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나는 오늘도 역전승을 꿈꾼다”

3표차 낙선한 문학진후보의 끝나지 않은 총선

  • 김종태·문화일보 정치부 기자

    입력2006-08-17 11:2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간은 꿈에서 세상으로 내려온다’ ‘전사 그리스도’로 불리는 체 게바라가 그의 무덤이 된 볼리비아 밀림속 나무에 마지막 순간을 예감하며 새겼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꿈을 놓고 세상에 내려오고 싶은 인간이 얼마나 될까. ‘문 세표’로 불리는 경기도 광주의 문학진(45) 민주당위원장은 최근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을 꾸었다.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났어요. 재검표에서 내가 당선됐다는 겁니다. 16표로 역전됐다는 판결문 낭독이 아직도 귓전을 울립니다.” 꿈 이야기를 하는 그는 “왜 16표였을까”라면서 현실처럼 생생했다고 회고했다.

    지난 4·13총선에서 한나라당 박혁규의원에게 3표 차로 분패한 문위원장은 재검표를 위한 당선무효소송과 재선거를 치르게 해달라는 선거무효소송을 동시에 제기해 놓은 상태다.

    현재 진행중인 일부 재검표 과정에 표차가 2표로 줄어 ‘문 두표’로 별칭이 바뀌기도 했지만 4월 이후 현재까지 장장 4개월에 걸쳐 선거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그가 꾸었다는 꿈이 얼마나 달콤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더구나 그의 운명이 재검표 담당 재판부가 미처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14표에 달려있다면 더욱 그렇다.

    유례없는 최장 선거에 피를 말리고 있는 그는 “매일 ‘러시안 룰렛(총알 하나를 리볼버 권총에 장전한 뒤 참가자들끼리 돌아가며 머리에 쏘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2년간의 우여곡절

    그의 ‘피말리는’ 정치적 운명은 사실 총선 훨씬 이전부터 시작됐다. 13년간의 기자생활을 접고 96년 15대 총선에 국민회의 공천을 받아 경기 하남·광주에 출마해 패배할 때만 해도 그는 얼마나 많은 희비가 단기간에 교차할지 몰랐다.

    정권교체의 기쁨과 함께 여당지구당 위원장으로 ‘격상’되고 98년 6·4지방선거를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그의 앞날은 순탄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방선거 직후 당시 지역구의원이었던 한나라당 정영훈 전의원 입당설이 돌면서부터 그는 높낮이가 심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그해 8월 소수 여당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영입차원에서 정 전의원이 입당했고, 그는 3년간 가꿔온 지구당을 양보해야 했다. 무보직 설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이때 수모를 자서전 형식의 저서 ‘백범 김구처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당위원장이 된 내게 부동자세로 ‘하명만 하십시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라던 경찰서장이 정 전의원 입당 후 만난 행사장에서는 아는 체도 안하고, 입에 대고 있던 오리고기만 먹고 있더라.”

    16대 총선 공천도 정 전의원에게 밀려 거의 기대할 수 없던 막막한 시절이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선거구 재조정 문제가 한줄기 빛으로 날아들었다. 그렇지만 1차 선거구 조정에서 하남·광주가 분리되지 않기로 결정돼 다시 낙담에 빠져들었다.

    천우신조였을까, 국회 본회의장에서 일부의원 반발로 선거구 조정이 원점에서 시작되어 일말의 가능성이 엿보였다. 여야 협상과정에 기사회생으로 광주와 하남이 분리됐고 그에게도 공천 티켓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 종료는 아니었다.

    그의 지지세가 광주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하남을 정전의원이 고집하는 바람에 ‘현역의원 우선배려 원칙’에 따라 내주고 광주로 출전하게 됐다. 그리고 3표차로 아슬아슬하게 낙선하는 불운을 겪고 이제, 최고 클라이막스인 재검표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문위원장은 “당선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이나 여권내부의 여론조사 결과로 당선을 확신했다는 설명이다. 개표 도중 TV에 당선 유력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박혁규의원의 몰표지역 투표함이 마지막으로 열렸고 14일 새벽, 그의 표현에 따르면 ‘황당한’ 터널이 검은 입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개표종료후 무엇보다도 먼저 개표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현실을 인지한 즉시 그는 민주당 김옥두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소송 의사를 밝히고, 친분이 있는 율사출신 신건 민주당 공명선거대책위원장에게 소송을 의뢰했다.

    1차 심리서 2표차로 따라 붙어

    곧바로 광주군 선관위 상대 소장을 접수하고 애간장이 녹는 재검표 단심소송을 시작했다. 첫 재판부터 “생사를 넘나드는 격전이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지난 총선에서 근소한 표차로 낙선한 후보들이 제기한 9건의 당선 무효 소송이 광주군 경우만 제외하고 이미 무번복으로 결정났음에도,이 재판 결정이 여전히 보류되고 있는 점이 양측의 치열함을 감지케 한다.

