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美國 변수’ 전화위복, 대반격 시작됐다

‘DJ新 체제’ 정국구상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5-01-11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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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한 테러로 한국 정치권도 큰 타격을 입었다. 대미 의존도가 절대적인 남북문제와 경제회복 등 국정 주요 현안의 일정이 줄줄이 틀어지거나 지연될 처지에 몰렸다. 지난 8월 이후 나름대로 ‘기대’속에 정국운영의 틀을 짜나가던 여권 핵심부도 고민에 빠졌다. 과연 9·11테러 이후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리고 DJ의 임기말 플랜은….
    2001년 9월11일 오전 8시45분(한국시간 11일 밤 9시45분), 승객 92명을 태운 보스턴 발 LA행 아메리칸항공 보잉 767기가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빌딩의 북쪽 건물을 들이받고 폭발했다. 이 어이없는 ‘사고’에 전세계가 어리둥절해 있을 무렵, 또 한 대의 여객기가 뉴욕시 상공을 가로질러 맨해튼에 접근해 왔다. 역시 보스턴에서 LA로 가던 유나이티드항공 175편이었다. 항공기는 맨해튼 상공을 저공비행으로 날아오더니 국제무역센터 남쪽 빌딩을 관통하듯 들이받았다.

    미국의 부(富)를 상징하는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형체도 없이 사라지게 한 여객기 충돌 테러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경악케 했다. 충격파는 태평양 건너 한국의 정치권에도 밀어닥쳤다.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 정당들은 즉각 테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국내정치권에서 세계무역센터 테러 공격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청와대였다. 임기 말에 접어들면서 사실상 집권 마무리 구상을 실행하기 위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야심 차게 진행하던 정치일정을 전부 다시 짜야 할 처지에 놓였다.

    사실 일반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지난 8월 이후 여권 내부에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믿겨지지 않지만 여권의 변화를 설명해줄 핵심 단어는 ‘자신감’, 더 정확히 말해 ‘기대감’이었다.

    지난 4∼5월, 김대통령의 지지율이 20%를 밑돌던 시절 여권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4월26일 실시된 지자체 재보궐 선거 참패에다 국민건강보험 재정파탄, 안동수 법무장관 인사파동 등 온갖 악재가 겹쳤다고는 하나 대통령 지지율이 20% 이하로 떨어진 현실에 여권인사들은 말을 잊었다. 청와대와 민주당, 국정원까지 나서 민심회복을 위한 비상대책 수립에 착수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여권 사람들은 절망했고 당사와 청와대 어디를 가나 한숨소리가 넘쳐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달라졌다. 최소한 지난 9월 초의 당·정·청(靑) 인사가 있기 직전까지 민주당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는 급격히 사라졌다. 지난 5월 당정 쇄신을 요구하는 서명파로 활약한 한 의원은 “(5월)당시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때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 조용히 지켜볼 때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중순 박지원(朴智元) 청와대정책기획수석이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나눈 대화에서도 달라진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박수석은 “김대통령은 역대 어느 정권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룩했다. 과거 정권은 다수당이었지만 지금의 정부는 소수당이다. 그렇기에 김대통령이 이룬 업적은 높이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운을 뗐다. 그리고는 남북정상회담으로 얘기를 풀어나갔다.

    “김대통령은 평소 신념대로 민족의 통일과 화합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은 누가 뭐래도 역사적인 업적입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인권국가로의 명성을 전세계에 떨쳤습니다. 단군 이래 최악의 경제난도 극복했습니다. IMF라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만큼 해낸 것은 정당하게 평가 해주어야 합니다. 김대통령의 국정업무 성과는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충분히 평가받을 것이며, 국민들이 현명하게 평가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는 또 DJ가 생각하는 민주당 대권주자의 자격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김대통령의 통치철학과 신념을 이어갈 수 있는 사람,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당선 가능성이 큰 사람 순서로 차기 대권 후보자격을 거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직은 지켜보자는 의견이십니다.”

    거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김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후계자의 자격조건과 정권재창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박수석의 전언은 달라진 여권 분위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지난 8월 말, 청와대 한 핵심인사의 말은 여권의 변화를 더 실감나게 설명해줬다.

