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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주자들의 이미지 따라잡기

링컨·케네디에서 블레어·고이즈미까지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대선주자들의 이미지 따라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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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태우의 ‘보통사람들’, 김영삼의 ‘신한국 건설’, 김대중의 ‘준비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끈 탁월한 이미지 전략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미지 메이킹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변수가 될 전망이다.
현대 선거에서 이미지메이킹(Image making)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선거운동 방식이 군중집회에서 TV토론으로 바뀌면서 이미지마케팅(Image marketing)은 승패를 좌우하는 변수로 등장했다. 1992년 대통령선거와 1995년 지방자치선거 당시 민주당캠프에서 이미지 전략을 담당했던 차영(車英) 전 광주MBC 아나운서는 자신이 펴낸 ‘나는 대통령도 바꿀 수 있다’(1997년, 디자인하우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권자들은 지지자를 결정할 때 딱딱한 선거공약이나 정책보다는 후보 개인의 이미지가 좋고 나쁘냐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이미지마케팅이 선거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1987년이다. 이때부터 정치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생겼고, 특정 후보의 코디와 이미지 관리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대통령후보의 선거캠프에 참여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는 1971년 이후 18년 만에 실시된 직접선거였다. 판세는 1노3김.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민주당 김영삼 후보와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여부가 선거의 최대 승부처였다. 하지만 광고전문가들은 노태우 후보의 이미지 전략이 대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당시 노후보의 캐치프레이즈는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였다. 이에 따라 노후보는 원탁에서 회의를 열고, 손수 가방을 들고 비행기 트랩에 오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반면 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백발을 휘날리며 ‘군정종식’을 부르짖었고, 한복 차림의 김대중 후보는 쉰 목소리로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고 외쳤다.

노태우와 조순의 성공

결국 노후보는 양김씨를 여유있게 누르고 당선됐다. 노후보는 양김씨의 분열이라는 ‘호재’를 만나 당초 불리할 것으로 보였던 선거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혼란스런 정치상황에서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서민층을 공략한 것이 주효했음은 물론이다.

1992년 대통령선거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맞대결 양상으로 치러졌다. 김영삼 후보는 ‘젊고 패기있게 한국병을 고쳐 신한국을 건설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당연히 김후보의 이미지도 ‘젊음’을 한껏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흰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강한 톤으로 연설한 점이 대표적인 케이스.

김대중 후보도 1987년 선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른바 ‘뉴DJ플랜’이 그것이다. 당시만 해도 김대중 하면 ‘과격하고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대중 후보는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가정주부가 다림질을 하면서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컨셉트에 따라 연설문을 만들었다. “주부 여러분, 김장하시느라 바쁘시지요”로 시작되는 DJ의 TV연설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결과론이지만 1992년 선거는 영호남 대결구도로 치러졌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후보측은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영남표를 잠식해줄 것으로 믿었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지 마케팅 차원에서 보자면 양 김씨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다.

정치광고업계에서 최대의 성공사례는 1995년 서울시장 선거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민주당이 영입한 조순 후보는 탁월한 이미지 마케팅으로 대역전극을 펼쳤다. 조후보는 연출에 익숙하지 않은 학자 출신이지만, 그의 순수한 이미지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조후보는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바람으로 청중들을 만났으며, TV토론에서도 어눌하지만 믿음직한 모습을 선보였다. 때마침 시청률 1위를 다투던 ‘판관 포청천’에서 빌려온 ‘서울 포청천’ 이미지는 조후보의 ‘강직하고 소신에 찬 서울시장’ 전략에 힘을 실어주었다.

1997년 봄, 신한국당에서는 이른바 ‘8룡’들의 대권경쟁이 한창이었다. 선두주자는 역시 이회창씨. 그는 1996년 제15대 총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해 정치권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치인 이회창의 트레이드마크는 ‘소신’과 ‘대쪽’이다.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쌓아온 이미지가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그대로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회창 대세론’에 도전장을 내민 주자들의 이미지 경쟁도 치열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를 언급하면서 급부상한 이인제 경기지사는 이때까지만 해도 가는 곳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를 치켜세웠다. 1997년 1월, 43세의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영국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당시 49세이던 이지사가 맞장구를 치고 나온 것.

실제로 이지사와 토니 블레어는 비슷한 점도 있었다. 같은 40대이고, 고향이 아닌 지역에서 정치적 ‘거물’로 성장한 데다,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온 점까지…. 아무튼 이지사는 자신이 주창한 ‘젊은 일꾼 대통령론’과 ‘토니 블레어 효과’의 화학적 결합을 시도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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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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