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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제주도 1.5배 크기 오키나와 열도 집어삼킨 日

  •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제주도 1.5배 크기 오키나와 열도 집어삼킨 日

  • 대청제국 중심의 동아시아 조공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베트남은 청불전쟁을 거치면서 청(淸)의 조공국에서 프랑스의식민지가 됐다. 일본은 청의 국력이 소진할 기미가 보이자 류큐를 복속시킨다. 조선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청일전쟁의 전운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청불전쟁 기록화. [위키피디아]

청불전쟁 기록화. [위키피디아]

1851년 1월 광시성 구이핑(桂平)에서 봉기한 태평천국군은 창장(長江) 남쪽 지류 샹장(湘江) 흐름을 타고 북진해 창장 중류 요충인 우창(武昌)을 거쳐 1853년 3월 대도시 난징을 점령한 후 수도(천경)로 정했다. ‘멸만흥한(滅滿興漢)’을 슬로건으로 내건 태평군은 100여만 명으로 불어났다. 

시랑(侍郞) 출신 증국번(曾國藩)이 향토의용군 상용(湘勇)을 조직해 태평군 토벌에 나섰다. 만주팔기, 녹영(綠營) 등 정부군이 부패해 전투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청(淸) 정부는 상용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증국번은 태평군이 토지 균분, 사당(祠堂) 파괴 등 기본 질서에 어긋나는 주장을 한다는 점을 부각함으로써 한족 기득권층의 협력을 이끌어냈다. 

태평군의 약점은 면(面)은 확보하지 못하고 점(點)과 선(線)만 점령한 것이다. 약점을 잘 알고 있던 태평천국 2인자 양수청은 난징 점령 직후인 1853년 5월 이개방, 임봉상, 길문원이 지휘하는 북벌군 5만 명을 난징에서 출정시켜 베이징을 곧바로 공격하게 했다. 북벌군은 5월 안후이성 자오저우(펑양·鳳陽)를 점령했으며 6월에는 허난성 카이펑을 확보했다. 7월에는 황허를 건너 허베이 평원에 들어섰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해 10월 북벌군이 톈진(天津)을 공략했으나 몽골 코르친족 출신 셍거린전(僧格林枕)이 지휘하는 청군에 패배했다. 북벌군은 1855년 길문원, 임봉상, 이개방 순으로 차례로 함몰됐다. 북벌군과 거의 같은 시기 출발한 석달개의 서정군(西征軍)은 성공적이었다. 증국번의 상용으로부터 우창을 탈환하고 초용(楚勇)을 이끌던 강충원을 죽였다. 안칭(安慶)과 주장(九江) 등 난징의 울타리 도시도 점령했다.


태평천국서 벌어진 ‘왕(王)’들의 권력 다툼

일본에 복속당해 450여 년 왕조가 끝장난 류큐 왕국의 ‘슈리성’. [동아DB]

일본에 복속당해 450여 년 왕조가 끝장난 류큐 왕국의 ‘슈리성’. [동아DB]

하나님(上帝)의 뜻을 대신 전한다는 천부하범(天父下凡) 권력을 행사한 양수청은 태평천국의 2인자 동왕(東王)이었다. 양수청이 힘을 얻으면서 1인자 천왕(天王) 홍수전과의 갈등이 벌어졌다. 양수청이 홍수전을 밀어내려는 상황에서 익왕 석달개가 지휘하는 태평군은 1856년 6월 청나라군이 천경 공략 목적으로 설치한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을 괴멸시켰다. 청 황제가 파견한 흠차대신(欽差大臣) 상영은 패주 후 사망했다. 

양수청의 도전에 위협을 느낀 홍수전은 북왕 위창휘를 사주해 양수청을 치게 했으며 양수청을 살해하는 데 성공한 위창휘는 세력을 강화하고자 석달개마저 숙청하려 했다. 석달개는 도피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의 아내와 아들을 포함해 2만~3만 명이 학살당했다. 위창휘는 1인자가 되고자 1856년 11월 천왕부를 공격했으나 홍수전 측의 반격을 받고 붙잡혀 극형을 당했다. 배신에 지친 홍수전은 홍인발 등 친형제를 요직에 기용했다. 

1856년 12월 증국번에 의해 우창이 다시 함락됐다. 홍인발 형제에게 우창 함락 책임을 추궁당한 석달개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난징을 떠났다. 위창휘에게 살해된 양수청의 잔당을 흡수함으로써 세를 키웠다. 

청군은 천경을 정벌하고자 다시 강남대영을 설치했다. 태평군은 충왕 이수성과 영왕 진옥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홍수전은 홍인발 형제가 뇌물을 받는 등 문제를 일으키자 그들을 해임했으며 1859년 일족 홍인간이 홍콩에서 건너와 천왕을 보좌했다. 

