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현역 최고령 시인 황금찬

  • 원재훈 | 시인 whonjh@naver.com

    입력2015-07-23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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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최고령 현역 시인 황금찬(97)이 올해 대한민국 예술원상 문학수상자로 선정됐다. 황 시인을 기념하는 ‘황금찬 문학상’이 올해 제정되기도 했다. 청록파를 잇는 대표적인 순수 서정시인으로 우리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긴 노시인이 들려준 문학과 삶 이야기.
    “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100세를 서너 걸음 앞둔 노시인의 기억과 추억은 드문드문했다. 이 말씀을 여쭈면 저 대답을 하고,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을 다시 하곤 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았지만, 때로 무대 위에서 독백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대화에 중심이 없고, 어느 순간에는 시인의 인생 변두리를 떠도는 느낌도 들었다. 어느 순간에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문득 하시곤 먼 산을 바라보았다. 몸과 영혼의 경계선이랄까, 곁으로 무엇인가 희미하게 지나가는 인기척이 느껴지곤 했다.

    먼 길을 날아와 찢어진 날개로 나뭇잎에 앉은 한 마리 나비처럼, 선생의 기억은 여기저기 해진 수도승의 가사처럼 남루한 것인가. 인생을 수능 문제 풀듯이 풀어대고자 하는 정신으로는 선생과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것이다. 선생은 나의 단순한 질문에 깊은 대답을 하셨다. 잘 적어놓았다가 인생 노트에 새겨놓으면 그 자리에 꽃이 필 것이다. 마른 꽃으로 피어난 시 한 편을 바라보았다. 몇 년 전 선생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선물 받은 흰 도자기에 새겨진 시를 제법 오랜 시간 바라보았다. 백자 항아리는 항상 저 자리에 있었다.









    지금 그 길은

    행복으로 가는 찬란한 길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저기로 걸어가는 것

    선생님과 한담을 마치고 길 건너 자택으로 모시고 가는 길에 선생에게 물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손은 어린 후배의 팔에 의지하고 천천히 걸었다. 걸음걸이가 느리지만 갈 길은 정확하게 아신다. 생은 이렇게 저기로 걸어가는 것인가 싶었다. 결국 사람은 자신이 이전에 살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인가. 잠시 친구를 만나기 위해 약속시간에 나와 커피를 마시고 집으로 가는 것처럼.

    “선생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시곤 하세요?”

    “뭐? 뭐라고?”

    역시 잘 알아듣지 못하신다. 나는 선생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 더 단순하게 질문했다.

    “선생님. 사람이 죽으면 간다는 천당과 지옥이 있을까요?”

    “음. 천당과 지옥은 잘 모르겠고, 시인이 죽으면 조금 다른 곳에 가는 것 같아.”

    “어떤 곳일까요?”

    “그러니까, 피천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한 말이지. 시인이 죽으면 다른 세계에 간다고 말이야. 살아서 사람들이 친하게 동네에서 어울리는 것처럼, 비슷한 영혼들이 함께 어울려 있을 거야. 아마도 그곳은 조용할 거야.”

    나는 이 말씀을 메모하고 빌라의 화단에 잠시 앉았다. 날이 더워 꽃들이 키가 크게 자란다. 어느 순간 나는 노트와 연필을 내려놓고, 먼 산을 바라보듯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선생과의 인연이 짧지만 깊다. 6년 전이던가, 모 방송국에서 선생의 말씀을 육성으로 남긴다는 기획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선생의 회고를 들었다. 그땐 라디오 문학방송 진행자로서 선생의 말씀을 듣는 도중에 힘든 인생을 살다간 선배 시인들의 이야기에 눈물이 나서 녹음 방송의 마이크를 끈 적이 있다. 선생은 눈물이 많다. 지나온 인생의 길이 눈물로 찍어 그린 그림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욕심 많아진 글쟁이들

    선생이 걸어온 길은 항일(抗日)기와 광복, 분단과 전쟁, 개발과 독재의 지난한 길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 태어난 선생은 김구 선생과 이승만, 윤보선과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과 김대중, 노무현과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 정부를 살았다.

