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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발굴|미 국립문서보관소 비밀자료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50년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 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미국은 노근리 사건을 50년당시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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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작가 파견 일람표이다.

『민병균 대구방면 병으로 인하여 평양으로 감, 리춘진 동해안으로 남진

한태천 군사령부에서 사업, 박웅걸 상주 대구방면

박팔양 군사령부에서 사업, 김영팔 춘천 방면

윤두현 동해안으로 남진, 리태준 진주 방면



김사량 대구방면 종군, 김남천 김천 방면

전재경 대구 방면, 림화 김천 방면

남궁만 대구방면 부상 입원, 송영 충청도와 전라도농촌 토지개혁과 선거 사업 취재

리동규 대전 방면, 박세영 동상

리정구 진주 방면, 리북명 김천 방면

김북원 조치원 방면, 김조규 동해안으로 종군

한봉식 강원도 영월 』

또 이 문서를 보면 ‘민주조선’ 기자 김인환, 김문규는 대전 대구 방면, 전욱은 탱크 105사단을 따라 영동으로 갔다가 대구 방면으로, 선관영은 대구 방면, 김교철·최예순은 동해안 춘천 방면, ‘로동신문’ 기자 임동수는 경북 방면, 현준극은 안동 대구 방면, 김전은 안동, 송학용은 상주, ‘민주청년’ 기자 최일규는 안동대구 방면, 통신사 기자 송영복은 강원도 천안 영동(3사단 7연대 배속)으로 파견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모든 문서들은 미국이 한국전 당시 노획해서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지난해 AP통신 보도가 나오기 전까지 이 사건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다음 문서들은 미 육군성 주한·미군 배상사무소가 노근리 피해자 대책위 정은용 위원장에게 그동안 보낸 답신 내용이다. 1994년 10월28일 회신이다.

“귀하께서 김영삼 대통령께 보낸 1994년 7월6일자 진정서는 본 배상사무소에서 처리하도록 이첩되었습니다. 귀하의 진정 내용을 살펴보면 1950년 한국동란 당시 미군들이 적군이었던 인민군과의 교전 중에 미군들에 의해 한국인들이 대량 살상되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피해는 직접적으로 군대가 적과의 전투 과정에서 야기된 것으로 사료되는 바입니다. 미 합중국은 합중국 군대가 전투과정에서 야기시킨 귀하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법률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1997년 10월8일자 회신은 다음과 같다.

“본 공한은 1950년 7월27일 자기들의 부모 또는 형제 및 자매들이 부상 혹은 피살 당했다고 주장하며 정신웅씨를 비롯한 44명의 지방민들이 제기한 행협 손해배상 신청사건 사건번호 청주 배심 97-행-002호에서 동 046호에 대한 회신입니다. 이들 신청인들은 6·25 사변 당시 연합군에 의한 사격과 폭격에 의하여 자신들의 가족들이 부상 또는 피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의하면 당시 피해자들이 전투 지역을 피하여 피란길에 오르다 군인들에 의하여 부상 또는 피살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배상 신청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를 근거로 기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첫번째 이유로, 이들 배상신청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며,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그 장소에 과연 미 제1기갑사단 병력이 주둔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입증 자료 또한 없습니다. 한편 이 사건 배상신청을 발생시킨 것으로 주장되는 그 사건이 군인들의 전투 활동중 직접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미군대협정 제23조, 민사청구권 제11항은 전투활동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의한 배상신청은 그 지급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설혹 주장하는대로, 사실 불의의 인명피해가 그 시점, 그 장소에서 발생했다 해도, 이들의 배상신청은 상기 조항에 의하여 금지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 손해배상신청 사건들은 적용될 수있는 소멸시효에 의하여 그 신청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군대 지위협정에 의한 손해배상신청 시효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3년 이내에 제출해야 하며, 미 육군규정 제27-20조에 의한 손해배상 신청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2년 내에 제출해야 합니다. 이건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는 무려 47년 전에 야기된 사건임으로 이들 신청의 지급은 불가능합니다.”

이 답신 가운데 ‘사건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그 장소에 과연 미 제1기갑사단 병력이 주둔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입증 자료가 없다’는 인민군쪽 자료와 미군쪽 전쟁 기록을 들여다보면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노근리 사건은 7월26일과 29일 사이에 일어났다. 먼저 북한쪽 기록.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1950년 8월1일자 ‘조선인민군’ 기사다.

