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국가와 시장의 갈등, 표류하는 DJ

지식인 21명의 진단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ixman@donga.com

    입력2005-03-22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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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와 시장의 갈등, 표류하는 DJ
    김대중 정권에 대한 이념시비가 한창이다. 돌이켜보면 한국 현대사에서 이념시비는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남북에 이질적인 권력이 들어선 이래 이념시비는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냉정하게 보면 정상적인 논쟁이라기보다 ‘좌파’에 대한 ‘우파’의 공세였다는 표현이 정확할지 모른다. ‘우파’는 때로 ‘매카시즘’ 수법을 동원하며 ‘좌파’를 억압하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이념시비에 가장 많이 휘말린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김대중 대통령을 들 수 있다. 그는 해방공간에서의 ‘행적’과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정치공약 그리고 군사정권하에서 벌어진 각종 시국사건 등으로 이념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대통령은 1971년, 1987년, 1992년 치러진 세 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했다. 그는 주요한 패인으로 ‘이념시비’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념시비에 관한 한 김대통령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정치인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진행된 이념시비는 어느 개인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김영삼 정권 시절의 ‘사상시비’와 성격이 다르다. 야당과 보수적인 성향의 지식인들은 정부의 정책기조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이념시비를 펴고 있다. 유력 언론사의 주필이 ‘좌·우 대립의 시대’라는 칼럼을 쓰는가 하면, 제1야당의 정책위의장은 공개적으로 ‘사회주의’라는 딱지까지 붙였다. 이것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신동아’는 김대중 정권의 각종 정책을 둘러싼 이념시비를 살펴보기로 했다. 물론 지식인 몇 사람의 주장을 근거로 김대중 정권의 이념을 분석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하지만 사안별 쟁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부족하나마 이념시비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동아’는 정책평가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각 분야 지식인들이 주요 매체에 기고한 글과 소속단체 등을 기준으로 인터뷰 대상자를 선정한 뒤, 8월3일부터 12일까지 대면 또는 전화로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는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진행했다. 총론에서는 김만제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제기한 ‘사회주의’ 논쟁에 대한 의견, 최근 김대중 정권을 좌파 또는 사회주의로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진 이유,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 기준, 김대중 정권의 총체적 이념 등을, 각론에서는 사회정책, 경제정책, 외교정책에 대한 평가와 이념적 견해를 물었다. 인터뷰에 응한 21명의 지식인 가운데 익명을 요구한 사람은 1명이었다. ‘신동아’가 인터뷰한 지식인 명단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구본태(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통일외교분과 부위원장·전 통일원 통일정책실장)

    김방희(경제평론가)

    김석준(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비전@한국 공동대표)

    김성훈(중앙대 농경제학과 교수·전농림부 장관)

    김세영(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비전@한국 공동대표)

    김연명(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남궁곤(동아일보 21세기평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류동민(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민병균(전경련 자유기업원장)

    서동만(상지대 교수·북한정치)

    성경륭(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

    손호철(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안석교(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

    유석춘(연세대 사회학과 교수·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자문위원)

    유승민(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이필상(고려대 경영학과 교수·함께하는시민행동 상임대표)

    장경섭(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한상진(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전정신문화연구원장)

    익명 답변자 1명

    질문1 한나라당 김만제 정책위의장이 촉발한 ‘사회주의 논쟁’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의장은 7월31일 인터넷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권의 정책에 대해 본격적인 이념공세를 폈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내세우는 신자유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이 이거 안 되겠다 싶어 시장기능을 가미한 것”이라고 말한 뒤 전교조 등을 사회주의적 집단이라고 규정했다. 김의장은 최근 김대중 정권의 경제정책을 “정육점 주인이 하는 심장수술”이라고까지 비하했다.

    한 가지 관심을 끄는 대목은 김의장의 발언 이후 지식인 사회에서 김대중 정권의 이념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는 점이다. 물론 지식인들 가운데 드러내놓고 김대중 정권을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상당수 지식인들이 비판의 근거로 삼는 이념은 ‘사회주의’보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에 가깝다.