    이들이 나라의 지도자라면 선생은 시인으로 우리에게 정신의 메시지를 보냈다. 확성기에 대고 하는 말도 아니고, 때로 듣는 이가 아무리 적어도 한 번 멈춘 적이 없다. 선생은 문단에서도 야인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도 없고, 이른바 주류 출판사에서 주목받는 화려한 시집을 내지도 않았다. 시인은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세론이 있다면, 선생은 그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다. 언젠가 선생에게 시인이란 무엇인지를 물었다.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산다는 건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인으로 산다는 건, 그건 시를 쓰는 일을 하는 거예요. 시를 쓴다는 건,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요…, 요즘은 글쟁이들도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아요. 가난하던 시절에는 오히려 욕심이 없었어요. 요즘은 부유해졌는데도 더 욕심이 많아진 것 같아요.”

    그럼 욕심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생은 단언한다.

    “욕심은 악마와 같은 겁니다. 시인은 악마와 만나면 죽어요. 시는 신(神)을 기억하는 작업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하는 대답이라기보다는 종교를 초월한 삶의 자세에 대한 말로 들렸다. 신을 기억하는 순간 우리는 적어도 순해진다.

    살아 있다면 사는 이야기를

    요즘 문단이 표절 시비로 시끄럽다는 뉴스를 전해드렸다. 선생은 “누구? 누구?” 라고 물으셨다. 누구라고 대답했더니, 아,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런 말씀이 없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간다. 선생이 문득 박희진 시인을 말씀 하신다. 동문서답과 우문현답의 인터뷰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얼마 전에 박희진 시인이 별세했어요. 참 허무해요. 그이가 많이 아프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집이 근처인데, 가보질 못했어요. 병원에 입원하고 좋아졌다고 하다가 다시 입원하고 그만 가버린 거지요. 고자도 아닌데…허허허,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살다가 외롭게 간 거지요. 참 허무해요.”

    박희진 시인은 지난 3월 향년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백발과 멋진 수염을 지니고 풍채가 좋았던 선생의 육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선생이 사시는 동네에 시인이 많이 살았다고 자랑하셨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살아온 세월이 행복하신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박희진 시인과는 인사동 공간시낭송회(구상, 성찬경, 황금찬 등)를 함께하며 각별하게 지냈다.

    긴 세월 선생은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특히 따님이 이화여대에 입학하고 병으로 죽자, 사모님도 몇 해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당신도 위험한 순간을 많이 넘겼다.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언젠가 자식은 절대 먼저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셨다. 나는 선생이 그 많은 죽음을 당신의 삶과 어떻게 연결시켰는지 궁금했다.

    “선생님, 수많은 사람을 먼저 보내셨는데 그때마다 외로웠지요?”

    선생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다른 말씀을 하셨다.

    “음, 여기 도봉구는 말이지요. 옛 시절엔 도적구라고 했어요. 도둑놈이 많다고 말이지요. 왜 그러냐면, 무덤이 많았어요. 길은 없고 그러니까 도둑들이 자주 나왔나봐요. 어려운 시절이니까 말이지요. 내가 53년도에 강릉에서 서울로 넘어왔어요. 그땐 미아리에서 살았지요. 아, 서울이 말이지요. 정말 많이 변했어요. 판잣집에서 아파트, 그리고 이 건물들을 봐요. 눈물 나게 고마운 거예요.”

    선생의 말씀을 유추하자면, 무덤이 많았던 동네를 지나 사통팔달 아스팔트가 깔린 동네에 살고 계신다. 지금 살고 있는 번화가 역시 그땐 논과 밭이었다고 한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거리를 보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건 의미 없다. 살아 있다면 사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동네 이야기일지라도.

    할 이야기가 없다면

    선생은 지금 40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계신다.

    “1963년에 첫 시집을 내고 지금까지 서른아홉 권의 시집을 냈는데 이젠 마흔 권 채우고 가야지요. 요즘엔 시가 짧아져요. 그동안 자연을 보고 말을 많이 나눴는데, 이젠 나이를 먹으니까 자연도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아. 늙은 놈이 뭘 하려고 하냐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잊어버려 사람 이름, 강 이름 자꾸 잊어버려….

    시가 짧아지는 건, 이젠 할 말이 자꾸 줄어든다는 거야. 시인이 할 말이 없으면 그만 쓰는 거지. 다행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나는 아직 조금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짧은 시를 쓰니까 말이야. 그거 하면 좋겠어. 그거 할 때까지만 살았으면 하는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할 말이 없는데 자꾸 쓰려고 하면 문제가 생겨. 병이 들고 말이야. 시인은 그만 쓰는 순간이 생명이 다하는 거야. 나머지는 여생이지.”