“각 전선에서 인민군 부대들은 미군부대들과의 전투를 계속하고 있다. 영동을 해방시킨 인민군 부대는 7월29일 황간을 해방시키었다.”

노근리는 영동군 황간면에 속한 곳이다. 이 기사를 보면 7월29일 무렵에야 인민군이 황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미군이 26일과 29일 사이에 현장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미군쪽 전쟁 기록을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방선주 교수가 공개한 미 제1기갑사단의 ‘전쟁일기’ 7월29일자다.

“29일 오전 5시30분, 야간에 포사격과 전차포 사격을 받은 7기갑연대 1대대는 철수명령을 받았다. 제1대대는 2대대보다 앞서 철수하여 계획에 차질이 생겨 철수가 지연되었다. 8시20분에는 1대대와 2대대가 황간 기차역을 지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전하였다. … 피란민들을 계속하여 철수시키고 있는데 많은 불편을 가져왔다.”

미국 답변 거짓투성이

이 기록을 보면 7월29일 오전까지도 미군이 노근리 지역에 머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는 1999년 3월22일 미국교회협의회의 요청에 대한 미 육군성의 답신이다. 이 답변은 AP보도가 나오기 직전에 미국 정부가 낸 회신이다. 영문 원본을 한글로 번역했다.

“미 육군은 한국 기독교회협의회가 만든 노근리에 관한 첨부자료를 검토했습니다. 또 미육군의 1950년 7월 한국전쟁 기록도 조사했습니다. 조사 결과 미 육군이 노근리에서 한국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아무런 정보(information)도 없었습니다. 미 육군은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한국전 당시의 미 육군 기록에 대해서도 조사했습니다. 이들이 조사한 기록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1949년~1954년 육군 군무국장 기록

b.1950년 7월7일~8월1일, 미 1기갑사단 5연대, 7연대, 8연대의 작전 기록

c.1950년 7월7일~8월1일, 미 25사단 24연대, 27연대, 35연대 작전 기록

d.1950년 7월, 미8군 전쟁 기록

e.1952년~1954년 미육군 법무감 기록, 미육군 전쟁 범죄 기록

f.1917년~1954년 육군 비밀 사찰 기록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는 미 육군이 가장 극심한 고통과 혼란을 겪으며 북한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던 시기였습니다. 아군 부대의 잦은 이동, 피란민 감독의 어려움, 제한된 시야에서 전투해야 하는 고초, 공산주의자들이 지뢰를 폭파하기 위해 피란민을 인간방패로 삼는 점, 피란민으로 위장 침투하는 적군, 공군 지원 부족, 야포 지원 부족 등 갖은 악조건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민간인들이 잠재적으로 희생될 위험이 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사 결과, 미 육군이 1950년 노근리 양민들의 죽음에 관련되었다고 주장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사건 당시 북한군 문서와 미군 문서를 보면 미국 당국의 답변은 거짓투성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측이 이렇게 답변한 데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미국방성이 노근리 사건을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답변했을 가능성. 둘째는 관련 문서의 존재를 알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렸을 가능성이다. 어느 경우라도 미국의 도덕성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미국은 이 사건에 대해 시간을 끌면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령 당시 영동 지방의 피란민 가운데는 좌익분자가 섞여 있었다는 물증을 잡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약속은 단호하다. 1977년 6월8일 제네바에서 채택돼 1978년 12월7일 발효된 제네바협약 제1의정서는 ▲충돌 당사국의 군대 구성원, 민병대, 의용대 ▲충돌 당사국에 속하며, 이 영토에서 활동하는 기타 의용대(지휘관이 지휘하는 조직적 저항운동 구성원, 멀리서 식별할 수있는 표지를 가질 것,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할 것, 자신들의 작전을 수행할 것) ▲정규군에 편입할 시간이 없어 침입하는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든 자(단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고, 전쟁법규 및 관행을 존중하는 경우에 한정)가 아니면 무조건 민간인이라고 규정했다.

