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호

interview

“소설은 ‘당사자’가 쓴다 나도 그에게 포획됐다”

작가 한수산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입력2016-08-02 11: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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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강점기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역사를 복원하고 문학으로 기억한다’는 작가적 의무 속에서 27년을 보냈다는 그에게 세월을 물었다.
    • 그는 1981년 ‘한수산 필화(筆禍)사건’을 운명으로 여겼다.
    작가 한수산(韓水山·70)의 신작 소설 ‘군함도’는 피해 당사자들과 함께 현장을 찾고 관련 문헌을 확인해 취재를 시작한 지 27년 만에 출간됐다. 최근 배우 송중기가 류승완 감독과 함께 동명(同名)의 영화 촬영을 시작하면서 소설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소설은 군함도에 끌려온 조선인 징용공들의 분투기다.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의 하시마(端島) 섬이다. 바다에 떠 있는 모양이 군함 같은 무인도다. 하루 12시간 이상 해저탄광(미쓰비시광업 하시마탄광) 채탄 작업에 시달린 노동자들은 ‘감옥섬’이라 불렀다. 하시마는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포함돼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정부기록물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2012)는 1943~45년 이곳에 500~800명의 조선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시마에서 발견된 화장 기록에 등재된 조선인 사망자는 122명, 우리 정부가 피해조사를 통해 인정한 ‘동원 중 사망자’는 27명이다.

    한수산 작가가 역사소설에 천착한 배경은 뭘까. 서울 광화문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암흑 속에 성장하는 자아

    ▼ 소설이 나온 5월에 뵈려고 했는데, 많이 편찮으셨다고요.

    “체력 회복이 안 되더군요. ‘군함도’를 작년부터 15개월 동안 바짝 달려서 썼거든요. 작년에 만난 사람이 10명도 안 되는 것 같은데…. 개 산책을 못 시켜줘서 개도 나도 살이 쪘어요. 2003년 ‘까마귀’ 쓰고 나서는, 폭탄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뭉텅이로 빠진 적도 있는데, 탈진했나 봅니다.”  

    ▼ ‘까마귀’를 요약해 ‘군함도’를 쓰셨다고….

    “‘까마귀’가 5300매인데, 그중 3300매를 잘라냈어요. 그러곤 1500매를 새로 써서 3500매 ‘군함도’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걸 그리기보다 압축된 이야기를 전달하자’는 목표였어요. ‘군함도’에선 징용공인 주인공을 성장시키려고 했어요. 암흑 속에 있어도 창조적인 자아를 발견해내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일제를 청산하는 게 아닐까 하면서.”

    ▼ 일본에서는 ‘군함도’가 2009년에 발간됐는데요.

    “한국에서 2003년 5권으로 출간된 ‘까마귀’가, 일본에선 2009년 2권짜리 ‘군함도’로 나왔어요.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까마귀에게 하듯 돌팔매질을 했대서 징용공을 까마귀로 치환해 붙인 제목인데, 부정적인 제목이라 영 불편했거든요. 그러다 일본 번역진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군함도’로 바꾸고, 일본인들이 잘 아는 그들의 풍습, 생활습관, 전시 상황이 나오는 대목을 대폭 줄였지요.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하기로 했는데, 제 개인적 사정으로 한국판이 늦어지게 된 겁니다.”



    생존자와 찾은 군함도

    ▼ 일제 강점기의 많은 피해 현장 중 군함도에 주목한 이유는.

    “1989년 도쿄 고서점에서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작은 책자를 보면서 시작됐죠.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에서 펴낸 건데, 모임을 주도한 오카 마사하루 목사님을 빼놓고는 이 작품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다들 직업이 있으니 주말에 삼삼오오 모여 그걸 들고 나가사키 전역을 10년 넘게 찾아다니며 조선인 피해 사실을 조사했습니다. 결과물로 ‘원폭과 조선인’ 소책자를 7번 냈는데, 그걸 보곤 경악했지요. 나가사키에서 피해를 입은 조선인이 1만 명이나 된다니…. 소설로 써야 했습니다.”

    ▼ 군함도는 언제 처음 갔습니까.

    “1990년에 오카 목사님을 처음 뵙곤 군함도의 소설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군함도에 갔습니다. 나가사키에서 50분밖에 안 걸려요. 어부의 배를 빌려 섬에 들어가서 3, 4시간 있다가 오는 거죠. 당시 그곳은 사기업 미쓰비시의 땅이라 정식 입도(入島)는 금지됐지만 철조망을 쳐놓고 일반인의 입도를 막지는 않았습니다.”

    ▼ 섬의 첫인상은 어떻던가요.

    “저를 위한 ‘세트장’ 같더군요. 축구장 3배 크기의 섬에서 징용공들은 초속 8m로 떨어져 내리는 통을 타고 토하면서 해저 700m 갱으로 내려가 채탄 작업을 하다가 돌아와 한 공간에서 2교대로 잤습니다. 공원하고 묘지만 없지, 절벽 있겠다, 바다 있겠다, 유곽터 있겠다…. 소설가가 뭘 더 만들어낼 게 없는 거예요.”



    ▼ 왜 일본이었습니까.

    “내가 영문과(경희대)를 다녔지만 미국 가서 영어 하고 다닐 생각하니까 싫더라고. 중국으로 갈까도 했는데 당시 중국과 국교가 없었어요. 꿩 대신 닭이라고 대만엘 가봤는데 일본 식민지 잔재가 있고. 그래서 싫어하던 일본에 간 거죠. 이 참에 일본에 살면서 내 몸으로 일본을 제대로 알아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 일본 체류가 역사소설을 쓴 배경이 됐군요.