    사회주의 vs 사민주의

    고전적 의미의 사회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며 계획적인 생산과 분배를 주장한다. 이에 비해 사민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공산주의와 동일한 의미로 쓰이다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등장한 이후 수정마르크스주의를 뜻하는 개념으로 발전했다. 오늘날 서유럽에서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경제 정책을 통틀어 사민주의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인터뷰에 응한 지식인의 상당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사회주의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지적했다.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김의장의 발언을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으로 평가했다. 서교수는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김만제씨 눈으로는 유럽의 ‘제3의 길’도 극좌로 보이는 모양이다. 한국의 냉전적 이념지형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도 김의장이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구별하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김교수는 “김대중 정권의 일부 정책들이 사민주의를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회주의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따지면 서유럽의 대다수 국가들이, 예컨대 독일 프랑스 영국 스웨덴도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라는 말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고려한 일종의 정치공세로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면 김석준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김의장의 발언에 일정 부분 공감을 나타냈다. 김교수는 “김의장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했다. 김대통령은 영국에 체류할 때부터 ‘제3의 길’을 주장한 기든스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그때 이미 정책의 기본방향을 그쪽으로 정했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주의적’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나름대로 근거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오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주의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김의장이 DJ정책의 사민주의적(또는 복지주의적) 지향을 사회주의라고 비판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유교수는 “신자유주의와 사민주의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이념인데, 김대중 정부가 두 가지를 동시에 추진하는 과정에 모순과 혼란이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유교수는 DJ정부에 참여한 많은 지식인들이 이념적 틀로 제시한 ‘제3의 길’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기든스의 ‘제3의 길’은 영국 노동당이 신자유주의로 변신하기 위해 사용한 ‘레토릭’일 뿐이다. 영국의 ‘제3의 길’도 두 가지를 혼합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토니 블레어가 국민을 설득하려고 사용한 수사에 불과하다. 유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지식인들은 이런 해석에 모두 공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이것을 헷갈리고 있다.”

    유승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과 안석교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김의장의 사회주의 발언과 관련, “적절한 용어를 선택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DJ정책에 대한 두 사람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김의장이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바람에 문제가 복잡해졌는데, 개념이 딱 맞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DJ정책에는 사회주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국가주의, 박정희식 경제논리, 관치경제 등이 뒤섞여 있는데, 그것을 사회주의로 묶어서 얘기하기는 힘들다.”(유승민)

    “김만제씨는 의사결정 과정의 문제와 특정한 정책이 시장경제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자는 주5일근무제, 후자는 사립학교법이 해당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비민주주의적 의사결정을 사회주의로 잘못 쓴 것이다. 또한 후자는, 상위가치인 자유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사회주의적 정책도 도입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안석교)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의장의 논리적 비약을 지적했다. 손교수는 “말이 안 된다. 경제학자 출신으로 집권 가능성이 있는 제1야당 정책위의장이 그런 무식한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김대중 정권의 국가개입이 좌익이고 사회주의적이라면 김만제씨가 일했던 박정희 정권은 공산주의란 말인가? 아무리 색깔론이라지만 정말 유치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김성훈 전농림부장관은 김의장의 발언을 진부한 ‘색깔론’으로, 이필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정치논리’라고 꼬집었다.

    “김만제씨 스스로 경제학자임을 부정하는 행태다. 덜 성숙한 학자가 정치를 했을 때 성격파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며칠 전 ‘시민의 신문’이 동물원에 간 김만제씨를 풍자한 것을 보았다. 원숭이 엉덩이가 빨간 것을 보고 김만제씨가 ‘여기도 빨갱이가 있구나’ 하고 외치는 그림이었다. 이번 상황에 딱 어울리는 것 같다.”(김성훈)

    “야당이 독한 말이라도 한번 해보자는 차원에서 그런 얘기를 한 것 같다. 정부 정책을 흠집 내서 차기 집권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겠다는 정치논리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정당에서 김만제씨가 했던 정책과 김대중 정부의 정책은 크게 봐서 다를 게 없다. 결국 김만제씨의 주장은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는 천박한 논리다.”(이필상)

    인터뷰에 응한 지식인 가운데 김의장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감한 사람은 민병균 전경련 자유기업원장 1명뿐이었다. 민원장은 “구구절절 맞는 얘기다. 사립학교법 개정안이나 재벌 빅딜 등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정책은 소유권과 운영권을 부정하고 자유시장경제의 권위를 공격하는 논리다. 정부와 시민단체가 펼치는 법개정 운동에는 다분히 좌익적 요소가 있다.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수년간 후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본태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통일외교분과 부위원장(현 한나라당 경기 김포시 지구당위원장)도 심정적으로는 김의장의 발언에 동의했다. 구부위원장은 “한 정치인의 우려 정도로 평가하고 싶다. 김대중 정부는 사회 저변층의 목소리를 확대하고 노동자들의 주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왔다. 이 과정에 새로운 사회계약의 틀이 짜이고 있는데, 여기에 자칫 친북 이데올로기가 스며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질문 2 최근 지식인 사회에서 김대중 정부를 ‘좌파’ 또는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부쩍 늘어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상진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과 손호철·성경륭 교수 등은 김대중 정부에 대한 이념시비를 ‘색깔론’으로 해석했다.

