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호

‘강력한 정부’가 경제 살린다

  • 황태연

    입력2005-04-26 15: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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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정부는 ‘강한 정부’가 아닌 강력한 정부를 지향한다. 강력한 정부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강권’이 아닌 ‘권력’을 추구하는 정부, 강력한 정부란 무엇인가?
    2001년 1월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힘으로 경제를 살리고 우리나라를 민주인권국가와 지식경제강국으로 도약시키기 위해 ‘강력한 정부’를 천명한 바 있다. “강력한 정부란 옛날 군사정권과 같이 물리력을 휘두르는 정부가 아니라, 정반대로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면서 문제를 대화와 양보로 풀어가는 정부’, 이것이 강력한 정부입니다. 반드시 민주원칙과 법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강력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국민의 정부는 ‘민주적이고 강력한 정부로서 원칙과 법을 준수하는, 그리고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라는 의미의 강력한 정부를 지향해 나갈 것입니다.” 여기서 천명한 ‘강력한 정부’는 의심할 여지 없이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어떤 경우든 흔들림 없이 민주주의의 강력한 힘으로 국사(國事)를 풀어가는 의연한 정부로 요약된다. 대통령의 ‘강력한 정부’ 명제는 위와 같이 물리적 힘을 휘두르는 ‘강한 정부’를 경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언론은 이 ‘강력한 정부’론을 무슨 까닭에서인지 일제히 ‘강한 정부’론으로 둔갑시켜 놓고 말았다. 이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와 야당의 반발이 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의연하게 민주원칙과 법질서를 지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강력한 정부’(powerful gover- nment)는 어디까지나 국민에 대해 강경한 정부인 ‘강한 정부’(hard or strong gov- ernment)와 대척이 되는 정부인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강한 정부’를 선호하던 탓에 제 발이 저린 듯한 과거 권위주의 세력들의 비난은 허공에 쏘는 화살인 셈이다.

    지난 3년간 정치권은 걸핏하면 정쟁으로 치달아 종종 정부와 경제의 발목을 잡고 개혁을 지체, 왜곡시켰다. 또한 정치권의 정쟁을 틈타 기승을 부리는 다양한 집단이기주의도 민심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정부의 개혁작업을 가로막곤 했다. 2000년 말부터 경기하강이 시작되자 국민은 더욱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과 정부가 ‘더 세게 나가야’ 한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잖은 지식인들도 혼란의 원인을 지나친 민주화와 유약한 민주정부에서 찾고 빈번히 ‘강한 정부’를 주문해 왔다.

    그러나 강권을 휘두르는 ‘강한 정부’는 외견상 강한 듯하지만 내적으로는 참으로 취약한 정부일 것이다. 반대세력과 이익집단들의 다양한 요구를 옥석 구별없이 물리력으로 차단하는 것은 시민사회와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짓밟아 정보화 시대의 창의와 생산성을 저해하고 국민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물리적 공권력 사용을 능사로 아는 ‘강한 정부’는 저항에 직면하여 결국 신뢰와 정당성을 잃고 붕괴되고 마는 취약한 정부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세게 하라고 말하지만, 그러려면 강권을 써야 하고 결국 강권정치를 하게 되고 만다. 그런데 강권은 실은 ‘양날의 칼’이다. 또한 강권 사용은 경제의 생명인 자율성과 시장경제 원리를 훼손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양날의 칼’ 같은 강권정치를 일삼던 ‘강한’ 권위주의 정부의 폐해를 군사정권 시절 뼈저리게 겪은 바 있다. 공권력 투입을 능사로 아는 ‘강한 정부’를 국민의 정부에 주문하는 것은 50년 만의 정권교체를 통해 탄생한 민주정부를 과거 유물인 권위주의로 되돌리라는 요구니만큼 불합리하고 위험한 것이다.





    강권정치는 ‘양날의 칼’

    대처총리가 내세운 영국식 권위주의의 ‘강한 정부’도 오래 가지 못한 채 치유할 수 없는 불신과 부작용만 만연시키고 국민 대다수를 고용불안과 빈곤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바 있다. 이것이 바로 대처가 ‘영국병’을 치유하고 경제를 살려냈으면서도 권력을 잃게 된 이유다. ‘강한 정부’의 참담한 좌초는 대처총리의 갑작스러운 실각과 1997년 보수당 정부의 선거참패로 입증되었다.