    “5월 말 이른바 ‘정풍운동’으로 민주당이 얼마나 떠들썩했습니까. 당시 온 국민의 시선이 민주당에 쏠렸습니다. 김대통령이 당장 이 사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당이 금방이라도 조각날 듯한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쇄신파 초·재선 의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현재(8월 말) 어떻습니까? 민주당은 조용합니다. 대통령이 석 달이 넘도록 당정쇄신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저런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 이유는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테러사건은 김대통령 입장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국내정치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내홍(內訌)조짐을 보이던 민주당이 조용해졌다는 점도 짭짤한 성과다. 9월11일 이전, 동교동과 당내 소장·개혁파 간의 갈등은 상당기간 잠복하며 물밑해결을 이뤄낼 공산이 크다.

    테러사건으로 김대통령이 얻은 소득은 그간 닫혀 있던 이회창 총재와의 대화 창구가 열렸다는 점이다. 미국이 테러당했다는 뉴스가 전해진 직후인 9월11일 밤, 이회창 총재가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이 전화에서 테러사건의 파장과 이 사건이 우리나라에 끼칠 영향에 대해 두 사람은 의견을 교환했다.

    이총재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사실에 김대통령도 적지 않게 감동한 눈치다. 김대통령은 다음날 청와대 회의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며 이총재를 추켜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영수회담이라는 ‘멍석’을 깔지 않으면 대화를 나누지 않던 두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 전화통화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수회담이 성사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영수회담의 조기 성사에는 여당의 일부 최고위원들이 찬성하고 나섰고 야당에서도 김만제(金滿堤) 정책위의장 같은 이가 적극 찬동하며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섰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9월18일 남북장관급 회담이 끝나는 대로 영수회담 일정을 택해 김대중 이회창 두 사람이 마주앉아 국정을 의논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에 돌입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실무진들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총재가 청와대에 전화를 건 다음날인 9월12일부터 한나라당의 이총재 특보단 등 보좌진은 영수회담에서 두 여야 정치지도자가 나눌 의제를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실제 한 측근인사는 기자들을 만나 “어떤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좋겠느냐”며 시중의 여론을 탐색하기도 했다.

    청와대도 이번 테러사건이 나기 훨씬 전부터 여야 영수회담의 의제와 합의사항에 대해 검토한 흔적이 드러나고 있다. 한 관계자는 “만약 영수회담이 성사된다면 김대통령과 이총재가 각각 두 가지를 ‘선물’로 교환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대통령으로서는 햇볕정책에 대한 한나라당의 지지를 끌어내고, 임기 말 안정적으로 국정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이총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최선의 결과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반면 이총재는 김대통령으로부터 정계개편이나 헌법개정 등 인위적으로 정치판에 변화를 가하지 말 것, 아울러 공정한 선거관리자로서 김대통령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 등을 제안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테러사건과 무관하게 김대통령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임기 마무리 작업에 돌입했다는 조짐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언론사주구속 강행과 DJP 공조파기를 불사하면서까지 햇볕정책을 사수하고 나선 것은 이런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반면 이어진 당·정·청 인사는 개혁보다는 친위세력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김대통령의 정국운영 방식의 현실과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테러와 미국의 보복전, 김대통령은 그의 임기 내 경제회복이 불투명해진 것을 제외하고는 테러정국에서 그리 잃을 것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남북관계 개선속도는 예상 밖으로 빨라져 김대통령 임기 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성사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러나 DJ가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얻은 가장 큰 이익은 한때 그에게 붙여진 ‘레임덕’이라는 말이 쑥 들어갔다는 점이다. 임기 말이 가까워지는데도 레임덕을 슬쩍 비켜가는 듯한 DJ의 고밀도 계산, 이 대목이 여권이 자신감을 회복한 가장 큰 이유인 셈이다.

    그는 그 이유를 정권재창출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데서 찾았다.

    “5월 민주당 초재선 의원들이 정풍운동을 벌인 가장 큰 이유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서명에 참여한 사람들 개개인의 이해관계가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크게 보면 이대로는 정권재창출이 어렵겠다, 민주당의 지지가 계속 하락할 경우 자신들의 정치생명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런 불안감이 단체행동으로 이어진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가진 불안감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조금도 밀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언론탄압이라는 야당의 반발에도 언론사주 구속을 강행한 것이 민주당 의원들의 ‘군기’(軍氣)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당장 임기 말 레임덕 현상으로 고통 받을 것 같던 DJ가 뜻밖에도 뚝심을 발휘하자 깜짝 놀란 거죠.