    손교수는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색깔론이 상대를 공격하기 쉬운 담론이라는 점, 과거부터 DJ와 DJ의 주변인물들이 진보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 수구적인 사람들의 눈에 DJ식 신자유주의가 ‘좌파’로 보일 수 있다는 점 등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지금과 같은 이념시비가 벌어졌다고 분석했다.

    한위원장은 “우리나라에서는 기분 나쁜 것을 색깔로 칠할 경우 쉽게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들도 이념의 배경이나 적절성을 무시하고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고 있다. 새삼 한국 지식인 풍토의 취약성과 오피니언 리더의 선정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또한 성교수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어떤 당파적 흐름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나라당은 자꾸 빨간 딱지를 붙이고 있다. 색깔과 관계가 없는 것을 자꾸 색깔로 몰아간다”고 비판했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과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색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이념시비가 확산된 원인으로 언론을 꼽았다.

    “사회주의 논쟁은 사실상 언론 때문에 나온 것이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신자유주의 논쟁이 있었다. 나는 사회주의 논쟁의 근거와 논리를 제대로 제시한 글을 본 적이 없다. 아마 김대통령도 사회주의라는 비판을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다.”(이종석)

    “이념을 말하면서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설득력 있게 김대중 정부를 좌파라고 비판하는 칼럼을 보지 못했다. 언론이 그런 논리를 키우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장경섭)

    DJ가 본색을 드러냈다?

    반면 유승민 소장과 유석춘 교수는 최근 들어 김대중 정권의 정책이 집권 초기와 달라졌다는 점을 주목했다. 1997년 대통령선거 직후에는 IMF 환란이 닥쳤기 때문에 독자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는데, 어느 정도 빚을 갚고 경제가 회복되자 본래의 색깔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권의 노선 변화에 따른 지식인들의 비판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이회창 총재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IMF의 처방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되찾으면서 이른바 생산적 사회복지정책 등을 추진했다. 만일 IMF가 없었더라면 초기부터 그런 식으로 나갔을 것이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신자유주의식으로 정리해고를 적극 추진했지만, 나중에는 정리해고를 자제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좌파적 경향으로 볼 수 있다.”(유승민)

    “정권 초반 2년은 IMF 구제금융의 조건을 따르다 보니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IMF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자 정부는 비교적 자유롭게 복지모델을 지향하는 정책들을 내놓았다. 집권 후반기에 김대중 정부의 이념적 지향이 드러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민주의적 요소가 있는 것이었다.”(유석춘)

    안석교 교수는 김대중 정권에 대한 이념시비를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파악했다. 일부 지식인들이 문제의 원인을 한쪽으로 몰아간다는 비판이다. 안교수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사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극단적 모형으로 접근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비인간적 특성이 있고, 사회주의는 역사의 심판이 끝난 체제다. 그래서 두 가지 모형을 보완해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도 사회주의적 섹터가 존재하지만, 우리처럼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교수는 김대중 정권이 이념적으로 오해받을 만한 구석이 있다고 말하고, 그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하나는 정치인 김대중의 ‘전력’이고, 다른 하나는 소외계층 보호정책의 등장시기다. 안교수의 주장을 더 들어보자.

    “아직까지도 김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전력을 두고 사회 일각에서는 대중중심주의라는 평가가 상존한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최근 시장경제체제와 호응하기 어려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만일 김대중 정부가 초반부터 소외계층 보호와 사회계층 통합에 주력했으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동만·이필상 교수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득격차가 심화된 부분을 지적했다. 실제로 경제전문가들은 이른바 ‘지니계수(상위 1%와 하위 10%의 소득을 비교한 계수)’가 1978년 이후 최악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됐다는 뜻이다. 서교수가 상류층의 대정부 비판현상에 관심을 보인 반면, 이교수는 서민층의 불신감에 주목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상위 10%는 소득이 더 늘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더 열심히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복지정책과 개혁정책이 자기들에게 손해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예방조치라고나 할까? 한나라당도 상위 10%를 대변하는 차원에서 그런 식으로 대응했다는 생각이 든다.”(서동만)

    “한국은 상위 10%가 하위 10%보다 9배의 소득을 더 올리는 나라다. 금융소득은 무려 21배나 된다. 정부가 복지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계속해서 국민의 부담만 커지다 보니 서민들의 감정이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이필상)

    김성훈 전장관과 남궁곤 동아일보 21세기평화연구소 상임연구위원은 김대중 정권의 태생적 한계에서 이념시비의 원인을 찾았다. 김 전장관은 “오랜 기간 형성돼온 호남 비토(veto) 분위기의 반영이다. 그들은 이 정권이 출범할 때부터 흔들었다”고 말했다. 또 남궁위원은 “이념시비에는 김대중 정권과 대립하는 비집권층, 비호남, 부유층, 기성세대, 반공주의자 등의 주장이 복합적으로 반영돼 있다”고 주장했다.

