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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작성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비밀 파일

  • 이흥환·정광호 미국 KISON 연구위원

미국이 작성한 한국 정치지도자들의 비밀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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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한국의 정치는 철저하게 이분법이었다. 힘을 가진 자들의 경이로운 권력 유지술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처절한 생존술의 교차점이 바로 한국 정치의 현주소였다. 한국의 정객들이 넘나든 것은 명분뿐이었던 민주와 반민주의 분계선이라기보다는 야망과 좌절의 경계선이었고, 모든 것은 ‘박정희’ 대 ‘반(反)박정희’로 귀착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저 멀리 제3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래야 마땅했다. 그러나 미국은 실제로 한국 정치의 제3자가 아닌 당사자였다. 여당과 야당 사이, 민주와 독재 사이, 언론인과 정객 사이, 남한과 북한 사이, 박정희와 김대중 사이에는 늘 미국이 있었고, 심지어 이후락과 정일권, 박정희와 김종필 사이에도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양극단 사이에서 때로는 침묵했고 때로는 속삭였고, 때로는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미국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모든 것을 기록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보관했다.

미국 워싱턴의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는 한국 정치의 이면사가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다. 한국 현대사 자료발굴 작업을 하고 있는 워싱턴 소재 비영리재단 인터내셔널 센터의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프로젝트 팀은 최근 워싱턴 시내 펜실베이니아 애버뉴와 인근 메릴랜드 주에 있는 제1, 제2 국립문서보관소에서 한국 관련 비밀 자료들을 수집, 주제별 분류와 한글 번역 작업을 마무리하는 과정에 있다.

이번 작업은 미국의 정보공개법(FOIA, 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올해 초부터 비밀 해제되기 시작한 1973년 이전의 국무부 자료를 중심으로 한 것이며, 가장 최근 비밀 해제된 1970년부터 1973년까지의 방대한 비밀 문건(A4 용지 총 1만2000장 가량) 가운데에서 한국의 국내 정치에 관련된 자료를 ‘신동아’가 KISON 프로젝트 팀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다. 》

[ 미 국무부의 김대중 비밀 파일 ]

(1970년 12월27일)


1970년 12월27일 윌리엄 포터 미 대사가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은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의원의 이른바 ‘개인 파일’이다. ‘김대중 이력’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비밀 전문의 내용은 김 의원의 개인 이력에서부터 정치 경력, 미국에 대한 태도와 주한 미 대사관의 김대중 의원에 대한 평가 등을 담고 있으며, 4개월 남짓 후에 치러질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어떤 점이 김대중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것인지를 분석해놓고 있다.

특히 김대중 후보의 미국관과 주한 미 대사관이 김 후보를 평가한 항목에는 ‘제한 인원만 열람 가능’이라는 비밀 분류 급수가 매겨져 있는데, 이 전문을 작성한 포터 대사는 미 대사관에서 근무한 4명의 요원이 시기별로 김 후보를 평가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대중에 대한 대사관 평가’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대사관 파일에는 4명의 각기 다른 대사관 관리들이 별도의 시기에 작성한 김대중 씨의 성품에 대한 자료가 있다. 첫 번째 것은 1960년도에 작성된 것인데, 그를 ‘유쾌하고 지적이며 솔직하다’고 기술해 놓았다. 두 번째는 1965년에 작성된 것으로 ‘솔직하며 독단적’이라고 평했는데 ‘기본적으로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긴 하지만 대사관 관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의도적으로 삼간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한 대화 비망록에는 ‘긴밀한 접촉이 형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70년 초반에 작성된 평가서에는 그가 ‘진지하고 온건하며 사려 깊은 정치인으로서, 대사관과는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씌어 있다. 가장 최근의 평가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지 일주일 후에 작성된 것인데, ‘자신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드러내 보이며,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온건하긴 하지만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이 전문의 요약문에는 주한 미 대사관이 보관하던 ‘대사관 파일’과 당시 조사 자료를 기초로 김대중 파일이 작성됐다고 밝히고 있는데, 4가지로 분류된 ‘대통령 선거에서의 취약점’이라는 항목에서는 박 정권 때 활동한 김대중 후보의 ‘수입원과 정치 자금’ 문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지적해 놓았다.

[ 김대중 후보가 미국에 밝힌 초기 이력 ]

김대중 의원이 신민당의 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것은 1970년 9월이었다. 같은 해 12월17일 포터 주한 대사가 국무부에 전송한 ‘김대중 이력’ 보고서에는 다음 해(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 후보에게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부분을 분석해놓은 부분이 들어 있다.