    여기에 더해 민주당의 차기 대권주자들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와의 경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대등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점도 민주당 의원들을 고무시킨 요인이었습니다. 5∼6월 민주당이 죽을 쑤고 있을 무렵, 이총재는 사실상 대선 게임을 끝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해보면 여전히 이인제 최고위원 등 민주당의 대선주자와의 간격을 더 이상 벌리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민주당 의원들도 다시 생각하게 된 겁니다. 말하자면 지난 4, 5월 같은 절망적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 든 겁니다.”

    이 인사의 낙관론은 이어졌다.

    “사실 여권으로서는 더 이상 야당으로부터 공격당할 악재(惡材)가 없습니다. 경제사정이 어려운 것이 부담이었지만 더 이상은 나빠질 사정이 없다는 게 우리의 판단입니다. 바닥을 쳤다는 거죠. 경기 순환 사이클로 보면 앞으로 나아질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남북문제는 DJ 퇴임 뒤에도 공적으로 내세울 만한 성과입니다만 최근 야당은 이에 대해서도 공격하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이 지연되고 있는데다 무작정 퍼주기 정책이라는 비판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8·15 방북단의 돌출행동도 DJ의 대북정책 성과를 갉아먹은 요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런 악재들이 내년에 터지지 않은 게 우리로서는 천만다행입니다.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두고 8·15방북단의 돌출행동 같은 돌발변수가 터졌더라면 정말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여권의 한 조사전문가는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가며 민주당의 달라진 상황을 설명했다. 이 전문가는 최근까지의 각종 여론조사, 즉 언론이나 후보 캠프, 그리고 여야 각 정당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 현재까지 대권주자 가운데 고정지지표를 확보한 후보는 이회창(李會昌) 이인제(李仁濟) 노무현(盧武鉉)씨 등 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가상 맞대결이 아닌 순수한 개인 지지만으로 보면 이회창 총재는 20% 정도를, 이인제 최고위원은 15∼16%의 지지율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들어 달라진 현상은 노무현 민주당상임고문도 고정지지표를 확보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대략 5%라고 생각됩니다.”

    이들 세 사람의 고정지지율을 표로 환산하면 이총재가 630만 표 내외, 이최고위원이 470만∼500만 표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이 계산대로라면 노무현 고문도 150만 표 가량의 고정표를 얻었다는 분석이다. 이들 세 사람 외에 나머지는 고정표라 할 수 있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민주당 두 후보의 표를 합하면 이총재와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점. 아직은 비관할 때가 아니며 지금의 정치구도로도 정권재창출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같은 여권 인사들의 낙관적 전망은 DJP 공조파기와 이어진 이한동(李漢東) 총리 유임과 한광옥(韓光玉) 대표 임명, 김근태(金槿泰) 최고위원과 권노갑(權魯甲) 전최고위원 사이에 불거진 동교동 해체주장 등 민주당 내분이 돌출하기 직전의 주장이다. 자민련과의 공조파기가 양 당사자인 김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 자민련 명예총재마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정설인 만큼, 지난 8월 이미 여권 핵심부에서 자신감에 찬 정국 전망이 나오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어 보인다.

