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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재|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이만섭 회고록 下

이회창과의 결별

이회창과의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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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국회가 아직도 이런 꼴이어야 하나…. 국회 출입 기자 시절부터 40여년간 국회를 지켜왔지만, 아직도 달라진 게 없다니…, 조금만 양보하고 자기 주장이나 고집을 버리면 충분히 타협이 가능할 텐데, 그걸 못 하다니….’ 》
80년으로 들어서자 마치 4·19 직후와 같이 각종 집회와 욕구 분출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서울의 봄’은 5·17비상조치로 인해 다시금 얼어붙고 말았다.

격동의 80년을 보내고 나는 정치적으로 새출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공화당이 해체됐으니 새로운 정당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난 결심했다.

‘그래도 정치가는 지조가 있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고난의 가시밭길이라도 한 길로 나가야 한다. 옛 동지들과 함께 공화당 이념을 재건할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난 공화당 시절 가깝게 지내던 의원들을 찾아가 상의했고 우리는 심각한 토론을 거쳐 당면을 ‘한국국민당’으로 정했다. 국민의 편에 서서 일하겠다는 각오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그해 12월3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공화당 출신 의원들로 창당발기준비위원회가 열렸다. 이때 ‘승계와 단절’을 기본정신으로 한 창당발기 선언문을 내가 기초하고 낭독했다.

‘승계와 단절’이란 과거 공화당 정권 당시 잘한 것은 승계하고 잘못한 것은 단절하자는 정신이었다. 승계할 일은 경제 발전을 이룩해 국민을 가난에서 구한 것과 ‘하면 된다’는 민족의 가능성을 개발한 것이고, 단절해야 할 것은 1인 장기집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의 길을 봉쇄하고 국민의 정치 참여를 막은 것 등을 들 수 있다. 경제는 승계, 정치는 단절인 셈이었다. 내가 ‘승계와 단절’의 논리를 편 것은, 잘못된 것은 변명하거나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은 달게 받아야 한다는 의도였다.

81년 5월4일에는 제106회 임시 국회가 열렸다. 그리고 김종철 총재가 원외였던 관계로 원내의 일은 다선 부총재인 내가 맡아야 했기에 3일 뒤 대표 연설에 나서게 됐다. 나는 서재에 앉아 대표 연설문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당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확립하는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고, 오직 나 혼자서 문안을 작성했을 뿐이었다. 인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당시 분위기로는 만일 내 연설문 초안이 당국에 알려진다면 제동이 걸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일부러 인쇄하지 않고 나 혼자 원고를 꼭 간직한 채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6일 아침 당국에서는 내게 연설문을 사전에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나 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미루었고 마침내 의사당에 올라 대표연설을 시작했다.

‘… 이 사람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전 대통령이 7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결코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국민의 진실된 의사가 얼마만큼 자유롭게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반영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다고 본인은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민의를 가장 직선적이며 효율적으로 반영하는 길은 대통령을 직접 선거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5공화국 들어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이란 단어가 처음 튀어나오는 순간이었다. 일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온 때문인지 의사당 안에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여당은 물론이고, 야당에서도 그리고 국민당 의원들조차 놀라는 얼굴이었다.

의석이 크게 술렁거렸다.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았는데, 체제 유지와 관련된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선거제도’ ‘정치쇄신법’ 문제를 거론하니 여·야 모두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난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의석과 국무위원석, 그리고 방청석, 기자석까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성역이라고 할 수 있는 ‘군의 정치적 중립’ 문제까지 꺼냈다.

‘국방 문제는 우리 조국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것으로, 우리가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국정의 최우선입니다…. 그러나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의 본연의 임무인 국토 방위에만 전념하고,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야 합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위의 발언이었던 나의 대표연설은 그날 석간과 다음날 조간을 크게 장식했다.

“군의 정치개입 막는 게 문민정치”

84년 2월29일 121회 임시국회에서 다시 내가 대표연설을 하게 됐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문민정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군이 어떠한 경우든 총칼의 힘으로 정치에 개입하려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나라를 지키는 사명을 저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군의 정치적 개입을 막는 것만이 이 사람이 오래 전부터 제창한 문민정치를 진정 이룩할 수 있는 길입니다….’

85년 2·12총선이 끝나자 국민당은 바로 전당대회를 열어 전열을 정비했다. 나는 당내 최다선인 5선이었기에 총재 출마를 결심했고, 당선되었다.

