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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증언

5인의 특공조, 9·9절… 심야에 적비행장 날리다

죽음을 넘나든 北派공작원의 ‘30년 묻어둔 비사’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wpark@donga.com

5인의 특공조, 9·9절… 심야에 적비행장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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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말 한마디에 젊은 모가지를 내걸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나라를 앞세워 꼬드긴 사람들이 그저 우리를 이용하고 버린 것이다.”
김 일성 광장에서 있은 환영행사에는 조명록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홍성남 내각총리, 전병호·계응태 당중앙위원회 비서 등 당·정·군의 요인들이 나와 이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송환을 축하했다.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양형섭 부위원장과 김윤형 서기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들에게 ‘조국통일상’이 수여됐다.”

지난 9월2일 북송된 김인서 김선명 등 비전향 장기수들에 관한 북한 중앙방송의 보도내용이다. 대대적인 국가적 환영을 받으며 ‘사회주의 조국’의 품에 안긴 북송 장기수 63명 중 46명은 남파공작원이다. 이들의 송환을 목도하면서 한숨짓는 이들이 있다. 같은 냉전시기에 북한에 파견되어 목숨을 내놓고 ‘대북사업’을 했던 북파공작원들이 그들이다.

북한이 오랫동안 남파공작원들에 대한 인도적 송환 등을 공개적으로 목청높여 요구하고 마침내 이를 관철시켜낸 이날까지 정부는 북파공작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온 터였다. 공작원의 파견 사실을 인정한다면 곧 휴전협정 위반을 자인하는 꼴이 된다는 이유로 북파공작원의 존재와 활동실상을 극비에 부쳐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국회에서 민주당 김성호(金成鎬·통일외교통상위) 의원이 6·25 전후 북파공작원 366명의 명단을 입수, 공개함에 따라 북파공작원의 실체는 더 이상 부인만 할 수 없는 문제가 됐다.

김의원이 공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53년 2월~72년 7월 사이 북파공작원중 북에서 체포 실종 사망한 사람은 모두 7726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국가유공자 예우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보상을 받은 경우는 12명에 불과하다. 특히 1960년 이후 북파된 2150명은 아예 법적으로 보훈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이같은 문제는 이들이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된 데서 비롯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파공작원들의 명예회복과 합당한 보상 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점차 가시화될 조짐이어서 관계당국을 곤혹스럽게 한다. 이런 움직임은 그 동안 보상은커녕 ‘북파 전력’ 때문에 되레 감시대상이 되고, 정상적인 사회활동에 지장을 받는 등 불이익을 당해온 생존 북파공작원 출신들을 중심으로 모색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이 남파공작원들을 당당히 데려가 영웅대접을 하는 마당에 국가를 위해 청춘을 사지에 내던진 사람들을 더 이상 모른 체해서는 안 된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 아직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놓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최근 남북정상회담 이후 탈냉전 무드와 장기수 북송 등 상황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며 연락이 닿는 ‘전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모으면서 전체모임도 계획하고 있다. 정부당국이 계속 침묵으로 일관할 경우에는 ‘법적’ ‘물리적’ 행동도 불사할 태세다.

“한번 갔다오면 가족까지 생활 책임진다”

이들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북파됐고 어떤 활동을 해왔는가?

‘신동아’는 북파공작원으로 북한 땅에 침투, 생명을 담보로 한 ‘대북사업’을 수행했던 공작원 두 사람을 만나 이들의 증언을 들었다. 처음에는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던 이들 공작원들은 계속되는 설득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지금까지 조금씩이나마 존재가 알려져온 50년대 북파공작원이 아니라 60~70년대에 활동한 북파공작원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본인의 동의를 얻어 실명으로 공개한다.

먼저 만난 이는 주진하(51)씨다. 인천 부평역 근처 찻집에서 만난 주씨는 5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무슨 운동이라도 하십니까?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데요.

“운동은 뭐, 그냥 옛날에 한가닥 ‘놀던’ 가락이 있어 그렇게 보이는 거겠죠.” ─‘한주먹’ 하셨던 모양이죠?

