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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취재

“1호 동지를 사수하라”

김정일 서울답방 2박3일 총력 경호작전

  • 이정훈 hoon@donga.com

“1호 동지를 사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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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답방이 가시화되고 있다. 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호. 경호에 실패하면 단순한 회담 실패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에는 6·25전쟁 이후 가장 짙은 戰雲이 감돌게 된다.

대통령 경호실은 2차 회담을 완벽히 경호할 수 있을까? 63년 창설된 대통령 경호실은 驚天動地할 사건을 네 차례나 겪으며 성장했다. 북한군 특공대의 청와대 기습사건(68년 1·21사태),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74년 8월15일), 김재규 정보부장의 박대통령 저격사건(79년 10·26사건), 북한군 정찰국 요원에 의한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 (83년 10월9일)이 그것이다.》

이 4대 사건 중 10·26을 제외한 3건은 북한에 의한 도발이었다. 4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경호실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신동아는 베일에 가려 있는 4대 사건의 비밀을 최초로 밝히고, 경호의 관점에서 이를 냉정히 분석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과 2차 남북정상회담 경호의 방정식을 풀어보았다.

지난 2월14일 중앙일보가 보도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2월 말 답방 가능성’ 보도는 오보로 판명되고 있다. 하지만 김위원장의 올 봄 답방은 가시화돼가는 분위기다. 지난 1월 김위원장은 이미 개혁·개방의 길을 달리고 있는 중국을 방문했다. 이는 남한 답방을 위한 ‘예행연습’으로 해석된다. 지난해에도 김위원장은 평양에서 열린 1차 남북회담을 한 달 남짓 앞둔 5월, 전격적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제 바빠진 것은 남쪽이다. 한국으로서는 한미정상회담을 가진 후 김위원장을 맞아야,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를 매끄럽게 유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부시 정부와의 ‘연줄’이 짧아서인지, 한미정상회담 날짜를 신속히 잡지 못했다. 이정빈(李廷彬) 외교통상부 장관과 임동원(林東源) 국가정보원장을 미국에 보내는 등 총력 교섭을 벌인 후에야 겨우 날짜(3월7일)를 잡았다. 미국에 새 정부가 들어설 경우 대개 한미정상회담이 미일정상회담보다 빨랐지만, 이번만은 미일정상회담이 열린 후 한미정상회담을 갖게 되었다.

가장 큰 화두는 警護

한미정상회담이 열리고 난 후 김대통령은 올상반기중 김위원장을 맞아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들어간다. 이 회담은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라는 차원에서 의미가 크다.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는 곧 ‘한민족이 자력으로 평화통일을 모색하겠다’는 것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통일 모색 과정에는 숱한 암초가 널려 있다. 이러한 암초 중에서 가장 거대한 것은 ‘경호(警護)의 실패’다. 두 정상이 회담을 아무리 잘 했더라도, 경호에 실패하면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평양에서 열린 1차 정상회담은 ‘완벽한 통제’하에서 이뤄졌다. 하객은 물론이고 꽃술을 들고 김대통령을 환영한 평양 시민들조차도 엄격한 신원조회를 거쳐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두 정상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가능성은 애초부터 적었다. 그러나 2차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된 남한은 ‘사상의 자유’가 있는 세계다. 평양과는 경호 환경이 전혀 다른 것이다.

김정일이 서울에 오면, 환영하는 사람외에 반대하는 사람도 연도에 나갈 수 있다. 6·25전쟁 때 가족과 재산을 잃고 간신히 월남한 사람,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폭파된 것으로 알려진 87년의 KAL 858기 희생자 가족, 동진호를 비롯한 납북 어부자 가족,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벗어난 탈북자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김위원장에 대해 절대로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미 지난 2월1일 KAL 858기 희생자 가족들은, 김위원장을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해 놓았다.

이들이 김위원장을 향해 계란을 던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며칠 전부터 계란 판매를 금지하면, 책이나 신문지 혹은 주머니에 넣고 간 수첩을 던질지도 모른다. 모든 물품의 소지를 금지하면, 큰 소리로 욕을 퍼부을 수도 있다. 경호 당국은 이러한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겠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99년 6월3일 김포공항에서 일어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계란 세례 사건을 되짚어보자. 김 전대통령은 퇴임한 지 7년이 지나지 않았기에, 가장 경호를 잘 한다는 대통령 경호실의 경호를 받고 있었지만 ‘계란 테러’를 당했다.

