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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최순영-김태정 ‘옷전쟁’ 1년

“마녀사냥은 있었다”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마녀사냥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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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세기말 한국사회를 뒤흔든 옷사건이 특검수사로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의 배경엔 재벌회장과 검찰총장의 사활을 건 전쟁이 있었다. 최순영회장 사법처리를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한판 승부. 거기에 종교가 끼어들었다. ‘옷 전쟁’1년의 비화들을 추적했다. 》
99년 1월18일 밤 10시. 술에 잔뜩 취한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박주선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다짜고짜 욕부터 해댔다. 다혈질인 김총장은 평소 화가 나면 육두문자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야, 이 개XX야. 내가 그래도 일국의 검찰총장이야. 니들이 일국의 검찰총장 부인을 멋대로 조사해, 이 개XX야. 니 형수 어딨어, 이 OO놈아. 당장 보내.”

청와대의 내사 움직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직동팀이 설마 그렇게까지 조사할 줄은 몰랐던 김총장의 울분이 폭발한 것이었다. 해명서 정도만 쓰면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상황은 그게 아니었다. 뭔가 음모가 벌어지는 듯싶었다. 더욱이 박주선이 누구던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로 친형제 같은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 XX가 지 형수한테 이럴 수 있나’ ‘감히 경찰 조직이 검찰총장 부인을 건드려?’ 김총장은 모욕감에 부르르 떨었다. 박비서관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사과했지만 그의 귀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 시각 그의 부인 연정희씨는 의상실 라스포사에서 12시간째 사직동팀의 조사를 받고 있었다. 상당히 강도 높은 조사였다. 오전 10시께 시작된 조사는 좀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연씨가 귀가한 것은 밤 1시가 넘어서였다. 이날 강인덕 당시 통일원장관 부인 배정숙씨는 조사를 받다 밤 1시30분께 각혈을 하고 쓰러졌다. 당황한 수사관들은 배씨를 병원으로 옮기고 조사를 중단했다.

이날 일은 옷사건이라는 연극의 서막이었고 장차 다가올 태풍의 전조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 부부는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사직동팀 조사로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다. 연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연극의 주연으로 발탁된 상태였다. 불똥은 남편에게 튀었다. 99년 6월 김태정씨는 법무장관에 취임한 지 보름 만에 옷을 벗었다. 겉으로 드러난 해임 사유는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에 대한 지휘책임이었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옷사건에 대한 책임 추궁이라는 것을. 그로부터 6개월 후인 99년 12월4일. 장관직에서 물러나서도 옷사건에 시달리던 김태정씨는 끝내 파편을 맞고 구속됐다.

“옷사건은 매우 간단한 사건이다. 유언비어를 방어하려다 보니 옷을 안 샀다고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 거짓말을 그대로 유지하려다 보니 문건 조작이 필요했다.”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의 변호인 윤전 변호사는 옷사건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지었다. 특검 수사 결과 그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애초 단순한 구조였던 이 사건이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변질된 것은 한 여인의 어리석음과 눈가림 탓이었다. 그리고 그 죄값을 짊어진 이는 그녀의 남편이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최순영 신동아그룹회장의 부인 이형자씨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연씨에게 옷으로 로비를 했는지, 또는 연씨가 그것을 빌미로 이씨에게 옷값 대납을 요구했는지 여부. 수사결과를 보면 연씨가 옷값 대납 요구에 직접 관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일순씨 및 배정숙씨의 혐의와는 별개 사안이다. 이형자씨 주장대로 두 사람이 옷값 대납을 요구한 게 사실이더라도 연씨에 대한 결론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옷값 안 내 구속(?)

그렇다면 이제 이 사건을 정리하는 마당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바로 ‘마녀사냥’이 있었는지 여부다. 이형자씨는 “옷값 대납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최회장이 구속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검증하느라 정치권 언론 검찰이 1년 동안 정력을 소진했다.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안 대줬다는 이유로 재벌회장을 구속한다? 아무리 의심이 가더라도 상식선에서 판단하면 아주 간단히 해답을 찾는 경우가 있다. 이씨의 주장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최회장은 애초 그 혐의의 중대성에 비춰 사법처리 대상이었다. 다만 외자유치 명분으로 그 집행을 보류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는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최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보류되자 98년 10월 그를 외화도피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일부 언론 역시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던 터였다.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른 데는 물론 연씨의 책임도 크다. 스스로 마녀사냥의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직동팀이 고관 부인들의 사치행각을 조사하는 줄 알고 ‘손을 썼다’. 윤전 변호사의 말마따나 ‘오해의 소지’를 아예 없애려고 거짓말(고의든 실수든)을 했고 그후 그 거짓말을 유지하기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하게 됐다. 그것이 언론의 집요한 공격을 불렀다.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다.