‘선거에서의 잠재 취약점

a. 초기 좌익 연루 : 김대중은 1945년 해방 직후 좌파 정치에 연루됐음. 그러나 자세한 부분에서는 언론마다 보도 내용이 다름. 한 보고서에 의하면 김대중은 1940년대 후반, 전에 한때 친(親)공산주의자들이었던 멤버들이 조직한 보도연맹를 위해 반 공산주의 연설을 행한 바 있음. 이 점을 볼 때 김대중은 초기 한때 좌파에 경도됐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동시에 반(反)공산주의로 빨리 넘어왔다는 사실도 지적해줌.

10일 전 김대중은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자신의 초기 활동에 대해 말해준 바 있음. 이에 따르면, 해방 후 그는 약 6개월간 좌익 신민당에 관계했으나 내부 공산주의자들의 세력에 반대해 당을 떠났음. 김은 또 자신이 1946년 10월 목포 파출소 습격사건에 참가했던 것으로 비난을 받았으나,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그는 장남을 출산하는 부인 옆에 같이 있었다고 주장했음.

김은 또 우리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1950년 목포가 공산주의 점령 하에 있을 때 공산당에 의해 감금돼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했음. 그는 공산당 패주로 구출됐음. 미 육군 정보참모부가 한국 정보계통 관리의 말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한국 정보계통 인사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틀림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상황을 종합해볼 때, 초기에 좌익에 기울었다는 주장은 대통령 선거운동에서 김대중에게 잠재적인 위해가 될 수 있음. 그러나 최소한 박 대통령도 똑같은 약점이 있기 때문에 민주공화당이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부각시킬 것 같지는 않음.

b. 병역 미필 문제: 김대중의 출생신고서에 따르면, 한국전 발발시 그는 24세였으나 한국군에 징집되지 않았음. 김대중은 대사관 관리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단순히 소집되지 않았을 뿐이며, 따라서 징집기피로 불릴 수는 없다고 함. 그러나 당시 부유층이나 유지급 가족의 자제가 병역면제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으며, 이를 반증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것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직후 김대중의 참모들이 준비한 김대중의 이력에 따르면, 김대중은 1950년 10월에는 ‘공민 해안경비대 전남 지부 부사령관’으로 되어 있음. 조사에 따르면 공민 해안경비대는 지역 방위와 해안 경비를 임무로 하는 비공식적인 자원 단체임.


[ 71년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 국무부의 판단 ]

”박정희가 이긴다”


70년대 초 한국의 국내 상황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69년 3선 개헌 파동으로 야기된 정치권 대파란의 후유증이 혼란을 가중시켰다. 3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끝난 10월17일까지 전국 40여 개의 대학이 한 달 넘게 문을 닫고 있었다.

70년대가 열리자마자 정인숙 사건이 터져나온다. 3월 초였다. 정 여인 사건은 정치권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 그해 11월에는 평화시장에서 전태일 분신 사건이 일어났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는 좀체 가라앉을 줄 모르고, 정치권은 여당인 민주공화당이나 야당인 신민당 할 것 없이 71년 4월의 대통령 선거를 향해 줄달음친다. 이러한 혼란과 혼탁의 와중에 치러질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한국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워싱턴의 국무부와 서울의 미 대사관은 한국 대선의 향방을 가늠하기 위해 동원 가능한 정보력을 다 가동했다. 이미 국무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1년여 전부터 한국 정치권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선거 판세 분석을 위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70년도의 국무부 비밀 전문 가운데 최소한 20% 가량이 71년 한국 대통령 선거의 추이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내용이었다.

71년 4월15일 국무부의 유서 깊은 정보 분석 연구팀인 ‘정보조사국(Bureau of Intelligence and Research)’이 내놓은 ‘한국: 역대 선거 분석’이라는 제목의 비밀 보고서 역시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반영하는 문건 가운데 하나다. 이 보고서는 7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평가서가 아니라고 전제하면서 ‘박 대통령의 지도 아래 비교적 공정한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긴 하지만, 만약 매력적인 야당 후보의 활기 찬 선거운동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박 대통령 지지자들이 과잉 행동을 보일 경우 분위기는 뒤바뀔 수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1948년 이후 한국의 선거는 부정 부패와 폭력으로 얼룩졌다’며 역대 한국 선거사를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 시대, 정치 공백 시대, 박정희 시대의 개막, 1967년 대통령 선거, 1967년 국회의원 선거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A4 용지 석 장 분량에 각 시대의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이 비밀 보고서는 마지막으로 ‘1971년에 대한 관점’이라는 항목에서 조심스럽게 박정희 대통령의 승리를 예측하고 있다.