    그런데 최근 주목할 만한 주장이 정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DJP 공조파기를 염두에 둔 국정운영 전략이 임동원 장관 해임결의안 파문 이전부터 여권 핵심부에서 심각하게 검토되고 있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런 검토는 문서로도 만들어져 청와대에 보고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내용에는 자민련과의 공조파기뿐 아니라 그 후 정국 운영방안에 대한 전망과 대처방안도 자세하게 거론돼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여권 핵심부의 논의는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 주변에서 이른바 ‘JP대망론’을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진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여권 핵심부에서 자발적 검토 수준에서 자민련과의 공조 파기 검토 및 이후 정국전망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고 지난 8월 말부터 DJ에게 집중적으로 보고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보고서는 자민련과의 공조를 파기할 경우 벌어질 정계 개편에 대해 집중 검토했는데, 결론은 공조파기가 민주당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보고서는 더 이상 DJP 연대에 연연할 필요가 없으며 연대를 끊어도 JP는 큰 위협이 못 된다는 점을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JP가 민주당과 연대를 끊더라도 한나라당은 JP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며, JP는 돌파구로 YS와 연대를 모색해 세력 키우기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럴 경우 정치권이 ‘개혁 1여(與) 대 보수 2야(野)’로 나뉘어 다가올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여권으로서는 손해볼 것이 없다는 등의 분석도 실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민련이 현실적으로 현정권에 도움이 되지 못할 바에야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한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는 이런 보고서의 존재에 대해 “그런 문건은 청와대와 당에서 일상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보고서가 아니라 그런 내용의 보고서를 만드는 민주당의 달라진 분위기”라고 말했다. JP와의 공조파기에 연연해하지 않을 만큼 정국운영에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최근 민주당이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과거 새정치국민회의 시절 즐겨 쓰던 캐치프레이즈를 다시 내걸기 시작한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중산층과 서민’은 김대통령의 당선에 표를 몰아준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계층. 김중권(金重權) 대표체제 이후 민주당은 한동안 이 캐치프레이즈 사용을 자제해왔는데 최근 들어 다시 전면에 내걸기 시작했다. ‘중산층과 서민’을 우호세력으로 다시 강조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보수층의 지지가 두터운 이회창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면서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계기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광옥(韓光玉) 대표도 최근 인터넷에 올린 대표 인사말에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한대표는 “여소야대라는 정국변화에서 민주당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이제 양과 수의 정치에서 탈피하여 질의 정치로 바꾸어 나가야 하는 과제도 주어져 있다”면서 “민주당은 민주주의·시장경제·생산적 복지라는 3대 이념을 바탕으로 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당’으로서 국민대화합 실현과 남북 화해협력을 주도하는 정당이라는 창당이념을 되새겨 당의 정체성을 재정립할 것이며 개혁작업의 견인차 노릇을 주도적으로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의 여론조사 관계자도 “어차피 모든 계층에서 지지받을 수는 없다. 잘사는 사람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으냐”며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서민계층에서 민주당 지지성향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이들이 내년 대선에서 득표율을 올리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무튼 민주당과 청와대의 분위기는 한결 밝아졌다. 적어도 한광옥 대표 임명과 이한동(李漢東) 총리 유임 이후 이를 반대하는 당내 개혁·소장파의 반발이 있기 전까지 민주당은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민주당의 전략 브레인팀인 국가전략연구소 관계자는 “대통령의 당·정·청 개편이 단행되면 이를 근거로 공조파기 이후 정국에 대한 연구소의 전략을 만들어 보고할 계획”이라며 기대감을 은근히 나타내기도 했다.

    공조파기에 대한 국민여론도 민주당을 들뜨게 했다. 민주당은 임장관 해임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 대국민 여론조사를 벌였다. 이 조사에서 민주당은 ‘자민련의 임장관 해임결의안 참가를 공조파기라고 보느냐’는 질문으로 공조파기의 책임이 자민련에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는데 결과는 42% 대 35%로 ‘그렇다’고 답한 의견이 많았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상담원에 의한 전화여론조사가 아닌 ARS 조사인 탓에 답변이 보수적으로 나온 편인데도 42%의 응답자가 공조파기의 책임이 자민련에 있다고 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향후 민주당의 정국운영 방향’에 대해 응답자의 25%만이 ‘자민련과의 공조회복’에 응답한 반면, 30%가 ‘민주당 단독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답했고 27%는 ‘정계개편을 통한 정치권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에 답했다. 앞서의 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당 단독 운영과 정계개편 등 적극적으로 현 정치질서의 변화를 요구한 응답자가 60%에 가깝다는 사실은 국민 대다수가 지금까지의 민주·자민 공동여당 대 한나라당의 정치질서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비록 국회 표결에서 패배해 임장관이 해임되고 말았지만 햇볕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여전히 현정권에 대한 지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임장관 해임에도 당은 패배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자민련과의 공조파기는 5월 이후 여권 내부에서 무럭무럭 성장해온 자신감에 거름을 듬뿍 더해주는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9월7일 이한동 총리의 유임 결정 이후 이어진 당·정·청 개편 결과 민주당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권노갑 전최고위원과 한화갑(韓和甲) 최고위원 간의 동교동 신·구파의 갈등이 불거졌고, 개혁파를 대표하는 김근태 최고위원이 권 전위원으로 대표되는 동교동 구파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민주당만 혼란에 빠진 게 아니었다. 민주당을 바라보는 한나라당도 “도저히 갈피를 못 잡겠다”는 반응이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한 측근인사는 “민주당과 청와대 인사를 보고 있노라면 김대통령의 본심이 무엇인지 헷갈린다”고 고개를 저었다.

    김대통령의 인사를 두고 여권 내부에서도 갖가지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이번 인사의 주도권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라는 주장이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번 대표 인사파동 한가운데 있던 한화갑 최고위원은 “인사권자는 대통령 아니냐”고 말했다.