그렇긴 해도 그녀는 이 사건의 피해자다. 한 예를 들면 그녀에게 혹독한 자백을 강요했던 호피무늬 코트의 반납시기만 하더라도 그 옷이 이형자씨의 로비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눈을 부라릴 일이 아니었다. 사직동팀의 내사정보를 사전에 알았는지 여부도 마찬가지다. 사전인지가 사실이라도 해도 사건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 경우 남편 몰래 고가의 옷을 구입했다가 그 옷이 자신을 음해하는 유언비어에 등장한 사실을 알고 ‘도덕적인 비난’이 두려워, 그리고 남편에게 누를 끼칠까봐 부랴부랴 반납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옷값대납 요구를 거절해 최회장이 구속됐다”는 취지의 이형자씨 주장을 바꿔 말하면 옷값을 대납했다면 최회장 구속을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언론은 이 비합리적인 주장의 허구성을 짚지 않았다. 그에 반해 연씨는 비록 거짓말로 화를 자초하긴 했지만, 로비 대상이 되는 위치에 있었다는 죄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언론은 진작 이씨의 주장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옳았다. 예컨대 연씨는 문제가 된 ‘최회장 사법처리 가능성 언급’에 대해 배정숙씨에게 “외자 유치가 안 되면 어렵지 않겠냐”는, 상식의 얘기를 했을 뿐이라며 결백을 호소했다. 그런데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연씨가 옷을 얻어 입기 위해 배씨를 통해 이씨를 협박했다는 쪽으로. 그 전에 전복과 그림을 거절한 것은 더 큰 뇌물, 곧 라스포사 옷을 입기 위한 고단수 작전이었다고….

김태정 혐의 논란

김태정씨의 죄에 대해서도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에게 원죄처럼 따라붙는 ‘정치 검사’라는 혐의에 대한 비난과 법적인 책임은 구별돼야 한다. 그의 구속사유엔 법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그에게 적용된 공무상비밀누설 혐의와 공문서변조 혐의에 대해 상당수 법조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영장을 발부한 판사조차 법정에서 논란이 되리라는 점을 인정할 정도였다. 정치 검사란 오명을 쓰고 정치인 사정수사의 사령탑이었던 그가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옷사건이 온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불거진 배경엔 분명 정치적 이유가 있다. 옷사건의 표면적 공격 대상은 연정희씨였지만 그 칼끝은 김태정씨를 겨누고 있었다. 실제로 이 사건으로 구속된 것은 부인네들이 아니었다. 거짓말로 화를 자초한 아내 못지 않게 분별력을 잃었던 남편, 바로 김태정씨였다. 그는 자신의 앞길을 망칠까 두려워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고 여론의 비판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여겨 결과적으로 더 큰 화를 불러들였다. 그의 죄는 아내에 대한 조사 결과가 담긴 문건을 건네 받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엉뚱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배경에 김씨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현 정부의 실세 중 김태정씨만큼 적이 많았던 사람도 드물다. DJ비자금 사건 수사 유보와 세풍 북풍 총풍 등 정치권 사정을 주도하는 과정에 야당의 극심한 반발과 원한을 샀다. 그가 대전법조비리사건 처리과정에 터져 나온 ‘심재륜 항명파동’과 소장 검사들의 집단서명파동 때 물러났다면 옷사건의 방향은 크게 바뀌었거나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론의 사퇴압력 공세에 꿋꿋하게 버텼다. 그의 정치적 야심이 큰 탓도 있었지만 김대통령에게 그의 충성심이 여전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그에 대한 대통령의 지나친 신임은 점차 정권에 부담이 됐다. 정치적 라이벌들의 견제심리도 커졌다. 옷사건은 출발 당시부터 권력의 암투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옷사건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선 먼저 이 사건의 외곽구도를 살펴봐야 한다. 옷사건은 재벌총수와 검찰총장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특별부록처럼 끼여든 사건이다. 양측의 전쟁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초기엔 정치권에 대한 신동아측의 로비와 검찰의 수사 보류로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다 98년 12월 최순영 회장에 대한 검찰의 사법처리가 초읽기에 들어감에 따라 최회장측의 패배로 끝나는 듯싶었다.