    “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무릎을 쳤다. 노래를 부를 수 없으면 안 부르면 된다. 이야기가 없으면 소설을 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일이 간단치가 않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식의 개발 논리가 문학에는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문단 선배에게서 들은 김동리 선생의 일화가 떠오른다. 당시 부인이던 소설가 서영은 선생이 밤새 소설을 쓰느라 끙끙대고 있자, 주무시다가 잠에서 깨어난 동리 선생께서 ‘자네 뭘 그리 끙끙대고 있나’라고 물었다. 서영은 선생이 소설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롭다고 했더니, 동리 선생이 물 한잔 마시고 나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하셨다고 한다.

    “할 이야기가 없어서 그런 거야.”

    이 일화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할 이야기가 없다는 건 쓸 문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없는데 쥐어짜려고 하니 힘들고 고단하다. 그것이 창작의 과정이라고, 고통이라고 위안을 하긴 하지만, 그 고통이 자연스럽게 소멸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 아닐까. 바로 톨스토이와 괴테 같은 문학의 거장들이 보여준 거대한 세상이다. 천의무봉의 세계. 저절로 흘러나와 강이 되고 산이 되는 그런 문학의 거봉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문학은 비우는 것

    문학은 담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마음 그릇에 가득 찬 이야기를 비우는 게 소설이고, 영혼에 차오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시다. 설명할 것이 많아 할 말이 많으면 덜어내는 것이 수필이다. 문학은 빈 그릇이 될 때 그 가치가 가장 빛난다.

    작가가 돈과 명성, 문학적인 성취에 눈이 멀어 자꾸 무엇인가를 담으려고 할 때 누추해지는 것이다. 장자의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와, 목마른 물고기-학철부어(·#28088;轍·#39826;魚)-에게 내일 강물을 끌어다주는 것보다 당장 물 한 컵 쏟아 부어주는 게 문학의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학은 역시 쓸모 있는 그릇이다. 사람들에게 빈 그릇을 선물하는 것이다.

    선생은 이제 할 말이 별로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황금찬 시인학교’의 수강생이 되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선생의 말씀을 듣는 자세로 바뀐다. 저널리스트로 선생을 만난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후배 시인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달항아리처럼 둥근 미소를 짓는다. 그래, 이제 아주 단순하게 가자.

    그날, 간헐적으로 들려주신 시에 대한 이야기다.

    “시를 쓴다는 건 말이야. 식당에서 굶은 자식에게 누가 점심 한 그릇 사 주는 기분이란 말이야, 그런 기분으로 시를 쓰면 좋겠어요.”

    “아이고, 이놈의 나이야, 내가 마지막 시집 낼 때까지만 멀리 가 있거라.”

    “시인이 말이야, 천재가 반드시 이익이 된다고 할 수 없어요.”

    “97세에 이렇게 거지 같은 시라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거….”

    “나이가 참 무서운 겁니다. 요즘엔 자꾸 잊어버려요. 사람이 달라지는 것 같아. 나이가 참 무서워. 나이에게는 당할 수가 없어. 시도 나이를 먹나봐요, 허허.”

    “내 첫 시집이 ‘보리고개’인데, 생각해보니 100년 전 일 같아요. 살아온 세월을 기억해보면요. 눈물 나는 것밖에는 없어. 고생들 참 많이 했어요. 김구용 시인은 말이야, 나보고, 친구여, 우리 언제나 소주 한잔 맘 놓고 먹을 날이 오겠나…라면서 울었어요.”

    너무 아름다우면, 죽는다

    선생이 살아오면서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있을 법하다. 기억이나 추억도 자아에 의해 적당히 변용되기 마련이다. 2015년 7월 현재 선생의 기억은 우선 전쟁부터 떠올렸다. 나는 선생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내가 1군단 사령부 종군작가로 있었어. 그때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썼지요. 내가 시를 쓰면 붓글씨를 쓰는 정훈병이 크게 옮겨 적었지. 그러곤 담벼락이나 대문 같은 데다가 붙여놓았어. 그 시를 지나가는 군인이나 피난 가던 민간인들이 보고 울었어. 군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흥남부두 철수할 때는 미군 배에 우리 민간인들이 타고 왔는데, 화물선이어서 그랬는지 화장실 시설이 부족해서 배 위에다 그냥 볼일들을 봤단 말이야. 생각해보라고, 그게 사람이 사는 거냔 말이야. 그렇게들 살아남았단 말이야. 참 눈물겨운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지나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문인뿐 아니라 인생 100세에 얼마나 많은 인연이 선생을 지나가고 다가왔을 것인가. 가난한 동네에 일도 많고 탈도 많은 법이다.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 중에 제일 예쁜 여자가 있어요?”