    무엇을 위한 논쟁인가

    한편 김석준 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포퓰리즘 성향이 이념시비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김교수는 “집권 초기에 펼치던 신자유주의 정책이 줄어들고 대중영합적 포퓰리즘 정책이 양산되면서 이념시비가 시작됐다. 때마침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의 대결이 벌어졌고, 보수적인 시각을 표명하는 메이저 신문에 김대중 정부를 비판하는 글들이 많이 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질문 3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우파’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남궁곤 위원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그는 “보수와 진보 개념이 한국에서는 역사적 경험과 관련돼 독특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보수와 진보의 잣대로는 한국의 이념적 대립구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궁위원은 “한국사회의 이념갈등은 권력갈등(집권층-비집권층), 지역갈등(비호남-호남), 계층갈등(부유층-빈곤층), 세대갈등(기성세대-신세대)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륭 교수도 한국현대사의 특수성을 주목했다. 성교수는 “한국에서의 이념갈등은 피맺힌 숙청과 연결돼 있다. 해방공간부터 좌파는 탄압을 받았다. 그런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좌우를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유석춘 교수는 “외국이나 한국이나 좌우를 구분하는 기준은 같다”고 말했다. 좌파는 마르크스주의, 우파는 시장경제가 중심이라는 것이다. 유교수는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사민주의에 대해 너무 ‘레드 콤플렉스’를 의식하는데 그들 스스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최장집 교수도 지난번 파동을 겪으며 자신은 ‘자유민주주의자’라고 했는데,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사민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신들과 색깔이 비슷한 정권에서 해야 될 것 아니냐. DJ정부에서 못 하면 언제 하겠다는 것인가. 지식인들이 기회주의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비해 김호기·김석준 교수는 서구의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김호기 교수는 시장제도와 전통에 대한 견해를 좌우의 기준점으로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전통을 존중하는 쪽이 우파, 케인스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하고 전통을 비판하는 세력이 좌파가 된다. 김석준 교수도 세 가지 구분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평등지향 쪽으로 갈수록,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사람일수록, 남북문제에 친화적일수록 좌파에 가깝다는 논지를 폈다.

    안석교·이필상 교수와 구본태 부위원장은 기본적으로 좌우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념보다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과거처럼 우는 자본주의고 좌는 사회주의라는 구분은 바람직하지 않다. 큰 틀에서는 자본주의로 가고, 극히 제한적인 부분에서 과도기적으로 사회주의적 요소가 개입하는 것이다. 좌우로 구분하는 방식은 통일시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안석교)

    “좌우를 나눌 수도 없고, 나눠서도 안된다. 한국적 현실에서는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 것말고는 없다. 논리를 갖고 편을 가를 때 이 나라에서는 권력이 이용하고 국민이 희생당할 뿐이다.”(이필상)

    “이념으로서의 좌우 논쟁은 이미 끝났다. 이제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좌우 논쟁이 더 중요하다. 인민을 굶주리게 하는 것이 좌라면 반대하는 것이고, 좌의 논리라도 국민들을 잘살게 만든다면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구본태)

    서동만 교수와 이종석 연구위원도 좌우의 구분을 무리하게 시도할 경우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서교수는 “개인적으로 색깔을 확실히 하는 것이 좋다고 보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냉전 의식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연구위원은 “우리 현실에서 좌우로 나누어 논쟁할 사안이 별로 없다. 좌우 구분은 자유주의적 개혁이 완성된 뒤에나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장경섭 교수는 한국사회에서 좌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 학문적으로는 마르크시즘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것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다양한 관점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장교수는 “국가보안법이 살아 있는데 어떻게 좌파가 있을 수 있나? 사회당 김철씨를 끝으로 좌파는 사라졌다. 민주노동당도 좌파는 아니다”고 분석했다.