    앞서의 청와대 고위인사는 “권노갑 한광옥 박지원 라인에서 인사를 전횡했다는 일각의 얘기는 김대통령과 동교동계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라고 잘라 말했다.

    “DJ 없는 권노갑, 박지원이 가능합니까? 특히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의 경우 당에 세력이 있나, 계보 의원이 있나, 철저하게 DJ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김대통령과 이들의 관계를 거꾸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가설입니다. 여전히 인사문제는 김대통령이 최종결정권자로서 직접 결정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한광옥 대표, 이한동 총리 진용은 DJ의 작품이라는 거죠.”

    이 인사는 이상주(李相周) 신임청와대비서실장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항간에는 약체 비서실장이라고 평가하는 모양인데 이는 이실장을 모르고 하는 얘기입니다. 워낙 무명이다 보니 비중을 두지 않는 모양인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조직장악력과 추진력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그런 장점을 알고 기용한 겁니다.”

    결국 김대통령은 철저하게 자신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집권 말기 당·정·청 인력배치를 마쳤다는 게 정가의 중론이다. 새로운 인물을 시험하기보다는 DJ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을 전면에 내세워 당정을 관리하고 대야관계를 풀어나가면서 DJ 자신은 임기 마지막 국정운영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차제에 김대통령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정운영에만 전념하려는 포석으로 당·정·청 개편을 단행했을 것”이라며 한발 앞서 ‘DJ탈당설’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거론하는 이도 있다.

    아무튼 지난 8월 말 9월 초 정치권 요동의 와중에 김대통령의 집권 말기 국정운영 프로그램도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임기 말 정국운영 계획은 9·11 맨해튼 테러를 계기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에 대한 테러가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였고, 더구나 미국은 한반도 정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해 당사국인 까닭에 미국의 선택에 따라 김대중 정권의 대북·대미정책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9·11테러 이전까지 김대통령과 여권이 남북문제 진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내년에 있을 지방선거와 대선의 ‘표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경제회복에도 어느정도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월20일로 예정된 김대통령의 미국과 남미 국가 방문은 막혀 있는 대북 문제를 푸는 물꼬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돼 왔다. 부시 미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햇볕정책 지속 등 남북문제에 대한 사전합의를 이뤄낸 뒤, 이어 10월에는 부시 대통령의 방한으로 남북대화 분위기를 이어간다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고 한다.

    이어 김정일 북한국방위원장의 답방을 올 연말과 내년 초 사이에 성사시킨다. 이와 함께 내년 상반기 경의선을 완전 복구해 축제분위기에서 경의선을 잇는 이벤트를 벌이는 것으로 DJ정권의 남북화해정책의 대미를 장식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구체적으로 내년 3월 남북한이 각각 건설해온 경의선을 완전개통하는 기념행사를 치르려 한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경의선 복구에 관심을 보이면서 “경의선 문제가 잘되면 이것은 곧 전방을 공개한다는 것이며 군사적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말해왔다.

    여권의 한 소식통은 “경의선이 뚫리면 이를 계기로 판문점 등 남북 분단과 화해를 상징하는 장소에서 남북한과 주변 4강의 실무자가 참석하는 ‘한반도 6자 회담’을 여는 것도 검토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임동원 전통일부장관의 ‘희생’에도, 남북문제에 관한 한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고 밀고 나가 김대통령 임기말을 축하하는 최대 이벤트로 꾸미겠다는 것이 여권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획일 뿐, 테러 발생 직후인 지난 9월13일 김대통령은 오는 20일부터 UN총회와 UN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하고, 미국을 순방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경제회생 계획도 나름의 일정을 갖고 진행중이었다.

    남북문제와 더불어 청와대가 김대통령의 대표적 치적으로 내세우는 ‘IMF 국난극복’을 뜻깊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체감경기 회복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현재 경제회복의 가장 큰 걸림돌은 대우자동차와 하이닉스반도체 문제다. 진념 재경부장관 등 정부측 관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말 이전에 이 두 회사의 처리를 마무리짓는다는 일정으로 해외투자자들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다.

    앞서의 소식통은 “테러 직전까지 경제 전망을 보면 미국이 하반기부터 경기회복에 접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고, 이에 발맞춰 우리 경제도 본격적인 회복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구체적으로 주가지수가 700∼800 사이에서 연말을 맞을 것으로 내다봤다”고 말했다.