    “있지. 아, 있지. 있어요. 젊어서 스위스에서 본 여자야.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데 올라오던 여자였지. 우연히 쳐다보는데, 너무 아름다워서 소리를 지를 뻔했어. 사람이 너무 고와도 사람이 죽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녀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어요. 예쁜 여자를 자꾸 보면 빨리 죽을 거야.”

    선생은 그때 생각을 하시는지 빙그레 웃으면서 “너무 아름다운 건, 남을 병들게 한다”는 말씀도 하셨다. 청춘의 한 시절, 이제는 지나가버린 그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에 선생과 비슷한 나이였다면 천상의 어느 곳으로 갔거나, 장미로 피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선생이 좋아하는 꽃 장미로 이어졌다.

    “내가 꽃을 사랑하는데 말이지요. 장미를 사랑하지요. 꽃도 미운 놈이 있어요. 붉은 장미를 보고 있으면 그 빛에 검게 보일 때가 있지요. 장미가 제일 아름다워요. 내 시에도 장미가 제법 등장하지요. 어려운 시절에 꽃집 앞을 지나가다가 내 눈을 붙잡는 장미를 발견하고 무턱대고 들어갔지요. 내가 장미꽃을 파냐고 물었지요. 그러자 주인이 꽃집에서 꽃을 파는 거지 뭘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비싸게 부르지 마시오, 내가 돈이 없으니 말이오. 그랬더니 돈이 없으면 사지 말고 보기만 하라는 거야. 돈이 없어도 한 송이를 샀어요. 그날 장미를 가지고 집으로 와서 밤새도록 봤어요. 그리고 아침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꽃잎을 하나씩 떼어내어 봤어요. 장미 꽃잎이 모두 몇 갠 줄 알아요?”

    언젠가 문학평론가 김재홍 선생이 달걀 한 개 값이 얼마냐고 물었을 때,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는데, 선생이 150원이라고 웃으면서 알려줬다. 시인이라면 달걀 1개 값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주로 한 판을 사고 돈을 낸다. 장미 꽃잎이 몇 장인지도 노시인에게서 받은 화두 같은 질문이었다. 역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선생이 웃으며 알려주셨다.

    “모두 쉰두 장이었어요.”

    장미는 52장의 꽃잎으로 이뤄진 꽃이다. 꽃이 꽃잎이 되는 순간 지는 것이다. 꽃잎이 떨어진다는 건 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날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꽃은 덩어리로 지는 것이 아니라 눈송이처럼 한 잎 한 잎 떨어져 사라진다. 지난 봄날에 본 매화 꽃잎이 떠올랐다. 선생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선생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씀은 잘 간직하고 있었다. 기분에 따라 젊은 시절로 갔다가, 중년으로, 어린 시절에서 다시 노년으로 선생은 자유롭게 자신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서 소풍을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송이의 장미도 여러 겹의 꽃잎으로 이뤄져 있다. 숲은 풀과 나무, 샘과 바위로 이뤄져 있다. 그 어떤 인생도 꽃잎처럼 낱장으로 뜯어내면 모두가 작고 귀한 것이다. 우리가 좌절하는 순간은 인생을 덩어리로 보기 때문이다. 탐욕덩어리, 욕망덩어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연 인생은 낱장으로 뜯어낼 수 없는 덩어리일까, 아니면 꽃잎처럼 서로 떨어져 이뤄진 것일까. 삶을 거대한 덩어리로 생각할 때 당신은 깊은 좌절감에 빠진다. 삶의 디테일에 주목하면 작품이 나오기 마련이다. 위대한 작품의 포인트는 디테일에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어떤 시련이 다가온다면 그것을 꽃잎 한 장처럼 떨어지는 것이려니 생각하시길.

    선생이 지나온 좁은 문들

    올해 황금찬 시인의 시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황금찬 문학상’이 제정됐다. ‘문학신문’과 문예지 ‘문학광장’이 주관하는 제1회 수상자들의 이름을 보면서 선생이 자주 다니던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을 서성거렸다. 5월 23일 혜화아트홀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선생이 재직한 동성고등학교 옆, 시상식 장소 역시 정감이 있다. 감회가 새롭다.

