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김동신, 괜찮은 사람이니 잘 봐줘”

‘북풍사건’과 김동신·이수동 로비 커넥션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mairso2@donga.com

    입력2004-09-07 1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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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9년 9월1일 낮 12시. 북풍사건을 조사하던 청와대 민정수석실 K국장과 이수동씨가 만났다. 장소는 한정식집 ‘인동초’. 이씨는 “김동신을 조사한다고 들었다” “김동신과 나는 친구 사이여. 잘 봐줘” 하며 김동신 당시 육군참모총장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
    김동신 국방부장관이 1999년 청와대의 북풍사건 조사 당시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에게 구명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같은 사실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돼 구속된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확인된 것이다. 아울러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김장관이 북풍사건 조사관인 청와대 관계자에게 돈봉투를 건넨 사실도 드러났다.



    김성재 민정수석의 보고


    1999년 9월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북풍사건에 대한 조사결과가 담긴 보고서를 올렸다. 여기서 말하는 북풍사건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오익제 편지사건’ ‘윤홍준 기자회견’ 등이 아니라, 1996년 4월 15대 총선을 며칠 앞두고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이자 당시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과 군 수뇌부가 이를 과대포장해 선거에 악용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군 수뇌부는 수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언론 홍보효과를 극대화하는 한편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합참(합동참모본부) 지하벙커(지휘통제실)와 북한군의 주요 군사시설을 찍은 사진을 공개해 이를 전 언론에 크게 보도되도록 함으로써 대북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북한군은 4월4∼6일(국방부 발표대로라면 4월5∼7일) 3일 동안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언론은 4월7일 이후 총선 하루 전인 4월10일까지 나흘 동안 북한군의 ‘위협’과 국군의 ‘단호한’ 대응태세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여파인지 여당인 신한국당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야당(국민회의)은 우세지역으로 예상했던 수도권에서조차 참패했다.

    자칫 역사의 그늘에 가려질 뻔했던 이 사건이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0년 4월 김OO예비역 육군대령의 국회 기자회견을 통해서다.

    북풍사건 당시 합참 전략정보과장이었던 김씨는 판문점 사태에 대해 군 수뇌부의 의지에 거슬리는 정보판단보고를 했다가 무능력한 장교로 낙인 찍혀 그후 한직을 돌고 여러 차례 승진에서 누락되는 등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김씨의 주장을 반박하며 ‘북풍’의 실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언론의 취재 결과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관계자들의 증언과 여러 정황증거가 드러남으로써 국방부의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김씨는 기자회견을 갖기 10개월쯤 전인 1999년 6월 청와대에 이 사건을 진정했고, 민정수석실에서 진상조사에 나섰다. 그러잖아도 민정수석실 관계자는 1998년 9월부터 이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던 중이었다. 김씨의 제보로 민정수석실의 북풍사건 조사는 활기를 띠었다. 약 3개월간의 조사 끝에 보고서가 작성됐고, 당시 김성재 민정수석은 이를 김대통령에게 대면보고했다.

    청와대 보고서에 따르면 김동신 국방부장관(보고서 작성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1996년 4월에 있었던 북풍사건 당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장으로 합참 작전본부장이었던 그는 청와대 고위관계자로부터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 사태를 언론에 적극 홍보하라는 지시를 받고 충실히 이행한 후 그 결과를 김동진 합참의장(후에 국방부장관 역임)과 이양호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청와대 보고서가 올라간 지 한 달이 채 안돼 김동신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임기 만료 5개월을 앞두고 사퇴했다. 대외적 명분은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한 ‘용퇴’. 하지만 호남군맥의 선두주자로 최초의 호남 출신 육군참모총장인 그의 갑작스러운 사퇴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정치권과 군 주변에서는 북풍사건에 대한 문책인사라는 얘기가 돌았다. 일부 일간지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2000년 10월 국방위 소속 민주당 정대철 의원은 국방부 국정감사를 통해 북풍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정의원은 “북풍사건 당신 군 수뇌부가 북한군의 통상적인 무력시위활동을 군사적 도발이 농후하다고 왜곡·확대시켜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다양한 홍보 메뉴를 개발해 언론을 상대로 8회 이상 공개 브리핑을 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K국장이 북풍사건 제보자인 김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6월19일. 당시 김씨는 대령으로 육군 정보학교 어학처장이었다.