    “그보다 필화사건을 겪으며 제 문학적 관심의 폭이 넓어진 겁니다. 말하자면 사회문제를 다루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반공포로 이야기, 물자 약탈을 위해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을 그렸죠.”

    ▼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문화 분야는 다 던지고 일해야 해요. 가산탕진하며 일해도 신이 밥 굶게 안 만들어요. 그렇게 해도 ‘일’ 하나는 남잖아요. 이번에도 ‘전작보다 낫다’는 게 남으니까 기쁩니다.”

    ▼ 일본에서 생활은 어떻게 꾸렸습니까.

    “기적이 일어나요. 어느 신문에 ‘한수산 작가가 7년 전 보안사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 일본으로 이민 갔다’는 오보가 났어요. 당시 일본은 이민을 받는 나라가 아닌 데다, 저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채 떠났는데 말예요. 그러면서 새로 나온 책이 60만 부 넘게 팔리고 그 전에 나온 책들도 함께 사랑받으면서 그걸로 살았어요. 독자가 ‘일본에서 사람같이 일하고 오라’고 성원해주신 것 같았습니다. 그때 ‘뭔가 한국 소설에 도움이 되는 걸 만들어야 하겠구나’ 싶어 44세에 일본어를 배웠습니다.  

    1988년 8월에 가서 1992년 9월에 돌아왔어요. 딱 (노태우) 대통령 임기 동안만 나가 살았던 거죠. 처음에는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지만, 취재를 하면 할수록 ‘당사자가 써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원폭, 하시마 섬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지막까지 인간의 길

    ▼ 일본 문헌 취재도 많이 필요했겠습니다.

    “조선인 문제를 연구하는 일본인 학자나 르포라이터들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군함도 유곽 3개 중 하나는 중국인이나 조선인이 가던 곳이란 기록을 봤습니다. 1991년쯤 받은 하시마 화장장 기록에서 ‘음독 투신자살한 유곽의 조선 여자’를 발견하고 소설 속 인물도 구상했지요. 군함도가 폐허 관광상품으로 부각되면서 관련 인터넷 사이트가 늘어 하시마 소학교 교가도 찾았습니다.”  

    ▼ 원폭 피해자 얘기도 기록이 근거인가요.

    “피폭 후 나가사키에 구호대로 들어간 일본인들이 죽은 사람과 부상자들을 분류하면서 신음하던 조선인은 버렸다고 해요. 작가 요시무네 미치코의 기록과 화가 마루키 부부의 그림을 보면 ‘물, 물…’ ‘어머니, 어머니’ ‘사람 살려’라고 조선말로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다 버렸다는 거예요. 살 수 있었던 많은 조선인이 그렇게 죽어간 거죠. 자료를 볼수록 소명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소설에서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허구인지요.

    “인물과 구성은 허구이고, 그것을 엮어낸 모든 에피소드는 사실입니다. 어느 에피소드 하나 상상으로 만든 게 없어요. 갱 안에서 죽은 징용공 창수의 시신을 끌어올리며 ‘올라가자, 창수야! 올라가’ 하는 장면도 규슈의 관습을 소설화했죠. 오늘이 아닌 시대의 이야기를 그려내려면 철저하게 기록이나 자료에 의거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없고, 어떤 감동도 끌어낼 수 없습니다.”

    ▼ 소설 속 나가사키 피폭 현장에서 조선인들이 구호에 나선 대목은 비현실적입니다.

    “사실이에요. 자기 살기도 바쁜데, 조선인들이 일본인을 도와요. 이게 소설의 핵심일지도 몰라요.

    집사람의 일본 친구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도서관에서 아사히신문이 펴낸 ‘원폭전후’라는 증언집을 구해 보내줬는데, 거기에서 ‘구원대의 주체가 돼 일해준 젊은 조선 징용공 제군의 활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미쓰비시 조선소 간부 히라다 히카리)는 증언을 보고 감정이 복받치더군요. ‘그랬구나, 조선인 징용공들은 마지막까지 인간의 길을 택했구나’ 하는 감동이었습니다.”

    ▼ 아이를 업고 남편을 찾아 군함도를 가는 설정도 좀….

    “그건 장모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전쟁 중 장인어른을 수소문하다 백령도 부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 살던 장모님이 아내를 업고 찾아갔다고 하신 데 착안했습니다.”

    ▼ 춘천고 상록회 기록도 허구 같던데 참고문헌을 밝혀뒀더군요.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전 의식이 고양되던 학생들을 구속한 사건인데, 인터넷 사이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데이터베이스’에서 심문 조서, 재판 기록을 볼 수 있어요. 독립운동을 위해 부인과 각방을 썼다는 학생의 진술도 나와요.”



    “이분법 넘어서야”

    ▼ 첩자들 얘기가 많아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 소설이 이분법으로 사람들을 나누는 게 싫었어요. 선과 악, 부자와 빈자 이렇게 나누는데, 그 사이에 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중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문학평론가들도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한발 나아갔다고 평가하더군요.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이 작품이 어떻게 읽히길 바랍니까.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 때 그 싸움을 두려워해선 안돼요. 그 가치를 위해 자신을 불사를 수 있어야 해요. 독자들이 한일 과거사의 해결에 나설 수 있기를, 우리의 역사가 분노를 넘어 용서의 지평을 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간 뭔가에 포획돼 누군가에게 잡혀서 써왔는데, 이젠 좀 자유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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