    질문 4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총괄해서 이념적으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인터뷰에 응한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김대중 정권의 이념을 중도노선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의견이 조금씩 갈렸다. 성경륭 교수는 경제정책을 신자유주의, 복지정책을 사민주의적 성향으로 정리한 뒤 개혁적 측면과 친시장정책의 혼합이라고 말했다. 이필상 교수도 외국자본에 대한 대응은 신자유주의적이지만, 서민층 중심의 개혁은 사민주의 노선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적 ‘제3의 길’의 운명

    김호기 교수는 김대중 정권의 노선을 신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제3의 길의 한국적 변형’이라고 정리한 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김대중 정부가 좌우 양쪽으로부터 이념적 비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상진 원장은 “서구적 개념으로 보면 사민주의적 성향이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사회 내부에 잠재된 공동체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설명했다.

    서동만·손호철 교수도 김대중 정권의 노선을 ‘중도주의’로 보았다. 손교수는 “내용적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보다 더 우파에 가깝지만, 한국적 현실을 고려하면 중도우파에 해당할 것이다. 복지 자체가 없었던 한국에 복지정책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역대 어느 정권보다 진보적이지만, 신자유주의적 메커니즘이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현상은 과거보다 훨씬 심해졌다. 솔직히 박정희 정권과 김대중 정권의 모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보수적인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서교수도 “정부의 복지정책은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하지만 김대통령의 진보성은 집권한 뒤 오히려 퇴색했다”고 비판했다.

    장경섭 교수의 견해도 김대중 정권의 이념이 복합적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장교수는 김대중 정권의 복지정책을 진보적 측면이 아닌, 세계화에 따른 불가피한 변화로 파악했다. 복지정책이 한국사회 내부에서는 시민권 보장의 성격을 띠지만, 다국적기업이 한국경제를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수단도 된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권의 복지정책을 두고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유석춘 교수는 김대중 정권의 정책을 ‘잡탕’과 ‘혼란’이라고 혹평했다. 유교수는 “과거에 비해 좌파적 성격이 배어난 정책이 있지만, 그것을 욕할 일은 아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정책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하는데, 이거 할 때는 이 얘기, 저거 할 때는 저 얘기가 나오고 있다”며 일관성 부재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유교수는 “DJ정부는 박정희를 비판하면서 박정희와 똑같은 정책모델을 추진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박정희를 선배로 모셔야 할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승민 소장도 이념적 혼란을 거론했다. 그는 “유럽식 좌파와 질서자유주의의 혼합이 김대중 정권의 이념이기 때문에 순수한 혈통의 사회주의 노선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유소장에 따르면 DJ는 특별히 진보적인 사람이 아닌데 ‘대중경제론’ 같은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책을 쓰면서 주변에 진보적 지식인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유소장은 “이른바 친DJ 지식인들이 좌파 성향의 정책을 만들고 홍위병처럼 DJ를 지지하는 것이 사회주의 시비를 불러일으킨 배경”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 익명을 요구한 보수 성향의 지식인 L씨는 김대중 정권을 ‘좌익 정권’으로 정의했다. L씨는 “김대통령은 1997년 북한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이런 약점 때문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밀착돼 있다”고 주장했다. L씨에 따르면 남북정상회담, 대북한 경제지원, 통일헌법 논의 등은 모두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북한의 전략이라는 얘기가 된다.

    질문 5 김대중 정부의 사회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며 이념적으로는 어떻게 보십니까.

    넓은 의미의 사회정책은 모든 정책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번 평가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이래 특히 논란을 빚었던 복지정책과 교육정책만 포함시켰다. 의보통합과 의약분업 사태로 홍역을 치른 의료정책, 기존 생활보호법을 개선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사유재산권 침해 논쟁에 휘말린 교육정책 등이 그것이다.

    < 의료정책(의보통합·의약분업) >

    유석춘 교수는 의료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시민단체가 과도하게 개입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유교수는 “의료정책에 사회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지적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걸 무조건 비판할 일도 아니다. 중요한 건 우리 경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유교수의 비판을 더 들어보자.