    K국장은 김대령을 비롯해 영관급 장교 3명으로부터 북풍사건 관련 증언을 들었다. 이들은 북풍사건이 있었던 1996년 4월 합참 상황실(지휘통제실)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이다. K국장은 이를 근거로 당시 군 지휘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돈봉투와 여하사관의 식사 시중


    K국장이 계룡대에 있는 육군참모총장 집무실에 찾아간 것은 1999년 7월14일이다. 그전에 참모총장 비서실을 통해 면담일정을 잡았다. 김동신 총장은 비서실 관계자를 통해 “일정이 빠듯해 10분 이상은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전했다. 그에 따라 면담시간은 오전 11시20∼30분으로 잡혔다. K국장은 11시쯤 도착해 비서실에서 기다렸다.

    11시20분. K국장과 만난 김총장은 “대전에서 점심 약속이 있다”며 시간을 많이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K국장은 “딱 한가지만 물어보면 된다”고 운을 뗀 뒤 북풍사건을 끄집어냈다. 김총장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애초 약속은 10분이었지만 면담은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1996년 4월 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 때 합참 상황실에서 유종하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전화를 받지 않았냐”는 K국장의 질문에 김총장은 “전화를 받는다면 김동진 합참의장이 받지 왜 내가 받겠냐”고 반박했다. 제보자인 김대령 주장에 따르면 당시 유종하 수석과 김동신 합참 작전본부장은 4월6∼8일 세 차례에 걸쳐 통화했다.

    김대령의 일기에는 구체적인 통화일시와 통화내용(김동신 작전본부장의 말)이 적혀 있다. 또 통화가 끝난 후 그때그때 김작전본부장이 상황실 근무자들에게 하달했다는 유수석의 지시사항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주로 대언론 홍보 강화에 관련된 내용이다.

    김대령 일기에 따르면 애초 유수석이 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찾은 사람은 김동신 작전본부장이 아니라 김동진 합참의장이다. 그런데 김합참의장이 자리에 없어 김작전본부장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김씨 일기 내용대로라면 김작전본부장은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유수석의 지시사항을 이행한 것으로 보인다(유 전수석과 김장관은 2000년 4월 김씨의 기자회견 직후 이 문제가 불거지자 통화 사실 자체를 부인한 바 있다. 다만 유 전수석은 “김동진 합참의장과는 통화했을 수도 있겠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K국장은 이날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김총장의 집요한 요청에 제보자가 누구인지를 밝힌 것이다. 이것이 뒷날 문제가 됐다. 이날 김총장은 K국장에게 방문 기념으로 도자기를 선물했다.

    7월18일, K국장은 민주당 임복진 의원을 면담했다. 임의원이 1996년 4월 북풍사건 직후 국회 상임위에서 이 문제로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을 질타한 데다 그해 9월 국방부 국정감사 때도 이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임의원은 진상조사를 위해 국방부 건물에 있는 합참 상황실에 들어가려다 뒤쫓아온 김동신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작전본부장은 임의원을 안내한 군인에게 “왜 이런 데 의원을 들어오게 했냐”고 나무랐다.

    결국 임의원은 북풍사건에 대해 의혹만 제기했을 뿐 진상조사에는 실패했다. K국장이 북풍사건에 대해 묻자 임의원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해줬다.

    그후 K국장은 합참 작전기획과장 L대령의 전화를 받았다. L대령은 ‘김동신 총장의 지시’라면서 “당시 관련 자료를 건네줄 테니 만나자”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7월28일 오후 2시 국방부 면회실에서 만났다. L대령은 북풍사건 당시 합참 지휘통제실장이었다.

    그는 김OO 대령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 “그때 나는 부임한 지 얼마 안돼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전임자가 남아 있으면서 일처리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동신 총장의 ‘혐의’와 관련해선 “김총장은 당시 합참 작전본부장으로서 청와대 수석으로부터 전화를 받을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K국장은 그에게 김총장의 ‘혐의’를 자세히 일러주면서 “총장한테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전하라”고 말했다.