    정치불안과 집단이기주의의 원인을 ‘지나친 민주화’에서 찾는 것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태인식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통해 집단이기주의를 억제해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을 낳는다. 또한 이런 인식은 은연중에 ‘민주주의는 유약하다’는 그릇된 관념을 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는 유약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강력한 것이다. 진정한 민주화에서 ‘지나침’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다다익선(多多益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민주정부는 집단이기주의로 인한 혼란과 일탈에 대해서도 ‘더 많은’ 강권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more democracy)’의 강력한 힘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집단이기주의는 어디까지나 국민여론의 힘에 의지하여 민주적 관용과 인내심,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 등 민주적 원칙을 바탕으로 한 끈질긴 협상력,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센 힘으로 이겨내야 한다.

    집단이기주의는 민주화의 산물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강력한 힘의 학습을 통해 치유돼야 할 일탈과 방종일 뿐이다.

    ‘질서자유주의(order liberalism)’라는 독일 특유의 새로운 시장철학을 제창한 경제학자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은 독일의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 팽배했던 집단이기주의의 원인을 민주화로 보고 집단이기주의와 민주화로 인해 국가권력이 훼손되는 것으로 파악한 바 있다. 당연히 집단이기주의에 대한 그의 해법은 ‘강한 정부’의 권위주의적 발상으로 귀착됐다. 이로써 그는 질서자유주의를 민주주의와 유리시켜 의도치 않게 나치의 집권을 방조하는 오류를 범한 바 있다.

    이에 반해 초대 서독 경제장관과 제2대 총리를 지내면서 전후 서독의 경제헌법과 경제원리의 창안을 주도, 서독 경제를 재건한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는 오이켄의 권위주의적 해법 대신 ‘민주적’ 해법을 제시, 질서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강력한 서독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다. 에르하르트의 철학은 시장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강화로 귀착한다. 그는 오이켄처럼 집단이기주의와 민주화를 인과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양자는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강력한 민주주의의 규범적 힘으로 집단이기주의를 이기려는 견해를 취했다.

    에르하르트의 경제개혁 기본원칙은 외부로부터 시장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이익집단들간의 권력투쟁을 시장내부의 생산적 경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건전한 경쟁체제에서는 불로소득을 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 허용되지 않듯이, 경쟁논리의 훼손과 왜곡을 통해 얻는 치부(致富)는 이익집단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소득과 소비는 경제적 기본권으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보장돼야 한다. 경쟁원칙과 경제적 기본권을 유린하는 집단이기주의에 대해서는 강권을 사용해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경제적 기본권을 단호히 승인하는 민주적 국민여론에 의거하여 정부의 엄정한 민주원칙과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해 대처해야 한다.

    ‘권력’이 강한 정부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시민의식의 미성숙으로 인한 이익집단들의 갈등과 과도기적 혼란을 인내심과 관용으로 시민의식의 성장을 유도함으로써 극복하는 민주적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에르하르트가 말한 이 ‘민주적 질서자유주의’는 우리 헌법과 김대중 대통령의 대중참여경제론 및 ‘국민의 정부’의 ‘민주주의·시장경제·생산적 복지’의 3대 국정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왜 강력한가? 그것은 권위주의 정부와 정반대로 ‘강권’이 강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권력(Macht)’과 ‘강권(Gewalt)’을 명확히 구분한 바 있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t)에 따르면, ‘권력’은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형성되는 지지와 동조, 신뢰와 연대감에 기초하는 데 반해, ‘강권’은 물리적 강압수단에 기초한다. 따라서 ‘권력’의 크기는 지지·동조하는 사람들의 머리 수에 비례하는 반면, ‘강권’의 크기는 강압수단의 규모와 효율에 비례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역사는 나라가 민주화할수록 ‘권력’을 선호하고 ‘강권’을 가급적 멀리하는 방향을 취해 왔음을 보여준다. 서구 정부들은 누가 보아도 참으로 강력한 정부들이다. 권위주의 정부는 ‘강권’은 세되 ‘권력’은 거의 없는 무력한 정부인 반면, 민주주의 정부는 강권은 약하되 권력은 센, 진정으로 강력한 정부이다. 권력이 센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신뢰를 받기 때문에 강력한 권력을 지닌다. 따라서 진정으로 ‘강력한 정부’는 강권을 휘두르는 정부가 아니라, 저항의 위험부담을 동반하는 강권의 사용을 예외적 사례에만 국한하고 주로 강력한 권력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정부인 것이다.

