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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격돌|‘강한 정부’론

‘강력한 정부’가 경제 살린다

  • 황태연

‘강력한 정부’가 경제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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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정부는 ‘강한 정부’가 아닌 강력한 정부를 지향한다. 강력한 정부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강권’이 아닌 ‘권력’을 추구하는 정부, 강력한 정부란 무엇인가?
2001년 1월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힘으로 경제를 살리고 우리나라를 민주인권국가와 지식경제강국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강력한 정부’를 천명한 바 있다. “강력한 정부란 옛날 군사정권과 같이 물리력을 휘두르는 정부가 아니라, 정반대로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면서 문제를 대화와 양보로 풀어가는 정부’, 이것이 강력한 정부입니다. 반드시 민주원칙과 법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강력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국민의 정부는 ‘민주적이고 강력한 정부로서 원칙과 법을 준수하는, 그리고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라는 의미의 강력한 정부를 지향해 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천명한 ‘강력한 정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어떤 경우든 흔들림 없이 민주주의의 강력한 힘으로 국사(國事)를 풀어가는 의연한 정부로 요약된다. 대통령의 ‘강력한 정부’ 명제는 위와 같이 물리적 힘을 휘두르는 ‘강한 정부’를 경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이 ‘강력한 정부’론을 무슨 까닭에서인지 일제히 ‘강한 정부’론으로 둔갑시켜 놓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와 야당의 반발이 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의연하게 민주원칙과 법질서를 지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부’(powerful gover- nment)는 어디까지나 국민에 대해 강경한 정부인 ‘강한 정부’(hard or strong gov- ernment)와 대척이 되는 정부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강한 정부’를 선호하던 탓에 제 발이 저린 듯한 과거 권위주의 세력들의 비난은 허공에 쏘는 화살인 셈이다.

지난 3년간 정치권은 걸핏하면 정쟁으로 치달아 종종 정부와 경제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지체, 왜곡시켰다. 또한 정치권의 정쟁을 틈타 기승을 부리는 다양한 집단이기주의도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정부의 개혁작업을 가로막곤 했다. 2000년 말부터 경기하강이 시작되자 국민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더 세게 나가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잖은 지식인들도 혼란의 원인을 지나친 민주화와 유약한 민주정부에서 찾고 빈번히 ‘강한 정부’를 주문해 왔다.

그러나 강권을 휘두르는 ‘강한 정부’는 외견상 강한 듯하지만 내적으로는 참으로 취약한 정부일 것이다. 반대세력과 이익집단들의 다양한 요구를 옥석 구별없이 물리력으로 차단하는 것은 시민사회와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짓밟아 정보화 시대의 창의와 생산성을 저해하고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물리적 공권력 사용을 능사로 아는 ‘강한 정부’는 저항에 직면하여 결국 신뢰와 정당성을 잃고 붕괴되고 마는 취약한 정부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게 하라고 말하지만, 그러려면 강권을 써야 하고 결국 강권정치를 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강권은 실은 ‘양날의 칼’이다. 또한 강권 사용은 경제의 생명인 자율성과 시장경제 원리를 훼손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양날의 칼’ 같은 강권정치를 일삼던 ‘강한’ 권위주의 정부의 폐해를 군사정권 시절 뼈저리게 겪은 바 있다. 공권력 투입을 능사로 아는 ‘강한 정부’를 국민의 정부에 주문하는 것은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통해 탄생한 민주정부를 과거 유물인 권위주의로 되돌리라는 요구니만큼 불합리하고 위험한 것이다.



강권정치는 ‘양날의 칼’

대처총리가 내세운 영국식 권위주의의 ‘강한 정부’도 오래 가지 못한 채 치유할 수 없는 불신과 부작용만 만연시키고 국민 대다수를 고용불안과 빈곤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바 있다. 이것이 바로 대처가 ‘영국병’을 치유하고 경제를 살려냈으면서도 권력을 잃게 된 이유다. ‘강한 정부’의 참담한 좌초는 대처총리의 갑작스러운 실각과 1997년 보수당 정부의 선거참패로 입증되었다.