사실 이날의 총재 선출은 5공화국 수립 이래 처음으로 야당 총재를 직접 경선으로 뽑은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날 나는 총재로 취임한 후 그 자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헌특위 구성을 제의했다.

‘국민 여망에 따라 반드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해야 하며, 또한 이를 위해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조속히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개선 투쟁의 서곡이 된 ‘헌특위’ 구성을 5공 이후 내가 처음 제의한 것이었다. ‘헌특위’ 문제는 이후 거의 1년여간 여·야의 쟁점이 되어 논란을 빚다가, 결국 86년 6월 24일 마침내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설치된다.

그러나 헌법개정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고 정국은 정치권의 농성, 직선제추진 서명운동 등으로 극도로 경색되어 갔다. 이런 가운데 86년 2월24일, 청와대에서는 대통령과 3당 대표 간에 영수회담이 열렸다. 먼저 전대통령은 정국을 대화로 풀 것을 당부했다.

“남·북한간에도 대화를 하는 마당에 여·야간에 대화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대선배시고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었으며, 국민당의 이만섭 총재도 정치를 잘 아시는 분이니 우리나라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 게 좋은지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서명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고 나는 헌특위 문제를 꺼냈다.

“개헌 등 정치 문제를 비롯, 경제·민생 문제 등은 모두 국회에서 여·야가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따라서 국회를 조건없이 빨리 여는 게 중요합니다. 개헌 문제에 관해서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국민 절대 다수가 직선제 개헌을 원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내가 개헌 문제를 꺼내자 전대통령이 말을 받았다.

“헌법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만큼 완벽할 수는 없겠지요. 때로는 개정할 점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정권을 연장하려는 것도 아니니, 88올림픽 등 민족의 대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에 필요하다면 개헌을 논의하는 게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요. 민족적 대사를 앞둔 마당에 법 절차를 무시하고 힘을 바탕으로 서명을 강행한다면 정국이 불안해지는데, 그 책임은 누가 지겠습니까?”

개헌불가에서 개헌논의로

전대통령은 이때 처음으로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상당한 발전이었다. 이전까지는 ‘개헌 절대불가’였던 것이 한 발짝 후퇴해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로 바뀐 것이다.

난 못을 박기 위해 다시 한 번 물었다.

“올림픽 후 89년 개헌 논의라는 것은 그때 단순히 논의뿐만 아니라, 개헌까지도 할 수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전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민우 총재는 못 믿겠다는 투로 말을 꺼냈다.

“대통령은 임기만 채우고 더 안하겠다고 하면서 임기가 끝난 후인 89년에 가서야 개선을 한다고 하면, 그것을 의심하는 국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민주화 일정을 밝혀 주십시오.”

이 말은 노태우 대표가 받았다.

“대통령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큰 정치로 88년의 국가 대사를 끝낼 때까지는 국론 분열을 막아야 합니다. 손님을 청해 놓고 집안싸움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개헌 문제는 2년 차이인데, 2년 뒤에 본격 논의하자는 것을 못 참는다는 것은 30~40년의 정치 경륜을 가진 사람들의 자세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자 전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나 보고 ‘89년 개헌을 보장’하라는 말 같은데, 나는 88년에 그만두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내가 보장한다는 것은 월권 행위입니다. 개헌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민이 보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방법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속한 민정당이 공당으로서 개헌을 국민 앞에 약속하고, 차기 대통령 후보가 개헌을 공약하는 방법입니다. 아무튼 국회 내에 헌법특별위원회를 설치하는 데는 동감합니다. 명칭이 문제라면, 여·야가 상의해서 결정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라면 회담은 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회담이 끝나갈 무렵, 몇 가지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헌법연구특별위원회’라는 명칭은 여·야간에 말이 많으니, ‘연구’란 단어를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기소된 신민당 의원 문제는 사법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해결돼야 합니다. 또한 경찰이 신민당사를 봉쇄하여 회의조차 열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야당 탄압이므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야당의 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전대통령의 견해는 뚜렷했다.

“서명 운동에 대한 경찰의 제지는 다소 지나쳤던 것 같습니다. 내가 그에 대해 조치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헌특위는 명칭이 문제라면 그냥 헌법특별위원회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이날의 회담은 대성공이었다. ‘개헌 절대 불가’에서 ‘88올림픽 후 개헌’을 이끌어낸데다, ‘헌법연구특위’도 ‘연구’를 빼고 ‘헌법특위’로 해 일시적으로 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던 것이다.