    “전문가가 문제점을 지적하면 반개혁이고, 시민단체가 좋은 취지만 내세워 시행을 주장하면 무조건 개혁인가. 전문가에 의존하지 않고 시민단체의 논리만 앞세우다 보니 ‘홍위병’ 얘기가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김만제 의장이 ‘인민재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

    김석준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김교수는 “가진 자들의 혜택을 줄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혜택을 늘리는 것이 바로 평등주의다. 정부는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언론과 시민단체를 동원했는데, 그것이 포퓰리즘”이라고 주장했다.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시민단체를 홍위병으로 보는 논리를 반박했다. 김교수는 “외국의 사례에 비추어볼 때 시민단체가 법 개정을 주도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정치적 합의를 거쳐 공식적으로 합의된 법을 이념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의료정책의 실패는 정책의 패턴이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행정부가 제대로 적응을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장경섭 교수는 의료정책에 대한 이념시비를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평가절하했다. 장교수는 “그렇게 본다면 지구상에 사회주의 아닌 나라가 없다. 의약분업보다 훨씬 진보적인 정책은 의료보험제도 자체를 도입한 것이다. 그걸 누가 했느냐?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군사정권이 했다. 또한 김대중 정권은 수가인상을 통해 의사의 편을 들어주었고 수많은 영세민은 신음하고 있다. 이것이 좌파 노선인가?”라고 반문했다.

    < 국민기초생활보장법 >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국가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보호해야 하느냐, 아니면 시장 기능에 그냥 맡겨둘 것이냐 하는 점이고, 둘째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복지혜택을 베풀 것이냐는 부분이다.

    김연명·성경륭 교수는 국민기초생활보호법을 높이 평가했다. 김교수는 “생활보호법과 비교할 때 혁명적이다. 놀고 먹는 가짜 빈곤층이 사라졌으며, 근로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자활을 지원하고 있다. 비판을 하려면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적 부조 예산을 지적해야지, 복지정책을 편다고 사회주의로 몰아붙이는 무식한 발상이 어디 있느냐”고 주장했다. 또 성교수는 “생활보호법보다 국민의 기본권이 강조됐고 소득기준을 설정해서 실사 후 차액을 지급하는 과학적인 시스템이다. 왜 국가가 국민의 기초생활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느냐를 비판해야지, 그것을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무지한 논리”라고 지적했다.

    김호기 교수도 국기법을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으로 보았다. 김교수는 “시행과정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지만 하층계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다. 서유럽의 보수당 정부들도 이와 유사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념적으로 재단하기에 앞서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 바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김석준·유석춘 교수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다는 국기법의 제정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한계계층 보호제도를 도입한 시기와 방법은 비판했다.

    “경제가 호황일 때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경제가 위축되는 단계에서 높은 수준의 복지를 실시하려다 보니 부작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국가채무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에서 과도하게 보장해주는 것이 문제다.”(김석준)

    “세수확보, 지불능력 등은 전문가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정권이 홍위병을 내세우며 너무 조급하게 포퓰리즘적 정책을 내놓고 있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너무 몰아치고 있다.”(유석춘)

    < 교육정책(사립학교법) >

    장경섭·성경륭 교수는 사립학교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유석춘·김석준 교수는 사립학교를 법으로 규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사립학교 재단은 정부(교육부)에 소속된 공익기구이고 그 자산은 국가에 신탁된 것이며 국민 세금 없이는 학교운영이 불가능하다. 법과 현실이 그러한데도 학교를 개인 마음대로 운영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장경섭)

    “언론사의 소유 편집 경영 분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립학교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이것을 색깔론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보수적 국회의원이 사립학교와 밀착해서 반대자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논리다. 여기에 좌는 어디 있고 우는 어디 있느냐? 이런 문제에서 이념논쟁은 무의미하다.”(성경륭)

    “사립학교법은 문제가 심각한 학교를 고칠 수도 있지만, 문제가 없는 학교에 ‘옥상옥’을 만들 수도 있다. 교육에 관한 한 정부가 개입하지 말고 민간에 맡기는 것이 좋다. 전교조의 문제제기 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해결과정에 자꾸 국가를 끌어들이는 것은 문제다. 그렇게 해서 문제가 풀릴지 의문이다.”(유석춘)

    “교육정책에서 국가의 지나친 관여와 과도한 평등주의는 특정 지배세력의 이념을 확대재생산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교육정책에 대중주의가 많이 반영되면 자연스럽게 대중주의에 친화적인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김석준)

    경제정책은 비교적 이념적 지형이 분명하며 김대중 정권이 출범한 이래 꾸준히 논의가 진행된 분야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번 평가에서는 지식인들 사이에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 재벌정책, 노동정책, 구조조정정책만 포함시켰다.

