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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독점 인터뷰­|제1부 YS 남북회담-국내정치 본격 발언

“주석궁과 청와대 핫라인 설치하려 했다”

김일성과의 ‘불발 정상회담’ 내막

  • 대담: 김종심 동아일보 출판국장, 황의봉 신동아 편집장 정리: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주석궁과 청와대 핫라인 설치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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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는 4월12일 김영삼전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고, 내부적으로는 국내정치 질서를 재편하게 될 4·13총선을 바라보는 전임 대통령의 시각과 경험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전대통령은 저녁식사를 포함해 5시간여 동안 진행된 특별인터뷰에서 94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처음 공개되는 몇 가지 중요한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또한 김대중 정부 후반기, 특히 차기정권 창출과 관련해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임을 시사했다.<편집자>
4·13 총선 바로 전날인 12일 오후 5시30분 서울 상도동 김영삼 전대통령 자택 2층 응접실. 김 전대통령은 1분도 어김없이 약속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짙은 감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를 받쳐 입고, 사각무늬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약속시간보다 20분 일찍 도착해 차를 대접받으며 벽에 걸린 재임 당시 사진 등을 화제로 담소하고 있던 ‘신동아’ 일행을 김 전대통령은 일일이 악수로 맞았다.

김 전대통령은 고향인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의 봄을 그린 서양화를 가리키며 소년같이 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여기가 전부 초가집이었는데 이제 우리집이 제일 나빠요. 전부 기와집이 됐어.”

방한한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대도무문(大道無門)’ 휘호를 써주는 사진을 가리키면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붓을 들고 한 번에 써내려 가니까 클린턴 말이, 태어나서 붓글씨 쓰는 걸 처음 봤답니다. 내가 쓴 글씨 뜻이 뭐냐고 물어서 수첩에 적어갔어요. 자기 가까이에 두고 보겠다고. 백악관 복도에 걸어놨대요. 한문이니까 뜻은 아시아 사람밖에 모르겠지….”

고통의 시간 너무 길었다

―연세(올해 74세)를 거꾸로 드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도 산에는 자주 가시는지요?

“산에도 가고, 될 수 있는 대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저런 사람들이 찾아와서 현실 얘기나 정치 얘기를 많이 합니다.”

―흔히들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오면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던데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요?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봐요. 머리를 많이 쓰다가 건강이 아주 나빠진 사람들이 많아요. 이혼하거나 직장을 그만두면 금방 죽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솔직히 나는 너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생각해보면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용한 일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어떻게 살았는가….

내가 연금 당했던 그 때는 집 주위에 전경이 몇백명씩 좍 있으니까, 동네 사람들한테도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는 거지요. 내가 이 집에서 살면서 청와대에 들어 갔다 왔는데, (창가 쪽 자리를 가리키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저기에 전경이 눈앞에 아른아른 하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너무 오래 계속되다 보니까 그런가 봐요.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되는데….”

김 전대통령은 건강 얘기를 하다가 훌쩍 군사독재 시절에 연금 당하고 고생했던 얘기로 옮아갔다. 아직도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이 역력한 채 ‘그때 그시절’을 길게 술회하는 마음 속에는 퇴임 후 이런저런 이유로 운신의 폭이 넓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과 답답함이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연금이 얼마나 힘든 건지,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낫습니다. 연금됐다는 사실은 신문에도 안 나오거든. 그러니까 국민들은 김영삼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런 판인데, 내가 회고록에도 썼지만 당시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이 세 차례 나를 찾아왔어요. 권익현이가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11기 동기생이거든. 그 세 사람이 내 문제로 상의를 했는지, 권익현이가 나에게 미국으로 가라는 거예요. 당시 김대중이는 미국에 가 있었거든. 생활비 걱정은 조금도 안해도 된다, 가는 곳은 일본도 좋고 미국도 좋고 유럽이든 어디든 내가 원하는 나라로 가서 살아라, 집도 사주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 때는 애들도 어렸으니까, 다 데리고 가달라는 거예요.

가만히 들어보니까 참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권총장, 김대중이 미국 보내고 나마저 내보내면 박정희처럼 18년 아니라 20년도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안가. 나쁜 X들. 전두환이한테 일러라. 나는 죽어도 그런 짓 못해’ 이랬어요. 권익현이가 세 번째 왔을 때에는 내가 ‘권총장, 나를 미국에 보낼 방법이 있어’ 그랬더니 ‘무슨 방법인가요?’ 하고 묻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를 시체로 만들어서 부치면 돼’ 그랬더니 그 다음엔 다시 안오더라고.

아무튼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용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너무 길었거든. 대통령 5년 하면서 괴로움도 많았고…. ‘영광의 시간은 짧았고 고난의 시간은 길었다’고 내가 퇴임 기자회견에서 표현했잖아요? 그게 진심이에요.”

―지난 4월10일에는 청와대 측으로부터 남북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연락받고 축하 말씀과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게 안부 전해달라’는 말을 하셨는데, 김대통령에 대한 그간의 비판적인 태도와는 좀 다른 느낌이군요?

“내가 그 쪽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데, 황원탁 안보수석이 오겠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내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파나마 대사로 임명했던 사람이지요. 유능한 사람이에요. 특히 어학에 능한데, 육군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 시절에 판문점 대표로 임명했거든. 그 사람이 정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안보문제에 대해서 말할 게 있다고 해서 오라고 했어요. 그 일(남북정상회담) 때문인지 짐작했지요.”

“이번 회담은 94년 ‘연기’의 연장선”

―재임 시절에 정상회담이 합의됐다가 북한측 사정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습니다만.

