로 몰려들었다. 이를 맞이하는 사람들은 가게마다, 리어카마다 모래시계를 쌓아놓고 팔았다. 마침내 정동진 남쪽 언덕에 거대한 배 하나가 올라섰다. 흡사 대양을 헤매다 언덕 위에 좌초한 듯, 2001년 12월 선박형 구조물 호텔이 정동진 남쪽 야산 60m 위에 건립된 것이다. 길이 165m, 높이 46.8m, 폭 26m의 이 호화유람선 형태의 숙박시설은 인간이 이 세계의 지형지물을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대범하게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한 설치미술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내 마음속의 정동진은 사라졌다.

    나는 8월의 오후에 강릉에서 열차를 탔다. 강릉역의 주차장에 차를 버려두고 역사 안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 옛날처럼 거친 숨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열차는 시발역이 되는 강릉을 떠나기 위해 잠시 몸을 뒤틀었다. 곧 정동진에 도착했다. 나는 차창 밖의 정동진을 바라보았다. 피서철이라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모래시계도 여전했고, 참으로 조잡하게 만들어놓은 조형물들도 여전했고 저 언덕 위의 거대한 유람선 모양도 여전했다. 내 마음속의 정동진은 사라져버렸다. 힐링은 고사하고 마음이 오히려 텅 빈 듯했다. 잠깐이라도 내릴까 했으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열차는 출발했다. 곧 묵호였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정동진역

    온 세상 가득한 비린내

    강릉에서 정동진 거쳐 묵호에 이르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내 미성년의 기억을 완전히 복기해버렸다. 마치 영화의 시퀀스처럼, 그 시절의 자전거 여행은 묵호에서 한 단락이 맺어진다. 가평에서 인제까지, 정동진에서 묵호까지, 그다음은 울진에서 시작해 상주로 끝이 나고, 또 그다음은 마산에서 보성 지나 목포에 이르는 식이다. 왜 그렇게 단락이 나뉘는지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자전거 여행은 군데군데 잘려 나간 몇 단락으로 기억된다.

    왜 묵호일까. 나는 7번 국도를 따라 삼척 지나 울진으로, 거기서 경북 산간 지방으로 꺾어졌는데, 왜 묵호가 한 시퀀스의 마무리로 유난히 또렷한 것일까. 이번에 열차를 타면서 그 까닭을 짐작하게 되었다.

    강릉에서 출발한 열차는 정동진까지 해변을 따라 달리다가 옥계 쪽으로 가면서는 잠시 바다와 멀어진다. 그렇다 해도 10분 안팎의 일이지만 하염없이 바다를 곁에 두고 달릴 것 같은 선로가 잠깐 산야로 방향을 틀자 일부 피서객은 아쉬워하기도 한다. 그랬던 열차가 망상을 지향해 다시 바다 곁으로 나오게 되고 곧이어 대진항을 지나 묵호로 들어가게 된다.

    그 사이에 나는 어달해수욕장을 보았다. 그렇다는 것은 그 해수욕장 바로 곁이 어달동이라는 뜻이다. 열아홉 살 때의 자전거 길에 만났던 바로 그 어달동이다. 지도를 확인해보니, 나는 그때 동해고속도로는 물론이고 7번 국도 또한 이용하지 않고 그저 비좁고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계속 달렸던 것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온 세상을 가득 채운 비린내를 맡았다. 그 냄새는 지금까지도 짙게 풍겨져 온다. 열차나 자동차라면 그 차창을 열기 전에는 맡을 수 없는 냄새일 텐데, 나는 그때 온몸으로 맞바람을 받으며 연신 페달을 밟고 있었고 묵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흡사 안개처럼 완전히 항구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비린내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저녁 불빛이 하나둘씩 밝혀지던 어달동 언덕에 서서 나는 한참이나 비린내를 맡았다.

