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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예로부터 전해진 기이한 이야기

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윤영손, 살아남지 못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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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를 죽여라

집현전 학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성삼문의 필적. [윤채근 제공]

집현전 학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성삼문의 필적. [윤채근 제공]

‘행수’는 집현전 부제학을 일컫는 은어였다. 집현전 제학 이상의 벼슬은 모두 명예직이어서 실질적인 조직의 수장은 늘 부제학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부제학을 행수라 부르며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었다. 1456년의 행수는 이개였지만 당시 행수라 하면 집현전의 반정 계획을 주도하고 있던 1454년의 부제학 성삼문을 지칭했다. 박팽년이 건넨 쪽지에 쓰여 있던 ‘행수’도 성삼문을 의미했음에 틀림없었다. 

눈을 감은 나는 직전에 집현전에서 벌어졌을 논의를 상상해보았다. 1453년 부제학을 지낸 박팽년은 비록 선배 행수였으나 맹목적으로 성삼문을 따르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성삼문이 거사 여부를 결정했을 것이다. 성삼문은 과격했지만, 완벽주의자여서 모험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사를 중지시켰을 것이다. 그럼 유응부는? 무장인 유응부는 운검과 관계없이 당일로 끝장을 보자고 주장했을 자였다. 

그런데 박팽년은 왜 그 와중에 나를 찾아와 쪽지를 건넨 것일까? 이젠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그날 반정에 참여한 나와 같은 무사들은 각각 자신이 살해할 인물을 할당받았다. 내가 죽일 인물은 신숙주였다. 집현전 내부 사정에 밝고 한명회만큼이나 눈치 빠른 신숙주는 운검들이 수양의 목을 베기 전이라도 기회만 오면 즉시 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성미 급한 내가 혹시라도 신숙주를 먼저 벨까 염려한 성삼문이 형조의 직속 상관인 박팽년을 서둘러 파견했을 게다. 행수인 자신이 광연전에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당연히 그게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절호의 기회

집현전 행수 일행이 방금 전 통과했을 경복궁 서문을 나와 창덕궁을 향해 걸으며 나는 봉보부인이 아침에 한 말을 떠올렸다. 거사를 중지시키는 자가 배신자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결정을 보고 실패하면 상왕을 보위한다. 봉보부인이라면 결코 거사를 중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누군가 중지하자 했다면 그자를 먼저 죽였을 터였다. 다시 창덕궁에 들어서서 인정전을 지나칠 무렵 나는 갑자기 무섭고도 터무니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건 우연히 마주친 내금위 조방림(趙邦霖)의 눈빛 때문이었다. 

조방림이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웃었는데 그건 죄수를 처형하기 직전의 낯빛이었다. 처형자들은 곧 목이 떨어질 상대방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죄수들은 물건이나 짐승인 채 죽음을 맞는다. 조방림이 바로 그런 방식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계획이 누설됐고 연회 자체가 수양이 조작한 한판의 연극일 수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급히 광연전 앞뜰에 들어선 나는 배신자가 누굴까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당상관들 좌석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박팽년을 발견했다.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수양의 우측을 찬찬히 살피니 우승지 한명회와 우부승지 조석문(曺錫文)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렇게 수양의 우익들로 채워진 해당 줄 끝에 좌부승지 성삼문이 보였다. 

성삼문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절망과 혼란 속에 현기증을 느끼던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유응부였다. 그가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우리는 대조전 동쪽 회랑 모퉁이의 변방(便房·뒷간) 근처로 이동했다. 유응부의 음성은 흥분과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아침나절 갑자기 운검이 폐지되고 성 승지가 거사를 중지시켰소. 뭔가 일이 꼬이고 있어. 아주 불길하오.” 

성삼문의 성정은 나도 아는 바였다.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변절자가 있는지, 그게 누구인지, 그자를 당장 어찌해야 할지. 질문들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 할 찰라, 하늘의 뜻이었는지 하필 그 순간 변방을 향해 걸어오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유응부가 재빨리 회랑 반대쪽 문으로 빠져나갈 동안 나는 변방으로 들어가 용변 보는 시늉을 했다. 뒤미처 변방 안으로 따라 들어선 자는 신숙주였다. 전날부터 퇴청하지 못하고 연회 준비를 주관한 그가 짬을 내 머리를 감기 위해 들른 것이다.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를 죽일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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