정치불안과 집단이기주의의 원인을 ‘지나친 민주화’에서 찾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인식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통해 집단이기주의를 억제해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을 낳는다. 또한 이런 인식은 은연중에 ‘민주주의는 유약하다’는 그릇된 관념을 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유약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강력한 것이다. 진정한 민주화에서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다다익선(多多益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민주정부는 집단이기주의로 인한 혼란과 일탈에 대해서도 ‘더 많은’ 강권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more democracy)’의 강력한 힘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집단이기주의는 어디까지나 국민여론의 힘에 의지하여 민주적 관용과 인내심,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 등 민주적 원칙을 바탕으로 한 끈질긴 협상력,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센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집단이기주의는 민주화의 산물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강력한 힘의 학습을 통해 치유돼야 할 일탈과 방종일 뿐이다.

‘질서자유주의(order liberalism)’라는 독일 특유의 새로운 시장철학을 제창한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은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 팽배했던 집단이기주의의 원인을 민주화로 보고 집단이기주의와 민주화로 인해 국가권력이 훼손되는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당연히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그의 해법은 ‘강한 정부’의 권위주의적 발상으로 귀착됐다. 이로써 그는 질서자유주의를 민주주의와 유리시켜 의도치 않게 나치의 집권을 방조하는 오류를 범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초대 서독 경제장관과 제2대 총리를 지내면서 전후 서독의 경제헌법과 경제원리의 창안을 주도, 서독 경제를 재건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는 오이켄의 권위주의적 해법 대신 ‘민주적’ 해법을 제시, 질서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강력한 서독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에르하르트의 철학은 시장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강화로 귀착한다. 그는 오이켄처럼 집단이기주의와 민주화를 인과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는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강력한 민주주의의 규범적 힘으로 집단이기주의를 이기려는 견해를 취했다.

에르하르트의 경제개혁 기본원칙은 외부로부터 시장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이익집단들간의 권력투쟁을 시장내부의 생산적 경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건전한 경쟁체제에서는 불로소득을 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 허용되지 않듯이, 경쟁논리의 훼손과 왜곡을 통해 얻는 치부(致富)는 이익집단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득과 소비는 경제적 기본권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보장돼야 한다. 경쟁원칙과 경제적 기본권을 유린하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해서는 강권을 사용해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경제적 기본권을 단호히 승인하는 민주적 국민여론에 의거하여 정부의 엄정한 민주원칙과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해 대처해야 한다.

‘권력’이 강한 정부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시민의식의 미성숙으로 인한 이익집단들의 갈등과 과도기적 혼란을 인내심과 관용으로 시민의식의 성장을 유도함으로써 극복하는 민주적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에르하르트가 말한 이 ‘민주적 질서자유주의’는 우리 헌법과 김대중 대통령의 대중참여경제론 및 ‘국민의 정부’의 ‘민주주의·시장경제·생산적 복지’의 3대 국정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왜 강력한가? 그것은 권위주의 정부와 정반대로 ‘강권’이 강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권력(Macht)’과 ‘강권(Gewalt)’을 명확히 구분한 바 있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t)에 따르면, ‘권력’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형성되는 지지와 동조, 신뢰와 연대감에 기초하는 데 반해, ‘강권’은 물리적 강압수단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력’의 크기는 지지·동조하는 사람들의 머리 수에 비례하는 반면, ‘강권’의 크기는 강압수단의 규모와 효율에 비례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는 나라가 민주화할수록 ‘권력’을 선호하고 ‘강권’을 가급적 멀리하는 방향을 취해 왔음을 보여준다. 서구 정부들은 누가 보아도 참으로 강력한 정부들이다. 권위주의 정부는 ‘강권’은 세되 ‘권력’은 거의 없는 무력한 정부인 반면, 민주주의 정부는 강권은 약하되 권력은 센, 진정으로 강력한 정부이다. 권력이 센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기 때문에 강력한 권력을 지닌다. 따라서 진정으로 ‘강력한 정부’는 강권을 휘두르는 정부가 아니라, 저항의 위험부담을 동반하는 강권의 사용을 예외적 사례에만 국한하고 주로 강력한 권력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정부인 것이다.

이런 ‘강력한 정부’는 두말할 것 없이 국민의 여론을 하늘처럼 받들고 언론자유를 철저히 보장하는 한편, 대화와 설득을 원칙으로 삼아 간단없이 국민의 지지여론과 신뢰를 창출해 나가야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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