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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서울법대에서의 35년

“국무총리 제의 거절한 건 安分知足할 나이였기 때문”

  •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내 마음의 영원한 등대’ 서울법대에서의 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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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6년 서울대 창립 50주년 기념행사 때 추억거리 물품전시회가 있었다. 출석부, 성적표, 교과서, 학적부,학생들이 동숭동 캠퍼스 앞에 있는 중국집 ‘공락춘’에외상값 대신 잡혀놓았던 시계나 학생증 등 흥미진진한 품목이 많았다. 단과대학 학장단이 일반에 공개하기 하루 전 먼저 관람하던 중 당시 대통령이던 김영삼의 학적부가 보였다. 

    김영삼 학생의 본적(거제)과 주소(중구 회현동)가 기재돼 있고,서울대 철학과 청강생이라는 기록이 보였다. 청강생을 한자로썼는데 들을 청(聽)자 대신 관청 청(廳)이라고 오기했다.당황한 교무처장이 이를 곧 치워버린 후로그 문서의 행방은 알 수 없다.

1972년 10월 17일 악명 높은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청명한 가을날의 날벼락이었다. 느닷없이 사이렌이 울리면서 “조기 통행금지가 실시되니 시민들은 오후 5시까지 귀가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버스에서 이 방송을 들은 나는 영문을 모른 채 귀가했다.


청명한 가을날의 날벼락

1997년 5월 1일 ‘법의 날’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1997년 5월 1일 ‘법의 날’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다.)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된 후 학교는 문을 닫고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법대 교수들은 출근한 후 김증한 학장실에 모여 소문과 시국담을 교환하면서 나라와 학교의 장래를 걱정했다. 교수들은 강의실을 잃은 채 방향 없는 삶을 이어갔다. 참으로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여론 주도층인 교수들을 달래고자 시작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이 보급한 교수 테니스가 시작된 게 이즈음이다. 당시 나온 교수 사회의 유행어 중 하나가 ‘주테야테’(낮에는 테니스, 밤에는 TV 시청 외에는 교수들이 할 일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다. 

대학본부와 각 단과대학에는 중앙정보부, 서울시경찰청, 보안사, 관할 경찰서 등 온갖 사복 정보원이 교수와 학생의 동태를 감시하고자 무시로 드나들면서 날마다 정보보고를 올렸다. 또한 이들에게 매수된 내부나 외부의 끄나풀도 많았으므로 교수들은 상호간에도 항상 말을 조심해야 했다. 교수회의에서 나온 발언이 10분 뒤 정보기관에 들어갈 정도였다. 

10월 유신이라는 억지 정치노름이 먹혀들지 않는 듯하자 정부는 교수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유신의 정당성을 홍보하게 했다. 특히 법대 교수는 이용가치가 많았다. 언론 인터뷰는 물론 공개 강연에 참여해 유신의 당위성을 설명하라는 게 정권의 요구였다. 나도 무척 시달렸으나 헌법은 내 전공 분야도 아니고 긴장된 순간에는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어 TV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상과 꿈을 품고 시작한 학자 생활은 이렇듯 험난했다. 법대 학생 시절부터 군인 집단이 국회를 대신해 1분마다 법률안을 한 개씩 통과시키는 코미디를 보면서 자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에 찬 고민도 많이 했다. 법이 권력에 눌리거나 아첨해 곡학아세하는 세상을 한탄하면서 법학을 공연히 전공하지 않았나 하는 회의심이 강하게 들 때가 많았다. 처참한 민주주의 형해화(形骸化)의 현장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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