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조풍언과 LA의 DJ 인맥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0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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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을 움직이는 얼굴없는 실세’. 대우그룹의 아도니스 골프장 매각 의혹과 대통령의 막내아들 김홍걸씨의 LA 호화주택 거주설로 화제의 초점에 떠오른 조풍언씨. 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LA에서 조씨의 행적을 추적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남서쪽 해안에 자리잡은 관광명소 레돈도 비치에서 바라본 바다 건너편 땅은 찬사를 자아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다. 그 곳이 바로 ‘국민의 정부의 얼굴없는 실세’ 조풍언씨(趙豊彦·60)가 살고 있다는 팔로스버디스 지역이다.

    하지만 오후 6시경 땅거미가 내리자 레돈도 비치에서는 더 이상 팔로스버디스 지역을 바라볼 수 없었다. 팔로스버디스는 미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가로등이 없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관광객들 때문에 주민들의 결의로 가로등을 철거했다는 것. 그 어둠 속에서 조씨는 지금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은둔생활에 들어가 있다.

    그의 침묵에서 어떤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일까? 본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갖가지 루머 덕분에 조씨의 ‘몸값’은 계속 치솟았다. 최근 한 달 사이에 국내 유수의 신문·방송 기자들로부터 연일 쏟아지는 수백통의 ‘러브콜’을 완고하게 거부한 탓인지 그에 대한 억측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최근에는 급기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어려웠던 야당 시절,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극진하게 모신 3인방 중 한 명”이라는 소문까지 돌면서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재미교포’라는 관측까지 나왔다.

    조풍언씨가 사람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2월8일 한나라당 이신범(李信範)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막내아들 홍걸씨(弘傑·미국 USC대 박사과정)의 LA 호화주택 거주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였다.



    홍걸씨는 LA의 부촌(富村)인 팔로스버디스 지역에 조씨 소유로 돼 있는 220만달러(26억4000여만원)짜리 집에 살고 있으며, 조씨는 무기중개상을 하면서 현 정권과 깊은 ‘커넥션’을 맺고 있다는 것이 이의원이 제기한 의혹이었다. 그러나 실상 김홍걸씨는 팔로스버디스에서 약 20분 떨어진 토랜스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요즘은 샌디에이고에 한 달간 머무르며 ‘태평양시대 한·미·일 3국 간의 무역관계’라는 주제로 논문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끝없이 제기되는 의혹들

    조풍언씨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 5월 그가 김대통령의 일산 자택을 6억5000여만원에 구입했다는 사실이 두 달후 알려지면서 그의 이름이 거론됐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재미동포 재력가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요량으로 집을 구입한 것 정도로 생각했고, 조씨 개인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한나라당은 지난 2월 말 홍사덕(洪思德) 선거대책위원장이 발표한 성명에서 “조풍언씨가 시가 1500억원에 이르는 대우그룹의 경기도 포천 소재 아도니스 골프장을 114억원이라는 헐값에 매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그의 일산 자택 구입, 홍걸씨의 호화주택 거주의혹 등을 함께 묶어 ‘권력형 부정비리’로 몰아 붙이기 시작했다.

    지난 1월과 2월 두 차례 미국을 다녀온 ‘DJ 저격수’ 이신범 의원은 좀 더 구체적으로 조풍언씨와 현 정부 사이의 ‘커넥션’을 주장했다. “조씨는 현 정부와 맺은 인연을 이용해 구조조정에 들어간 대우그룹이 벌인 사업 중 전망이 좋아 보이는 사업을 유리한 조건에 인수하려고 했다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는 것.

    그 대표적인 예로 이의원은 포천 아도니스 골프장과 대우통신의 TDX사업 부문을 적시했다. 이의원은 “무기거래상인 조씨는 쓰러져가는 대우로부터 통신장비 군납과 관련, 일종의 전화교환기 시스템인 TDX 사업을 인수해 사업을 확장하려 했으며, 아도니스 골프장의 경우에도 금융감독위원회가 대우와 정희자씨(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부인) 측에 조씨와 계약을 체결하도록 권한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조풍언씨와 대우통신 간의 TDX사업 매각에 대한 계약은 조씨가 계약금 230억원을 치른 상태에서 해지됐으며, 조씨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라베스’라는 회사 명의로 지난해 말 계약금 반환소송을 낸 상태다.