“북파공작원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힘없는 집에서 태어나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으면서 몸은 날쌘 사람들이 ‘사냥’ 대상이 돼요. 그러나 순수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한 일이라는 말 한마디에 목숨까지 담보로 바치고는 아무것도 건진 게 없어. 나라를 앞세워 꼬드긴 사람들이 그저 우리를 이용하고는 버린 거죠. 또 그동안 우리를 진정으로 대변해준 사람도 없었고.”

─태어난 곳은 어디입니까?

“1949년 5월19일 서대문구 충정로 3가요. 남대문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부모님은 뭘 하셨습니까?

“이북에서 내려와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셨어요. 나는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형들이야 장남이고 그러니까 학교 보내는 거고 셋째는 찬밥 아닙니까. 전 집을 나와서 창신동 종묘 근처에서 놀았죠.”

─북파공작원으로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겁니까?

“거기서 생활하다가 여러 명이 첩보공작대에 같이 갔어요. 물색조가 우리한테 물색을 하러 왔어요. 저는 그때 뭘 해먹고 살았느냐면, 한마디로 불량 청소년이죠. 노벨극장 주변에서 남의 것 도둑질하고 유치장도 들락날락하고, 동대문 실내스케이트장이 있었는데 거길 우리가 꽉 잡고 있었어요. 이런 생활을 하다가, 물색조에 강선규(가명)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 19~20세 때 접근해 가지고….”

─그 사람이 뭐라고 설득했습니까?

“자기는 정보부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7××부대라는 것이 있는데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이북에 한번 갔다 오면 제대증도 주고, 취직도 시켜주고 성과에 따라 보상금도 주는데, 보상금은 대체로 개인택시 한 대 값 정도 주고 다달이 연금도 준다 이겁니다. 그리고 가족한테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준다 이겁니다. 우리로서는 그 얘기가 꿈만 같았죠. 나이 19 20 21세 되는 놈들이 ‘굵고 짧게’ 살아본다는데, 그때는 그런 맘이 들었어요. 그래서 멋도 모르고 거기에 응했죠.”

─그럼 바로 그 사람을 따라 나섰습니까?

“아뇨. 신상명세를 그 사람한테 다 밝혀주니까 1주일 후에 남산 야외음악당 앞에서 만나자고 합디다. 그러면서 증명서를 하나 주더라고요. 거기에 뭐라고 돼 있느냐면, 이 사람은 국가가 뭐뭐뭐 해가지고, 아이고, 기억도 잘 안 나는데, 하여간 그때 우리가 볼 때는 어마어마한 쯩(증명서)이에요. 그러면서 ‘너희들 사고 나서 파출소나 경찰서 잡혀 들어가면 그걸 보여라, 그러면 금방 내보낼 거다’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거 믿고 창신동 종묘 숭인파출소 다 때려 부쉈어요. 그 쯩을 내보이니까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금방 내보내주더라고. 그러면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1주일 동안 쓸 생활비를 주는 거야. 1주일 후에 남산 야외음악당에 가니까 그 사람이 나와 있잖아. 다시 1주일 동안 쓰라고, 날짜가 적힌 그런 증명서를 또 주고 생활비도 줘요. 그렇게 세 번을 만났지.”

─실제 부대로 들어간 건 언제쯤입니까?

“갈월동에 가면 노동회관이 있는데 거기서 세 번째 만났고, 그후에는 남산 야외음악당 앞으로 오전 8시 반까지 집결해라 이거예요. 그때는 정말로 가는 거다 이거죠. 그 전에 한 달 동안 못 갈 사람은 커트를 해낸 거야. 모이라는 날 아침에 갔더니 여남은 명이 모였어요. 거기에 ‘D산업사’ 버스가 대기하고 있더라고. 그때는 정보부가 D산업사였나봐. 그 버스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서 약수동 길로 해서 광화문을 지나 영등포로 갔지. 영등포의 지금 국세청(세무서) 자리가 옛날엔 군부대 자리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가 정보사령부 대기소야. 일반 군인들이 논산에서 올라와서 대기하고 있으면 양구 춘천으로 보내는 대기소였어. 거기로 데리고 가서 신체검사를 하더라고. 머리도 깎고 군복도 입히고. 부산 애들이 한 20명 먼저 와 있었어요. 그 사람들하고 합세해서 그날 저녁에 청량리역으로 가서 중앙선 열차를 탔는데 한 칸은 우리 애들밖에 없어. 아무도 못 들어오는 거야.