    이런 ‘강력한 정부’는 두말할 것 없이 국민의 여론을 하늘처럼 받들고 언론자유를 철저히 보장하는 한편, 대화와 설득을 원칙으로 삼아 간단없이 국민의 지지여론과 신뢰를 창출해 나가야만 하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새해 첫 국무회의에서 21세기형 ‘강력한 정부’의 3대 요소를 ‘정도의 정치’ ‘법치의 정치’ ‘민생의 정치’로 정리한 바 있다.

    먼저 ‘정도의 정치’는 ‘민주주의의 정도를 걷는 정치’를 말한다. ‘정도의 정치’는 첫째, 국민여론을 최고의 격률(格率)로 삼고, 둘째, 시민의 자율성을 진작하고 강권을 최대한 배제한다. 셋째, 집단이기주의에 대해서는 국민여론을 배경으로 최대한 민주적 관용과 인내로 대처하고 민주적 원칙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을 통해 끈질기게 협상하여 합의를 이끌어낸다.

    국민여론을 최고의 격률로 삼는 정부는 “국민을 하늘처럼 받드는 정부”이다. 2001년 연두기자회견에서도 김대통령은 국민의 정부는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는 정부”라고 말했다. 민주주의가 인류의 보편가치로 정착한 21세기에는 이런 정부가 ‘강력한 정부’다. 국민의 여론을 최고로 두려워하며 국민을 하늘처럼 받드는 정부만이 국민으로부터 지지와 신뢰를 받는 정부일 것이고,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많이 받을수록 ‘권력’이 ‘센’ 정부이며, 진정으로 ‘강력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의 여론을 중시한다는 말이 ‘악마의 주술’ 같은 지역감정이나, ‘노벨상도 돈 주고 샀다’ ‘북한에 다 퍼준다’ ‘북한에 끌려 다닌다’는 유언비어와 같은 흑색선전과 불공정보도에서 유래하는 속론(俗論)들까지 다 존중한다는 뜻은 아니다. 합리적 논거에 바탕을 둔 공개토론과 쟁론이 보장된 공론장(公論場)에서만 형성되는 ‘여론(public opinions)’은 어디까지나 음지의 뇌동심리(雷同心理)로 형성되는 ‘속론(popular opinions)’과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여론’과 ‘속론’을 구별할 줄 아는 정부로 저급하고 편향된 ‘속론’을 배제하고 공정한 ‘국민여론’은 하늘처럼 받드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여론’과 ‘속론’은 구별해야

    다른 한편으로 하늘 같은 여론 형성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는 민주국가에서 철저히 보장돼야 한다. 동시에 이 신성한 자유는 모독당하거나 오남용돼서도 안 되고 특정집단과 특정인의 특권으로 축소, 변질돼서도 안 될 것이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의 권리이기에 앞서 국민의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론 자유의 오남용은 중대한 인권 문제인 것이다.

    의무 없이는 권리도 없다. 오늘날 언론의 자유는 사상 최대로 보장돼 있는만큼, 언론사도 공정한 비판과 책임 있는 보도를 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국민과 일반 언론인들 사이에서 언론개혁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거센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편, 21세기형 ‘강력한 정부’는 시장, 지식경제, 시민사회를 특징으로 하는 시민자율의 사회를 지향한다. 정부는 자율적 시장 메커니즘을 발전시키고 시민의 자발성과 자율적 기율(紀律)을 신장해야 한다. 강력한 시민적 자발성에서 ‘강력한 정부’가 나오기 때문이다. 시민의 자발성과 자율적 기율을 신장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일선에서 강권을 휘둘러 일도양단(一刀兩斷)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지식정보화와 무한경쟁의 시대다. 중앙정부는 약해지고 지방정부는 강해져야 하며 정부는 2선으로 물러나 민간을 앞세워 기업을 지원해야 한다.