    오호근(吳浩根)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위원장 겸 대우 구조조정추진협의회 의장 역시 이의원의 주장을 “근거없는 억측”이라고 일축했다. 오 위원장은 “김우중씨가 대우통신에서 TDX 부분을 매각하기로 한 것은 경영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이었으며, 대우통신에 대한 워크아웃이 시작되면서 계약이 해지된 것”이라고 말했다.

    오위원장은 TDX 사업부문에 대해서는 현재 채권단이 주체가 돼 실사작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라 매각이 이루어지면 조씨가 낸 계약금 반환소송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위원장은 “현재 협상 테이블에서 거론되는 가격은 조씨가 제시한 계약금보다는 다소 높은 가격대에서 이뤄지고 있다”면서 “조씨가 낸 계약금이 특혜를 운운할 만한 금액은 아니다”라고 했다.

    또한 조씨와 김우중 회장 사이에 사업 매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경기고 선후배 사이라는 개인적인 인연에 의한 것이지 권력을 이용해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은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

    오위원장은 또, 아도니스 골프장 계약과 관련해 “조씨가 대우측에 잔금까지 모두 지불해 계약이 성립됐었다”며 “막판에 정희자씨가 서명을 거부하면서 시간을 끌더니 없던 일으로 하자고 고집을 부려 조씨측이 계약금과 잔금을 모두 돌려 받은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신범 의원은 조풍언씨가 세운 무기중개업체 기흥물산이 미국의 대표적인 레이더 통신장비 업체 ITT(International Telephone · Telelgraph)의 장비를 국내에 들여오는 에이전트 노릇을 하면서 거액의 소개료를 챙겼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시절부터 20여년간 연간 1조원이 넘는 무기중개 시장에서 그가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며 재력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기흥물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 사람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기흥물산의 유풍상(劉豊相) 사장은 “1973년 창립 당시 조풍언씨가 공동대표를 맡았지만,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1984년 이후 공동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며 조씨와 가깝다는 소문을 일축했다. 유사장은 “조씨에게 가끔 전화를 걸지만 최근에는 바쁘다며 전화도 잘 안 받아준다”고 말했다.

    유사장은 또 “군장비의 경우 최근 국방부가 직접 계약을 하기 때문에 무기중개업체인 우리 같은 회사가 큰돈을 벌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이신범 의원이 제기한 조풍언씨와 대통령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의 막내동생 이성호(李聖鎬)씨의 유착설에 대해 이성호씨는 “1992년 친지의 소개로 LA에서 조풍언씨를 만나 서로 아는 사이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5년 동안 단 두 차례, 그것도 우연히 만났으며 친밀한 사이는 결코 아니다”라고 밝혔다.

    조풍언씨는 3월1일 한 언론사와 전화 인터뷰에서 “아도니스 골프장 매입을 추진했던 것은 1999년 6~7월경 경영난에 빠진 김우중 회장과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으며, 계약금을 치른 것은 사실이지만 대주주인 정희자씨의 반대로 계약이 무산됐다”고 해명했다.

    조씨는 또 매매가격인 114억원도 “결코 헐값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조씨에 대한 궁금증은 가시지 않는다. 조씨가 이후 언론 인터뷰를 모두 거부하고 있는데다 공개석상에 나서는 것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갖가지 소문을 몰고 다니는 조풍언씨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기자는 이런 의문을 품고 3월10일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팔로스버디스 롤링힐즈에 있는 조풍언씨의 집에서도 조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그가 경영하는 한인타운의 가든스위트 호텔에서도 그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호텔 직원들은 하나같이 “회장님은 멀리 출장을 가셨고 호텔에는 자주 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씨로부터 팔로스버디스의 카발레스로드 저택을 구입한 조모씨가 경영하는 레돈도비치의 한국 횟집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조씨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는 없었다. 조씨 부부가 다닌다는 교회에서도 조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아! 자넨가?

