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자유의 언덕’이 있는 곳, 서울 북촌

  • 글·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김성룡 | 포토그래퍼

    입력2015-01-21 11: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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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이 뒤섞였다. 과거 속에 현재가 있고, 현재 속에 과거가 살아 숨 쉰다.
    • 화가와 시인 같은 ‘싸움꾼’들이 자유로운 영혼을 찾아 깃든다.
    • 같은 골목인데 사람들의 시선은 각자 ‘이기적’이다.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한 이래 지금껏 장장 스무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홍상수 감독은 늘 기이하면서도 발칙한 제목을 사용해 왔다.‘강원도의 힘’이라든지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든지 ‘하하하’라든지,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접하기 전 늘 제목을 보면서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갸우뚱하곤 한다.

    최근 작품도 그 점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북촌방향’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 ‘자유의 언덕’…. 그의 영화는 늘 제목만으로도, ‘이건 사실 별 얘기 아냐, 그러니 그다지 신경 쓸 것 없어. 괜히 모든 영화에 의미 부여하려 하지 마’라는 식의, 홍상수 특유의 무덤덤하고 무신경한, 그래서 오히려 세상과 동떨어져 그 세상을 보다 더 신경질적으로 조소하는 듯한 표정을 드러낸다.

    놀라운 것은 지난 2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그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편수의 영화를 찍어댔다는 것이다. 거의 1년에 한 편꼴이며 어떤 해에는 두 편을 찍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가 양(量)으로 승부를 내는 감독이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올시다’이다. 그 많은 영화를 만들면서 그는 국내외 평단에서 한결같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오히려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늘 진화하고,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작품을 만드는 데 주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근까지도 홍상수는 신작으로 국내 영화상을 휩쓸다시피 했는데 국내에 이런 감독, 즉 최다 편수를 자랑하면서 역시 최다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감독은 매우 드물다.

    ‘천재적’인 초저예산 영화 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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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 포스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보통 영화를 만들려면 평균 30억 원이라는 물적 지원이 수반돼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매번 안정적으로 투자를 받아내는 감독이라는 얘긴가. 그것 역시 ‘아니올시다’다. 그는 상업성 있는 감독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꾸준하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대기업 자본에 전혀 기대지 않는, 초저예산 공법의 영화를 선호해왔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최근 들어 숱한 스타를 기용해 영화를 찍으면서도 편당 제작비가 1억 원을 넘지 않는 절묘한 제작 행태를 보여왔다. 국내 제작자들, 감독들이 그런 그를 보며 혀를 내두르는 것은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단 스타들은 그의 영화에 나오면 돈을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태프도 적은 비용을 마다하지 않는다. 홍상수와 영화를 한다는 것을 좋은 기회로 받아들인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이제는 ‘열정 페이’만으로는 일을 추진할 수 없다. 아무리 인건비를 줄인다 하더라도 기본 세팅 비용은 들어가야 한다. 카메라를 포함해 장비도 있어야 하고, 일단 무엇보다 물류비용, 곧 오가는 데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홍상수 영화의 비결과 핵심은 바로 이 부분, 그러니까 로케이션(location) 촬영을 극도로 줄임으로써 이동 비용을 ‘제로베이스’로 한다는 데에 있다. 영화를 거의 한 공간에서 촬영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싸게, 빨리, 간편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작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오히려 더 다양하게 묘사해낼 줄 알아야 한다. 홍상수의 천재성은 여기에 있다. 그는 공간의 흐름이 아닌 내면의 흐름을 통해 러닝타임 1시간 반 가까운 영화의 이야기를 직조해낸다. 그의 영화가 단순히 ‘보는’ 작품이 아니라 ‘읽는’ 작품의 느낌이 나는 건 이 때문이다.