    이처럼 남북문제와 경제회복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둔 상태에서 내년 상반기를 마무리할 경우, 민주당 정권의 재창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여권 핵심부의 계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9월11일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펜타곤으로 날아든 여객기로 여권의 꿈은 휘청거리게 되었다. 당장 정국운영 일정의 전면 재조정이 불가피해졌다.

    경제는 더 골칫거리다. 테러 이후 미국의 보복전쟁이 불가피해지면서 올 연말은커녕 언제 경기가 회복될지 요원해졌다. 세계경제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끌려 다니는 국내경제 사정상 세계경제가 테러와 보복공격의 충격에서 확실히 벗어나지 않는 한 한국경제 회생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경제전문가들의 대체적 전망이다.

    여객기 충돌 테러로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린 건물이 세계무역센터라는 사실이 한국경제로서는 더욱 뼈아픈 대목이다. 세계무역센터는 JP모건, 모건스탠리 등 세계적 투자은행들의 본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이다. 이번 폭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특히 모건스탠리. 이 회사는 무역센터 전체 사무실 면적의 10%를 빌려쓰고 있으며 무역센터로 출퇴근하는 직원만도 3500명에 달하는데 이번 사고로 수 천명의 직원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 정도 피해라면 전세계 금융시장에 투자한 투자자금의 운용은 물론, 투자심사 업무 등이 상당기간 마비될 전망이어서 투자은행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는 데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예측하기 어렵다.

    세계무역센터에는 이 밖에도 독일의 코메르츠방크, 도이체방크 등 세계 유수의 금융회사들이 입주해 있다. 결국 세계무역센터를 중심으로 한 월스트리트의 금융시스템을 완전 복구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요될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투자은행이 한국경제에 끼치는 영향이다. 한국경제의 회복은 뉴욕의 투자은행들이 한국금융시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는데, 뉴욕의 투자은행들이 제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경제회복은 늦어질 공산이 크다. 하이닉스반도체 처리과정에서 보듯, 같은 미국 국적의 자본이라도 금융자본은 한국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점치는 반면, 한국 기업과 대립관계에 있는 미국 내 산업자본은 반대의견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금융자본의 메카인 맨해튼이 제기능을 상실했다는 점은 곧 한국의 자본시장에 적지 않은 불안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사고 직후 정부는 미국의 테러사태로 인해 세계경제의 회복시기가 지연될 것으로 보고, 재정지출 확대와 추가 금리인하 등 비상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권오규 재정경제부차관보는 9월13일 기자회견을 갖고 “세계경제가 당초 4분기부터 점차 회복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번 사태의 영향으로 회복시기 지연이 불가피하다”며 “비상대응조치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경부는 당초 우리 경제가 4분기에 5∼6%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번 테러사태로 세계경기의 회복이 지연되면서 목표달성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긍정적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번 사건과 관계없이 북한은 여전히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가’로 묶여 있고, 대량살상무기 확산 주범으로 묘사되어 왔다. 남한 역시 미국의 안보우산 안에 놓여 있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원활하게 진척하기 위해서는 부시 행정부와의 정책 공조가 불가피하다. 따라서 한반도는 어떠한 형태로든 이번 테러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여권에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햇볕정책은 지속될 것이며 남북한 대화 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보복전으로 치닫는 미국 내부사정이다. 전쟁은 사회적 갈등관계의 충돌이지만 사회적 갈등의 해소과정이기도 하다.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을 선언함으로써 이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 정부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 해결에 진력해야 할 상황이다.

    따라서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 적극 개입할 여력은 없어 보이며 결국 지난해 남북정상회담 성사 당시의 국제사회의 지지분위기가 다시 한 번 남북관계 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역대 미국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미국 내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여왔다. 지금의 전쟁 국면 역시 미국 국민들의 들끓는 보복여론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전쟁여론의 한편에서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허점이 있음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날수록 MD정책을 밀어붙이며 제3세계국가들과 끊임없이 마찰을 빚어온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전면수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럴 경우 남북관계 진전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여권 관계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이번 테러사건에 대한 북한의 태도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북한은 9울1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번 세계무역센터 및 국방부 공격사건을 “매우 유감스럽게도 비극적인 사건은 테러리즘의 위험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북한은 유엔 회원국으로서 모든 형태의 테러, 그리고 테러에 대한 어떤 지원도 반대하며 이러한 방침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9월13일 김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에서 테러에 반대한다는 선언을 공동으로 한다면 의미있는 성과가 될 것”이라며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반테러선언’을 채택하라고 공개적으로 지시한 것도 북한의 테러반대에 대한 맞장구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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