석달개는 1859년 자립을 선언했으나 1861년 창장 대도하(大渡河)에서 강을 건너 북상하는 데 실패한 후 부하들을 구하고자 스스로 청군(淸軍)의 포로가 됐다. 석달개는 1863년 청두에서 살을 발라 죽이는 책형(刑)에 처해졌다. 2차 아편전쟁이라고도 하는 애로호(청-영국 간 분쟁) 사건이 진행 중이던 1860년 태평군은 충왕 이수성과 영왕 진옥성의 분전 덕에 ‘천하의 2개 과실’ 쑤저우와 항저우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1862년 1월 태평군은 상하이 공격에 나섰다.


英佛이 약탈한 淸 보물 루브르·대영박물관으로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나라 황실정원인 원명원(圓明園)에서 약탈한 국보급 문화재, 12지신(支神) 가운데 쥐와 토끼 머리 청동상.  [뉴시스]

제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청나라 황실정원인 원명원(圓明園)에서 약탈한 국보급 문화재, 12지신(支神) 가운데 쥐와 토끼 머리 청동상. [뉴시스]

영국, 프랑스 등 외세는 상승군을 조직해 청군을 지원했다. 상하이가 태평군에 떨어지려는 상황에서 난징이 청군에 거꾸로 포위당했다. 홍수전의 재촉을 받은 이수성은 상하이 공격을 중지하고 쑤저우와 난징을 오가면서 난징의 포위를 풀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군은 1863년 12월 쑤저우를 잃고, 1864년 초에는 항저우마저 상실했다. 1864년 7월 난징도 함락됐다. 홍수전은 난징 함락 1개월 전 음독자살했다. 난징에 입성한 상용은 학살·약탈을 자행했다. 

태평군 진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증국번, 좌종당(左宗棠), 이홍장(李鴻章·1823~1901) 등 한족 출신 인사들은 무력을 배경으로 해 청 말기 권력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홍인간은 자정신편(資政新篇)에서 기독교 교리에 기초해 중앙집권과 함께 은행, 철도, 우편제도 도입 등 서양 문물 수용을 주장했다. 그만큼 태평천국은 혁명적 측면이 있었다. 태평천국과 동학 봉기가 종종 비교되나, 동학이 근왕(勤王·임금을 위해 나라 일에 힘씀) 등 반(反)서구, 보수적 색채를 띠었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난다.
 
애로호 사건은 태평천국전쟁이 한창이던 1856년 10월 일어났다. 청나라 침략을 노리던 영국과 프랑스는 연합군을 구성해 그해 12월 광저우(廣州)를 공격했다. 영·불군은 1858년 4월 톈진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 러시아 함선 1척도 합류했다. 애로호 사건은 톈진조약으로 이어져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까지 허용되는 등 청나라가 대폭 양보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톈진조약 기록화. [위키피디아]

톈진조약 기록화. [위키피디아]

톈진조약 비준 문제와 관련해 톈진 외항(外港)에서 청군과 영국군 사이에 포격전이 벌어져 영국군이 패하는 바람에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 1860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군함 100여 척, 병력 1만5000명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파견했다. 영·불 연합군은 1860년 톈진을 거쳐 베이징을 점령했다. 영·불 연합군은 그해 10월 자금성의 이궁(離宮) 원명원(圓明園)에 난입했다. 병사들은 보물을 대거 약탈했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의 전시실이 이때 약탈한 보물로 채워졌다.


“淸이 망하고 나면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잇는 유일한 나라”

아편전쟁을 겪은 도광제의 후계자 함풍제는 베이징 북방 청더로 도주했으며 영·불에 합세한 러시아는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연해주 영유권을 확보했다. 러시아인들은 함경도 경흥에 나타나 조선에도 통상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집요한 통상 요구는 1866년 병인년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공으로 이어졌다. 

1864년 아들 고종의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집권 초기 조선 천주교도의 주선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 했으나 천주교를 적대시한 성리학 세력이 반발하자 권력 유지를 위해 프랑스인 신부(神父)와 천주교도를 대거 처형했으며, 이는 프랑스의 군사 개입을 야기했다.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서 소각된 사건을 핑계로 미국 동아시아 함대가 1871년 신미년에 강화도를 침공했다. 이 사건 후 조선의 대외 폐쇄 및 고립은 한층 심화됐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1864년 7월, 당시 최강의 무력집단이던 상용을 장악한 증국번은 동생 증국전과 팽옥린 등으로부터 새 나라를 세우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전쟁을 오랫동안 치르는 동안 상용도 부패해 전투력이 약화됐으며, 좌종당 이홍장 등 부하들의 마음도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증국번은 난징 점령 후 상용을 해산하고 일부 우수한 간부만 이홍장에게 넘겨줬다.