    홍상수의 최신작 ‘자유의 언덕’이 바로 그렇다. 일본 배우 가세 료의 ‘메소드 연기’(배우가 극중 캐릭터에 완전히 동화돼 연기하는 방식)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그리 복잡한 줄거리를 가지지 않은 척하지만, 사실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치밀하게 씨줄 날줄로 얽혀 있다. 한 줄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100페이지 정도로 풀어 써야 영화의 의미가 들어온다.

    ‘뒤섞인 과거’의 기억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한적한 북촌 골목(왼쪽)과 ‘북촌공원’의 고목.

    일단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몸이 아파 요양을 갔다가 서울 북촌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여자(서영화)는 문에 꽂힌 편지를 발견한다. 오래전 자신에게 청혼했던 일본 남자 모리(가세 료)가 남긴 편지다. 편지는 일기 형식으로 그가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는 남자가 남긴 편지 아닌 일기를 보던 중, 그걸 계단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여자는 이제 모리가 남긴 한국에서의 일상을,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뒤인지 모른 채 좇아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모리가 자신의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될지, 아닐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던 와중에 모리가 또 다른 여자 영선(문소리)을 만나 잠자리까지 같이 하게 되든 말든 그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그건 모리의 판타지인가, 현실인가?). 그가 머무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아들(김의성)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하는 건 또 아무러면 어떤가.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있는 묘령의 여인(정은채)은 남자 때문에 집을 나온 모양인데, 결국 아빠(기주봉) 손에 끌려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도 모리에게는 한국, 특히 서울 북촌에서 겪는 별의별 일 중 하나일 뿐이다.

    이 영화 ‘자유의 언덕’에서 중요한 점은 시간이 뒤섞여버렸다는 것, 이야기의 순서가 선형이 아니라 비선형으로 이리저리 꼬였다는 것이다. 이 비현실의 현실감. 홍상수는 우리가 기억 속에 간직하는 일상의 순서는 그렇게 제멋대로라는 점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을 우선순위로 배열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시간에 따라 진행된 과거의 일상은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내가 기억하기를 원하는 순서에 입각해 정리되고 우리 기억에 남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흘러가는 일상의 기억이 자의적으로 재배치되는 과정을 목격하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홍상수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북촌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30년 된 철물점 옆에 모던한 커피숍이, 시골스러운 식당 골목에 유럽식 카페가 눙치듯 자연스레 자리 잡고 있다.

    30년 된 철물점 옆 모던 커피숍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안타깝게도 북촌의 옛 공중목욕탕은 곧 헐린다.

    ‘자유의 언덕’을 포함해 ‘북촌방향’ 등 홍상수 영화에 북촌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앞서 얘기한 촬영 장소 문제에 있다. 홍상수가 보기에 북촌이라는 좁은 동네를 잘 활용하면 여기서 영화 한 편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작지만 활용도가 높은 공간인 데다가 이 동네에 매력적이고 특이한 명소나 카페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별다른 무대미술을 더하지 않고도 그냥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을 만한 곳이 많다는 얘기다.

    ‘북촌(北村)’ 하면 말 그대로 서울 북쪽에 있는 마을, 동네를 뜻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가회동에서 계동 사이를 일컫는다. 그래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면 헌법재판소와 현대그룹 본사 빌딩 사이의 구역을 생각하면 된다. 좀 더 넓게 보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사간동과 삼청동 그리고 가회동, 소격동, 계동, 원서동 일대를 지칭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시작해 우회전한 후 정독도서관을 거쳐 계속 직진하면 오랜 음식점인 ‘북촌만두’와 ‘용수산’이 나오는데 그 정면에 창덕궁 돌담길이 보이면 거기가 북촌마을의 끝이라고 보면 된다. 그 길을 지름으로 잡고 머릿속에서 반경 1km의 원을 그리면 그 안에 북촌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온다.