    < 재벌정책(빅딜·국가개입) >

    이필상 교수는 시장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한 국가의 개입은 정당하다며, 빅딜을 사유재산 침해 논리로 보는 주장을 비판했다. 이교수는 “재벌의 논리대로라면 공적 자금도 국민의 돈을 빼앗아 부실기업에게 넘겨주었다는 얘기가 된다. 또 재벌은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성장했다는 계급투쟁의 논리도 가능하다. 그런 극단적인 주장은 사회적 혼란만 부를 뿐이다. 잘못된 정책을 비판해야지 이념적으로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류교수는 “재벌이 오늘까지 오는데 공정한 경쟁을 통해 성장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기들은 지금껏 온갖 특혜를 다 받았으면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려고 하니까 이제부터 공정한 경쟁을 하자는 건 모순”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유승민 소장과 김세영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정책이 정치논리에 의해 왜곡됐다는 점을 집중 거론했다.

    “빅딜이나 채무보증, 부채비율 기준 등은 반시장적 국가주의 노선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재벌을 꼼짝못하게 묶어놓고 물밑에서 부패한 정경유착이 진행됐다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정부와 잘 지낸 대우와 현대는 망하거나 위기를 맞았고, 정부와 갈등을 겪은 삼성과 LG는 경쟁력이 높아졌다. 이것은 잘못된 정경유착이 빚은 폐해로 봐야 한다.”(유승민)

    “경제가 정치논리에 종속되다 보니 선거를 위한 경제정책이 양산됐다. 시간을 두고 정책을 깊이있게 연구했다면 지금과 같은 비판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김세영)

    < 노동정책(노사정위원회) >

    류동민 교수는 노사정위원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이것을 이념적으로 공격하는 논리를 비판했다. 류교수는 “노사정위원회를 사회주의 모델로 몰아붙이면 유럽은 다 사회주의라는 얘기가 된다. 한국적 레드 콤플렉스가 빚은 해프닝이다. 정치적 효과를 노린 선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필상 교수도 노사관계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교수는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는 비정상적인 힘의 대결이다. 건전한 노사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국민이 위임한 정부가 중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노동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냥 탈퇴하는데 그게 무슨 사회주의냐?”고 반문했다.

    반면 민병균 원장과 김세영 교수는 국가가 노사관계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시장경제 원리를 거스르는 행태라고 주장했다.

    “노사가 법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데 정부는 자유시장경제를 무시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결과 노동자의 임금은 IMF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다. 단순논리로 보면 우리는 또다시 환란을 겪고 몰락할 위기에 처한 셈이다.”(민병균)

    “‘노사정’ 개념에서 ‘정’은 없어야 한다. 시장에 맡겨놓으면 기업끼리 경쟁하다가 적자생존에 의해 잘난 놈이 살아남는 것이다. 정부가 중간에 끼어서 오히려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김세영)

    < 구조조정정책(퇴출·합병) >

    이필상 교수와 경제평론가 김방희씨는 각각 ‘암수술론’과 ‘다이어트론’을 제시하며 중단 없는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두 사람 모두 김대중 정권이 도중에 구조조정을 포기하는 바람에 한국경제의 위기가 더욱 심화됐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구조조정은 암수술과 같다. 생명이 붙어 있는 한 뿌리까지 찾아서 잡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경제는 심각한 부분만 잘라내고 덮어버렸다. 대우 같은 기업은 집권 초기에 죽였어야 충격을 줄일 수 있었다. 계속 살려주다 보니까 금융기관의 부실을 부채질했다. 몸속에 남아 있던 암세포가 다시 퍼진 꼴이다.”(이필상)

    “2000년 1월부터 8월까지 김대통령은 남북관계에 관심을 쏟느라 상대적으로 경제에 무 관심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했기 때문에 상황을 낙관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다이어트를 하던 사람이 단식으로 체중을 줄였다고 해서 다이어트가 끝난 것은 아니다. 꾸준히 식생활을 조절하고 운동을 해야 하는데 우리 경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김방희)

    반면 유승민 소장과 민병균 원장은 정부가 구조조정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바람에 돈은 돈대로 들이고 효과는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두 사람 모두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 관치의 심각한 폐해가 나타났다고 비판했다.

    “공적 자금을 쏟아부어 은행 자체의 재무제표는 상당 부분 청소했는데, 경영을 엉망으로 만드는 인사를 무수히 단행했다. 호남 위주의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은행의 독립은 더욱 요원해졌다.”(유승민)

    “은행 민영화가 긴박한 상황인데도 오히려 관치금융이 강화됐다. 정부는 그것이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한국경제는 큰 짐을 지게 됐다. 결국 고질적인 정경유착이 문제고, 돈 드는 정치가 원흉이다.”(민병균)

    질문 7 김대중 정권의 남북관계 및 대미·대일 외교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며 이념적으로는 어떻게 보십니까.