    그후 김동신 총장의 행정부관 정아무개 중령이 K국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총장이 같이 식사하기를 원한다”는 전갈이었다. 참모총장실 송아무개 대령으로부터도 연락이 왔다. 8월5일 낮 12시, K국장과 김총장은 두번째로 만났다. 장소는 국방부 뒤편에 있는 육군참모총장 서울사무소. 미군부대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점심을 함께했다. 정갈한 한정식이 나왔는데, 미모의 여하사관 2명이 음식시중을 들었다. 북풍사건에 관한 얘기가 오갔다. 김총장은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식사가 끝난 후 김총장은 K국장에게 봉투를 건넸다. 휴가비 명목이었다. K국장은 완강히 거절했으나 김총장이 강권해 ‘마지못해’ 받았다. 봉투엔 10만원짜리 수표 10장이 들어 있었다. 대전 모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였다. K국장은 이를 청와대 사무실에 보관해뒀다.

    그 이틀 뒤인 8월7일 K국장은 해외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그가 휴가 간 사이 ‘일’이 벌어졌다. 북풍사건 제보자인 김OO 대령이 육군참모총장 직속인 육군중앙범죄수사단(중수단)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된 것이다. 8월10일 오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어 김대령의 부하직원 8명도 줄줄이 중수단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중수단은 김대령의 ‘비위사실’을 제보한 익명의 투서를 내세웠다.

    하지만 투서는 의문 투성이였다. 우선 작성자의 신분이 불분명하고 투서경위가 석연찮았다. 또한 그 내용이라는 것도 ‘첩보’ 수준의 얘기를 끌어모은 것이었다. 김순례라는 민간인이 군수사기관에 제보했다는 이 투서에는 대략 네 가지 ‘비위사실’이 적혀 있었다.

    ▲김대령이 당시 근무지인 정보학교에서 식당 이발소 등 복지시설 이익금을 챙겼으며 ▲부대 내 세탁소 주인으로부터 사례비를 받았으며 ▲영어시험 답안지 유출 후 문제가 생기자 부하 직원에게 책임을 전가했으며 ▲정치적 발언을 자주 하고 특히 전국구의원으로 진출한다는 얘기를 주변에 했다는 것이다. 내용의 신빙성을 떠나 하나같이 민간인이 군수사기관에 진정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내용이었다.

    중수단은 엿새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김대령과 그 부하들을 조사했으나 비위사실을 확인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김대령은 무혐의로 풀려났다. 북풍사건에 대한 청와대 보고서와 김대령 증언에 따르면 당시 김동신 총장은 부하들을 시켜 김대령을 회유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8월11일 오후 6시, 중수단 소속 모 중령은 국방부 뒤편 식당 ‘용수정’에서 김대령에게 밥을 사주며 “참모총장 앞으로 사죄편지를 쓰면 잘 처리해주겠다”고 제의했다.

    다음날엔 정보학교장 K소장이 비슷한 얘기를 하며 김대령을 ‘달랬다’. 8월13일엔 중수단장 L대령이 나섰다. 이날 오후 4시 계룡대 골프장 클럽홀 2층에서 김대령을 면담한 L대령은 조사배경에 대해 “육군참모총장실에서 지시받았다”고 알려주며 자신은 북풍사건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고 했다.

    청와대 K국장이 휴가에서 돌아온 것은 8월16일. 자신이 없는 사이 김대령이 연행된 사실을 알게 된 K국장은 계룡대 육군참모총장실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비서실장 K준장에게 김대령 연행과 관련해 거칠게 항의하는 한편 북풍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 의지를 내비쳤다. 두 사람은 이날 욕설까지 하며 심하게 다퉜다고 한다.

    K국장은 김성재 민정수석에게 김대령 연행사실을 보고했다. 그때까지 북풍사건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김수석은 김동신 총장에 대해 분개하며 이 사실을 김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대통령은 “누가 그런 짓을 하냐’며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8월17일, 김동신 총장의 비서실장인 K준장이 김대령을 만나 “일을 확대하지 말라. 너만 참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설득했으나 김대령은 굽히지 않았다. 8월19일엔 중수단 K중령이 청와대로 K국장을 찾아왔다. K국장의 고향 후배인 노아무개 중령이 다리를 놓았다. 세 사람은 오후 5시20분께 청와대 면회실에서 마주앉았다.

