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이달의 경제보고서 | LG경제연구원

덜 완벽하지만 더 친숙하니까

‘B급 제품’이 뜬다!

  • 유미연 |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입력2016-07-12 1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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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리적인 소비 대안으로 B급 제품이 주목받고 있다.
    • 소비자들은 이른바 ‘가성비’가 높고 다양한 활용 가치를 지닌 B급 제품의 매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뭘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날까’ 제품을 구매할 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했을 법하다. 그만큼 소비자들은 자신의 구매 경험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관심이 많다. 그 선택으로 남보다 이득을 더 얻었는지 여부를 확인 하고 싶어 한다.

    계속되는 불황과 성장 정체로 소비 행태가 바뀌고 있다. 체면이나 외부 시선에 좌우되기보다 실리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즉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다. 싸고 유행이 지난 제품을 쓰면 약간의 창피함을 무릅써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내세워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똑똑한 소비

    합리적 소비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가성비다. 불황과 저성장이 고착화한 탓에 이젠 상류층에서도 가성비를 따지는 게 트렌드가 되고 있다. 가성비 높은 제품들 중엔 흔히 ‘B급 제품’으로 알려진 것들이 있다. 제품의 품질에는 하자가 없지만 정상적인 유통이 불가능한 상품을 말한다. 가전제품은 흠집이 있어 판매하기 어렵거나 반품된 상품, 리퍼(재정비 제품 교환)를 받은 제품, 식료품은 흠집이 났거나 모양이 예쁘지 않은 농수산물, 유통기한이 임박해 매장에 진열하기 어려운 제품이 B급으로 취급된다.

    최근엔 B급 제품이 온·오프라인 몰에서 정식으로 판매되고 있다. 유통기한 임박 상품 전용 온라인 쇼핑몰(임박몰, 떨이몰 등), 리퍼 가전 가구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아웃렛이 생겨났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트렌드모니터가 2014년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B급 제품 이용 관련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68.8%가 ‘향후 B급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지금보다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비자들의 ‘B급 제품 구매 경험’은 58.5%로, ‘앞으로 국내에 B급 제품을 취급하는 매장이 좀 더 많아져야 한다’는 의견도 72.3%에 이르렀다. 또한 10명 중 7명 이상이 ‘B급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똑똑한 소비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B급 제품은 싸구려 제품’이라고 인식하는 경우는 5.8%에 불과했다.

    B급 제품은 ‘다양한 경험’에 가치를 두는 성향을 충족시키는 데도 유리하다. 우선 다양한 활용 가치부터 살펴보자. B급 제품은 누군가가 사용한 흔적이 있거나 유행이 지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누군가가 싫증나서 버린 제품을 다시 주워 쓴다는 생각에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요즘 B급 제품은 ‘못난이 사과’ ‘웃긴 감자’ ‘실패한 레몬’ 등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제 기능은 한다’는 의미를 담은, 친숙함이 묻어나는 애칭을 가졌다. 소비자들은 이들을 통해 겉치레형 소비에서 오는 피로감을 달래기도 한다. 명품 브랜드 제품을 사서 SNS에 올리는 대신 큰 하자가 없는 제품을 쓰면서 만족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B급 제품은 이처럼 소비 자체는 포기하지 않으면서 ‘소소한 가치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현재 앱스토어와 구글 플레이 게임 차트 3위에 올라 있는 인기 모바일 게임 ‘Color Switch’는 앱 제작 과정과 게임 콘셉트를 고려하면 B급에 든다. 그런데 컬러 볼을 튕겨 다양한 색깔의 컬러 장애물을 통과시키는 단순한 게임인데도 묘한 중독성이 있다.

    이 게임의 개발자는 컴퓨터 코딩을 할 줄 모르는 일용직 근로자이자 색약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Buildbox라는 드래그앤드드롭(Drag-and-drop, 프로그램 구성 아이템을 마우스로 끌어서 다른 곳에 옮기는 작업) 방식의 DIY(Do-it-Yourself) 게임 제작 툴로 앱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개발 경험이 전무한 개발자가 초급 수준의 앱 제작 도구로 만들었으니 B급이라 할 수 있다. 하이엔드 게임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적당히 즐길 수 있어서 좋고, 제작 과정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공개된 후 사용자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면서 더 친숙해졌다.



    진격의 ‘모디슈머’들

    B급 제품은 비싸지 않아 부담 없이 손댈 수 있다. 제조사가 제시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고 제품을 얼마든지 자신의 상황에 맞게 고쳐 쓰거나 보완할 수 있다. 정상적인 유통이 불가능한 B급 제품이라도 자신만의 독특한 기호나 취향을 살리는 ‘가치 소비’가 가능하다.

