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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대립 1년, 우익독주 55년

한국현대사의 좌우익 논쟁

  •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ㆍ한국현대사 >

좌우대립 1년, 우익독주 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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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수진영에서는 진보진영이 겉으로는 민주를 가장하지만 실제는 사회주의자라고 몰아붙인다. 진보진영도 보수진영 지식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때문에 진정한 이념논쟁을 위해서는 상호 신뢰가 간절한 상황이다.
처음 ‘신동아’로부터 ‘한국현대사의 좌우익논쟁’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광복 직후의 3년, 아니 보다 정확히 이야기해서 1946년 8월까지의 1년을 제외하고 우리 현대사에서 좌우익 간의 진정한 논쟁이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광복 정국에서 한국전쟁까지 치열한 좌우익 투쟁은 있었지만, 논쟁은 적었다. 빨갱이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고 남한사회가 무너지는 것처럼 여겨진 세상에서 논쟁은 있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은 완전히 이념적으로 교통정리가 되었다. 남한에 개인으로서의 사회주의자는 혹시 남아 있을지 몰라도 세력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극히 최근까지 우리 사회는 거의 멸균실 수준의 반공을 유지해왔다.

너무 일찍 끝난 논쟁 후유증

그리고 1997년 환란 위기의 와중에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다시 3년 반이 흐른 오늘, 우리 사회는 ‘보수파들에 따르면’ 악령이 떠돌고 홍위병이 설치고 사회주의자들이 날뛰는 혼란에 빠져 있다. 과연 현재의 편가르기 논쟁을 좌우익 간의 이념논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좌우익 논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던가를 고찰해 보자.

좌우익 논쟁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흔히 알려진 좌우익 사이의 논쟁, 또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논쟁으로 우리는 1922년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의 사회장 논쟁, 또는 물산장려운동을 둘러싼 논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이들 논쟁은 좌우익 간의 논쟁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을 어떤 형태로 이루어갈 것인가를 놓고 벌인 사회주의자 내부의 논쟁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주간이었던 설산 장덕수(雪山 張德秀)는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상해파는 조선의 상황은 아직 사회주의 혁명을 추진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들은 민중을 계몽하고 생산력을 향상시켜야 하며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맺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정치노선은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샀고, 그 결과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서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좌우익 간의 논쟁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이들의 논쟁이 꼭 대립으로 귀결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때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일제 강점기 전체를 놓고 본다면 격렬하게 대립했던 시기보다는 공동의 적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치고 민족의 독립과 광복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협동했던 시기가 더 많았다. 또 광복을 맞이하기 직전 독립운동 진영의 정치강령을 비교해 보면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이 광복 이후 세우려고 했던 국가의 기본성격이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광복 직전의 4대 독립운동 세력으로는 흔히 중경의 임시정부, 연안의 독립동맹,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으로 퇴각한 빨치산 세력 그리고 국내의 건국동맹 등을 들 수 있다.

임시정부는 토지혁명을 통해 ‘문란한 사유제도’ 대신 토지국유화를 실현하고, 대생산기관 역시 국유로 한다는 것을 ‘건국강령’을 통해 천명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헌법인 ‘임시헌장(1944)’은 파업의 자유를 ‘인민’의 자유와 권리의 하나로 보장하였다.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념적으로 가장 오른편에 위치한 임시정부의 이런 정책은 좌파가 주류를 이룬 독립동맹이나 빨치산 세력, 또는 건국동맹의 정강정책과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 김대중 정권이 도입한 노사정위원회를 ‘사회주의적’이라고 몰아부치는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대한민국이 법통을 계승하였다는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임시정부가 1950년대의 진보당, 1980년대의 민통련, 또 오늘날의 민주노동당 등도 감히 제기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책을 채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의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주요산업의 국유화나 토지국유화는 반드시 ‘사회주의적’인 정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에 주요산업은 일제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토지의 상당 부분도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또는 친일지주 소유였기 때문이다. 광복 직전의 임시정부는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주의자 계열의 독립운동 진영과 아주 유사한 정책을 채택한 것이다.

또 좌우익을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를 침략한 제국주의를 레닌의 규정에 따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 보았기 때문에 독립운동 진영의 전반적인 기조는 우익에서조차 반자본주의적이었다. 따라서 광복이 우리 민족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면, 새로운 정부의 수립과 관련하여 독립운동 진영의 좌우익 간에 심각한 이념논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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