    미국 동포사회에서 조씨는 그다지 널리 알려진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이번 ‘사건’ 이후 고향이 목포로 김대통령과 같으며, 김대통령 미국 망명 시절 경제적, 심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고, 김대통령 일가와는 거의 친척 같은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한인사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교포들의 경우도 대부분 조씨를 한두번 보았다고 대답하는 정도거나 이름을 들어봤다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교민사회의 각종 모임에 나와 적극적으로 활동한 적도 없으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라는 것. 이를 입증하듯 그가 20여년간 정착해서 살아온 LA에서 그의 증명사진 한 장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1967년 미국 유학 생활을 거쳐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LA 카운티의 주요 정책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커미셔너로 활동하고 있으며 김대통령 당선 직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막후에서 도왔다는 이천용(李千龍)씨는 “한두 번 스친 적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간 뒤 건축업으로 성공, 미국 국무부 극동담당 자문위원을 지냈을 정도로 LA에 깊이 뿌리내린 박시언(朴時彦) 전 신동아그룹 부회장도 조씨에 대해 “10여년전쯤 비벌리힐스에서 벤덤이라는 주류소매업(Liquor Store)을 해 돈을 번 뒤 호텔업으로 성공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는데, 면식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대통령이 신군부의 탄압에 못이겨 미국으로 망명했던 시절, 음으로 양으로 김대통령을 ‘모셨던’ 인사들은 대부분 조풍언씨의 행적에 대해 비교적 소상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1966년 미국에 건너가 LA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현재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이선주(李善主)씨는 “김대통령과 동향인 조씨의 아버지는 광복 직후 목포에서 청년단 단장을 했는데, 김대통령이 조씨 아버지 밑에서 부단장을 지내면서 인연을 맺었다”며 “이후 조씨는 한국에 무기류를 납품하는 무기수출 대행업을 하면서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이씨는 조풍언씨와 김대통령이 처음 대면한 자리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1993년 10월15일 LA에서 열린 한국인권위원회 창설 10주년 기념식에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났다는 것.

    망명 시절이던 1983년 7월, 비민주적인 군사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정부를 회복하겠다는 취지로 김대통령이 설립한 이 단체의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대통령은 공식행사가 끝나고 리셉션을 가졌는데, 그 장소가 바로 조씨가 운영하는 가든스위트 호텔이었다. 자연스레 인사할 기회를 맞은 조씨는 김대통령에게 자신이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소개했고, 대통령은 조씨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때 조씨는 후원비로 1만달러를 선뜻 내놔 1992년 대통령 선거로 패배로 침울해 있던 김대통령을 흡족하게 했다.

    이선주씨는 “조씨는 재미동포들이 조국의 열악한 인권상황에 맞서 어려운 투쟁하고 있을 때도 기부금을 내거나 한 적은 없었다”며 “교민사회에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고 말했다.

    LA 한인회 부회장인 오봉균씨도 “조씨는 베일에 싸인 사람”이라며 “군 전력증강사업인 율곡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많이 벌었고, 10여년 전부터 주류소매소 10여곳을 운영하면서 현금을 많이 굴렸다”고 했다. 현재 운영중인 가든스위트 호텔은 원래 중국인이 운영하다가 빚을 많이 진 호텔인데, 조씨가 싼값에 인수해서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160㎝가 조금 넘는 작은 키에다 호리호리한 체구,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조씨는 1993년 자신의 호텔에서 열린 김대통령 초청행사 이후 김대통령 후원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적지 않은 기부금을 내놓기도 했다고 오씨는 전했다. 오씨는 또 “조씨는 아도니스 골프장을 싸게 구입했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으며 대통령이나 그 가족들과 가깝다고 과시하는 등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고 덧붙였다.

    무기중개업 사정에 밝은 A씨는 조풍언씨와 대우 김우중 전회장의 연계고리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A씨는 “조씨는 고교 선배인 김우중씨가 총수로 있다는 점을 이용, 대우정밀이 국방장비 생산과 무기거래에서 쌓은 노하우와 정보를 바탕으로 무기중개상으로 자리잡았다고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정보력의 우위와 국내 정·재계 인맥을 바탕으로 국제적 로비스트로 활동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김우중 전 회장이었다는 것.

    김우중씨와의 ‘특별한’ 친분

    A씨는 “신동아그룹 최순영(崔淳永) 전회장 구속이 임박했을 즈음 쟁쟁한 경기고 54회 동문들을 제치고 조씨가 청와대 구명로비 대상자로 거론되는 것을 보고 그의 위세가 커졌다는 것을 실감했다”고도 했다.

