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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발굴|미 국립문서보관소 비밀자료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50년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50년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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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해 10월 한·미 양국은 올해 6월 말까지 노근리 사건 진상을 모두 조사해 종합보고서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미국은 시간만 끌고 있다. 이 시점에 ‘신동아’는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6·25 당시 노근리 상황을 전한 인민군과 미군 문서 여러건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문서는 미군이 6·25 당시 인민군에게서 노획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은 노근리 사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문서를 보유한 주체가 미국 정부였으니만큼 미국은 1950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사건을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지난 해 9월 말 AP 통신은 6·25 당시 미 제1기갑사단과 25사단 사령부 명령서 2건을 공개했다. 이 명령서를 보면 당시 미 육군 25사단장인 윌리엄 B 킨 소장은 1950년 7월26일 야전지휘관에게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해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또 제 1기갑사단 사령부도 명령서에서 “피란민이 전선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고 전선을 넘어오는 자에게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령서 하나로도 관계자들은 중대한 전쟁 범죄 행위로 처벌될 수 있다.

미국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1949년 제정된 ‘전시의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은 전쟁 상황에 충돌 당사국은 민간인과 전투원, 민간 물자와 군사목표를 구별하며, 따라서 그들의 작전은 군사목표물에 대해서만 행해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전쟁이나 인도주의에 반한 범죄, 집단학살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법상의 대원칙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 2차 대전 당시 유대인을 학살하고 수십년 동안 아르헨티나에서 숨어지내던 독일인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붙잡아 집단학살죄로 처벌한 사례가 있다. 베트남전과 관련해서도 미국 군사법원이 밀라이 민간인 학살 사건의 주범인 당시 미군 현역 대위를 처벌한 사례도 있다. 미국은 제네바협약의 초기 가입국인데다, 6·25전쟁 발발 이후 맥아더 사령관이 협약 적용을 선언하면서 북한군에도 이를 적용하자고 요구한 사례가 있다.

더구나 AP통신은 당시 노근리 현장에서 직접 기관총을 쏜 미군 병사의 증언을 제시했다. 이 증언은 피해자측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보도 직후 한·미 합동 조사단이 꾸려졌고, 조사단은 6·25전쟁 50주년이 되는 2000년 6월 말까지 사건 진상을 모두 조사하고 종합보고서를 내기로 약속했다. 또 2000년 3월쯤 중간보고서를 내겠다고 공언했다. 이쯤 되면 이 사건은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사람들도 그렇게 알았다.

그러나 약속한 6월이 다 돼가는데도 종합보고서는 나올 기미가 없다. 약속한 중간보고서도 나오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사건의 한 관계자는 “미 국방부는 한국 국방부에 당시 노근리 지역이 적성 지역임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즉 미국이 당시 노근리가 있던 영동 지역의 빨치산 활동이 어떠했는가와 지역 주민 성향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일부 언론은 지난해 9월 말 AP통신이 최초 보도 당시 제시한 발포 명령서 존재 자체를 아예 적시하지 않고 핵심 관련자의 증언을 부인하는 기사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또 사건을 조사하는 주체인 미국 군부는 AP통신이 밝혀낸 미 1기갑사단과 25사단사령부 명령서가 노근리 학살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느냐를 쟁점화하고 있다. AP가 보도한 문서는 사단 사령부 명령서이므로 ‘노근리’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군이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신동아’는 노근리 사건과 관련한 비공개 문서 여러 건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문서들은 재미학자인 방선주교수와 노근리 피해자대책위의 정구도씨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새로 발굴해 ‘신동아’에 전한 것이다. ‘신동아’가 공개하는 이 문서들은 모두 6·25 당시 미군과 북한군이 작성한 것이다. 물론 전쟁중에 작성된 문서라 다소 과장은 있겠지만, 여러 건을 동시에 검토해보면 그 상황이 매우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미 제1기갑사단 8월17일 문서

미 제1기갑사단 7연대 1대대는 1950년 8월15일 39.7-50.4 지역에서 2건의 북한군 문서를 노획하였다. 이 문건은 사단본부의 정보참모부에서 같은날 오후 7시에 인수하여 17일 오전 8시에 대략 번역해 놓고 등사하여 관련된 부서에 배포하였다. 첫 문건은 8월2일자로 제목이 ‘복수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북돋우자’이고 둘째 문건은 8월8일자로 ‘산하부대 주의 사항’과 비슷한 것이다. 미군이 영역한 번역본만 발견되고 원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문을 보고 그 원래 구절을 추측할 수 밖에 없다.