    북촌이 재미있는 것은 근대와 현대, 과거와 현재가 부딪히거나 갈등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해서다. 예컨대 문 연 지 30년도 넘어 보이는 철물점이 있고 바로 그 옆에는 가장 모던해 보이는 커피 가게가 붙어 있는 식이다. 계동 골목길에는 여전히 ‘똘똘이네집’ 같은 노점식 맛탕 가게와 ‘중앙탕’이라는 이름의 공중목욕탕(안타깝게도 이 집은 요즘 재건축되는 모양인지 헐리고 있다)이 있는가 하면, 그 길 아래로는 현대식 의상점, 액세서리 가게가 즐비하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에선 옛것과 요즘 것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오히려 편안함과 느긋함을 느끼는 것이 읽힌다.

    ‘싸움꾼’들의 서식처, 카페 ‘소설’

    요즘 들어 이 동네 이곳저곳을 힐끔거리며 망중한을 보내는 관광객 아닌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사람들이 이곳을 편하게 느끼는 것은 겉으로 필요한 것과 속으로 필요한 것을 일목요연하게 다 갖췄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멋을 내고 요란하게 다녀도 뭘 해먹기 위해서는 들기름이 필요한 법인데, 이 동네엔 들기름집까지 있다. 살다보면 고급 미용실을 가기도 하지만 동네 미용실에서 후다닥 머리를 손질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전구를 갈기 위해서는 전파상도 가까워야 하고, 꼭 현대식 마트는 아니어도 그때그때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멍가게가 더 편할 때가 많다. 북촌이 바로 그런 곳이다.

    헌법재판소 건너편 골목길로 들어가면 계동으로 이어지는 길 어귀에 ‘소설(小說)’이라는 카페가 있다. 서울에서 난다 긴다 하는, 뭐 좀 합네 하는 예술인이라면 대충 다 모이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주인 염기정(55) 씨가 운영하는 이곳은 북촌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20대 초반 장필순 등과 함께 포크그룹 ‘햇빛촌’에서 활동했던 염씨는 1988년부터 신촌에서 바를 운영하다 1996년 인사동에 이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인 2000년 북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염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화가와 시인 같은 ‘싸움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소설가 황석영과 성석제, 건축가 조건영, 그리고 홍상수 같은 영화감독이 단골손님이다. 이곳은 끊임없이 자유를 찾고 또 자유를 갈망하는 예술가들의 서식처 구실을 했다. 여주인은 손님들처럼 술에 불콰해지기 일쑤고 ‘전 손님의 종업원화(化)’라고, 아무나 주방을 드나들며 안주를 만들거나 술병을 꺼내 들고 와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분위기가 사람들을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게 만들었다.

    홍상수는 아예 이곳에서 영화 한 편을 거의 다 찍다시피 했다. 바로 ‘북촌방향’이라는 영화다. 카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킥킥’ 댔다. 자기가 너무나 잘 아는 공간이 영화 속에 나왔을 때의 그 기묘한 희극적 느낌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가 영화 같지 않거나, 어떤 때는 오히려 더 영화 같은 이중성을 느낀다. ‘북촌방향’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을 주 무대로 삼아 홍상수가 영화를 통해 추구하는 이 사회 지식인들의 ‘스노비즘(snobism·속물주의)’을 더욱 더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같은 이야기의 반복…달라지는 시선

    영화 ‘북촌방향’의 줄거리는 짧으면서도 길다. 하나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중첩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예술영화 몇 편을 찍었지만 그다지 잘나간다고 할 수 없는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북촌에 와서 선배인 영호(김상중)를 만나려 애쓴다. 그 와중에 인사동에 가서 술도 마시고 옛 여자친구(김보경)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선배 영호를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카페 ‘소설’. 성준은 카페 여주인이 옛 여자친구를 닮은 게 희한하다. 술자리에는 어떤 여교수(송선미)가 동석하고, 이날 성준은 카페 주인과 몸을 섞는다. 그리고 다음 날 혹은 다른 그 어느 날 성준은 영호와 그 여교수, 그리고 배우 출신의 다른 남자(김의성)와 넷이서 술을 마신다.