    이제 선생은 우리 시문학에 이정표로 남을 수 있는 큰 나무처럼 우뚝하시다. 하지만 선생은 언제나 기둥이나 뿌리이기보다는 줄기로 남기를 원한 분이다. 세속적인 명예를 초탈해 그저 허허 웃으면서 묵묵히 시를 적었다. 문체나 사상보다는 정신이 더 드러나는 선생의 시는 간혹 욕심 사나운 문장에 회초리를 드신다. 가령 이런 시다.



    회초리를 드시고

    ‘종아리를 걷어라’

    맞는 아이보다

    먼저 우시던 어머니

    -시 ‘회초리’

    “詩는 神을 기억하는 작업”
    선생은 이런 분이다. 먼저 우시던 어머니 같은 분,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겸손하고 항상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며 눈물겨워 하는 꽃잎 같은 분이다.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나서 좋은 뉴스가 들려왔다. 선생이 올해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선생은 ‘동해안의 시인’이라는 별명과 함께 해변시인학교 교장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그동안 월탄문학상, 한국기독교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서울시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하셨다. 선생은 천재가 아니라 거장이다.

    인생은 문(門)이다. 인생의 문은 여러 형태로 다가온다. 가장 열기 쉬운 인생의 문은 책이다. 문학과 역사, 철학의 문을 열고 먼 길을 간다. 두 번째가 타인의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은 내 인생의 문이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로 이어진 문을 열고 누구나 지나간다. 세 번째가 바로 오늘이라는 문이다. 오늘의 문을 열지도 않고 미래로 가려고 하지 마라.

    선생과 마주하는 동안 나는 좁은 문을 보았다. 선생이 열고 지나온 그 좁은 문들, 그것이 바로 선생이 걸어온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는 자택의 대문을 열고 나오는 것도 조심스럽다. 결국 사람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문을 거치기 마련인가.

    황무지의 피아노 소리

    선생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노인이 되어 난청이지만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소년처럼 즐거워하신다. 마리아 칼라스를 위해 시를 적은 적도 있고, 어려운 시절을 견디기 위한 방편처럼 시와 음악은 항상 선생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해방 전에 이북에서 처음 클래식 음악을 만났지요. 맹인 선생이었는데 이 분이 음반과 좋은 유성기를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 집에서 2km쯤 떨어진 곳에 사셨는데. 한겨울에 눈이 참 유난스럽게 많이 내렸지. 눈이 펑펑 내리는 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 무작정 걸어서 갔어요. 눈을 맞으면서 철길을 걸어가다가 기차 오는 소리도 못 듣고 그만 죽을 뻔한 일도 있었어. 그 고생을 해서 그분 집에 가서 쇼팽의 피아노곡을 듣고 그 어려운 시절에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었지요.”

    감정의 과잉이랄까, 선생의 음악 사랑은 들뜬 소년과도 같아 보였다. 왜 음악은 선생에게 그토록 눈물겨운 것이었을까. 피아노에 대한 추억은 또 있었다.

    “쓸쓸한 이야기지만, 53년에 강릉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토요일 아침에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거야. 집주인이 말하기를, 음악 선생이 이사를 왔는데 미혼이고 대학교수였어. 그때 들은 음악도 쇼팽의 즉흥환상곡이야, 좋은 연주였어요. 내가 눈물 나게 잘 들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들어주는 분이 있어서 고맙다고. 그래서 내가 왜 결혼을 안 하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피아노와 결혼을 했다는 거야.”

    우리 詩의 원형

    피아노에 얽힌 이야기는 각기 다른 시대 배경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다. 황무지와 같은 시대에 들려온 피아노 소리는 어쩌면 선생에게는 ‘천상의 레시피’일 수도 있다. 선생이 꿈꾸는 사람 사는 마을은 바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가 서로 어울려 협주하는 마을이다.

    선생이 그간 발표한 8000편이 넘는 시 중에서 감히 한 편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이 글을 쓰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다. 선생은 서울 집에서 나와 강릉 집에서 자제분과 계시다면서 전화를 받았다. 내 질문에 선생은 주저 없이 ‘경주를 지나면서’라고 대답하셨다. 이 작품은 1953년 ‘문예’지에 추천된 등단작이다.