신장 ‘삼키려던’ 영국·러시아

이홍장은 증국번의 유산을 기초로 회용(淮勇)을 만들었다. 이홍장은 회용을 배경으로 직례총독을 여러 차례 역임하는 등 청나라 말기 최고실력자로 군림했다. 이홍장 이후 허베이·허난·산둥·산시 4개 성을 관할하는 직례총독이 군기대신을 대신해 청나라 정부의 최고실력자가 됐다. 

아편전쟁, 태평천국 봉기, 애로호 사건, 러시아의 연해주 점령 등 청나라의 몰락이 가시화되는데도 조선은 외부 세계 변화에 눈을 감았다. 

이항로, 기정진, 유인석, 최익현 등 성리학자들은 제비집이 매달린 초가에 불이 나고, 아래에서는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는 연작처당(燕雀處堂) 상황에서도 “청이 망하고 나면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잇는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조선이 멸망한 1910년에도 1644년 멸망한 명나라 연호 ‘숭정(崇禎)’ 사용을 고집했다. 

애로호 사건을 통해 청나라 인사들은 구미(歐美) 제국주의 세력이 영토를 노린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청나라 실력자들은 외세의 침입을 방어하는 방책과 관련해 임칙서와 좌종당 중심의 새방파(塞防派)와 이홍장 중심의 해방파(海防派)로 나뉘었다. 새방파는 육지로부터의 침략, 해방파는 바다로부터의 침략을 우선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편전쟁 발발 책임을 추궁당해 신장으로 좌천당한 임칙서는 러시아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영국과 미국은 영토 할양이 아니라 조차(租借)나 통상 이익을 원하는 정도인 반면 러시아는 영토 점령을 시도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좌종당의 견해 또한 임칙서와 같았다. 

새방파가 친미·친영적 색채를 띤 반면 해방파가 친러적 색채를 띤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방론과 해방론은 지정학에 기초했으며 현재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안보정책을 관통하는 핵심 논쟁점(Key Words)이다. 

러시아는 186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등을 영토로 한 부하라칸국(汗國), 1873년 아무다리야 하류를 중심으로 한 히바칸국, 1876년 페르가나 계곡과 타슈켄트를 중심으로 한 코칸드칸국을 차례로 점령했다. 코칸드칸국 장군이던 야쿠브벡은 러시아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신장으로 근거지를 옮겨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다. 영국은 러시아의 동진을 막고자 야쿠브벡을 지원했다. 나중에는 신장 침투를 노리던 러시아도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야쿠브벡을 도왔다. 

1875년 새방파 좌종당은 흠차대신(欽差大臣) 자격으로 정예부대를 이끌고 야쿠브벡 군대에 맞섰다. 해방파 이홍장은 야쿠브벡 군대와의 전쟁이 임박했는데도 프랑스와 일본 등 해양세력과의 싸움에 대비해 증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홍장이 보기에 신장은 중국의 지엽말단에 불과한 땅이었으나 좌종당은 신장은 몽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하고, 몽골을 유지하는 것은 수도 베이징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논리로 맞섰다. 

좌종당은 1877년 증국번이 식량을 포함한 군수물자를 충분히 지원해준 데 힘입어 야쿠브벡군을 격파했다. 위구르족의 집단거주지면서 남신장(南新疆)의 중심인 카슈가르, 야르칸드, 호탄 등을 보호령으로 삼으려 하던 영국이나, 북신장(北新疆)의 이리 지방을 점령했던 러시아도 삼켰던 이권(利權) 대부분을 토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좌종당이 야쿠브벡군을 군사력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조공 질서 붕괴

신장과 중앙아시아는 인종(페르시아 및 투르크)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연결돼 있다. 8세기 당나라 현종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절도사 안록산의 아버지는 사마르칸트(康國)의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는 돌궐인이었다. 

중앙아시아 최대 상인 집단 소그드인은 사마르칸트에 본부를 두고 동쪽으로 신장-중국-만주에 이르는 강력한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소그드인은 동족 안록산의 반란을 적극 지원했다. 그들은 안록산을 통해 중국 내 상권을 장악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록산(Roxan)’은 소그드어로 ‘빛나는(光明)’이라는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소그드인 부인 이름도 록산네(Roxane)였다. 