    오호근 위원장도 “조씨가 대우의 아도니스 골프장이나 대우통신 TDX사업부문 매각에 깊이 관여한 것은 김우중씨와 보통 이상의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김 전회장은 사업이 어려울 때 조씨와 상의했고, 미국에 드나들 때면 조풍언씨를 자주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재미사업가는 조풍언씨로부터 당한 ‘황당한’ 경험을 들려줬다.

    5년 전쯤 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모 한국계 인사를 위한 후원행사가 가든스위트 호텔에서 열려 미국 전역에서 한인들이 모여 들었다. 그중에는 비행기로 7시간 거리의 뉴욕 등 멀리 동부지역까지 이동해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중 한두 명이 옷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객실을 ‘잠시’ 이용했다는 것. 하지만 샤워를 한 것도 아니고 침대에 손을 댄 것도 아닌데 호텔측에서 숙박료를 청구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조씨와 10년 이상 교분이 있던 그가 항의했다는 것.

    청년시절부터 조풍언씨를 지켜봤고, 오랜기간 동업자이기도 했던 기흥물산 유풍상 사장은 조씨를 가장 잘 아는 이 중 한 사람이다. 경기고 55회로 조씨의 1년 후배이기도 한 유사장은 조씨가 대학 시절 자신의 고모집에 입주과외를 하면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다고 말했다.

    유사장에 따르면 조씨는 고려대를 졸업한 후 1970년대 초반 청사진 사업과 무역업, 제조업을 하는 기흥물산을 창업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기흥물산은 1980년 부도를 냈고, 몇년후 조씨는 1983년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미국 LA와 오렌지 카운티 등에서 주류소매상과 부동산 사업 등으로 돈을 번 조씨는 1988년경 테니스 국가대표였던 이덕희씨와 두 번째 결혼을 해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 유사장은 “기흥물산은 무기중개에 뛰어 들어 1990년까지 매년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흑자를 내며 고속 성장했지만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교회 헌금도 ‘큰손’

    유사장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과 조씨의 관계에 대해서도 “김 전회장이 종종 조씨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어려운 문제를 놓고 상담도 자주 한 것으로 안다”며 “대우가 경영난에 처하자 조씨는 ‘김우중씨의 구조조정 시나리오가 좀 잘못된 것 같다’ ‘김회장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낀다’는 등의 말을 자주 했다”고 전했다.

    유사장에 따르면 조씨는 본인이 미주 교포사회에서 따돌림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괴로움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유씨는 “지난해 6월 조씨의 어머니 상가에 찾아온 사람들조차 조씨가 좀더 처신을 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조씨와 가장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던 KTE(미주 한국방송) 임춘훈 사장도 최근 조씨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미주 한인사회의 정보에 밝아 ‘마당발’로 통하는 B씨는 “조씨의 경기고 1년 후배인 임씨는 평소 조씨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따랐지만, 요즘은 서로 전화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앙숙이 됐다”고 말했다.