    오래전, 나는 이 길을 간 적이 있다

    묵호 밤하늘

    아니, 비린내를 맡고 싶어서 그 언덕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달동의 앞바다가 황홀했었다. 아마도 오징어잡이에 나섰을 게 틀림없는 작은 배 서너 척이 멈춘 듯 떠 있었다. 어달동의 낡은 집들이 하나둘씩 불을 켜고 있었다. 그 언덕길에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리하여 꽤 오랫동안 비린내를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 냄새는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또렷하게 깔려 있다. 묵호의 어달동을 떠올릴 때마다 심상대의 소설이 생각난다. ‘묵호를 아는가’라는 작품이다. 심상대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 묵호는 술과 바람의 도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둘러 독한 술로 몸을 적시고, 방파제 끝에 웅크리고 앉아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토악질을 하고, 그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 가끔은 돌아오는 이도 있었다. 플라타너스 낙엽을 밟고 서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다가, 아파트 베란다에 나서서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무언가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면, 그들은 이 도시를 기억해냈다. 바다가 그리워지거나, 흠씬 술에 젖고 싶어지거나, 엉엉 울고 싶어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허둥지둥 이 술과 바람의 도시를 찾아나서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묵호는, 묵호가 아니라 바다는, 저고리 옷고름을 풀어헤쳐 둥글고 커다란 젖가슴을 꺼내주었다. 그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고 도리질하며 울다가 보면, 바다는 부드럽게 출렁이는 젖가슴으로 돌아온 탕아의 야윈 볼을 투덕투덕 다독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얘야, 떠나거라. 어서 떠나거라, 얘야.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단다. 자아, 어서 인간의 바다로 떠나거라.”



    논골마을 판잣집

    묵호는 큰 항구였다. 지금은 산업과 관광의 트렌드가 변해 아래쪽의 동해 삼척이나 위쪽의 강릉 속초와 비교해 일견 위축된 형편이지만 20세기 중엽의 묵호는 외항선이 드나들던 동해안의 가장 은성한 항구였다. 한때는 오징어를 비롯한 건어물 생산 유통의 80%를 담당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러시아산 대게를 삶아 파는 가게들이 묵호에서 어달을 거쳐 대진항까지 줄지어 있다. 심상대의 표현처럼 오징어가 만국기처럼 집집마다 널려 있던 풍경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제 그런 풍경을 보려면 언덕 위 판잣집 마을을 찾아다녀야 한다. 그 언덕의 담벼락에 옛 시절의 오징어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논골마을이라고도 하는 묵호진동이 그곳이다. 논골마을의 풍경 시계는 1980년대에 멈춰 있다. 묵호는 일제강점기인 1941년 어업 전진기지로서 개항하면서 급속하게 발전했다. 그 역사의 중심에 묵호진동, 즉 논골마을이 서 있다. 아버지는 오징어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어머니는 오징어를 다듬고 말렸다. 시멘트 공장이나 무연탄 공장이 인근에 들어서면서 맨몸 하나로 가족들 먹여 살리려는 사람들이 묵호로 몰려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묵호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로 들어와 살았고 그런 풍경이 지금의 논골마을에 남아 있다.

    시인 이동순은 시집 ‘묵호’를 2011년 출간했다. 1973년 신춘문예에 당선한 시인에게 팬레터가 쏟아졌는데 그중에서 어느 여성의 편지가 각별해 일부러 만나러 간 곳이 묵호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묵호에 사무친 시인은 급기야 69편 전체를 이 항구에 바친 시집을 빚어낸 것이다. 묵호의 바다와 사람과 냄새들. 그 눈물과 인연과 기억들. 그것이 시집 ‘묵호’에 담겨 있다. 그 한 작품인 ‘묵호 장날’을 읽어본다.



    파릇파릇 새싹이 돋네

    엄마 발걸음 서둘러 묵호 장 가시네





    안주인 없는 빈집엔

    강아지도 구름 보고 짖다 잠잠하고

    처마 밑 툇마루엔 하루 종일 심심한 바람만 드나드네





    긴긴 하루에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데 엄마 돌아오시는 소리 들리지 않네

    내 귀는 온통 대문 앞에만 가 있네





    엄마 혼자 무겁게 들고 오실

    장바구니가 눈에 선하게 떠오르네

    냉이 한 줌 두부 한 개

    망개떡 한 봉지





    묵호역에서 나는 잠깐 망설였다. 강릉역에서 표를 살 때, 나는 창구를 향해 “도계 한 장 주세요”라고 말했다. 차를 강릉역 주차장에 맡겨놓았기 때문에 저 멀리 청량리까지 가는 이 열차를 너무 오랫동안 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정동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가벼운 행태일 뿐이라서 강원 산간 도시를 목적으로 하고 살펴보니 도계가 눈에 들어왔다. 도계까지 들어갔다가 여차 하면 버스를 타고 철암까지 더 들어가고 또 거기서 태백, 정선으로까지 가고 싶었다.

    그렇게 표를 구해 탄 열차지만 나는 묵호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열차가 대진항을 지나면서 갑자기 익숙한 풍경과 냄새가 떠올랐고 그것이 곧 어달동임을 확인한 나는 묵호역에 내리고 말았다. 해는 여름이라, 아직은 밝았다. 나는 도계를 나중 일로 미루고 묵호항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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