    합리적인 소비와 개성을 지향하며 가치 소비를 추구하는 소비자를 흔히 ‘모디슈머(modisumer)’라고 한다. ‘modify’와 ‘consumer’의 합성어로 제품을 자기 방식으로 재창조해 사용하는 소비자를 일컫는다. TV 프로그램에서 선보여 인기를 끈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그런 예다. 미용 분야에선 ‘레이어링(layering) 뷰티’, 즉 기존의 화장품 용도가 아닌 색다른 사용법으로 제품을 소비하거나 다른 제품과 섞어 나만의 화장품을 만들어 쓰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저렴하고 간편한 B급 제품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조금 모자라고 흠이 있는 제품이라 사용자가 그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gap filler)을 적극 시도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스펙 경쟁을 피해 일탈을 시도하는 제품들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평범하다 못해 버려지는 것들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 고객이 원하는 형태로 재구성·재설계해 판매하는 것)하기도 한다. 스위스의 국민 가방으로 불리는 ‘프라이탁(Freitag)’은 일명 ‘쓰레기 뜯어 모아 만든 가방’이다. 가방의 천은 트럭 위에 씌우는 방수(防水)천으로, 어깨끈은 폐차에서 뜯어낸 안전벨트로 만들었고, 접합부엔 자전거 바퀴의 고무 튜브를 떼내 붙였다. 가방에서 화학제품 냄새가 꽤 나는데도 가격은 50만 원에 육박한다.

    이런 재활용품이 명품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희소성 덕분이다. 같은 소재, 같은 디자인의 방수천이라도 저마다 낡은 정도, 때 묻은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일부분을 떼어내 만드는 가방은 똑같은 디자인이 단 하나도 없다.

    ‘페어폰(Fair Phone)’은 네덜란드 벤처기업이 개발한 조립식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가 새로운 콘셉트로 생산, 판매하는 제품이다. 페어폰은 비분쟁 지역에서 생산된 광물만을 소재로 사용하고, 안전한 노동환경이 보장된 공장에서 조립되는 ‘공정 전화기’다. 페어폰이 1대 팔릴 때마다 2.5달러가 기부돼 노동자 복지에 쓰인다. 소비자는 온라인으로 주요 부품을 주문해 배송받은 뒤 직접 조립한다. 가격은 525유로(약 69만 원)로 중저가 스마트폰 수준. 유럽에서만 배송된다.


    새 시장 개척하는 매개

    이처럼 소박하고 평범한 특성과는 대조적으로, 대중 시장에서 검증되지 않았거나 시도하기 어려운 속성 때문에 B급 제품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제품은 생산 규모 혹은 타깃 시장을 확대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소비자의 반응을 엿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2014년 구글 개발자 회의에서 가상현실 조립 키트인 VR(Virtual Reality) 카드보드가 공개됐다. 비록 카드보드로 만든 VR이지만, 낯선 가상현실에 접근하도록 도와주고 생소한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왔다. 만듦새나 품질의 완성도는 낮지만 이용자가 잘 모르던 가상현실의 재미를 부담 없이 전달했다.

    소비자는 이처럼 B급 제품으로 새로운 기술을 접할 뿐만 아니라 낯선 사용 방식에 대한 거부감도 줄일 수 있다. 더 나아가 B급 제품에 익숙해진 사용자는 해당 제품의 개선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다. 저사양, 저가격의 B급 제품이 향후 출시될 제품에 대한 사용자의 기대와 니즈(needs)를 발견할 수 있는 매개 역할로 적절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소비자들은 B급 제품에 대해 별로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제품을 소유하는 차원을 넘어 소비를 독특한 경험 가치로 격상시킬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업들이 소비자를 벤치마킹해야 한다. 제품을 어떻게 활용해 최적의 경험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살펴야 한다. 더 나아가 제품 자체를 하나의 모듈로 생각하고 그 안에 담길 콘텐츠와 서비스의 내용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일정한 조건이 발생하거나 사용자가 특정 명령을 내릴 때 자주 사용하는 동작을 실행하는 자동화 앱 IFTTT를 보자. IFTTT는 ‘If This, Then That’의 약자로 ‘이럴 때는 이렇게’라는 의미를 지녔다. 두 가지 이상의 앱 연동을 돕는 자동화 레시피(recipe)다.

    레시피란 사용자가 임의로 기존 서비스나 앱들을 고른 후, 조건이나 명령에 해당하는 앱 기능과 거기에 자동으로 반응하는 앱 반응을 조합, 설정하는 것이다. IFTTT는 앱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와도 연결된다. 필립스 LED 전구 ‘휴’, 벨킨 ‘위모’(원격 스위치) 등의 하드웨어도 특정 조건에서 명령을 받아 작동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불특정 다수의 사용자가 레시피를 독창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조합과 명령에 따라 수천 가지의 레시피가 만들어질 수 있는데, 이를 모든 사용자와 공유할 수 있다. 사실 각각의 레시피는 매우 단순하다. 다양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레시피로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하드웨어 인터페이스 등을 발굴할 수 있다.