    B씨는 또 “조씨는 자기가 알게 된 사람을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며 “현 정부 출범 후에도 과거 인권문제연구소 등 대통령을 오랫동안 도운 사람들을 배제하고 혼자서만 대통령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경계를 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춘훈씨는 현재 서울에 머무르고 있으나 10여 차례 기자의 통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조씨가 교민사회를 위해 기여한 일도 있다. 신도가 5000명이 넘어 LA 지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로 꼽히는 토랜스 제일장로교회가 2년 전 교회 로비를 지을 때 이 교회 집사인 조씨 부부가 익명으로 40만 달러(약 4억8000여만원)를 선뜻 내놓은 것. 하지만 교회 사무국의 한 관계자는 “조씨가 돈을 기부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며 조씨 부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LA에서 30년 이상 거주한 한 시민권자는 “조씨와 부인 이덕희씨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문을 닫을 뻔 했던 한인교회 서너 곳에 재정지원을 해 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조씨의 부인 이덕희씨의 성균관대 동문이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국 서부지회 회장 조남태씨도 “이씨는 성대 동문회 행사에 얼굴을 자주 내비치고 학교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모임 참석 때마다 400∼500달러 씩 기부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3월10일부터 13일까지 수차에 걸쳐 조풍언씨의 부인 이덕희씨에게 조씨와 관련한 의혹에 대해 해명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씨는 “한달 내내 얼토당토 않은 소문과 괴담에 시달려 정신적으로 너무 피로하다”며 “어떠한 악선전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 해명하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게 나나 남편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이씨는 “앞으로도 누가 뭐라고 하든 어떤 대응도 자제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유신선포 직후 1차 망명길에 올랐고, 1982년 12월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등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은 뒤 2차 망명길에 오르는 등 두 차례에 걸쳐 3년 남짓 미국에 머물렀던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여러 인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김대통령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와 김대중후원회 등 두 개 단체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워싱턴 본부를 비롯해 LA, 샌프란시스코, 애틀랜타, 포틀랜드 등 미국 24개 지역에 3000여명의 회원을 모았다. 한 관계자는 “인권문제연구소의 모토는 ▲ 신군부 시절 국내인권 보호 ▲ 인종차별이 엄존하는 미국내 동포의 권익 향상 ▲ 민족의 화해와 교류증진 등 세 가지였다”며 “이외에도 김대중씨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활동이 이 단체가 그동안 벌인 활동의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김대통령 당선 후인 1998년 10월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창립 15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정·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고, 잔치의 주인공인 재미동포 280여명이 한국에 입국했다. 이 자리에서 이희호 여사는 “여러분의 눈물 겨운 성원이 국민의 정부 출범이라는 결실을 거뒀다”며 “여러분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영웅’들”이라고 추켜 세웠다.

    한국에 진출한 ‘재미동포 파워’

    이선주 소장은 “김대통령이 당선되고 한국의 인권문제도 많이 해결된 상태지만 아직도 해외동포의 권익향상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다”며 “과거에는 호남인이 주축이 됐으나 최근에는 비호남권 중에도 인권문제연구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소장은 “인권문제연구소의 또 다른 기능은 동포사회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벌인 인재를 국내에 소개해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김대중 정부 출범 후 30여명의 인재가 ▲청와대, 정부 및 산하기관 ▲ 교육 ▲ 벤처사업 분야 등에 진출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대통령 망명 시절 미국에서 김대통령을 도운 공로가 인정돼 정부기관 등에 ‘특채’된 고위 관리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유용겸(兪龍兼) 국민체육진흥공단 서울올림픽파크텔 사장, 노영철(盧永哲) 국민체육진흥공단 한국체육산업개발 사장, 심기섭(沈基燮) 한국냉장 사장, 장남진(張南珍) 농업기반공사 감사, 모 공기업체 이사장 윤모씨, 전 청와대 경호실장 특보 정모씨, 모 골프장 사장 정모씨 등이 그 면면들.

    1998년 6월, 3년 임기의 올림픽파크텔 사장에 취임한 유용겸씨는 23년 전 미국 LA에서 가방사업을 시작했고, 그 후 인권문제연구소에서 일한 경험을 인정받아 올림픽파크텔을 경영하게 됐다. 유사장은 “사장 임명을 통보받았을 때 이민 시절 호텔 관련 비즈니스를 한 경험을 살려 재정난에 빠진 호텔 경영의 혁신을 꾀하도록 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유사장은 또 “한국에 진출할 당시 고국은 IMF 위기로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구조조정 바람으로 새 자리가 없는 상태였다”며 “내가 무능력한 ‘낙하산’이었다면 당장 노조에서 가만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유사장 취임 직전인 98년 2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던 올림픽파크텔은 지난해 10억원의 흑자를 내는 등 경영이 호전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체육산업개발 노영철 사장은 김대중 정권 출범에 앞선 1990년대 중반 국내에 들어왔지만, 정부 산하단체로 진출한 것은 김대통령 당선 직후인 1998년이었다. 노씨는 이 해에 국민체육진흥공단 사업본부장에 오르더니 1999년 한국체육산업개발 사장이 됐다. 미국 몬테레이파크 경찰국 무도사범, 캘리포니아주립대 한인학생회장, LA 한인회장, 한미청년회의소회장 등 다채로운 경력을 자랑하는 노씨의 이력서에도 ‘1986∼1990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중앙이사’ 경력이 등장한다.

