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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취재|박정희기념관 파문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 조성식mairso2@donga.com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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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불길이 뜨겁다. 지난 9월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학계 언론계 노동계 문화계 등 각계 247개 단체의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결성으로 기세를 떨친 이 운동은 최근 서울 문래동의 문래공원에서 벌어진 박정희 전대통령(이하 박정희) 흉상 철거 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국민연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념관 반대운동을 범국민 차원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1월8일 오후 문래공원은 적막감과 평화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칼바람이 공원 여기저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낙엽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놀이터에선 몇몇 아이들이 한가롭게 미끄럼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오랜 세월 인간들의 삶을 지켜봐왔을 성싶은 아름드리 고목들의 연륜에 위압감을 느끼며 문제의 박정희 기념탑이 자리잡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래공원의 박정희

문래공원은 약 7000평.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 따르면 하루 평균 700∼800명의 시민들이 찾는다. 자연학습장과 놀이터 동물원 등이 주요 시설물이다. 공원 정문 쪽에서 박정희 기념탑 쪽으로 가다보면 금계와 인도공작, 일본원숭이 등이 놀고 있는 동물원이 눈에 띈다. 그 앞에서 직원 한 사람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기자는 그의 왼손 손가락 두 개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언론에 보도된 윤아무개씨(52), 바로 그였다.

보도에 따르면 윤씨는 3일 전인 11월5일 낮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5개 기관·단체 회원 30여명이 이 공원에 세워져 있던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때 이를 저지하다가 전치2주의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기자가 “얼마나 다쳤냐”며 아는 체를 하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더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잰걸음으로 동물원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따로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손가락이 부러진 건 아니고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간 정도”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김용삼씨(50)에게 적용된 폭행 혐의는 바로 이 손가락 상처와 관련된 것이다.

동물원을 지나 20발짝쯤 걸으면 박정희 기념탑과 마주친다. 공원의 거의 동쪽 끝이다. 몸통인 흉상이 떼어진 기념탑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높이는 2m쯤 될까. 윗부분에 흉상과의 연결고리인 듯싶은 철근 2개가 삐죽 솟아 있다. 탑 앞면엔 ‘5·16 혁명발상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이 이곳에 세워진 배경은 이렇다. 5·16 당시 이곳엔 서울을 관할하는 육군 제6관구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 별 두 개를 단 박정희는 이듬해 6개월 동안 6관구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런 인연으로 6관구사령부는 5·16 당시 쿠데타군의 지휘부 구실을 했다.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1966년. 6관구사령부의 요청으로 홍익대 조소과 최기원 교수(65)가 제작했다. 이번 흉상 철거 사건에 홍익대민주동문회가 관련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기념탑 뒷면엔 문인 박종화(1981년 사망)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이 새겨져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7.7‘



DJ의 선거공약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숙제인 박정희. 그는 과연 한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1961년 5월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당시 44세)는 일단의 군대를 끌고 한강을 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한국사회는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포박됐다. 3선개헌, 유신헌법 제정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통치기간을 연장한 그는 1979년 10월26일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서야 절대권력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절대권력의 혼란기를 틈타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헌법 전문에서 ‘5·16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박정희와 다름을 애써 강조했다. 이후 상당수 한국인들은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구국의 결단’이라던 5·16은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혁명이 아닌 불법 쿠데타로 굳어졌고, ‘민족중흥의 지도자’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입에서 박정희 기념관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7년 대선 유세 때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경북 구미를 방문, 박정희의 생가를 둘러본 후 그 지역 유권자들에게 박정희 기념사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 추진은 이처럼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해 5월13일 대구를 방문한 김대통령은 이의근 경북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적극 지원할 의지를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은 곧이어 5월19일 김대통령이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지시한 직후 싹트기 시작했다. 5월20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역사의식에 왜곡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대구참여연대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등 대구 지역 시민단체들도 반대성명을 냈다. 또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는 “김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투쟁을 하다 의문에 싸여 죽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며 지원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 7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신현확 전국무총리가 회장을, 김대통령이 명예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민회의 권노갑 고문(현 민주당 최고위원)과 자민련 김용환 의원(현 한국신당 대표) 및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현 한나라당 부총재)이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비(100억원)와 기념사업회 운영비(5억원) 등 모두 105억원을 2000년 예산에 책정했다.

10·26 2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25일 서울에선 두 가지 상반된 모임이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선 옛 공화당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어록집(‘우리도 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반면 정동의 세실 레스토랑에선 전국역사학자모임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자 1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국고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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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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