현재 미 국방부와 한국 국방부도 이 문서를 갖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문건을 노획한 미 1기갑사단 7연대 1대대는 노근리 학살 사건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밝혀진 2대대와 작전 지역이 거의 겹치는 부대이다. 이 문건을 공개한 방선주 교수는 “이 미군 문건은 노근리 사건이 발생한 지 5일도 안 돼 미군이 철로 굴다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일을 인민군이 산하 부대에 주지시킨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래서 이 문서는 노근리 사건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본자료가 된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8월2일자 문건을 다시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제1군단본부

분류: 비밀

1950년 8월2일

제목: 복수하기 위하여 증오심을 북돋우자

수신:산하 모든 부대

1. 인민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인민의 이익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민과 분리되어서는 안되며, 인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적군은 인민군과 인민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갖은 책동을 다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죄없는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처형하고 있다. 매국노 이승만은 지난 5년 동안 미 제국주의자들의 도움으로 남한에 살고 있는 노동자 수만명을 학살했다. 이들은 학살을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까지 도발했다. 현재 제국주의자들은 직접 전쟁에 참가하고 있고, 또 민간인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 인민의 명령을 따르는 인민군 앞에서 이 사악한 적들은 괴멸되고 있다. 이제 놈들은 조선에서 거의 쫓겨나고 있다. 인민군과 인민 사이의 강고한 연대를 두려워하는 적들은 조선인민군이 아직 해방시키지 못한 지역에 있는 사랑스런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들을 처형하고 있다.

서울과 그 남쪽에서 수집된 증거에 따르면 도합 1만1148명의 민간인이 처형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적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용서받지 못할 민간인 살육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있다. 영동에 있는 기찻길 터널에서 적들이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 민간인들을 학살한 방법은 낮에는 공군기의 기총사격이었고, 밤에는 기관총 사격이었다.

영동 근처의 터널에서는 약 100명의 사람들이 학살된 것이 발견되었다. 이중에는 엄마의 젖가슴에 달라붙은 아기도 있었다. 이들 중 누구도 일어나지 못했다. 이 시체더미 가운데서도 10여명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이들은 닷새 동안이나 시체더미에 깔려 있다가 달아날 수 있었다. 눈물로 뒤범벅이 된 이 생존자 10명은 자신들의 복수를 해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우리는 이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전투 요원들에게 아래 지침을 이슈화할 것이다.

1. 모든 문화부문 요원들은 영웅적으로 싸우고 인민군 병사들에게 영동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선전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고, 적들을 전멸시킬 것이다.

2. 각 중대의 문화부문 요원들은 명령에 따라 이 선전을 충분히 퍼뜨릴 것.

3. 문화 부문 요원들은 인민군 병사들에게 적들이 이런 야만스런 행동을 이후에도 계속할 것임을 알릴 것이다. 그래서 병사들이 실제로 가능한 한 빨리 인민들을 이런 살육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임무임을 깨닫도록 할 것이다.

4. 이 정보를 인민군의 모든 병사들에게 알릴 것.

제1군단 군사위원 김재욱

문화부 사령관 최종학

다음은 월북작가 이태준이 로동신문 1950년 8월5일자에 김천발로 쓴 ‘전선으로’라는 기사다. 이태준은 일제시대에 ‘시는 지용(정지용), 문장은 태준’으로 불릴 정도로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다. 이 문서는 로동신문 원본 그대로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패망도주하면서 조선의 애국자들과 민주주의자들과 일반 인민들까지 참살하는 식인종 만풍은 괴뢰군경들에게만 있지 않았고 그들의 스승인 미국놈들에게 있어 더 악질적이었다는 것이 놈들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통하여 자명하여졌거니와 영동군 한 곳에서만 보드라도 임계리와 주곡리에서 평화인민 2000여명을 학살하고 달아났으며 황간에서는 기차터널 속에 피난한 촌사람 백여명에게 굴 양쪽으로부터 박격포를 들어 쏘았고 기관총을 난사하여 중상자 한 명과 죽은 엄마의 젖을 빠는 젖먹이 하나 이외에는 모주리 처참한 죽엄을 당하였고 죽은 사람들 속에는 나체로 놈들에게 능욕을 당한 처녀와 젖가슴에 탄환을 받은 시체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방선주 교수는 “당시 작가 이태준은 8월4일 무주에서 연락장교의 차로 영동에 들러 다시 327호 탱크에 편승하여 추풍령을 넘고 김천지방에 도착했다”고 설명했다. 이태준이 언급한 영동 지방의 학살 이야기는 사건 발견 후 불과 6일 사이에 영동 지방에서 채집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50년 8월26일자 ‘민주조선’에 종군기자 전욱이 쓴 내용이다. 전욱 기자는 같은 내용을 8월19일자 ‘조선인민보’에도 썼는데 8월26일자 ‘민주조선’ 보도가 좀더 간결하다.

이 문서도 한글 신문 그대로 미국립문서보관서에서 잠자다가 발견되었다.