    현대의 외교정책에서 이념을 논하는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과거 냉전체제에서의 외교는 이념과 직결돼 있었지만, 오늘날의 외교는 철저하게 국가의 실리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관계는 아직까지 이념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대미·대일 외교에서는 이념적 색채가 상당 부분 퇴색한 상황이다. 이번 평가에서도 지식인들은 그런 반응을 보였다.

    < 남북관계(햇볕정책·답방) >

    서동만 교수와 김성훈 전장관은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서교수는 오히려 국가보안법조차 개정하지 못하는 김대중 정권의 현실을 아쉬워했고, 김 전장관은 남북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대중 정권은 역대 정권과의 차별성, 그리고 아직도 계속되는 분단 현실 때문에 이념시비에 휘말린 것이지 정책이 진보적이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김대중 정권은 현재 공식적으로 노태우와 김영삼 시절의 ‘한민족공통체통일방안’을 계승하고 있다.”(서동만)

    “남북이 평화만 유지할 수 있다면 지금 남한이 북한에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의 몇 배가 넘는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노태우 정권은 구소련과 수교한 이후 30억달러를 지원했는데, 김대중 정권이 북한에 지원한 것은 2억2000만달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왜 노태우 시절에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시비를 거는지 동기가 불순하다.”(김성훈)

    반면 유승민 소장과 익명을 요구한 L씨는 햇볕정책의 기조에 근본적인 의문을 나타냈다. 두 사람 모두 북한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그런데도 북한이 변했다면서 ‘친북노선’을 지향하는 김대통령의 이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DJ의 마음속 깊은 곳에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훼손하더라도 김정일과 거래하겠다는 것인지 헷갈린다. DJ는 대한민국의 체제보다 통일 그 자체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게 북한을 감싸는지 이해할 수 없다.”(유승민)

    “북한은 1980년대부터 대남혁명의 주전장을 휴전선에서 서울로 바꾸고 친북정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가운데 1997년 ‘좌익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김대중 정권이 국가보안법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조선을 만드는 데 장애가 되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전략이다.”(L씨)

    < 대미외교(주한미군·부시정부) >

    서동만 교수는 한미관계가 악화된 책임을 김대중 정부에게 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에는 남북한과 미국의 삼각 협력관계가 잘 유지됐는데,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것이 깨지자 냉전세력들이 의도적으로 한·미 갈등설을 유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종석 연구위원도 “김대중 정부는 대미협력을 잘 유지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율성을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남궁곤 위원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국제관계 속에서 무임승차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 집권, 일본 자민당의 분열, 북한의 경제상황 악화라는 ‘호재’ 속에서 국내외적 지지를 얻었지만, 미국에서 부시 정권이 등장하고, 일본에서 고이즈미 내각이 출범하면서 국제적 환경이 불리해졌다는 진단이다.

    손호철 교수는 김대중 정부가 지나친 성과주의에 매달려 외교적 실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손교수는 “부시 정부의 성격이나 대한정책을 철저히 파악하고 한미정상회담을 가졌어야 했다. 아시아 대통령으로서 처음 부시를 만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고 꼬집었다.

    한편 구본태 부위원장은 주한미군 철수논쟁이 전통적 우방인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구부위원장은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이 주한미군을 붙잡아야 할 상황이다. 그런데도 김대중 정부가 주한미군에 반대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대단히 우려된다”고 말했다.

    < 대일정책(교과서 문제) >

    서동만 교수와 이종석 연구위원은 정부의 강경대응을 당연한 조치로 보았지만, 구본태 부위원장과 유승민 소장은 감정적 대응은 국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한일파트너십’을 깨뜨린 일본에 강력하게 대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정부가 유화적으로 나갔다면 보수파들은 지금보다 더 난리를 쳤을 것이다. 다만 이번 파문으로 민간교류까지 끊긴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서동만)

    “일본이 먼저 ‘한일파트너십’을 어겼기 때문에 한국은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DJ는 일단 밀어붙이다가 뒤로 빠지는 것 같다. 일본 내부에서 왜곡 교과서 채택율이 낮아진 점은 우리가 뒤로 빠질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이종석)

    “너무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본을 직접 공격하는 것보다 세계적으로 일본의 몰역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한국 내에서 정서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정부가 너무 정치적으로 활용한 것 같다.”(구본태)

    “정부는 미리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일파트너십’을 치적으로 남기기 위해 일찌감치 대응하지 않았다. 미리 준비했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이 난리를 치더라도 대일관계를 중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유승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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