청나라의 시각에서 볼 때 세계 질서는 힘이 미치는 정도에 따라 ①각 성(省)과 만주(滿洲) ②소수민족 통치지역인 번부(藩部)와 쓰촨 서부, 구이저우, 윈난, 칭하이 등의 토사지역(土司地域·소수민족 자치지역) ③조선, 베트남, 류큐(오키나와), 버마 등 조공국(satellite) ④일본, 중앙아시아, 여타 동남아시아 등 반(半)조공국 ⑤인도, 중동, 유럽 등 외연으로 구성돼 있었다. 

1840년 아편전쟁을 통해 청나라의 무기력이 드러나자 대청제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럽과 일본은 청의 적대세력이 돼 기존의 동아시아 질서를 해체해나갔다. 

19세기 중엽 프랑스의 침공으로 베트남이 가장 먼저 조공국 대열에서 이탈했다.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이던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 살해를 구실로 1858년 필리핀 주둔 스페인군과 함께 베트남에 출병해 중남부 항구도시 다낭을 점령했다. 다낭은 2018년 3월 초 미국 항공모함 칼빈슨이 기항한 천연의 양항이다. 

프랑스군은 4년간의 공방 끝에 메콩델타(코친차이나)를 점령했으며, 1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으로부터 메콩델타의 3개 성을 할양받았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지 불과 2년밖에 지나지 않은 1873년 송코이강(紅河) 통항권 확보를 위해 하노이를 포함한 송코이델타(통킹)를 점령하고, 베트남 정부에 제2차 사이공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는 메콩델타 총독 뒤프레 제독이 중앙정부 승인도 없이 독단으로 수행한 작전이었다. 프랑스는 제2차 사이공 조약을 통해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베트남으로부터 송코이강 통항권은 물론, 메콩델타의 3개 성을 추가로 할양받았다. 청나라도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다.


베트남, 淸 조공국에서 佛 식민지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 국내외 상황이 안정되자 베트남 전체의 식민화를 시도했다. 베트남 총독 빌레는 송코이델타 점령을 위해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켰다. 1882년 4월 프랑스는 송코이델타 일부가 태평군 잔당 유영복의 흑기군(黑旗軍)에 의해 장악돼 통항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핑계로 리비에르 대령이 지휘하는 600명의 병력으로 하여금 하노이를 점령케 했다. 리비에르는 후에(順化) 소재 베트남 정부에 송코이델타 할양을 요구했다. 

베트남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며 청나라는 프랑스군이 북진할 것을 우려해 장지동(張之洞)을 사령관으로 베트남과 접한 국경에 부대를 파견했다. 청나라의 강경한 태도에 당황한 프랑스는 송코이강을 경계로 세력권을 분할할 것을 제안했다. 1883년 2월 새로 집권한 식민지주의자 페리 총리는 이 제안을 취소해버렸다. 청나라·흑기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하노이를 점령했으며 리비에르 대령은 전사했다. 

프랑스는 1884년 육·해군으로 구성된 1만6500명의 병력을 증파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증강된 프랑스군은 송코이델타 주둔 청나라·흑기 연합군을 격파해 베트남 영외로 퇴각시켰다. 이어 프랑스군은 후에로 진격했다. 프랑스는 베트남군을 항복시킨 다음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홍장은 1884년 5월 프랑스와 톈진조약을 체결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으나 그해 6월 프랑스군이 철군을 지체한다는 이유로 송코이델타 주둔 청나라군을 공격해 전쟁이 재발했다. 

이번에는 프랑스 함대가 푸젠 앞바다에까지 나타났다. 조선장관(船政大臣) 하여장은 외교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해 푸젠을 지키던 청나라군에 프랑스 함대에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프랑스 함대는 푸젠의 마웨이 군항(軍港)을 공격해 양무파(洋務派)가 건설한 조선소를 파괴했다. 마웨이 조선소가 파괴됐다는 소식을 접한 청 정부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쿠르베 프랑스 해군 제독은 함대를 지휘해 창장 하구와 타이완을 봉쇄하고, 펑후열도(澎湖列島)를 점령했으나 저장성을 공격하다가 청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1885년 3월 청-흑기 연합군은 송코이델타의 랑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랑썬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페리 내각이 붕괴했다. 프랑스군은 소극적 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으로서도 펑후열도를 잃고, 타이완에 대한 통제도 상실한 상태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청나라는 1885년 파리 조약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인정했다.