‘김대중 후보의 약진세가 계속될 경우 비교적 공정하고 평화로운 선거 분위기가 사라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과 그의 측근 추종자들이 패배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과잉 행동을 보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과 행정부 내의 하급자들이 행정부의 권력과 자신들의 위치를 보호하기 위해 지나친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 따라서 엉망이 되다시피한 1967년 국회의원 선거의 재판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되면 불행이 겹치는 꼴이 된다. 즉 강력한 힘의 전략은 국내의 안정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능성은 박에게 있다. 김대중이 운동가로서 재능이 있긴 하지만, 박이 공정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선거일을 불과 닷새 앞둔 71년 4월22일. 미 국무부의 윌리엄 로저스(William P. Rogers) 장관과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 마샬 그린(Marshall Green) 등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회의에서도 한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날의 회의 내용은 4월22일자로 비밀 분류된 대화 비망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비망록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당선을 예측하고 있다.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일일 보고를 보내오고 있다.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서 60만 명의 청중을 동원하며 정력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지만 박정희가 재선될 가능성이 높다.’

선거 하루 전인 4월26일. 긴장 속에 서울에서 선거전을 지켜본 포터 미 대사는 ‘선거 최종 요약’이라는 제목의 비밀 전문을 워싱턴으로 띄운다. 여야 후보의 마지막날 유세 상황을 주로 담고 있는 이 전문은 ‘선거를 취재한 일본 기자들은 주한 일본 대사관 요원들에게 이번 대선 경쟁은 너무 아슬아슬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도무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이번 선거가 내가 후보가 되는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라는 박정희 후보의 마지막 유세와 “이번 선거야말로 한국이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면서 150만 표 차이로 승리를 장담하는 김대중 후보의 막판 공세 등 최종 유세 상황을 균등하게 다루고 있는 이 전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선거일의 일기 예보는 전국적으로 맑고 따뜻할 것이라 함.’

박정희 후보의 승리였다. 득표 차이는 90만 표였다. 미국이 ‘타고난 캠페이너’라고 평한 김대중 후보의 탁월한 연설 솜씨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대중 후보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박 정권이야말로 꺾기 힘든 상대라는 것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워싱턴에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으로 돌아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이런 비관론을 펼치긴 했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자신감도 있었다. 워싱턴에서 국무부 고위 관료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을 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 미국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이냐?”고 물었던 사람이 바로 김대중 후보였다.

국무부의 비밀 문건들은 미국이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에 이미 박정희 후보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대통령 당선 확정 발표가 있기도 전인 4월28일, 국무부가 백악관 헨리 키신저 보좌관 앞으로 보낸 문서에도 미국의 이런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제목: 박정희 한국 대통령에게 보낼 축하 전문.

박에 대한 신임을 확인한 투표였다는 말 외에는 선거의 성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 야당에서는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지만, 주한 미 대사관의 보고와 언론 보도에 의하면 차분하고 질서 있는 가운데 치러진, 그런대로 공정한(reasonably fair) 선거였음.’


선거가 끝난 지 3개월 만에 국무부의 정보조사국은 ‘한국: 선거 이후 권력 구조의 새로운 요소들’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는다. 정치적 유동성이 증대한 상황에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의 정치력 복원, 김대중의 부상 등 3인의 향후 정치적 위상에 초점을 맞춘 이 비밀 보고서는 한국 정치의 미래는 역시 ‘불투명’하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다음은 이 비밀 보고서의 내용 중 위 양김씨에 관련된 부분이다.

‘당의 보스이자 정보부장이었고 최근에 총리로 복귀해 장기간에 걸쳐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김종필은 한국의 가장 강인한 정치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가장 숙련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한때는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였지만 1968년 3선 개헌을 둘러싼 갈등의 와중에 권력을 잃었다.

4월의 대통령 선거 직전 그에게 선거 운동의 핵심 역할이 주어졌고, 김은 이 기회를 유효 적절하게 이용해 선거운동 연설가로 대중적 이미지를 굳혔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세 번째 임기가 마지막이며 후계자를 양성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은 김종필을 박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국무총리로서 김의 위상은 취약하다. 정부의 실수에 대한 비난과 불신을 한몸에 받게 되는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며, 박 대통령은 다른 국무총리들을 그렇게 해왔듯이 그를 희생양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민주공화당 내에서 김이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허락할 것인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인데, 김은 또 신민당 의원이 의석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상대해야 한다.

선거 전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야당 의원 김대중은 대중 앞에 나타나 활기 차고 강도 높은 선거 일정을 잘 소화해냄으로써 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전국적이고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일반적인 한국인과는 달리 김대중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슈를 가지고 선거를 치렀는데, 현상 유지를 반대하고 유권자들에게 대안을 제시하면서 정부 정책과는 다른 제안을 내세웠다. 이 제안들은 선거판을 휘어잡았고 신민당에 대한 평판은 부쩍 좋아졌다.

김대중은 이제 대통령과 김종필을 제외하고는 어떤 현역 한국 정치인보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김대중은 또 뛰어난 대중 연설 기술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할 당내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과시했는데, 전통적으로 분열 양상을 빚어온 신민당을 1970년 11월 치열한 전당대회에서 하나로 묶어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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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환·정광호 미국 KISON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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