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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春秋 전문입수

“박정희, 다나카 총리에게 4억엔 바쳤다”

27년만에 드러난 金大中 납치사건 韓·日유착 현장

  • 기무라 히로야스(木村博保)

“박정희, 다나카 총리에게 4억엔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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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년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의 일부 진상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밀사였던 이병희 전 무임소장관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연결해준 인물의 증언으로 최근 공개됐다. 다나카 총리의 핵심 측근으로 ‘리틀 가쿠에이’라고 불렸던 기무라 히로야스씨가 그 주인공. 그는 박대통령의 밀사가 다나카 총리에게 수억 엔이 든 종이 가방을 건네는 장면을 마치 영화를 보듯이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신동아’는 일본 시사월간지 ‘문예춘추’ 2월호에 실린 기무라 히로야스의 글을 전문 소개한다. <편집자>
작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오랜 세월 야당에 몸담고 있으면서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김 대통령에게 동시대인으로서 존경심을 품고 있던 필자의 감개는 남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필자는 개인적으로 김대통령을 만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에 관여한 적이 있다.

1973년 8월 8일, 당시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피신한 김대중씨는 구단(九段)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했다. 김씨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8월 13일. 장소는 서울에 있는 김씨의 자택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정치가가 자유 의지에 의한 귀국이 아니라 납치됐다면 그 책임은 한국에 있는 것이며, 사건 발생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원상회복’, 즉 김대중의 재 도일(渡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본 국내에서 높았다. 그것은 법치국가로서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측은 가까스로 신병을 확보한 김대중씨를 또다시 해외로 내보내기를 꺼렸다. 게다가 김대중씨는 8월 16일부터 자택 연금 상태였다.

따라서 한일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하게 됐다. 같은 해 11월2일, 한국의 김종필 당시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에게 사죄하는 ‘정치 결탁’이 이루어지기까지 공식·비공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복잡미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과 일본을 부지런히 왕래했다. 여기서 소개할, 필자의 직접적인 중개 하에 전개되는 내용은 이 복잡한 교섭의 종막에 해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치적 결탁 직전, 메지로(目白)에 있는 다나카 수상의 관저에서 한국에서 온 밀사가 다나카 총리에게 박대통령이 보낸 친서와 수억 엔의 현금을 건네주었다. 그 중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필자는 지난 27년간 이 사실을 가슴속에 비밀로 간직한 채 지내왔다. 이 사실을 입밖에 낸다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은 물론, 정계를 뒤흔드는 대 스캔들이 될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사건으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필자가 스승으로 모셨던 다나카 총리를 비롯하여 이 숨겨진 드라마의 주역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필자 또한 올해로 74세가 된다. 필자는 이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야기될 파장보다도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이 어둠 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리는 것이 더 두려웠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된 것이다.

그때 납치사건을 둘러싼 한일 교섭의 키를 잘못 잡았더라면, 그 후 김대중씨가 걸어갔을 여정은 지금과는 같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필자는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뉴스를 접하면서 하게 됐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 두 개의 종이 가방에 넣어 건네준 수억 엔, 그 무게가 27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필자의 손에서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밀사’의 전화

1973년 가을, 필자의 자택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비교적 정확했지만 외국인 억양이 느껴지는 일본어였다.

“기무라 선생, 오랜만입니다. 저, 이병희입니다.”