    K중령은 김대령의 ‘비위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김대령은 ‘국장님이 쓸데없는 일을 해 자기만 곤란하게 됐다’며 국장님을 원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K국장이 김동신 총장한테 돈봉투 받은 얘기를 슬쩍 끄집어냈다.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인 K국장은 “돈 봉투 받은 것까지 수석한테 다 보고했다. 수표는 증거로 청와대에 보관하고 있다. 김동신한테 가서 똑바로 전하라”고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8월20일 오후 7시, 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 K준장이 중수단 K중령과 함께 김대령 집 근처인 잠실롯데호텔 일식당에 자리를 잡고 김대령을 불러냈다. K준장은 김대령에게 “참모총장을 왜 괴롭히느냐” “김대령만 조용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손잡고 함께 일하자”고 김대령을 ‘설득’했다.

    이에 김대령은 중수단이 자신을 연행한 데 대해 항의하는 한편 김동신 참모총장이 자신의 ‘안전보장’과 관련해 각서를 써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끝났다. 김대령은 이날 대화내용을 녹음해뒀다.

    이 즈음부터 김동신 총장의 정치권 구명로비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8월 하순, 청와대 K국장은 평소 친분이 있는 여권 실세 K의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K의원은 대뜸 “육군참모총장 조사한다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대통령에게 올라갈 북풍사건 조사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던 K국장은 K의원에게 북풍사건의 개요를 설명해줬다. 설명을 듣고 난 K의원은 “알아서 잘 해보라”며 더 이상 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K국장과 절친한 사이로 모 의원의 동생인 K씨로부터도 전화가 걸려왔다. 김총장과 광주일고 동기인 그는 “김동신, 내 동기여. 잘 봐줘” 하고 부탁했다.

    K의원이 김동신 총장 조사사실을 알게 된 것은 DJ 비서실장 출신인 모 사법기관의 고위직 인사 C씨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였다. 북풍사건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올라간 후 K국장은 C씨를 만나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8월말 K국장은 과거에 당쪽에서 일할 때 친분이 있던 아태재단 행정실장 이수동씨로부터 여러 차례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이씨는 용건을 밝히지 않은 채 K국장이 “전화로 얘기하자”고 해도 계속 만나자고 했다. 북풍사건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한 K국장은 이씨를 만날 때 보고서 초안을 들고 나갔다.

    두 사람은 9월1일 점심때 한정식집 ‘인동초’에서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이씨는 “김동신을 조사한다고 얘기 들었다”며 “김동신과 나는 친구 사이여” “김동신, 참 괜찮은 사람이니 잘 봐줘” 하면서 김총장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 K국장이 “나이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친구냐”고 묻자 “형 동생 하는 사이”라고 고쳐 말했다.

    K국장은 이씨에게 “김동신 총장은 북풍사건의 핵심인물은 아니지만 부화뇌동한 측면이 있다”고 김총장에 대한 조사배경을 설명했다. 이씨는 설명을 듣고 나서 웃기만 했다. K국장은 “똑바로 알고 계시라”며 이씨에게 조사보고서 초안을 보여줬다. 이씨는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으려 했다. K국장이 “이거 가져가면 큰일난다”며 도로 뺏었다.

    이씨가 계속 김총장을 두둔하면서 ‘선처’를 부탁하자 K국장은 “김동신 총장 관련 부분이 빠져도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문제없다. 보고서에서 김동신 총장의 이름을 빼줄 수도 있다”며 이씨를 안심시켰다. 이씨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당시 김총장의 정치권 구명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이런 증언도 있다. 김총장과 친분이 있는 여당 L의원의 보좌관은 김총장이 ‘구명’을 위해 몇몇 정치권 인사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김총장실에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 일 있으면 왜 우리한테는 얘기하지 않았느냐” 고 묻자 총장 비서실의 한 관계자는 “조용히 처리하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대답했다.