세계사는 경호 실패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제1차 세계대전이다. 1914년 6월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는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을 맞고 절명했는데,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다. 역사에서 뭔가를 배우겠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철학이 있다면, 경호 당국은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뜻밖의 사태로 비화하지 않도록 ‘총력경호(總力警護)’하는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경호는 무조건 완벽해야 한다.

경호 관례를 무시한 1차 회담

더불어 이번 회담 경호는 북한의 경호 기관인 호위사령부에, ‘경호가 무엇인지. 신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1차 회담시 평양 측은, 경호 문제에 관해 우리에게 큰 ‘결례(缺禮)’를 범했다고 한다. 정상회담 일자가 잡히면, 양측 실무자들은 통상적으로 2달 전부터 정상회담에서 논의할 안건(Agenda)을 정하는 협상에 들어간다. 동시에 양측 경호 책임자들도, 방문자 측의 경호원 숫자와 소지 무기, 경호 방법 등을 협의한다. 이러한 협상이 타결되면 방문자 측의 경호 선발대가 주최국에 들어가, 자국 정상이 묵을 숙소와 방문지 등을 사전 점검한다.

그러나 1차 남북정상회담은 안건도 정하지 않고, 사전 경호 협상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열렸다고 한다. 남과 북은 지난 50여년간 적대관계였다. 그렇다면 더욱 경호가 철저해야 하는데, 우리측 경호 선발대는 북한 측이 반대하는 바람에 김대통령이 묵을 숙소나 회담장소 등을 사전 점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 간에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 주저하지 않고 북한에 들어갔다.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은 경호는 자기네가 책임질 테니, 남측에서는 최소한의 경호 요원이 최소한의 무기(권총 정도)만 갖고 들어오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이러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경호실은 남북대화를 트겠다는 김대통령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경호 세계만큼 철저히 ‘상호주의’가 지켜지는 곳도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 대통령이 방문할 때 5명의 경호원이 따라 들어갔으면, 저쪽 정상이 올 때도 5명의 경호원만 대동해야 한다. 적대 관계인 양측이 신뢰를 구축하려면, ‘무력(武力)에 있어서는 양측이 똑같이 한다’는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무력의 신뢰). 무력의 신뢰는 경호의 신뢰를 통해 쌓이고, 경호의 신뢰는 결국 철저한 상호주의 위에 쌓이게 된다. 1차 회담 때 우리 대통령이 경호 문제에 용단을 내렸으면, 이번에는 김위원장이 그만한 크기로 ‘통 크게’ 화답해줘야 한다.

2차 남북정상회담의 경호를 둘러싼 두 가지 문제 중 상호주의 부분은 남북 경호 당국이 벌일 앞으로의 회담에 맡겨놓기로 하자. 지금 말한 주제는 완벽한 경호다.

과연 대통령 경호실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완벽한 경호를 펼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한국 경호사(史)부터 찬찬히 살펴야 한다. 지난 30년간 압축성장해온 한국 경제에 경제의 모든 것이 녹아 있듯, ‘폭발적’으로 성장해온 한국 경호 역사에는 경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조선시대까지 임금을 지키는 것은 경호가 아니라 ‘호위(護衛)’로 불렸다. 대한제국이 생기자 비로소 근대적인 호위조직이 생겼는데 이때 황제를 호위한 것은 경위원(警衛院) 혹은 황궁경위국(皇宮警衛局)이라고 불린 경찰 조직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해 1948년 대한민국 정부를 다시 세우자, 대한제국 때의 전통이 되살아나 내무부 경무국(경찰청의 전신) 산하 경위부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호위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 1949년 2월23일 ‘경무대경찰서’가 창설돼 대통령에 대한 호위를 전담했다(경무대는 청와대의 옛이름이다). 그리고 그해 12월29일 내무부 훈령으로 ‘경호규정’이 제정되면서, ‘경호(警護)’라는 용어가 처음 쓰이게 되었다. 그러니까 경호는 경찰이 대통령을 호위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말인데, 경찰이 대통령의 신변을 호위하지 않는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1960년 4·19의거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내각제가 시작됐다. 권력이 대통령(尹潽善)에서 총리(張勉)로 이동하자, 경무대경찰서는 폐지되고 서울경찰국 경비과에서 경무대 경호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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