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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마카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라진 슬픈 섬

澳 카지노 왕국의 그늘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라진 슬픈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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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역이 끊기면서 도박과 성매매를 호구지책으로 삼은 마카오. 100여 년 뒤 그 호구지책은 주력 산업이 됐고, ‘동양의 몬테카를로’는 세계 최대 도박장이 됐다. ‘완전고용’과 ‘흑자 예산’을 자랑하는 돈 많은 카지노 왕국이지만, 민초들의 삶은 힘겹기만 하다. 변변한 의료·교통시설은 찾아볼 수 없고, 카지노산업 외에는 마땅한 일자리도 없다. 차별은 여전하고 민주화의 길은 요원하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라진 슬픈 섬

몬테 요새에서 바라본 마카오 시내.

1991년 KBS 드라마 ‘야망의 세월’은 어릴 때 무척 재미있게 본 드라마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일제강점기 사업가 박만석이 흰 모자에 흰 재킷, 흰 바지, 흰 구두로 ‘쫙~’ 빼입고 등장하자 그의 지인들이 “와, 마카오 신사 됐수다!” 하며 감탄하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신사의 대명사 마카오, 이름도 이국적인 마카오는 어떤 곳일까. 마카오는 그 이름만으로도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훗날 마카오가 중국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적잖이 실망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마카오는 어릴 적 필자의 환상을 아쉽게나마 달래주었다. 대항해의 선구자 바스코 다 가마와 예수회 창시자 로욜라의 동상이 시내에 서 있고, 희고 노란 파스텔톤 건물들 사이를 걸으며 먹는 에그 타르트와 푸딩은 유럽의 정취를 자아낸다.

대항해시대가 낳은 마카오

현실과 환상의 경계 사라진 슬픈 섬
마카오의 약칭은 ‘깊을 오(澳)’ 자다. ‘오(澳)’는 배가 정박하기 쉽게 해안선이 움푹 들어간 곳을 말한다. 마카오는 중국어로 ‘아오먼(澳門)’, 천혜의 항구임을 뜻한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는 마카오라는 이름이 훨씬 친숙하다. 식민지 이름이 대체로 그렇듯, 마카오라는 이름도 제국주의자와 현지인의 대화로 만들어졌다.

중국 뱃사람들은 바다의 수호여신인 ‘마조(媽祖)’를 섬기고 사원을 지었다. 포르투갈인이 마카오의 마조 사원 근처에 정착하며 현지인에게 이 땅의 이름을 물었다. 현지인은 사원의 이름을 묻는 것으로 착각해서 “아마 까오(마조 사원)”라고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이곳은 마카오라는 이름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포르투갈인은 왜 마카오에 자리를 잡았을까. 광둥성의 중심 광저우(廣州)는 명·청(明淸) 쇄국정책 때에도 유일하게 개방한 대외무역항이었다. 중국과 교역하길 원하는 각국의 배들이 광저우에 몰려들어 “강을 따라 떠들썩한 번화가, 순식간에 수천 척의 배가 솟아난다”는 장관을 연출했다. 광둥성의 젖줄 주장(珠江)은 광저우의 남쪽으로 흘러 남중국해로 들어간다. 주장과 남중국해가 만나는 지점, 중국 대륙의 땅끝에 마카오 반도가 있다. 즉 마카오는 당시 세계 최대 항구였던 광저우와 가까우면서도, 중국 조정의 삼엄한 감시를 ‘살짝’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중국과 교역하는 한편, 독자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은 해외상인 집단이 탐낼 만했다.

포르투갈은 “육지는 이곳에서 끝나고, 바다는 이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처럼 유럽의 서남쪽 끝에 있다. 대서양과 지중해의 경계이고, 유럽과 아프리카의 경계이며, 가톨릭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경계다. 예부터 포르투갈은 라틴족, 켈트족, 게르만족 등 유럽민족과 카르타고인, 무어인, 베르베르인 등 북아프리카인들이 부대끼며 살았다. 따라서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접하며 교역하는 것에 익숙했다.

더욱이 포르투갈은 땅도 작고 인구도 적다 보니 장사가 아니면 먹고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베네치아공화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어 대서양으로 나가는 다른 항로를 찾아야 했다. 열악한 사정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던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항해 왕자’ 엔리케가 아프리카를 탐색했고,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열었다. 포르투갈의 동진은 거침없었다. 인도를 넘어 동남아시아를 지나 중국과 일본까지 닿았다.

외교, 전쟁, 밀무역

다만 포르투갈이 마카오에 안착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포르투갈은 동남아 일대를 석권할 수 있는 요충지 말라카를 점령한 후, 1517년 국왕 마누엘 1세의 공식 사절 토메 페레스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 외교·교역 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이때 명나라 황제 정덕제는 스스로 대장군에 봉하고 몸소 몽골군과 싸우는 등 기행을 일삼은 황제이긴 했으나,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자금성에서 살기보다 북해공원 근처에 몽골식 천막을 치고 생활하는 것을 좋아했고, 몽골어와 산크리스트어에 능해 서역인과의 만남을 즐겼다. 그런 만큼 정덕제 자신은 포르투갈과의 관계도 흥미롭게 검토해볼 만했다.

마침 말라카의 사신이 명나라에 와 ‘포르투갈이 범선과 화포로 왕국을 점령하고 국왕을 축출했다’며 구원을 요청했다. 말라카는 ‘칙서를 내려 책봉한 나라’로 명나라 조공 질서의 일원이었다. 포르투갈의 말라카 점령은 명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신하들은 일제히 포르투갈을 비난했다.

“지금 그들이 왕래하여 무역하는 것을 듣건대, 위세를 내세워 반드시 싸우고 살상을 자행하니 남방의 환란과 위태로움이 끝이 없습니다.”

포르투갈은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자 함포로 명나라 문을 열고자 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선두주자답게 화력도 만만치 않았으나 명나라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차례 전투 모두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외교와 전쟁, 두 가지 공식 루트가 모두 실패하자 남은 길은 비공식 루트, 즉 밀무역뿐이었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해안에서 밀무역과 해적질을 일삼았다. 포르투갈의 탐험가 핀투는 당시 저장성 닝보(寧波)에 있던 불법체류 포르투갈촌(村)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다고 전한다.

“닝보에는…(중략)…약 3000명의 포르투갈인이 백인과 인도인 혼혈 여성과 결혼해 살았고, 두 곳의 병원과 연간 약 3만 크루자도(cruzado·금화)로 유지되는 성당 2곳이 있었으며, 도시 의회는 매년 6000크루자도의 세금을 거둬들였다. 그 규모로 미루어 아시아에서 가장 고풍스럽고 부유하고 풍족한 도시라는 것은 분명한 듯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불법행위로 포르투갈 상인들은 이익을 볼지 몰라도, 포르투갈 왕국이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1552년 포르투갈 왕실함대 사령관 리오넬 데 소사가 포르투갈 해적선과 밀무역 상인을 소탕해 명나라 조정의 환심을 샀다. 소사는 포르투갈 왕국이 질서와 명예를 중시하는 ‘바다의 제국’이며 일부 몰지각한 포르투갈 무뢰배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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