그렇게 밤새도록 가니까 강릉에 도착했어요. 거기 트럭 두 대가 와 있더라고. 주먹밥을 하나씩 줘서 먹고 트럭에 올라 타고 호로를 탁 씌우고 나서 정처없이 올라가는 거야.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 막아놨으니까. 대여섯 시간 올라가다가 내려놓은 곳이 알고 봤더니 강원도 고성군 △△리라는 곳이었어. 앞에는 바다가 보이고 뒤에는 설악산 무슨 바위 밑이야. 거기도 말하자면 대기소야. 거기서 내려놓고 겁을 주는 거야. ‘이 근처에 도망 못가게 전부 지뢰를 박아놓았다’고 말이야. 거기서 25일을 지냈어.”

─훈련은 어떤 걸 받으셨어요?

“25일 동안 일반부대 훈련소에서 하는 제식훈련에서부터 사격, 수류탄 투척 등의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고성군 모 지역으로 올라갔어. 거기가 육군 첩보공작조 훈련소야. 거기는 우리 선배인 도깨비부대와 번개부대가 있었어. 두 부대는 한 부대에 인원이 100명 정도씩 있었어. 우리가 박쥐부대고, 우리 밑에가 땃벌, 이렇게 4개 부대가 있는 곳인데 여기는 민간인 통제구역이고 정말로 인간개발이 되는 거야. 25인용 텐트 쳐놓고 생활하면서 정말로 모진 교육을 다 받는 거야. 등에는 30㎏ 모래배낭을 짊어지고 양발에는 1.5㎏짜리 모래주머니를 차고, 그렇게 생활하는 거야. 거기서 교육을 받는데 산악훈련, 독도법, 사격 등을 배워. 사격도 AK 사격이야, 국산권총은 만져보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봉술, 태권도, 호신술 특공무술, 해검법(열쇠 따는 것), 통신 모스 부호, 민사심리(유사시에 적지에 들어가 그 지역 인민들을 동조하게끔 하는 전술), 절취도 훈련받아. 절취는 시내로 교육을 나가지.

그리고 흔적인멸과 폭파교육을 받았어요. 그것만 계속 반복적으로 받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게 산악하고 독도법하고 폭파야. 그것만 집중적으로 배우다가 팔리기 시작하는 거야.”

─그런 훈련을 받는 사람들이 많았나요?

“내가 68년 7월29일 들어갔어요. 그런데 우리 선배들은 68년 3월부터 들어와 있었어. 68년 1월달에 김신조가 넘어왔거든. 그해 1월21일날 말야.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러면 안 되겠다, 우리도 만들자’고 지시해서 그런 부대를 만든 겁니다. 이렇게 되니까 3월 4월에 들어온 팀이 도깨비부대 1기, 5월 6월 들어온 게 번개부대, 7월 8월이 우리 박쥐부대고, 우리 뒤로 땃벌이가 있었어. 69년 1월이 되니까 1기가 ‘팔리는’(작전에 투입되는) 거야. 나를 가르친 팀장이 1기를 데리고 웅천대로 팔렸다고. 8명을 데리고 팔렸는데 걔들을 교육시키다 보니까 우리 생각이 나는 거야. 우리는 좀 늦게 들어갔어도 정말로 잘했어요. 진짜 날고 기었다고. 김신조는 산악훈련 팔부능선으로 1시간에 30㎞ 간다고 그러지만, 우리도 25㎞는 갔다고, 밤에 말야. 그러니까 이 양반이 우리 생각이 나거든. 그래서 우리 기수에서 6명이 1기 선배들에 합류되고 다시 거기서 최종적으로 4명이 차출된 거야. 거기에 내가 끼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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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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