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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비사·全國區 39년

  • 이병도 < 시사평론가 >

재력에는 비례, 민의에는 반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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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7월19일 현행 선거법의 국회의원 비례대표(전국구) 의석 배분방식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졌다. 1인1표제도 “비례대표 배분방식에 적용하면 위헌”이라는 ‘한정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여야 정치권은 올 가을 정기국회 때 법개정을 목표로 당론을 모으고 있다. 정치권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정치파행의 주범 전국구제도 39년을 되돌아보았다.
“세도정치가 나라의 기반을 어지럽히고, 가는 곳마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이 성행하였다. 지방관리들까지 돈을 바치고 관리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일은 권력자들이 모두 다 차지하여 백성들은 실직자가 되어갔다. 선비의 기운은 없어지고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이익만 도모하게 되고, 벼슬을 하거나 큰 사업을 위해 세력 가진 자에게 아첨이나 하니, 시시시비(是是非非)가 전도되어 정의로운 공론(公論)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대부들은 세력을 가진 자들이 해코지를 해올까 봐 친구간이라도 말조심을 하게 되었고, 진실된 언로는 막혔다.”

구한말, 패망 전야의 사회상을 생생히 증언한 민족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痛史)’ 중 일부다. 돈을 주고 벼슬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의 성행과 권력자들의 세도정치가 가장 큰 망국병이었음을 이 기록은 보여준다.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의 3공화국에서 이른바 ‘3김 보스정치’에 이르기까지 매관매직과 부패 정치권력 행위의 상징으로 비판받아온 전국구 국회의원 선출제도, 그 실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문자 그대로 ‘전(全)국구’인가 아니면 ‘전(錢)국구’인가. 전국구 국회의원 제도와 그 내막에 대한 실태 점검은 한국정치 및 선거문화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계기로 대한민국 전국구제도 39년의 풍상과 비사(秘史)를 조명한다.

권력형 운용과 매관매직

우리나라에 비례대표제가 처음 소개된 것은 5·16 직후 제5차 헌법개정 때였다. 당시 전국구제도 도입 명분은 국회의 직능대표제적 성격 강화였는데, 각계 명사나 전문가를 국회에 진출시켜 국회의 질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취지와 달리 전국구제도는 시행과정에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다.

6공화국 이전까지 정권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집권여당은 전국구를 정권 기반 강화용 혹은 ‘정치시녀’ 확보용으로, 이에 맞서 싸우는 야당은 전국구를 정치자금 마련 통로, 즉 ‘공천 장사’에 활용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부터 오늘의 ‘3김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경중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국구 제도의 폐습은 시정되지 못한 채 지속되고 있다.

그러면 이 제도의 도입과정부터 살펴보자. 박정희정권은 5·16 군사쿠데타 후 개헌을 위한 전국 공청회에서 전국구를 포함한 국회의원 선거구제에 대한 국민 여론을 물었다. 명분은 국회를 전문화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 의도는 크게 달랐던 것으로 드러난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관여했다가 야권으로 돌아섰던 한 인사의 증언.

“박정희 의장이 전국구제도 도입을 구상한 것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무엇보다 국회를 무력화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여야 정치권의 기존행태를 국가이익과 무관한 당쟁으로 간주, 대단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박의장은 쿠데타 직후 국회의원 선출 구조부터 뜯어고쳐야겠다는 발상을 했다. 의원 정수를 대폭 줄이고, 전체 의석의 4분의 1을 자신이 직접 지명하는 전국구 의원으로 충원한다는 복안을 이미 세워놓고 측근들에게 준비를 지시했다.

이로써 전국구 제도는 1963년 11월 실시된 6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 후 박대통령은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국회를 사실상 자신의 시녀로 만드는 방책으로써 갈수록 전국구제도에 집착했다.

박대통령의 이런 구상에 따라 9대 국회에 이르러 전국구 제도는 다시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이름으로 뒤틀리게 된다. 유신헌법에 근거한 유정회 의원은 전체 국회의원 정원의 3분의 1에 해당했는데, 유정회 후보는 대통령이 일괄추천하고 이들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케 함으로써 무소불위 철권정치의 전위대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전국구 의원들을 자신의 권력 전위대로 적극 활용한 셈이다. 전국구 제도를 이용한 박대통령의 권력 행보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이 인사의 추가 설명.

“박대통령은 전국구제도를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사실상의 동력(動力)으로 삼았다. 즉 제도정치권을 장악, 모든 정국현안을 강제로 타개하려 했다. 전국구가 도입된 6대 국회에서 야권과 재야, 학생운동권의 극심한 반발 속에서도 한일협정비준 동의안을 단독 의결로 밀어붙였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어 7대 국회 때는 3선개헌안까지 통과시켰다.

절대권력의 절정기인 1973년 2월 실시된 9대 총선에서는 ‘새로운 전국구’인 유정회 의원이 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국회가 만들어졌다. 유정회 발족 직후인 10대 국회에서 박대통령은 YH사건을 빌미로 당시 야당총재였던 김영삼(金泳三) 신민당총재의 의원직을 강제로 제명하는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모두가 전국구제도란 정치권 장악의 방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대통령은 전국구제도를 독재 권력행위와 통치드라이브에 긴요하게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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