    또 ‘정도의 정치’를 펴는 ‘강력한 정부’는 민주주의의 기본덕목인 ‘관용’을 실천하는 정부다. 관용의 실천은 최루탄, 유혈진압 등을 과거지사로 만든 국민의 정부에 맡겨진 정치적 사명이다. 민주적 관용은 집단이기주의도 이길 수 있다. ‘강력한 민주정부’는 하늘 같은 국민여론의 힘에 의거하여 집단이기주의를 관용과 인내로 대하고 모든 분규와 갈등을 민주적 원칙과 법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설득으로 푼다. 이해당사자들이 아집과 독선을 넘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양보와 타협정신을 바탕으로 끈질기게 협상하면 진정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정부는 끈기 있게 이를 지켜보고 독려해야 한다.

    위협과 강압으로 이루어진 합의는 조만간 깨지고 마는 법이다. 위협과 강압이 없는 가운데 자유로운 대화와 타협으로 얻은 합의야말로 진정 튼튼한 것이고 이런 튼튼한 합의에 기초한 정부가 진정 강력한 정부다. 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 끈질긴 협상과 합의의 원리는 국회 내의 여야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돼야 할 것이다.

    의약분업 분규가 준 교훈

    국민의 정부는 관용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공권력을 행사하라는 조급한 권고를 단호히 뿌리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모든 분규와 갈등을 해결했다.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인 의약분업도 대화로 이루어냈다. 일본 정부가 10여 년의 갈등 속에서도 끝내 실패한 의약분업을 국민의 정부는 4개월 반 만에 해낸 것이다. 관용과 대화의 민주적 힘은 이토록 위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의사폐업이 반복된 4개월 반 동안 조급증에서 아우성을 쳤고 또 어떤 이들은 정부가 준비도 없이 일만 벌여 놓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심지어 또 다른 이들은 정부가 ‘빼도 박도 못할’ 일에 된통 걸려들었다고 냉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약분업 분규에 소모된 4개월 반이라는 시간은 의약분업 같은 위업달성이라는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것이고 또 의약분업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불할 수밖에 없는 최소한의 사회비용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우자동차, 한국전력, 한국통신, 한국중공업, 철도청 등의 노사분규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됐다. 한국 금융계의 미래가 걸렸던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 문제도 노사 양측의 이성적 양보와 인내, 그리고 우리 경찰의 지혜가 하나로 모여 유혈충돌 없이 원만하게 해결됐다. 이를 통해 집단이기주의 및 노사문제에서 양측이 다 사는 상생의 신(新)노사문화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역사적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민주적인 정부는 갈등당사자의 정당한 권리를 확실히 보장하지만, 원칙을 어긴 부당한 권리 주장, 폭력, 불법은 용납하지 않는다. 정부가 민주적일수록 오히려 원칙을 더 확고히 견지하고 법치주의를 확실히 구현하여 불법과 폭력을 뿌리뽑는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정부는 최고로 강력한 정부인 것이다.

    따라서 ‘강력한 정부’는 ‘정도의 정치’와 함께 ‘법치’를 일관되게 실천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도 법을 지켜야 하고 언론인과 종교인, 시위대중과 시민운동가, 기업인과 노동자도 모두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대우그룹 같은 부실재벌의 사업주와 그 사장단이 처벌받는 마당에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도 법을 어기면 처벌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예외일 수 없다. 가령 노조가 경영에 간섭하는 것, 이익집단들이 불법·폭력시위를 벌이는 것, 스스로 합의를 어기고 원칙 없이 부당한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 법이 정한 절차를 무시하고 파업으로 치닫는 것 등 불법과 원칙에 반하는 행위에 대해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법치’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정부는 모든 문제에 관용과 인내로 대처하고 모든 문제를 원칙에 입각하여 끈질긴 대화와 설득으로 해결해 나가되, 이익집단 등 이해당사자들이 법과 원칙을 어기고 자기주장을 밀어붙이거나 정부의 관용과 인내를 악용하고 도리어 정부에 대해 역공작을 하려들 때는 엄정하고 단호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한 경우에 공권력 등 ‘최후의 이성’을 투입해서라도 계도에 나선다는 것도 함의한다.