“그렇지요. 내가 김일성 주석을 만난다고 했다가 보름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지요. 그때 내가 ‘아쉽다’고 표현했어요. 그게 정부의 공식 논평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논평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통령이 논평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며칠 뒤에 김용순이가 그 쪽의 유고로 정상회담을 연기한다는 통지문을 보냈거든. 그러니까 ‘연속성이 있는 거다, (남북정상회담은)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인데 (이번에 성사되어서) 축하한다’ 그렇게 말한 거예요.

물론 소소하게 얘기할 건 많았지만 그런 말은 안 했어요. 왜 하필이면 선거 때에 발표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고, 하는 방식도 나와는 전혀 다르거든. 하지만 그런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어요. 내가 지금 재임 5년간의 회고록을 쓰고 있는데, 거기서도 남북 정상회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질 겁니다.”

―그렇지만 야당에서는 남북정상회담 발표가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특급 카드가 아니냐고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전임 대통령이 뜻밖에 축하한다고 하니까, 국민들이 놀라워 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남북정상회담)는 앞에서도 잠시 얘기했지만 내가 하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잘못됐다’, 말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반대하더라도 이건 좀 다른 문제이지요. 이것은(남북정상회담은)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계승하는 일인데, 무작정 잘못됐다고만 할 수 없죠. 지엽적으로 잘못한 점도 있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시비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요컨대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자신의 재임 시절에 성사됐다가 북측 사정 때문에 ‘연기됐던’ 게 이제야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축하한다는 뜻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런 축하와는 상관없이 김 전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 여전히 악감정과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대화 중간중간에 여러 차례 분명히 확인됐다. ‘대통령’ 호칭을 붙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이따금 서슴없이 ‘육두문자’를 쓰기도 했다(이 인터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말하는 부분은 문장을 최소한만 다듬는 식으로 정리했다.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에 대한 김 전대통령의 지나친 표현은 적절하게 수정했음을 밝혀둔다 ―편집자).

“전쟁은 절대 안된다”

―94년 당시의 정상회담 얘기좀 자세히 해주시지요. 지금 우리 국민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경험담 아닙니까?

“취임 1주년인가 됐을 때 내가 공식적으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어요. 베를린에 가서 그렇게 말했고. 김대중이 말한 내용도 비슷해요. 그런데 그 때는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었어요. 당시 미국이 동해에 항공모함과 전투함을 갖다 놓고서 이북을 폭격하고 함포를 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동해안에 와 있을 때인데, 내가 클린턴에게 강력하게 반대한 거예요. 너희 국민이 죽는 게 아니니까 그러느냐고.

그 때 나는 북한이 휴전선에 좋은 무기를 갖다 놓고 있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주도까지 날아가는 포를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면 1000만명이 죽을지 몇백만명이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 미국이 전쟁을 하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가 레이니 미국 대사를 만났어요. 그 때 기록은 없는데, 대사를 부르는 건 웬만큼 중요한 사안이 아니면 좀처럼 없는 일이에요. 내가 개별적으로 만난 대사는 미국, 일본, 중국 대사 정도였어요. 내가 레이니를 들어오라고 한 것은, 레이니가 다음 날 오후 4시에 기자회견을 하는데, 대사관 가족 및 군인들을 전부 철수시킨다는 발표를 할 것이라는 보고 때문이었어요. 그건 미국이 전쟁을 개시하기 첫 단계에서 하는 일이예요.

안보수석에게서 그 사람이 다음 날 기자회견을 한다는 보고를 받고서 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전쟁은 절대 안된다. 우리 65만 군인중 단 한 사람도 거기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한국 땅을 빌려서 폭격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죽는 전쟁을 하겠다는 말이냐. 북한 사람들도 우리 동포인데. 또 남한 사람들은 죽지 않겠느냐. 북한이 가만 있느냐’ 이러면서 내가 강력하게 반대한 거예요.

그날 저녁에는 클린턴에게 전화를 했어요. 32분 동안 전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내용은 레이니에게 한 것과 똑같아요.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나는 이것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 때는 일반 전화로 전화를 했어요. 아주 급박하게 연락을 한 거예요.”

―김대중 대통령 측에서는 전쟁 일보 직전이던 그 당시 카터를 만나서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전쟁 위기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설득한 게 효과가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장이니까. 전적으로 거짓말을 많이 해요. 카터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김대중 대통령)의 그런 얘기는 믿을 것 없어요.

어떻든간에 그 일이 계기가 돼서 한미 정상간에 핫라인도 놓여졌어요. 클린턴 얘기가 ‘앞으론 정상끼리 언제나 통화가 가능하도록 하겠다. 지금까지 그렇게 한 일은 없지만 한국의 대통령 관저에 전화를 설치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더라고. 그래서 ‘좋다’고 했지. 이 전화는 도청불가능한 전화입니다. 모든 전화는 도청이 된다고 하는데, 이 전화는 국내에서든 미국에서든 도청이 불가능하다는 비밀전화입니다. 그래서 사흘도 안돼서 전화 놓으러 사람이 왔어요.

지금도 그때 설치한 전화가 청와대에 있는데, 그때 클린턴과 약속된 게 ‘내가 필요해서 클린턴에게 전화하면 언제든지 받는다’는 거였어요. 회의 중이든 잠자리에든 받는다, 그리고 자기가 전화했을 때도 밤중이라도 받아달라, 이렇게 약속했어요. 아마 역대 대통령 가운데 내가 미국 대통령과 가장 많이 전화했을 거요. 필요하면 수시로 하는 거지. 클린턴은 문제가 생겼을 때 나에게 전화하면서 미안하니까 ‘김영삼 대통령 목소리를 듣는 게 인생의 낙’이라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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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김종심 동아일보 출판국장, 황의봉 신동아 편집장 정리: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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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궁과 청와대 핫라인 설치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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