월북작가 이태준의 기록

“29일(7월29일을 말함) 해질 무렵이었다. 대구 방면으로 진격하는 우리 인민군 부대 장병들이 황간역 북쪽 로응리에 다달았을 때 들과 철교 밑에서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참혹한 장면에 부닥쳤다. 동지점 일대의 들의 초목과 철교밑 시냇물은 피로 물들여 있고 두겹 세겹씩 덮인 시체로서 처참한 수라장을 이루어 우리 인민군 전투원들의 가슴을 어지럽게 하였다. 발디딜 곳조차 없는 현장에는 늙은이 젊은이 어린이 약 400명의 시체가 널어져 있었고 그중의 젊은 녀성들은 반라체가 되어 거꾸러져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우리들은 별안간에 어린애 목소리에 놀랐다. 6,7세 가량이나 보이는 소녀가 등에 젖먹이를 업고 벌벌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 뒤에 머리가 흰 로파가 따라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달려들어 사유를 물었더니 그들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우리들을 쳐다 보고만 있었다. 우리들은 재빨리 부대에 뛰어가 우선 우유와 빵을 가져다 그들에게 먹이었다. 그랬더니 차차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말을 주고받고 보니 소녀는 계산리에 사는 최순자였고 그 등에 업은 젖먹이는 자기 동생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흰 로파는 소녀들의 이웃집에 사는 김사랑씨였다.

로파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여섯 식구가 모두 들에서 학살되었고 최순자 소녀의 일곱식구도 학살되어 자기들은 간신히 살아 남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계속 동지점에서 벌어진 미군의 입에도 담지 못할 학살 사건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로응리’는 ‘노근리’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전욱은 실제로 영동에 종군기자로 갔던 사람이다. 이는 미군의 또다른 노획문서가 증명하고 있다.

‘민주조선’ 1950년 9월7일자에 실린 종군작가 박웅걸씨의 수기에서도 노근리 사건이 나온다. 이 문서도 ‘민주조선’ 원본 그대로 발견되었다.

“영동은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해방되었는데 그 날은 왼 거리가 문자 그대로 불바다였다. … 영동에서 황간이라는 거리로 진공해 나가는 도중에서 나는 수십명의 피란민을 만났다. 늙은이와 부인들과 5,6세 가량되는 어린애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부상을 당해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다섯살 가량 되는 어린 사내아이가 나의 팔에 매어 달리어 “아저씨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도 죽었어요. 나는 어떻게 해요”하며 운다. 사정을 들어보니 그들은 그 웃마을에 사는 농민들인데 미군들과 국방군들이 피난을 시켜준다고 사람들을 모주리 끌고 나와 기차턴넬 안에다 몰아넣고 미군이 직접 기관총소사를 퍼부어서 모주리 죽여버렸는데 그들은 그 속에서 탄환이 빗맞아 살아 나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나는 인민군대 동무들과 같이 그 굴안에 들어가 보았다. 어구에서부터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피로써 땅이 젖었는데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들의 자지러지는듯한 신음소리가 들려 온다. 굴 안에는 200여개의 시체가 그냥 산처럼 쌓여 있다. 그 가운데에서 무엇인가 새빨간 피덩어리 하나가 우리쪽으로 기어 나오며 “아빠 아빠”하고 부른다. 자세히 살펴 보니 그것은 세 살도 못되는 어린 아이였다. 이 천진스러운 어린이는 자기의 방패가 되어 총에 맞아 쓰러진 어머니의 젖가슴을 파고 있다가 우리가 들어가니 아빠가 왔다고 기어오는 것이었다.

우리 동무 하나가 이 어린이를 모-터찌클에 태워서 다음에 진공해 나간 부락에 갖다 주고 아직 죽지않은 부상자들에게는 군의 대대동무들이 응급치료를 해주었다. 또 그 아랫 마을 미군 포진지가 있던 곳에서는 묘령의 여성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이 시체는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그리고 반나체로 의상을 입힌 채 학살한 것이었다. …

7월31일 모-타찌클부대 동무 하나가 전사들 앞에서 우리들이 그제 영동 아래서 목도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황산을 진공해 나올 때였다. 우리들은 도중에서 부상한 피란민들의 한떼를 만났다. 그들은 그 웃동리에 사는 농민들인데 미군이 피난을 시켜 준다고 끌고 나와 굴안에다 쓸어 넣고 기총소사를 퍼부어 수백명이 죽고 그중에서 용케 살아 나온 사람들이라 한다. 우리는 그 굴안에 들어가 보았다. 수백의 농민들이 시체가 산처럼 싸여 있고 피가 도랑물이 되어 흘러 내린다. 이것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려는 미군이 유엔의 간판을 쓰고 감행한 일이다. …”

6·25전쟁 당시 북한은 저명한 작가들을 전선으로 파견하여 전쟁 상황을 기록하게 했다. 위에 인용한 기사를 쓴 작가들은 실제로 북한이 현장에 파견한 기자들이다. 이는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된 북한군 노획문서(노획문서 SA2005 7/80(box 142)가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박웅걸과 이태준이 모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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