    공자와 맹자도 김대중 대통령의 ‘정도의 정치’에 해당하는 덕치(德治) 또는 인정(仁政)을 기본으로 삼으면서도 예(禮)와 덕(德)으로 교화되지 않는 경우에는 최후수단으로 ‘법치’를 행하는 보완적 정형(政刑)의 불가피성을 인정했다.

    강력한 민주주의 정부는 이익집단들의 폭력, 불법행위,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의 침해, 대화를 거부한 실력행사 등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단호하고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권리 주장은 철저히 보장돼야 하지만, 불법과 폭력은 허용될 수 없다.

    국회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구현돼야 한다. 여야는 원칙적으로 관용과 인내, 대화와 설득, 양보와 타협을 바탕으로 국회를 공동으로 운영해야 한다. 여야는 의회주의 원칙과 국회법 및 국회윤리강령의 관점에서 법과 원칙에 합당한 안건을 제출해야 한다. 또 합당한 안건이라도 여야합의가 안 되는 경우에는 의회주의 원칙과 국회법 및 국회윤리강령에 따라 표결로 처리해야 한다. 이래야만 국회는 ‘강력한 생산적 국회’로 거듭날 수 있다.

    둘째, ‘법치’는 21세기 민주국가에서 법이 통하지 않는 이른바 ‘성역’을 용납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자의 불법이든 기업인의 불법이든 언론사와 언론사주의 불법이든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법이 정한 의무는 이들 모두가 이행해야 하고 정부는 법이 정한 대로 이들의 의무이행 여부를 조사하고 점검해야 한다.

    언론사 세무조사는 ‘법치’의 일환

    2001년에 시행되는 22개 중앙언론사에 대한 정기 세무조사도 ‘법치’의 일환이다. 물론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는 언론의 자유라는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안이므로 철저하고 공정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시행돼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원칙과 법치주의를 내세워온 대법관 출신 야당총재가 주장한 언론사 세무조사 중단 요구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언론사를 ‘성역’으로 남겨두자는 것으로, 그야말로 자기모순적이고 위법적인 주장이다. 또한 70%에 가까운 국민들이 현행의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셋째 ‘법치’는 정부와 민간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뿌리뽑기 위한 지속적인 사정(司正)이다. 이 사정 활동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성역 없이 지속적으로 시행돼야 한다.

    정부는 이미 여러 차례 공직자 비리를 조사, 적발하여 수만 건의 비리행위를 처벌한 바 있다. 정부는 2000년 12월 말부터 지난 1월까지 실시된 공직자 비리조사에서도 8200명의 비리행위자를 적발했다. 이중 449명은 금품수수, 향응, 공금유용, 횡령 등 뇌물 및 위법행위 사범으로 사법처리됐고 7760명은 업무부당처리, 복무규정 위반, 사생활 문란자 등 기강해이자로 징계처리됐다. 공직자의 청렴성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높여 시민들의 국정참여 의지를 고양하기 때문에 결국 민주주의를 강화한다.

    부실기업의 경우에도 업주와 관련자들의 비리를 철저히 조사하여 적발되면 예외 없이 사법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강력한 정부’는 부정부패와 비리에서 해방된, 그리하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한 정부여야 한다. 뇌물방지국제협약으로 국제적 차원에서 반부패운동이 본격화된 21세기는 청렴(淸廉)도 국력이다. 따라서 ‘강력한 정부’와 국력신장을 위해 반부패기본법의 제정과 시행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강력한 정부’의 셋째 요소는 ‘민생의 정치’다. 민생을 적극적으로 챙기는 정부는 민심을 얻고, 민심을 얻는 정부는 강력하기 때문이다.