    영화는 이 이야기의 반복이다. 다만 시선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 점이 아주 흥미롭다. 사람의 기억은 조금씩 변형된다는 것, 중간 중간 삭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미된다는 것, 그럼으로 해서 기억의 진실은 어쩌면 진실 그 자체가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것, 남기고 싶은 것, 사랑하고 싶은 것만을 고르려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취약한 이기(利己)임을 설파한다. 영화는 일상의 이야기인 척, 사실은 다양하고 다기한 철학을 담보한다.

    북촌을 찾는 사람 중 많은 수가 홍상수 영화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그의 영화는 그리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지 못하지만 로열티가 강하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의 매력에 빠지고 그가 보여준 공간에 매력을 느낀다.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서양화가 고희동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직접 설계해 지은 목조 가옥.

    꼭 홍상수 영화 때문이 아니더라도 북촌에는 가볼만한 명소가 많다. 예컨대 고희동 가옥 같은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1918년 직접 설계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목조 가옥이다. 마당 정문 본채에는 ‘춘곡의 집’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춘곡’은 고희동의 호(號)다. 개량 한옥이라지만 일제 강점기가 본격화하기 직전, 일본식 가옥이 아닌 한옥의 멋스러움을 간직하려 했던 고희동의 뜻이 담겼음을 알 수 있다. 100년이 다 된 가옥이지만 잘 보존돼 있다. 마당 한가운데 서 있으면 이상한 데자뷔 같은, 역사적 통시성이 느껴진다. 북촌의 맛은 이런 것이다.

    고희동 가옥을 가기 전에 ‘은덕문화원’이라는 웅장한 저택이 하나 있다. 원불교 재단이 운영하는 이곳은 일종의 수도원이다. 그래서 일반인에게는 거의 개방하지 않지만 문화원 바로 옆에 붙은 ‘카페 마고’를 통해 본채 안쪽으로 접근할 수 있다. 적요(寂寥)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마음의 심상을 스스로 그려보게 만드는 곳이다. 100년 넘은 가옥을 원불교가 인수해 현대식으로 재정비한 이곳은 다소 이국적이다. 중앙에 ‘ㄹ’자형 정원이 꾸며져 있고, 정원을 따라 옛 일본 건축양식을 유지한 본채와 새로 지어진 별채가 이어졌다.

    영화 ‘자유의 언덕’에서 주인공 모리가 머무는 게스트하우스 ‘휴안(休安)’은 항상 개방된 것이 특징이다.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영화를 생각하며, 혹은 모리를 생각하며 집 안을 둘러볼 수 있다. 하루나 며칠을 묵는 데 그리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고 늘 어딘가 머무는 법이고, 값싸고 따뜻하며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을 찾는다. 한옥인 ‘휴안’에 들어서면 그런 느낌이 난다. 여기서라면 다시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죽치고 기다리면 떠나간 여인이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언덕’

    인생은 늘 반복적이기 마련인데 반복할 때마다 잘못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어디 있고, 또 누구와 함께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싶은지가 명확해야 한다. 북촌에 서 있으면 마치 우주평행이론을 체험하는 듯 과거의 내가 현재와 미래의 나와 조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북촌은 언덕이 아니다. 그럼에도 홍상수가 이곳을 자유의 언덕이라 한 것은 사람이라면 진정 자유롭게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뼛속 깊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바로 거기에서 예술이 만들어지고 진정한 삶의 방식이 마련된다는 것, 내가 자유로워져야 다른 이들도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깨닫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화 ‘자유의 언덕’과 서울의 북촌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북촌에 가면 자유가 있다. 잠깐이나마 그 기분을 만끽해보시라. 삶은 종종 진정한 휴식이 필요한 법이다.

    비현실의 현실감 데자뷔 속 자메뷔

    영화 ‘자유의 언덕’의 주무대로 사용된 게스트하우스 ‘휴안’은 항상 개방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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