    담당 재판부인 대법원 특별 1부는 지난 6월5일 성남지원에서 첫 심리를 열고 재검표를 실시했다. 문위원장과 박의원측이 그날 선관위의 검표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표는 모두 42표. 이 42표가 승부를 가름짓는 열쇠로 부상한 것이다. 당락차가 3표였음을 감안할 때, 무수한 변수를 갖는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42표는 대부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미묘한 표들이어서 결과를 섣부르게 예단할 수 없다. 투표용지가 훼손되거나 지장이 함께 찍혀 있는 경우, 기표 인주가 다른 후보에게 번진 경우(전사), 어느쪽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인지 판단하기 난해한 경우가 다수였다.

    7시간50분 동안 진행된 첫 심리에서 재판부는 42표 중 일단 28표에 대해 잠정 판단을 내렸다. 나머지 14표는 현재까지 보류돼 있다. 이날 심리 결과 표차는 2표로 줄어들었다.

    28표 중 당초 박의원 표였던 1표는 절반이 절단된 뒤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진 채 발견돼 재판부가 무효로 처리하기도 했다. 1표에 생사가 달린 만큼 박의원측이 이의를 거듭 제기해 재판이 2차례나 정회됐다.

    이날 재판부의 판정에 대해 양측은 모두 불만이 역력하다. 문위원장은 “28표 중 12표의 판정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고, 박의원측도 스카치테이프로 붙여진 1표 등에 강력하게 항변하고 있다.

    양측은 나머지 14표뿐 아니라 28표도 여전히 최종판정이 된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황이라고 기대하고 있지만 대법원측은 견해가 다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일단 판정이 된 만큼 합리적인 이의가 아니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게 관례“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현재 전반전은 2표 차의 게임 스코어로 끝났으며, 후반전은 14표로 치러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우선 재판부가 일단 무효처리한 스카치테이프가 붙여진 표를 놓고 양측이 언제 찢겼느냐를 놓고 맹렬히 맞붙어 있고, 대법원 특별 1부에 소속됐던 대법관 4명 중 2명이 퇴임하고 신임 대법관 2명이 새로 배속돼 28표의 판단이 바뀔 확률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법원측은 “28표의 판단은 개별 대법관이 아닌 총괄적인 재판부가 한 것이므로 대법관 변동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고 그럴 가능성을 거의 일축하고 있다.

    첫 심리가 열리는 동안 문위원장과 박의원은 문제가 된 표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양측 대리인인 변호사만 참석이 허용된 까닭이다. “손에 땀이 강물처럼 흘렀다”고 문위원장은 말했다. 박의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두 번째 심리는 6월13일에 열렸다. 그날은 별다른 재판절차가 이뤄지지 않고 양측에 42표의 복사본이 전해졌다. 재판부가 아예 42표를 공개한 것이다. 양측은 현재 이 42표의 복사본을 들고 다니며, 각자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선전하고 있다.

    6월27일에 속개된 3차 심리는 두 명의 증인이 출석해 긴장감을 더했다. 형식상 피고인 광주군 선관위가 신청한 증인이었다. 1명은 문제의 스카치테이프 표와 관련된 개표 종사원으로, 그는 “문제의 표는 개표과정에 실수로 찢어져 스카치테이프로 접합했다”고 박의원에게 유리하게 증언했다.

    이 종사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해당 표는 박의원의 표로 분류돼 다시 3표 차이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문위원장은 “표가 동강이 나서 붙였다면 선관위원장 서명과 함께 개표록에 근거가 남아야 하는데 근거가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형국이다. 또 한명의 증인은 투표소에 들른 장애인이 건물 2층인 투표소 위치 때문에 투표하지 못했다는 문위원장측 주장과 관련된, 본안소송과는 약간 무관한 사안이었다.

    문위원장은 현재 재검표가 목적인 당선무효소송이 패소로 끝날 경우에 대비, 또다른 안전망을 쳐놓고 있다. 선거 자체가 무효이므로 아예 재선거를 치르게 해달라는 선거무효소송 등이 그것이다.

    선거무효소송은 주소송인 당선무효소송에 첨부해 예비적으로 제출되었으며 재판부는 두 가지 사안을 함께 심리하고 있다. 문위원장이 설명하는 선거무효 주장의 이유는 첫째, 광주군 투표구 2군데에서 각기 1매씩 투표용지 2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투표인수에 비해 개표용지가 1매씩 부족한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두 번째는 투표소 위치 때문에 투표장에 들어가지 못한 장애인은 물론 동행인 2명 등 3명이 투표를 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이 장애인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개별적으로 제기했다.