전대통령, 86년 개헌 약속

연이은 대표회담으로 정지 작업을 한 후 야당 총재와 대통령 간에 영수회담이 열렸다. 이민우 총재에 이어 6월4일 청와대에서 전대통령을 만나게 되었다.

서로 부드럽게 인사를 나눈 뒤 본론에 들어간 나는 바로 헌특위 문제부터 꺼냈다.

“모두 아집과 독선을 버려야 쉽게 이해가 되고, 또 합의점도 발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구성돼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여당이 타협 분위기 조성에 계속 힘써 주셔야 하겠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훌륭한 헌법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 나의 소신입니다. 여야가 국가적 차원에서 허심탄회하게 절충해 빨리 개헌 작업을 벌이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난 전대통령의 ‘빨리’라는 말을 바로 받았다.

“평화적 정권 교체와 그 부수 작업을 위한 일정을 감안할 때, 금년 정기국회에서는 개헌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켜야 합니다만….”

“여야가 합의한다면야 올 정기국회에서도 통과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대통령은 이때 처음으로 ‘정기국회내 개헌’을 언급했다. 비록 ‘여야가 합의를 한다면’이라는 사족을 달긴 했지만, 아무튼 커다란 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특히 학생들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구속된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이총재께서 특별히 관심을 표명한만큼, 법 절차 진행 과정에 뉘우치는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석방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다음날 조간 신문에는 이 두 가지 사항이 합의된 사실을 1면 톱으로 보도했다. 그만큼 빅 뉴스였던 것이다.

아무튼 얼어붙어 있던 정국은 2월24일, 4월30일, 6월4일 등 세 차례에 걸친 청와대 회담을 통해 ‘88올림픽 후 개헌 논의’ ‘88올림픽 후 개헌’ ‘임기 내 개헌’ ‘86년 정기국회내 개헌’까지 진전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러한 성과는 우리 몇몇 정당 지도자들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직선제와 민주화를 바라던 ‘국민의 힘(people’s power)’, 그리고 도도한 시대정신 때문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사족 같지만 당시 ‘86년 정기국회내 개헌’을 이끌어낸 청와대 회담을 하면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나의 인식도 약간은 달라지게 되었다.

나는 군인 출신인 그에 대해 강경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때로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됐다는 것을 지적하고 사심없이 설득하면 그 자리에서 그 결정을 바로 고칠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87년 난국 속 ‘합동용퇴론’

아무튼 헌법의 권력 구조에 대해 여야가 속셈은 달랐지만 어쨌든 개헌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져, 마침내 6월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리고 7월30일에 ‘헌법특별위원회’가 정식으로 가동되었다.

그러나 각당의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그 사이 야당의 장외투쟁, ‘건국대사태’ 등을 거치며 헌특위 무용론이 나오기도 했다. 11월29일 신민당의 ‘직선제 추진 서울대회’ 발표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느닷없이 ‘김일성 사망설’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87년이 밝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사건이 터졌다. 전국이 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는 가운데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그날 당사에서 석간신문을 뒤적이던 나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死’라는 제목의 기사에 충격을 받았다. 구체적인 얘기가 씌어져 있진 않았지만, 십중팔구 예사롭지 않은 죽음으로 판단됐다.

다음날 경찰은 공식 발표를 통해 “취조중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박군이 갑자기 억 하며 책상 위로 쓰러졌다”고 어처구니없는 발표를 했다. 말도 안 되는 발표는 의구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 발표를 듣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 더이상 이 정권은 존립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유도 명분도 없다…. 이런 일이 민주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난 곧바로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정부·여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토록 했다.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노도 분노지만, 정치인으로서 스물한 살의 어린 생명을 희생시킨 것이 못내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한 87년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사실 국민들에게 정치인은 면목이 없었다. 국민들이 원하는 개헌은커녕 국회조차 열지 못하는 판이니 할 말이 없었다.

정국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열기로 합의한 국회는 여전히 열리지 않았기에 개헌은 물론이거니와, ‘인권문제’ 역시 다룰 수 없는 상태였고 당시 여당에는 ‘개헌에 관한 중대 결단’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호헌(護憲)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성명을 발표하고 말았다.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TV를 통해 대통령의 특별 담화를 들으며 예상했던 대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 데 대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3 호헌 조치’는 엄청난 반대에 부딪혔고 이러한 가운데 6월9일 6·10대회를 앞두고 연세대 정문에서 또다시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이다. 연세대 교내 시위중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실려간 것이었다.

