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 팔자

메리 여왕의 두 번째 남편 단리 백작 [구글 캡쳐]
더구나 폐위된 어머니를 둔 엘리자베스보다 튜터 가문의 직계인 증조할머니를 둔 메리 스튜어트는 왕위에 더 가깝다고 볼 수도 있었다. 최고급 순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메리 스튜어트!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메리 스튜어트는 언제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1560년 남편인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한 지 1년 만에 사망하자 외가인 프랑스 기즈 가문은 몰락한다. 초라한 선왕의 미망인이라는 허울만 남은 그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조국 스코틀랜드로 향한다. 프랑스에서 모든 사람이 떠받들어주며 고고하게 살던 스튜어트는 세상을 몰랐다. 더구나 스코틀랜드는 너무나 억세고 거친 땅이었다.
선대왕 4명 중 2명은 암살당하고 2명은 전장에서 전사했다. 또 귀족들의 내정간섭은 왕의 자리를 초라하게 했다. 군통수권도 없는 왕에게 주어진 권력은 보잘것없었고, 왕실 재산 또한 양 1만 마리가 전부였다. 초창기 그녀는 결혼조차 자신의 결정보다는 권력층의 이해득실에 따라서 계획되고 제약되는 운명에 순응하는 듯했다.
그러나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성인이 되자마자 그녀는 오로지 본인의 의사로 스코틀랜드 최고 미남이자 명문 귀족 단리 백작과의 결혼을 감행한다.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먼 친척 단리 백작과 혼인하며 각종 직위를 주고 차기 왕권까지 약속한다.
통상 배우자의 외모에 대한 애착은 3년을 넘길 수 없다고 했던가. 메리 여왕은 1년도 넘기지 못했다. 스무 살 혈기왕성한 단리 백작은 여왕이 자신보다 궁정악사와 더 가까운 것에 불안감을 가졌다. 약속한 차기 왕권이 흔들리고 있다고 여긴 것이다. 만삭의 여왕 침실에서 단리 백작은 수족들을 불러들여 여왕이 애지중지하는 궁정악사 리치오를 50번이나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극에 달한 국민의 분노

처형당하는 메리 여왕 [구글 캡쳐]
범인은 누가 봐도 뻔했다. 내연남과 짜고 자신의 남편을 무참하게 살해한 것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귀족과 국민은 메리 여왕의 행위에 격분해 그녀를 폐위시킨다. 결국 그녀는 겨우 걷기 시작하는 한 살 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국으로 망명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메리 여왕은 가장 가까운 혈육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여왕에게 스코틀랜드 왕권을 찾아주지 않았다. 다만 왕족으로 충실히 대우해주면서도 감시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구교와 영국국교회의 잔인하고 첨예한 대립으로 엘리자베스 1세는 암살과 모반의 위험에 늘 노출이 돼 있었다. 정세에 밝지 못한 메리 여왕은 반란을 꿈꾸는 구교도들의 모반에 매번 연루돼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다. 결국 그녀가 연루됐음을 알리는 서류가 발각돼 위험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