    이수동씨가 K국장을 만난 다음날인 9월2일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K국장에게 북풍사건에 대한 김OO 대령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진술서를 써준 김OO(당시 호서대학교 학군단장) 중령이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한 일이다. 북풍사건 당시 합참 징후분석장교였던 김중령은 한미연합사령부의 미군측 실무자와 워치콘(WATCH CONDITION·정보감시태세) 격상 문제를 협의했다(상자기사 참조).

    청와대 보고서에 첨부된 김중령의 진술서에는 당시 상황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진술서에 따르면 9월2일 새벽 2시30분께 김중령의 숙소(충남 아산시 배방면 모산리 소재 보림빌라 305호)에 2∼3명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침입했다. 그들은 방문을 두드리며 “김OO 중령이 맞냐?”고 신분을 확인한 후 “같이 가보면 안다”며 동행을 요구했다.

    김중령이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문을 열지 않고 버티자 그들은 그냥 돌아갔다. 김중령은 즉시 부대 당직실에 연락한 후 집무실로 복귀했다.

    2000년 10월 민주당 정대철 의원은 국방부 국정감사를 통해 김OO 대령 연행사건과 김OO 중령 납치미수사건을 문제 삼기도 했다. 김중령은 자신에 대한 납치기도가 군 수사기관의 소행이라고 여겼다.

    김성재 민정수석을 통해 북풍사건보고서가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은 1999년 9월 중순. 보고서에는 이수동씨의 ‘기대’와는 달리 김동신 총장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김총장의 북풍사건 관련 행적은 물론 ‘청와대 조사 방해 혐의’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됐다.

    김수석은 이날 한 시간 가량 김대통령을 단독면담, 북풍사건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대통령이 큰 관심을 보여 김수석은 뿌듯해 했다. 그 며칠 전에 김수석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정복 차림의 김OO 대령과 만나 북풍사건 관련 증언을 직접 들었다.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올라간 후 모 국가정보기관의 장인 A씨가 대통령을 면담, 김동신 총장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김동신 총장이 사퇴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쯤 뒤인 10월26일이다.

    현재 학술진흥재단 이사장인 김성재 전수석은 북풍사건 보고서와 관련해 “청와대는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북풍사건의 진실을 완전히 밝히지는 못했다. 다만 여론수렴 차원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회고했다.

    육군참모총장에서 물러난 김동신씨는 민주당 안보위원회 고문을 맡아 당쪽에서 활동했다. 2000년 총선 때는 광주 지역에서 민주당 L의원에 대한 찬조유세를 하고 광주시지부가 주관한 정당연설회에 참석하는 등 선거 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북풍사건 관련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던 그가 지난해 3월26일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자 정치권과 국방부 주변에서는 발탁 배경으로 그가 군내 대표적인 ‘미국통’이라는 점을 꼽았다. 당시 한미관계는 햇볕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크게 삐걱거리고 있었다. 그해 1월 출범한 부시 행정부가 ‘힘의 외교’를 앞세워 대북강경책을 폈기 때문이다.

    김장관 자신도 발탁 배경에 대해 “최근 안보 측면에서 한미관계가 중요하다. 군생활을 하면서 한미군사관계에 대한 실무경험이 있다는 점과 현재 미 행정부 안보팀의 주요 핵심인사들과의 개인적 교분 등이 고려됐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김장관이 ‘미국통’이라는 사실은 군경력에서도 드러난다. 육사21기인 그는 광주 출신으로 광주일고를 졸업했다. 초임장교 시절 서울대 영문학과에 편입, 1969년 졸업장을 받았다. 1976년 미 육군 지휘참모대를 졸업했고 1980년대 후반에는 미 해군대학원 연수를 거쳐 영국 국방대를 졸업했다.

    주로 정책 부서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국방부와 합참의 요직를 두루 거쳤고 1996년 10월엔 미국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대장)에 임명됐다. 그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기 두 달 전인 지난해 1월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미국으로부터 네 차례 훈장 및 포상을 받았다.

    이런 경력 탓인지 일부 언론은 그의 장관 임명과 FX사업을 비롯한 10조원대 무기사업의 향방을 연결시키기도 했다. 당시 몇몇 일간지는 장관 프로필 기사에서 그가 북풍사건에 관련됐다는 점을 짤막하게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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