또 민간인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우면 민간인으로 간주하고, 민간인이 아닌 사람이 민간인 무리에 섞여 있다 할지라도 이 무리의 민간 성격을 박탈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비록 이 협약이 1977년에 채택되었다고 하지만, 미국이 노근리 사건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가더라도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다. 유감스럽게도 미국은 아직까지 이 협약에 가입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전세계에 자국 군대를 파견하고 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들이 앞으로도 전쟁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미국은 자국 군법에 따라 개별 병사를 처벌한 적은 있지만 국제법에 따라 미군 병사의 전쟁 범죄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 인정하고 배상한 사례가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이런 배상 요구를 미국 국익과 세계 전략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1998년 로마에 국제형사재판소가 설립되었을 때 가입하지 않았다. 노근리 문제는 미국의 이런 선례에 이정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다.

시효문제가 걸림돌

노근리 사건을 법적으로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시효다. 현재 한·미 간의 실정법에 비추어보면 노근리 문제는 시효가 끝난 사건이다. 따라서 형사처벌은 불가능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법해석에 따라 시효를 적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모르지만 전쟁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국제 사회 관례다. 실제로 1997년 7월 미국 하원의원 15명이 2차대전 때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손해를 배상하라고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한 바 있다.

비록 한국과 미국이 가입하지 않았지만 유엔은 1968년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시효 부적용 협약’을 맺은 바 있다. 2차대전 이후 열린 나치전범 재판에서도 연합국은 시효를 적용하지 않았다. 프랑스 법원 또한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재판에서 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일본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유엔 인권특별보고관 게리 맥두걸씨도 보고서에서 일본의 책임은 시효에 따라 소멸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노근리 사건의 범죄 성격을 확실히 밝혀야 한다. 미군의 당시 작전이 민간인 생명을 유린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고 벌어졌다면, 또 이런 민간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다면 이는 전쟁 범죄와 반인도적인 범죄로 규정될 수 있다. 6·25 당시 미군이 민간인을 살육했다는 기록은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는 북한군의 선전 문건뿐만 아니라 미국 기자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방선주 교수가 새로 발굴한 미국 AP통신사의 종군기자 스윈톤의 목격기를 인용해 본다.

“사랑하는 부모님, 지금 깊은 밤의 차가운 천막 속입니다. 예기된 중공군 반격이 전개될 것인가 보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각은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부모님께 편지 쓰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마지막 진격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우리 기총소사로 수백명의 피란민들이 죽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애입니다. 저들은 행길 옆에 기어가듯 죽어 넘어지고 있습니다. 비행기의 50mm 구경 기관총이 그들을 사격할 때 모친들은 한두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아기들을 업고 품고 가고 있습니다. 아기들은 맞지 않고 모친의 잔등에서 떨어져 나가 길옆에서 얼어죽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전쟁을 보았지만 이것은 가장 잔혹한 광경이었습니다. 우리 공군은 이것은 필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적이 피란민 행렬에 침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적의 군인 하나 죽이는데 25명의 민간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할 만한 일입니까? 민간인을 적으로 만들어, 우리가 빨갱이들에게 손실을 입힘으로써 얻는 효과를 더욱 갉아먹고 있지는 않는지요? 제 견해로는 예스, 그러합니다.…1951년 1월30일”

6·25전쟁은 국제법인 국제인도법과 제네바협약이 적용되는 전쟁이다. 국제인도법의 핵심은 군사 목적에서 벗어난 불필요한 학살과 파괴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은 전쟁 범죄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인 민간인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혹 피란민 행렬에 인민군이 섞여 있었다 할지라도 민간인 행렬을 전투원으로 취급하는 것이 미군 작전 지침이나 일반 명령, 혹은 묵인 사항으로 굳어져 있었다면 이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전쟁 범죄 행위로 볼 수 있다. 스윈톤 기자의 기사를 보면 미군이 노근리 사건과 비슷한 행위를 저질렀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노근리 사건은 범죄 행위를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의미가 크다. 만약 6·25전쟁 이후 노근리 사건이 제대로 사법처리되었다면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현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6·25전쟁에 대한 해석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남북 분단과 한·미 관계 때문에 더욱 어려웠는지 모른다. 노근리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가 6·25전쟁을 극복하는 중요한 사건이라 볼 수 있다. 한결 성숙한 한·미 관계를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의미가 크다.

신동아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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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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