    노씨는 “명색이 사장이라지만 내가 받은 월급명세서를 보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라며 “부와 명예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동안 쌓은 경험을 토대로 조국에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씨는 이어 “임기가 시작하자마자 공단에 구조조정의 회오리가 몰아쳐 내 손으로 200명 이상 감원하는 등 악역을 맡았다”며 “결과적으로는 80억원 이상 적자를 보던 조직을 20억원 흑자를 내는 조직으로 변모시켰다”고 말했다.

    국영기업인 한국냉동의 심기섭 사장은 1998년 4월에 한국냉동 부사장으로 부임했다가 작년 3월 사장이 됐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워싱턴의 인권문제연구소 본부에서 상근하며 대변인과 사무총장을 역임한 경력이 힘이 됐다. 심사장 자신은 “인권문제연구소에서 일하는 동안 내 청춘을 바치며 정말 성심껏 일했다”며 이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심씨는 “1993년 3월 연구소를 해체하는 게 좋겠다는 김대통령의 뜻에 따라 인권문제연구소를 탈퇴한 뒤 고기도매상으로 변신, 사업 노하우를 쌓았다”며 “나를 불러 달라고 손들고 나선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오리건 지회장 등을 지낸 장남진씨는 1998년 농어촌진흥공사 감사를 지낸 뒤 현재는 농업기반공사 감사로 활동중이며,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인권문제연구소 출신의 정모씨도 현 정부에서 청와대 경호실장 특보로 전격 임명됐지만 얼마 전에 해임됐다.

    인권문제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한인회장이나 인권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사람 중 상당수가 한국에 진출했고, 이들은 대체로 그 자리에서 일했다는 것에 대해 ‘영광스럽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영삼정권 때와 비교해보면 대통령과의 인연이나 실세의 지원으로 정부기관에 무혈 입성하는 사람은 오히려 적을 것”이라며 “미국에 살면 미국 사람들과 경쟁해 현지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옳다는 게 김대통령의 철학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LA 동포사회를 배경으로 한국에 진출한 이들은 ‘민들레회’라는 친목모임을 조직, 매달 한 차례씩 정기모임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1996년 총선 때 인천 부평갑에서 출마, 낙선한 뒤 1999년 3월 남해화학 감사로 임명된 송선근(宋善根)씨가 회장인 이 모임의 이름은 “마차바퀴가 지나가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강인한 민들레처럼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자”는 뜻에서 붙인 것.

    송씨는 기자가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결국 전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 민들레회 회원들의 사무실 중 몇 곳에는 김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과 함께 대통령 친필 휘호가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비운의 실세’ 황제선씨

    김대통령이 어려웠던 시절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도 한국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하지 못한 동포도 물론 많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황제선씨. 동포사회에서 “동부에 박지원이 있다면 서부에는 황제선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현재 황씨는 심장수술을 받은 뒤 하루 세 번 약을 먹지 않으면 몸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황. 전남 영암 출신인 황씨는 “김대통령이 92년 대통령선거에서 패한 뒤 어려운 사정인데도 수술에 보태쓰라고 큰돈을 보내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황씨는 금액을 밝히기를 꺼렸지만, 김대통령은 당시 2만5000달러(약 3000만원)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1960년대 초 미국에 유학간 뒤 시민권을 얻은 황씨와 김대통령의 인연은 김대통령의 도쿄(東京) 납치사건 직후인 1974년에 시작됐다. 당시 미국에 있던 황씨는 이중삼중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동교동에 가택연금돼 있던 김대통령을 만나 “조국이 민주화될 때까지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후 황씨는 진주형무소에 투옥된 김대통령에게 사식(私食)을 넣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자기앞수표에 해당하는 ‘머니 오더’ 사업으로 번 돈을 꾸준히 지원자금으로 보냈다.

    1982년부터 김대통령 후원회장직을 맡아온 황씨는 그해 12월24일 김대통령 후원을 위한 사조직인 ‘1·7회’를 만들기도 했다. 1·7회는 김대통령의 생일 다음 날, 워싱턴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 모임에는 민주당 김경재 의원을 비롯, 인권문제연구소장을 지낸 최병구씨, 국회의원을 지낸 이돈만(李敦萬)씨, 이북 출신의 이정(李正)씨, 송선근 남해화학 감사 등 10여명이 참가했다. 12대 총선 때는 김대통령과 함께 귀국하다 공항에서 경찰에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물론 황씨가 국내 정계 진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황씨는 “김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이던 1988년 후원회 몫으로 배정됐던 전국구 10번 자리에 공천헌금 15억여원을 내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료인 정모씨에게 양보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서경원(徐敬元) 의원 방북사건으로 1989년에 실시된 함평·영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도 공천이 유력시됐지만, 당시 영호남 화합이 중요하다는 대통령의 의견을 받아들여 영남 출신의 이모씨에게 공천을 양보했다고 말했다.