    짧게 많이 쓰기

    넷플릭스는 콘텐츠 시청을 간편하게 해주는 DIY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왔다. ‘넷플릭스 양말(Netflix socks)’과 ‘더 스위치(The Switch)’가 대표적이다. 넷플릭스 양말은 TV를 시청하다 잠이 들 경우 신체 신호를 감지해 넷플릭스 재생을 중지하는 기능을 지녔다. 더 스위치는 버튼 하나로 모든 조명을 끄고 스마트폰을 매너 모드로 바꾸며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제품이다.

    이것들은 완제품이 아니고 소비자가 키트(kit)를 주문해 직접 만들어야 한다. 넷플릭스의 메이크잇(Make-it) 사이트를 통해 동영상 매뉴얼을 보여줌으로써 누구나 만들 수 있게 했다.

    넷플릭스는 이처럼 완성품 대신 다소 투박할 수도 있는 DIY 제품을 통해 소비자들이 자연스럽게 자사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유도했다. 소비자들의 이용 가치가 이렇듯 중요해질수록 제품 자체의 완성도 자체는 큰 의미가 없게 된다.

    최근 B급 제품이 많이 등장해 판매된다는 것은 ‘특정 제품을 오래 소유하지 않고, 짧게라도 많은 제품을 경험하겠다’는 전략을 택하는 소비자가 늘었다는 의미다. 이런 소비자들은 대개 제품 구입 때 포장 상자와 구성물을 깨끗하게 보관한다. 추후에 신제품이 출시되면 기존 제품을 판매해 신제품 구매 비용을 마련하고, 사용 제품 경험담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다.  

    과거엔 소비자가 새 제품을 한번 구매하면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판매자와 만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제품이 공유될 경우, 즉 소유 대신 리스나 렌털 방식으로 거래되면 판매자의 서비스 개선 노력 및 소비자와의 관계가 시시각각 평가된다. 따라서 기업들은 어떤 판촉 활동을 전개할지보다 고객과의 긍정적 경험을 지속시킬 방안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스타트업 ‘렌트더런웨이(Rent the Runway)’는 유명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도매가에 구입한 뒤 온라인으로 고객의 신청을 받아 대여하는 사업을 운영한다. 하버드대 MBA 과정에서 공부하던 제니 플레이스와 제니퍼 하이먼은 하이먼의 동생이 친구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는 데 애를 먹는 것을 보고, 중요한 파티에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쉽게’ 빌려 입고 갈 수 있는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공유경제 회사를 설립했다.



    성숙기 시장의 돌파구

    서비스를 운영하기에 앞서 100벌의 드레스를 준비해 학부생들에게 대여하는 실험을 했다. 학생 대부분은 드레스를 판매가의 10분의 1 가격에 빌려가서 매우 조심스럽게 입고 처음 상태대로 돌려줬다. 드레스 사진만 보고 오프라인에서 빌려가는 경우도 실험했다. 드레스를 찾는 여성 중 5%가 빌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을 보고 웹서비스의 성공을 확신했다. 이후 디자이너 드레스 800벌을 확보하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사업을 벌였으며, 고객 반응을 보면서 서비스를 개선해 공유경제의 상징적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아무리 고급 드레스라 해도 이미 불특정 다수가 빌려 입었으니 소비자 처지에서는 B급 제품으로 여길 수 있다. 그렇다고 겨우 며칠 입으려고 비싼 돈 주고 고급 드레스를 구입해본들 한두 번 입고 나면 드레스는 옷장에서 여생을 보낼 것이다.

    지금까지는 B급 제품의 가치는 가성비에 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가성비 외에도 B급 제품의 여러 가지 속성에서 새로운 소비자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다. B급 제품에서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경험 가치’다. 소비자들은 B급 제품을 통해 합리적 소비는 물론, 자신의 기호나 취향에 따라 경험 가치를 보완하고 발굴하는 데 적극적이다. 그렇게 해서 발굴된 경험 가치는 한 사람이 소유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곤 한다.

    B급 제품 중에는 유행에서 철저히 벗어나거나 주류에 속하는 제품 속성에서 일탈한 형태도 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시장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궁극의 차별화를 꾀한다면 그 자체로 프리미엄을 인정받을 수 있다. B급 제품이 이러한 속성들을 모두 갖출 순 없겠지만 불황기에 처한 성숙 시장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흠 있는 제품이 소비 늘린다?소비자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부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B급 제품은 부담스럽지 않다. 어차피 최상의 제품이 아니기에 흠이 생길 것을 걱정하지 않고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상 제품과 양이 동일하지만 제품의 모양을 변형했을 때 즉, 분할하거나 조각냈을 때 소비량이 늘어난다고 한다. 실험 참가자들은 같은 양의 빵 혹은 치즈인데도 흠이 없고 상품 가치가 높은 것보다 구멍이 나거나 부서진 것을 더 많이 집어 먹었다.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소하려고 일정한 양을 먹기보다 스스로 적당하다고 ‘느끼는’ 양을 먹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온전한 식품 한 단위를 먹을 때와 양은 같아도 조각나고 부서진 식품을 먹을 때 왠지 덜 먹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 놓고 먹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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