“아! 네, 정말 오랜만이군요”하고 필자는 대답했다. 한국의 무임소(無任所) 장관이었던 이병희와는 그 지방 유지인 한 재일교포를 통해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니가타 현회(縣會) 의원이었던 필자는 60년대 말경 동료 의원의 적극적인 권유로 니가타현 한일 친선협회를 만들어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이 협회의 발족은 전국적으로 빠르게 진행됐고, 이때 필자가 만든 규약이 전국의 한일 친선협회의 모델이 됐다. 이 협회와 관련된 일로 이씨와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이씨는 당시 김종필 총리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다. 김총리가 중앙정보부(KCIA) 부장 시절에는 서울지부장을 역임했다. 한국과 일본의 국회의원으로 결성된 한일 의원연맹의 간사장을 맡고 있기도 했으며, ‘일본담당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일본과의 교류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잠깐 상의드릴 것이 있는데 좀 만나뵐 수 있을까요?”라며 지금 일본에 있다고 했다. 니가타현 근교에 있는 필자의 자택까지 이병희가 직접 찾아오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혼자서 니가타까지 찾아온 이씨의 ‘용건’은 그해 여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필자는 이 사건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필자가 관여해서 해결될 차원의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 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저희는 실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선생님, 뭔가 좋은 해결방법이 없겠습니까?”

이병희는 그렇게 말하며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필자는 “좋은 안(案)이나 마나 저같은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오죽하면 날 찾아 왔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역으로 “뭔가 대안이 있는 겁니까?”라고 되물었다.

이씨는 조금 뜸을 들인 후 “사실은 말이죠…”라고 말을 꺼냈다.

“선생께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동향(同鄕)이면서 가장 가까운 제자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총리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 일이라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필자는 일찍이 면장 시절부터 다나카 총리와 안면이 있었고, 가리와(刈羽)면의 월산회(越山會)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씨를 만나던 당시에는 이른바 그 지방의 정책 담당을 맡고 있었던 터였다.

“뭐, 그런 일이라면 어려울 것 없습니다”라고 필자는 대답했다.

“그분은 누구든지 만나줍니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대신 진정하러 가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는 점만은 감안하셔야 합니다. 메지로에 있는 수상 관저로 제가 모시고 가는 것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어딘가 요정같은 곳으로 모셔오거나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좀 복잡해지거든요.”

우리가 보통 때 진정을 하러 드나드는 것과 같은 형태라면 다나카 총리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정치가도 아마 드물 것이다. 사전에 약속을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필자의 대답에 만족한 것인지 몰라도 이병희는 그날 그대로 돌아갔다.

”선물을 준비해 가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이씨는 다시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구체적인 날짜를 정하자는 내용이었다.

납치사건으로부터 한 달 이상이 지난 때였고 한일 교섭은 이른바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다나카 이소지(田中伊三次) 법무대신 등은 ‘원상회복’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한국측은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외교관을 차례로 귀국시키면서 “조사 경과를 소상하게 보고하기 바란다”는 일본측의 요구에도 응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전 한국대사였던 가네야마(金山政英)와 한일협력위원회 회장으로 한국과 두터운 연결 파이프를 가지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 등이 서울을 방문해 일본측 ‘밀사’로서 암약하고 있었다.

이병희가 다시 니가타에 온 것은 10월 어느 날이라고 기억된다. 그때는 아직 상행선 신칸센(新幹線)이 개통되기 훨씬 전이었기 때문에 필자 집까지는 도쿄에서 나가오카(長岡)까지 특급으로 네 시간을 타고 와서, 나가오카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40분이 걸렸다. 거의 한나절이 걸리는 그 일정을 한 나라의 장관이 수행원도 없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필자는 한국 정부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속수무책인 사안의 해결책을 다나카 총리를 만나는 것으로 어떻게든 타결해보려는 의지가 느껴졌던 것이다.

그날 정오가 지났을 무렵, 필자는 응접실에서 이씨를 맞이하여 준비해 놓은 불고기와 브랜디를 대접했다. 마침 점심 때가 되기도 했고, 그날 이야기가 시간을 요할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방에서 필자는 그가 왜 다나카 총리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물어보았다.

“‘김대중 사건’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서는 최고위직 인사와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 현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원상복귀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 조치로서는 당연한 것이지요. 일본 처지에서 보면 국가의 주권이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왜 김대중씨를 일본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더니, 말꼬리를 흐리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사실 한국측에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털어놓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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