    97년 대선 당시 DJ의 아킬레스건인 ‘북풍’을 차단하는 데에 한몫을 하기도 했던 황제선씨에게 현 정부 출범 후 또 한 차례 기회가 찾아왔다. 산업자원부와 강원도 등이 공동출자해 폐광촌에 건설하기로 한 강원랜드 카지노의 관리 책임자로 그가 거명된 것. 현 정권에 기여한 공로도 있고, 유학생 시절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딜러로 일했던 경험과 능수능란한 사업수단 등이 고려됐다고 한다.

    하지만 황씨의 국내 진출은 끝내 좌절됐다. 황씨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다는 LA의 모 인사는 “황회장이 유력했던 건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정실인사를 할 경우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는 참모진의 건의가 받아들여진 것 같다”고 말했다.

    황씨도 ‘강원랜드 소문’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내에 들어와 봉사하라는 제의를 받은 뒤 의욕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간호사 출신인 아내가 ‘당신은 강원도까지 가서 일할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니다’며 적극 만류해 고사했다”고 말했다.

    4·13 총선을 한 달 남짓 앞둔 미국 LA교민 사회는 겉으로는 조용한 가운데도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크고 작은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미주 인사들 중 몇몇은 암암리에 국내에 들어와 민주당의 선거 전략 짜기에 골몰하고 있다는 소문이다.

    100년 맞는 미주이민

    실제로 여론조사 분야의 권위자인 선우동훈(본명 선우영·鮮于煐)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명예교수와 김대통령 망명 시절 치과 주치의였던 강대인씨는 민주당 선거전략팀에서 활약하고 있고, 이밖에도 20여명의 재미동포가 이번 총선에서 지지 후보를 돕기 위해 속속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다고 한다.

    한인회의 한 관계자는 “선거철이면 한국에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많이 온다”며 “교민들의 경우 한국에 나가 직접 활동하는 경우와 이 곳에서 후원회를 조직해 지지 후보를 돕는 두 유형이 있다”고 말했다.

    200만명을 헤아리는 미주 한인들은 대체로 세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국 정치나 미국 정치에 무관심한 채 가정과 직업, 교회 등 개인적인 일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이 첫째 유형이고, 2세를 미국 사회의 주인공으로 우기 위해 자녀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들이 둘째다(이들은 대체로 미국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몸은 미국 땅에 있어도 관심은 여전히 한국의 정치나 사회상에 두면서 언젠가 한국으로 금의환향할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다.

    앞의 두 부류가 약 80%, 셋째 유형은 20% 이하라는 게 현지 교민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그 20%는 또 다시 햇볕정책에 반대하는 보수파들과 민주화운동 경력에 개혁적인 성향 등등 다양한 이념적 편차를 보인다.

    한인사회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모래알 집단’이었다. 전문지식을 갖추고 미국 주류사회에 웬만큼 편입된 사람들은 모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한 사람들을 백안시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그들대로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해 부와 명예를 쌓은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 LA 지역에만 갖가지 한인단체가 300여개에 달한다고 하지만 교민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성원을 보내는 단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망명 시절 대통령을 도왔던 인권문제연구소나 후원회 사람 몇몇이 현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공직에 진출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교민들조차도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었다. 생업조차 뿌리치고 한국으로 달려가 선거판에 매달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냉소적이었다.

    조풍언씨와 그를 둘러싼 소문을 찾아 1주일간 LA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지만 꼭꼭 숨어버린 그의 진실은 좀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3월14일 오후 조풍언씨가 경영하는 가든스위트 호텔 부근에서 한국 노인들의 장기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기자가 지나가는 말로 “조풍언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느냐”고 묻자 한 노인이 반문했다.

    “조풍언? 그거 뭣에다 쓰는 물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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