6월10일, 나는 연세대를 졸업한 선배로서 이한열군이 입원해 있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연세대 정문 앞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6·10 대회 출정식’을 갖고 교외 진출을 시도하는 학생들이 던진 돌멩이와 이를 저지하려는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 냄새로 지나갈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중환자실로 가서 이군을 보았다. 이군은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누워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노대통령에 ‘필사즉생’ 결단 요구

중환자실을 나서는 나는 우울했다. 갑자기 시끄러워져 고개를 드니 중환자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십명의 학생들이 내게 몰려왔다.

“한열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까?”

“아직 살아 있어요.”

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브란스 병원을 나서는 내 마음은 한없이 슬펐다. 내게도 그만한 자식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능력이 부족함을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똑같이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모든 정치인은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6월10일 모두가 민주 투쟁에 나선 날이었지만, 민정당은 이를 외면한 채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바로 장충체육관에서 국민들의 뜻을 무시한 채 ‘전당대회 및 차기 대통령 후보 선출식’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노태우 당대표가 예상대로 대통령 후보가 됐다.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스운 시절이었다. 거리에서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함께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외치면서 경찰에 잡혀 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누가 뭐라든 자기들 나름대로 정치 일정을 강행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최루탄을 맞은 한 젊은 생명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데….

6월10일의 태풍이 지나갔지만, 정국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군은 여전히 깨어날 줄 몰랐고, ‘6·10대회’ 강경진압에 항의해 학생들은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시위를 계속했다. 시간이 흘러도 정부 여당과 국민 사이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했다.

안 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13일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난국수습을 위한 기자회견’이었다. 위기감이 감도는 가운데 열린 이날 기자회견 요지는 만일 난국을 수습지 못하면 나를 포함한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물러나야 한다는, 이른바 ‘합동용퇴론’을 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민심도 흉흉해졌다.

워낙 전국이 혼란스럽자 곧 위수령이나 계엄령 같은 비상조치가 단행될 것이라느니, 서울 인근 지역의 공수부대가 이동하고 있는 게 목격됐다느니 하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일부 국민들은 ‘제2의 광주’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흉흉한 판에 한 가지 서광이 비쳤다. 노태우 대표가 내가 제안한 4당 대표회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각 당대표들에게 개별 회담을 제의한 것이다. 나와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20일로 날짜가 잡혔다.

그러나 기대했던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는 전대통령과 직접 면담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며, 노대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태우 대표와 회담키로 한 6월 20일, 회담장인 2층 귀빈식당에 올라가서 잠시 기다리니 노대표가 올라왔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위 학생들이 다치고 전경이 죽는 등 우리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맞붙어 싸우는 불행한 사태는 모두 우리 정치인들 책임입니다.”

“그렇습니다.”

노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이순신 장군이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라고 했으니 옳은 것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영원히 삶을 얻는 것이며, 소아(小我)에 매달려 살려고 하면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옳은 것이란 당연히 대통령 직선제이고, 소아란 호헌 조치를 부른 권력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또한 ‘必死卽生 必生卽死’는 내 좌우명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자리에 연연치 않겠습니다. 내가 발벗고 수습에 나설 것입니다.”

노대표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나는 왠지 회담이 잘 이뤄질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우리는 워낙 시국이 중대 국면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간에 격의없이 의견을 교환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은 뒤 내가 먼저 시국 수습을 위한 7개항을 내놓았다.

‘첫째, 4·13 호헌 조치의 즉각 철회. 둘째, 헌특위 또는 여야 중진 회담기구를 통한 개헌 논의 즉각 재개. 셋째, 6·10사태와 관련된 구속자의 즉각적인 석방. 넷째, 시위 학생에 대한 과잉 단속과 최루탄 남발 즉각 중지. 다섯째, 김대중씨의 가택연금 해제. 여섯째, 인권 보장과 언론자유 등 민주화 조치 단행. 일곱째, 국회의 조속한 정상화.’

이 일곱 가지 사항은 불과 9일 뒤 나온 ‘6·29선언’과도 맥을 같이하는 내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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