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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은 없고 권력투쟁만 있다

DJ정권·한나라당·자민련의 이념적 현주소

  • 김만흠

이념은 없고 권력투쟁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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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정당정치에서 이념적 차별성은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정당의 분화는 시민사회의 특성이나 이념의 차별성에 근거하지 않고 권력투쟁을 둘러싼 분화였다.
  • 즉 집권세력과 이에 도전하는 세력의 여·야 대립구조였다. 여·야 자체가 구체적인 개념이나 성향을 갖는 개념은 아닌 것이다.
최근 민주당 의원 17명과 한나라당 의원 4명 등 여야 국회의원들이 합세해 ‘국가보안법 폐지안’에 서명하고 이를 정기국회에 상정하면서, 각 당에서 이를 둘러싼 논란이 제기되었다.

특히 한나라당의 경우 ‘민주당은 노동당의 2중대’라는 김용갑 의원의 발언 파문에 이어서, 일부 의원이 국보법 폐지안에 동조함으로써 당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여기서 한국의 정당들에서 이념이란 무엇인가, 즉 한국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이 정치이념적 공간을 제한

이념의 차원과 수준과 기준은 보수와 진보(급진), 우익과 좌익, 민족주의에 대한 시각, 민주주의, 시장경제와 국가개입, 개발론과 환경론, 페미니즘 등에 대한 신념이나 시각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이념은 정치현실에 대한 인식과 미래의 비전에 대한 가치체계 및 신념이다.

그동안 한국의 정당을 두고 이념이 없었다는 지적은, 우리의 정치인과 정당들이 정치현실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나 미래의 비전에 대한 신념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사적 연고나 1차원적인 권력게임에만 초점을 맞춰 행동해온 데 대해 비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정치인들이 권력게임의 조건에 따라 여당에서 야당으로, 또 이 당에서 저 당으로 쉽게 이합집산했던 것을 보면 이러한 지적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5대 국회만 하더라도 전체 의원들의 25% 정도가 소속 정당을 바꿨다.

물론 정당의 정체성이 반드시 이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정당은 정치권력을 획득, 유지, 확장하는 정치활동 조직이다. 따라서 정치권력 투쟁에서 이념이 유용한 자원이 될 때, 그것은 정치인이나 정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주요 변수가 된다.

최근에 다시 불거진 우리 정당들의 이념적 정체성 논란은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더 넓은 차원에서는 한국의 정당정치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받고 있는 과도기적 혼돈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알다시피 한국의 근대정치는 이른바 좌우익의 이념투쟁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이념투쟁은 국제적 냉전체제와 맞물리면서 남북분단으로 귀결되었다. 남쪽은 우익세력이 지배하는 정권으로, 북쪽은 좌익 정권으로 분단된 남북 대립체제는 남북 모두의 정치과정에 이념적 지평을 극도로 제한했다. 다원적 이념을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 체제의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다원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남한에서도 좌익적 정치이념은 반체제적인 것으로 불법시되었다.

남북분단의 대립체제에 따른 정치인들의 성향과 국가체제의 특성 때문에 한국 정당정치는 그 이념적 지형이 우익 일변도로 돼버렸다. 또 대의정치의 궁극적 자원인 우리의 시민사회도 정치이념을 제한하는 데 크게 작용했다. 6·25전쟁 경험과 함께 일반 국민들에게 ‘레드콤플렉스’가 내재하는 배경 위의 대의정치 체제에서 좌익 정당이 자리잡기 불가능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 통치와 박정희 정부 이래 계속된 국가주의적 동원전략은 우익 체제 내부에서 그나마 다양한 이념의 활동 공간을 더욱 억압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정당정치에서는 이념적 차별성이 별 의미를 갖지 못했다.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정당정치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분파적 주장과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불필요하다는 것. 이른바 ‘일민주의(一民主義)’ 주장이었다. 물론 이승만은 얼마 안 가서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집권여당이라 할 수 있는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다른 명분도 내세웠지만, 권력투쟁을 위한 도구로서 의회를 지배하고 국민들을 동원하는 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정치에서 정당의 분화는 시민사회의 특성이나 이념적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정치세력간의 직접적인 권력투쟁을 둘러싼 분화였다. 즉 집권세력과 이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세력이 대립하는 여야 대립의 구조였다. 여야 자체가 구체적인 이념이나 성향을 담고 있는 개념이 아니다. 다만 현재의 집권세력과 이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세력의 구분일 뿐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의 비민주적 통치가 장기화하고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여당과 야당은 각기 하나의 정향을 갖는 정치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여당은 안정과 안보, 또는 경제성장 등을 주요 정치명분으로 주장했다. 야당과 그 지지세력은 여당을 비민주세력,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야당은 민주화를 주요 명분으로 제기하였고, 그 자신들도 민주화 세력임을 자임했다. 이런 대립 구도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 기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의 3당 합당, 14대 대선에서 정주영의 국민당 창당과 대권 도전,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등으로 전통적인 여야의 개념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5대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되며 처음으로 여야간의 위상이 바뀌었다.

여야 관계와 지역주의의 혼재

물론 이 기간에 여야의 축을 넘어서는 정치세력이나 정당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승만 정부 때 등장했던 진보당으로부터 최근의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진보적 이념의 정당은 계속 있었다. 또한 제도적 이념틀의 한계 속에서 진보적, 급진적 세력들이 반합법, 비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앞서 지적한 한국정치의 환경 속에서 정당정치의 중심으로는 진입하지 못했다. 4·19 직후 열린 환경으로 인해 1960년의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정당활동이 가장 두드러졌었다. 그럼에도 당시 선거에서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 진보계열 정당들의 득표율은 민의원 6.8%, 참의원 3.4%에 불과해 각각 233석 중의 5석과 58석 중의 2석을 차지했을 뿐이었다. 이후 5공화국 초 전두환 정권이 의도적으로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국회의원 2명을 제도에 편입시킨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진보정당의 제도적 진출은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렇듯 그동안 한국의 정당정치는 여야를 축으로 한 대립과 경쟁의 구도였다. 여기에 1971년의 대통령 선거부터 두드러졌던 지역주의가 1987년 13대 대선을 거치면서 정당체제로 자리하게 되었다.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는 지역주의와 여야관계가 혼재했다. 5공화국 이래의 집권여당인 민정당이 대구·경북의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삼고 전통적 야당의 한 분파인 김영삼과 민주당이 부산·경남의 지역주의를, 다른 한 분파인 김대중과 평민당이 호남의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통적 집권여당의 일원이라 할 수 있는, 주로 박정희 정권 때의 여당 세력을 계승한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이 충청권을 주요 기반으로 삼았다.

여야관계와 지역주의가 혼재하던 당시의 정당체제는 여야관계의 입지와 각 지역주의의 특성에 따라 차별성이 있었다. 민주당과 평민당은 민주화를 정치적 과제로 삼고 있었으며 전통적 민주화운동 세력이 주류를 이루었다. 지지기반으로 보았을 때는 민주당과 평민당 간에 차이도 있었는데, 지역적 특성과 맞물리면서 민주당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엘리트 및 상위계층의 지지가 많았다. 집권여당 민정당은 안정과 안보를 강조하면서 기득권세력을 옹호하게 되는 전통적 여당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공화당은 구성과 성향으로는 전통적인 집권여당의 특성을 보이면서도 야당의 위치에 있는, 모호한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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