    ‘민생의 정치’를 펴는 정부란 예전처럼 정부가 민생 차원에서 공적 서비스와 재정적 지원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하는 정부가 아니라, 민생을 적극적으로 챙기는 ‘능동적 정부’(active government)를 뜻한다. 이 ‘능동적 정부’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의 주요 정부들도 채택하고 있는 21세기의 정부운영 원리다.

    세계화·시장화·정보화와 이에 따른 리스크에 대처할 수 있는 시민들의 새로운 노동능력과 모험능력(risk-taking capacity)을 정부가 강화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구조조정을 완료하고 지식정보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민생을 적극적으로 챙기는 ‘능동적 정부’ 원리의 실천이 절실하다.

    우리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벤처·중소기업 육성, 창업지원, 인적자원 개발과 교육·훈련,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생산적 복지 정책, 정부 서비스 개선 정책 등은 ‘능동적 정부’의 정책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민생을 앞장서 챙기는 ‘능동적 정부’의 원리는 올해의 경제난과 실업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더욱 강화돼야 할 것이다.

    그간 국민의 정부는 벤처창업을 지원하여 벤처기업을 일으키고 인터넷 사용능력과 컴퓨터 보급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올렸다. 또한 건강보험 통합 등 4대 보험체계를 완비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제정, 시행하여 민생의 기본토대를 튼튼히 하고 중학교 및 유치원 교육을 의무화하였으며, 교육복지를 강화했다. 나아가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확대, 개편하고 해당 부처의 장(長)을 부총리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특히 정보화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인터넷 사용 인구비율이 일본 14%, 대만 18%, 홍콩 17%, 중국 0.7%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34%에 달한다. 초고속정보통신망을 이용하는 인구는 일본이 40만 명, 미국이 500만 명, 우리는 300만 명이다. 미국의 인구가 우리보다 4배 많은 것을 감안하면 초고속망 이용 인구비율에서는 우리나라가 세계 1위인 셈이다. 또 PC방이 2만 개나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능동적 정부운영으로 ‘민생의 정치’를 펴는 대통령과 국민은 이미 다대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것은 비록 우리 경제가 지금 냉각 국면에 처해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우리나라의 이런 성과와 잠재력을 고려할 때 현재의 경제난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객관적 자료들이다. 이런 전망에서 ‘민생의 정치’를 2001년에 더욱 강화하여 ‘강력한 정부’의 튼튼한 초석으로 삼고 국민의 정부의 올해 국정지표인 ‘지식경제강국의 구현’과 ‘중산층과 서민의 보호’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강력한 정부’로 2001년을 대도약의 해로 만들자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단계는 대도약과 대추락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 정부가 조만간 철저한 구조조정을 완료하여 올해의 불황을 이기고 경제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정보화를 제일 먼저 달성하여 지식경제강국을 건설하고 민족화해와 평화협력을 바탕으로 유라시아와 태평양을 잇는 신(新)통상국가와 한반도 통합경제권을 구축함으로써 세계중심국가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우리 국민은 향후 30여 년 동안 대번영의 시대를 구가할 수 있다.

    우리는 1962년에서 1966년까지 짧은 기간에 땀흘린 대가로 ‘시동 걸기’에 성공한 산업화 물결이 이후 30년 가까이 중진국 수준에서 번영하는 발판이 되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지체로 올해의 경기냉각 국면과 경제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앞서 정보화를 실현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나라는 다시 변방으로 밀려나는 대추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 것이다.

    말하자면 올해가 우리나라의 30년 미래를 좌우하는 해가 될 전망이다. ‘강력한 정부’의 국정운영 기조는 지금까지의 놀랄 만한 정보화 성과를 더욱 발전시키고 우리 국민의 거대한 잠재력과 저력을 현실화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강력한 정부’ 운영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능히 올해를 대도약의 해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이 올해 한번만 더 저력을 발휘하여 희생과 고통을 감내한다면, 우리 경제는 연말부터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여 내년이면 회생기조에 들어 갈 것이다. 나아가 2001년 한 해의 희생과 고통은 현세대만이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도 향유할 30년 민족대번영을 앞당기는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근대화에 뒤처졌던 약소국의 아픔을과거로 흘려보내고 대한민국을 세계중심국가로 도약시키는 역사적 위업달성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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