    “여당 프리미엄은 커녕…”

    문위원장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만일 양측의 표가 동수일 경우, 연장자가 당선자가 된다는 법 규정이 불합리하다며 헌법소원도 내놓고 있다. 얄궂게도 문위원장과 박의원은 동갑이며, 박의원이 문위원장보다 생일이 50여일 빠르다. “아무리 장유유서의 사회라지만 국민의 대표자를 선정하는데 너무나 수긍하기 어려운 규정”이라는 게 그의 항변이다.

    3차 재판을 끝으로 대법관 2명이 바뀐 재판부는 9월중순 다음 심리를 재개할 것으로 예측된다. 지키는 처지인 박의원도 무더운 여름이 서늘하겠지만 신화를 창출해야 하는 문위원장은 속이 다 타는 표정이다.

    지난 8월12일 기자와 만난 문위원장은 연신 담배를 피워물며 누구도 측량키 어려운 심정의 일단을 내비쳤다. 활기차 보이려 애썼지만 지친 기색이 엿보였다.

    지역민의 반응을 묻는 질문에 “현역대접이야 받겠느냐”며 입을 연 그는 사법부에 대한 피해의식부터 드러냈다. “혹자들은 여당 힘을 이용해 뒤집으려 한다지만 내가 오히려 불리한 재판을 치르고 있다”는 하소연이었다. “재판이 길어지는 것은 비난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길게 하기 때문이라는 악성소문도 있다”면서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고 목청을 높였다.

    오히려 사법부의 기류가 ‘편파적’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주장했다. 지금 여당은 야당보다 못하다는 ‘무기력한 여당론’도 내놓았다. 더불어 “대법원이 정치적 고려같은 것을 싹 빼고 손을 탁 털어야지, 무엇 때문에 질질 끄는지…. 정치적으로 고려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그렇지만 (42표의 복사본이)공개가 이미 돼 있으니까 정확하게 판정할 것으로 본다”며 “만약 공개가 안 되었다면 더 불안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집권당 소속인 그가 사법부에 대해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는 선뜻 납득되지 않는 구석도 있다. 그러나 정권교체 후 사법부에 대한 여권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때 이해키 어려운 부분만은 아니다.

    실제로 재검표 소송을 냈던 김중권 민주당 지도위원과 다른 민주당 고위인사들이 6월말에 열린 대법관 청문회를 앞두고 “사법부 견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던 사례가 새삼 상기되기도 한다.

    문위원장은 민주당에 대한 불만도 감추지 않았다. 첫 심리 때 한나라당 의원은 무려 20여명이 나타났지만, 민주당 의원은 1명만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당에 항의했더니 2차 심리 때는 10명이 왔지만 3차 심리 때는 다시 1명이더라며 허탈해 했다.

    그는 “한나라당 이부영의원이 계속 재판에 나오기에 왜 매번 오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팀장이라서 그래’라고 말하더라”며 “그쪽은 조직적으로 팀을 짜서 활동하는데 우리는 팀도 없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김옥두총장이 당내 율사출신 의원 4명에게 도움을 요청해놓았다며 상의하라고 해 찾아갔더니 1명만 성의를 보이고 나머지는 바쁘더라는 설명이다. 이어 “그중 한 명은 아예 ‘나는 큰 사건만 하지 1표 2표 이런 사건은 안 합니다’라고 말해 속을 뒤집어놓았다”고 실소하기도 했다. 그는 “목마른 놈이 샘을 파지”라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의석 하나가 아쉬운 당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 책도 통 못 읽는다는 그는 가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 “어젯밤 문위원장이 당선되는 꿈을 꾸었다고 말할 때는 답답하다”고 털어놓았다. 가끔 박의원을 지역구 행사에서 만나지만 “서로 말 없이 악수만 하고 헤어진다”며 어색한 순간을 전하기도 했다.

    박의원측, “뒤집어지면 여당 압력탓”

    재판 전망과 관련해서는 판정이 보류돼 있는 14표를 최악으로 분류해도, 8(문위원장):5(박의원):1(무효)로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전망대로 14표 가운데서 3표를 앞서게 되면, 기존 2표를 상쇄하고도 1표 차이로 승부를 되돌릴 수 있다. 그는 8:2:4 확률을 더 믿고싶은 눈치다. 그렇게되면 4표 차이로 이기게 된다.

    그러나 박의원측은 최악의 경우 최종판정이 동수로 나와 연장인 박의원이 승리를 굳히거나, 총 4표를 앞설 것으로 확언하고 있다. 박의원측은 “만일 뒤집어지면 여권의 압력 때문이다”고 못을 박고 있다. 설령 문위원장에게 신이 미소짓는다 하더라도 그후 그가 극복해야 할 공세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재판종료 휘슬이 언제 울릴지 현재로선 추측하기 어렵다. 재판부 4명 전원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된 전원합의체로 재판이 넘어가 의외로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문위원장측 주장을 근거로 재선거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어쨌든 ‘문 세표’라면 누구나 알아봐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는 문위원장이 앞으로 문동(同)표, 또는 문플러스(+) 한표 등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를 광주군의 선거는 지금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