    경주(慶州)를 지나면서



    저녁노을 피는

    하늘가엔

    먼 사연(詞緣)이 잠이 들고



    들국화(花)

    산길엔

    牧童(목동)만 내린다



    첨성대(瞻星臺) 안압지

    돌아가는

    나그네 봇짐에 어스름이 실리고



    어디를 갔느냐

    아득히 불러도

    서라벌(徐羅伐) 천년(千年) 배 떠난 나루!



    더불어 다른 시인의 시 한 편도 추천을 부탁드렸다. 역시 청록파 시인들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조지훈 선생의 시를 말씀하셨다. 이제는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서 웃었다. 하여간 선생은 조지훈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셨다. 선생의 초기 시를 보면 청록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선생의 초기 시를 보니 문득 우리 시의 원형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새 우리는 시가 전해주는 저 울림과 여백의 공간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조지훈의 영향이 분명한 선생의 초기 시 한 편은, 시란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서 완상(玩賞)하는 도자기와 같다는 것을 알게 했다. 절제된 우리말과 한자어의 절묘한 조화, 편의상 한글 옆 괄호안에 한자 표기를 했지만, 원문 그대로 한자와 같이 읽으면 그 맛이 더 깊다.

    우리 글을 쓰지 못하는 시절도 아니지만, 우리 글이 전해주는 맛과 정취 깊은 울음을 즐기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선생은 그것을 아쉬워하셨다. 그런 의미에서랄까. 나는 선생의 다음 시집이 무척 기다려진다. 첫 번째 독자로 줄을 서서라도 그 시집을 사고 싶은 마음이다.

    잠시 낮잠을 잔 것 같아

    선생은 동성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자주 다니던 혜화동 마로니에공원을 사랑하신다. 이제는 마음만 움직이고 몸이 힘들어 혜화동에 자주 나가시지는 못한다. 대신에 자택 근처에 있는 커피집 ‘인투 커피 into coffee’에 일주일에 서너 번 가시곤 한다. 이 집에는 선생의 시가 걸려 있다. 그 밑에 앉아 선생의 말씀을 들었다.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과대학 교정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가 유명하듯이, 강북구 우이동에선 솔밭공원이 유명하다. 동네의 시인들이 지켜낸 공원이라고 자랑하신다. 건축업자들이 소나무를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주택을 지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시인들이 모여 소송을 제기해 기어이 공원을 지켜낸 것이다.

    선생과의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잠시 그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소나무는 100년의 시간을 견디는 일이 한결같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서 긴 세월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다.

    선생은 이제 솔밭공원의 한 그루 소나무처럼 세월에 무심하다. 지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는 몸을 부축해드리면서 거칠고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났다. 오랜만에 천천히 걸었다. 선생과 보폭을 맞춰 건널목만 건너면 되는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 ‘소걸음으로 천리를 간다’는 옛 선비들의 말씀이 떠올랐다.

    “선생님, 어떠세요. 이제 100년 사시는 건데요.”

    “아이고, 눈물 나게 고맙고…, 잠시 낮잠을 잔 것 같아. 허허.”

    나는 생각했다. 선생의 100년은 짧다 하지만 나의 하루는 너무나 길었다. 어쩌면 지나간 1000년보다 더 긴 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하루일 것이다. 최근에 본 영화의 주인공이 한 말처럼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누구의 인생이든 간에 말이다. 지금 선생과 걷고 있는 이 시간, 이 보도, 길거리의 가로수, 아기 엄마와 신생아의 보행 등등. 저것이 바로 살아가는 자들이 오늘 하루를 걸어가는 걸음걸이다.

    선생은 하루를 나이테처럼 간직하고 있다. 우리 시의 거목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 한나절 잘 쉬었다. 그늘이 깊고 넓어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온 나그네가 쉬기 좋은 곳이다. 선생이 평생 의지한 시란 그런 것이 아닐까.

    선생 댁에 도착했다. 문 앞까지 모시고 가겠다고 하니까 만류하신다. 공동주택 현관에서 집까지는 선생이 스스로 가시겠다 한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서 가, 어서 가, 하시면서 등을 보이신다. 나는 그냥 서서 선생이 가시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 여덟 계단이다. 선생은 천천히 여덟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잠시 후,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다정한 손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이 문을 닫고 들어가셨나보다. 조용하다. 이젠 내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늘 하루는 참 길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긴데, 선생의 100년은 어떤 것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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