조선 女人 셋을 첩으로 둔 위안스카이

프랑스 식민지 시기 하노이. [위키피디아]

프랑스 식민지 시기 하노이. [위키피디아]

오키나와 열도, 즉 류큐(琉球)는 일본 규슈 남부에서 타이완까지 활 모양으로 점점이 퍼져 있는 총면적 2712㎢(제주도 1.5배 크기)의 열도다. 류큐는 조선, 중국, 일본과 교류하면서 발전해 1429년 오키나와섬을 중심으로 통일왕국을 세웠다. 16세기에는 쇄국정책을 취한 명(明)과 일본, 조선 간 중계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렸다.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으로 이어진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9년 사쓰마번(薩摩藩·가고시마)이 3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해 류큐를 점령했다. 사쓰마번은 가까운 아마미(奄美) 제도는 직접 지배하는 대신 류큐의 명목상 독립은 유지했다. 

류큐는 이후 청나라와 사쓰마번 모두에 조공을 바치는 양속국(兩屬國)이 됐다. 청나라만 이를 몰랐다. 류큐는 1847년 영국, 프랑스에 개항했으며, 미국과는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국제정세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다가 청나라의 국력이 소진될 기미를 보이던 1879년 류큐를 병합했다.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외세 및 국내 반란 세력과의 싸움에 정신이 없던 청나라는 일본의 류큐 합병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공체계로 불리는 청(淸) 중심 동아시아 질서의 한 축에 금이 간 것이다. 

청·불전쟁의 여파는 조선에도 미쳤다. 일본은 1884년(갑신년) 12월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청나라의 허를 찔러 김옥균과 홍영식 등 소장 개혁파를 부추겨 친청(親淸) 민씨 정권을 반대하는 정변을 일으키게 했다. 

일본의 예상과 달리 이홍장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조선 주둔 청나라군을 빼내가지 않았다. 청군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연계된 임오군란(1882)을 진압한 뒤에도 2000명 정도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하응은 1873년 왕비 민씨에 의해 실각당한 후 임오군란 직후 혼란기에 잠시 권좌에 복귀했으나 청군에 의해 납치돼 3년간 베이징 인근 바오딩에 유폐된 바 있다. 

24세의 청군사령관 위안스카이(袁世凱)는 병력을 동원해 정변 발생 3일 만에 조선의 개혁파 세력을 제압했다. 위안스카이는 당시 조선 여인 3명을 첩으로 들였는데, 그중 하나인 안동 김씨의 손자 위안자류(袁家)는 세계적 물리학자가 됐다.


바람 앞의 등불

동학을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를 주도했다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동아DB]

동학을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를 주도했다가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되는 전봉준. [동아DB]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 청나라 우위가 확고해졌다. 청은 일본과 톈진조약을 체결해 조선으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거나 파병할 때 사전 통보 의무화에 합의했다. 일본이 조선에서 철군하기로 한 것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청나라에 비해 약했기 때문이다. 특히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을 포함한 대형 함선을 보유한 청나라 해군이 일본 해군을 압도했다.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한 후 청나라 정복 계획을 수립하는 등 군비 증강에 전력을 다했으나 청나라는 북양함대 증강에 사용할 예산을 시태후(西太后) 환갑 축하를 위한 이화원 공사비로 돌려놓았다. 일본이 신형 함정을 발주하는 등 해군력을 크게 증강하는 동안 청나라는 10년간 단 한 척의 함정도 추가로 확보하지 못했다. 

1894년 3월 조선 정부가 파견한 홍종우가 상하이에서 김옥균을 암살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가 보내온 김옥균의 시신에서 목을 떼어내어 양화진에서 효수(梟首)했다. 이 사건으로 청나라에 대한 일본의 적개심이 한층 고조됐다. 

1894년 2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동학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이 봉기했다. 동학군은 5월 10일 정읍시 황토현에서 이틀간에 걸친 처절한 전투 끝에 조선 정부군에 대승을 거뒀다. 황토현 참패는 조선 조정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은 5월 28일 전남 장성(長城)에서 동학군과 접전했으나 대패했다. 5월 31일 동학군은 장날 장사꾼으로 변복하고는 순식간에 전주성을 점령했다. 낫과 쇠스랑 등 농기구로 무장한 동학군의 전주 점령은 외세가 개입하는 국제전쟁으로 비화했다. 

민영준(민영휘로 개명) 일파는 동학군이 이하응과 연결돼 민씨 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커지자 정권 상실을 우려한 나머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 정부가 조선 파병을 결정했으며 일본 군부는 조선에서 청군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계획했다. 일본은 조선으로 출병할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었는데 동학 봉기로 인해 기회를 잡았다. 일본은 일본군과 청군이 동시에 조선에 출병하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먼저 군대를 파병했다. 청·일군이 파병돼 군사 충돌 위험이 높아지자 동학군은 외세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고자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해산했다. 

조선의 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청일전쟁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신동아 2018년 8월 호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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