그때 최회장측이 뽑아든 비장의 카드가 바로 옷사건이었다. 소문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나갔고 마침내 사직동팀의 내사가 시작됐다. 최회장측에 유리한 국면이었다. 그러나 내사결과는 최회장에게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의 역공은 무서웠다. 99년 2월 최순영 회장은 구속됐다. 김태정씨의 KO승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다. 또다른 시작이었다.

박시언-김태정의 비밀

99년 5월 김태정씨가 법무부장관이 되자마자 최회장측은 벼르고 벼르던 ‘물귀신 작전’을 전개했다. 그때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옷사건을 언론을 통해 폭로한 것. 전황은 급전했다. 검찰수사가 벌어지고 김씨는 궁지에 몰렸다. 김씨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 및 시민단체의 누적된 반감도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결국 김씨는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어야 했다. 어찌 보면 이제 양측은 더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관성이 붙은 옷사건의 바퀴는 멈출 줄 몰랐다. 검찰이 사건 전모를 제대로 밝히는 일보다 ‘장관 사모님’인 연씨를 감싸는 일에 더 골몰한 결과였다. 언론과 정치권이 부지런히 사건의 바퀴를 굴려 갔다. 청문회에 이은 특검수사. 사방에서 두들겨 맞은 김태정씨는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다. 여기에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신동아 부회장 박시언씨가 사직동팀 최종보고서를 공개한 것. 치명타를 맞은 김태정씨는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막판 대역전극이었다. 이것으로써 재벌과 ‘일국의 검찰총장’의 ‘죽고 죽이는’ 전쟁은 끝이 났다.

막판에 최순영 회장 부부의 대리인으로 나서 김태정씨를 거꾸러뜨린 ‘용병’ 박시언씨. 두 사람은 과연 어떤 관계인가. 김태정씨는 왜 그에게 문건을 보여줘 화를 자초했을까. 두 사람 관계의 비밀을 풀면 양측의 ‘최후의 승부’가 전개된 배경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 또 수사유보에서 사법처리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옷사건의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는 옷값 대납 요구와 최회장 구속을 연결시키는 이형자씨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검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먼저 박씨의 정체를 살펴보자. 미국 시민권자인 그가 신동아그룹에서 맡은 일은 로비였다. 최순영 회장이 그를 신동아 부회장으로 영입한 것은 98년 6월. 정식 직책은 신동아그룹 비상근총괄부회장 겸 대한생명 고문. 신동아그룹의 경영부실과 최순영 회장 개인비리에 대한 검찰 내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박씨는 병역을 마친 뒤 미국으로 이민갔다. 뉴포트 대학 졸업 후 시민권을 얻었고, 건설업으로 돈을 번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김태정씨와 인연을 맺은 것은 93년께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씨는 대검 중수부장으로 YS 정부 사정수사의 실무책임자였다. 그의 지휘를 받던 대검 중수부3과는 그해 한화 김승연 회장을 사법처리한 바 있다. 그때 3과장이 박주선씨였다. 옷사건에 관련된 한 변호사는 “박시언씨는 김회장 사법처리에 공을 세웠다”고 밝혔다. 박씨의 동생이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었는데 수사팀이 그를 통해 김회장의 미국 내 별장구입 계약서를 입수했다는 것. 반면 박주선씨는 “박씨 동생을 만나긴 했지만 크게 도움이 안 됐다”고 말한다.

박씨는 김대중 대통령과도 인연이 있다. 그가 김대통령을 알게 된 것은 김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 이때 P씨 등 현 정부의 실세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재정지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미주지역후원회 부회장을 맡고 90년대 초 미국 상·하원의원 자문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특히 97년 대선 직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클린턴 대통령의 동생인 로저 클린턴의 만남을 주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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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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