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호

군검찰, 이정연 관련 진술 알고 있었다

김대업, ‘昌과의 전쟁’ 4년

  •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4-08-27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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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업, 오래 전부터 “이회창 잡을 수 있다” 호언
    • 녹음테이프 주인공 김도술, 정치인 관련 병역비리 자백한 사연
    • 김도술, ‘도술’ 부려 자신의 두 아들 병역면제 처리
    • 김도술과 연결됐다는 헌병 준위 출신 B씨 조사 때 엄청난 외압
    • 1999년 병무비리수사 초기부터 이정연은 주요 ‘용의자’
    • 2000년 정치인 타깃 군·검합동수사는 김대업과 청와대 합작품(?)
    • 2001년 김대업이 미국으로 김도술 찾아나선 이유
    • 서울지검 특수1부와 김대업의 특수관계
    군검찰, 이정연 관련 진술 알고 있었다
    이른바 ‘김대업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직후 국방부의 고위 인사는 “김대업씨가 이회창씨 아들의 병역기피의혹을 추적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김도술씨가 이회창씨 관련 진술을 했다는 것은 군검찰 주변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얘기”라고 말했다.

    몇몇 군검찰 관계자도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김대업씨의 주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증언들이다. 그렇지만 김도술씨의 진술이 담긴 녹음테이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딱 한 사람, 김대업씨말고는.

    ‘뇌관의 심지가 타들어 가는 형국’. ‘신동아’ 2002년 7월호에 실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장남 정연씨의 병역기피 의혹 기사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의혹이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이 ‘예측’은 놀라우리 만치 맞아떨어졌다.

    무더기 소송 사태와 사활을 건 여야의 대치 국면, 그리고 요란스러운 언론 보도.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씨의 의도야 어쨌든 이 문제는 이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검찰 수사결과와 상관없이 정치권의 분쟁은 쉬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한쪽이 승복하면 다른 한쪽이 수긍하지 않을 태세이기 때문이다.

    5년 전인 1997년에도 제기됐던 이정연씨 병적기록표 위·변조 의혹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정말 이상한’ 병적기록표라는 의심을 갖게 하는 징후가 자꾸 드러나 의혹을 부채질한다.



    김대업씨 주장으로 불거진 은폐대책회의 의혹은 먹구름처럼 병무청과 한나라당 당사 위를 떠돌고 있다. 장본인으로 지목된 김길부 전 병무청장의 기자회견은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씨의 주장은 일면 타당해 보이지만 영 개운치가 않다. 다른 얘기는 그만두고라도 서울지방병무청 문서창고에 안전하게 보관된 이정연씨의 병적기록표를 왜 자신이 ‘특별관리’했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8·8 재·보선을 앞둔 지난 6월 초 김대업씨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회창 후보의 부인 한인옥씨가 병역면제과정에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녹음테이프가 있다는 주장.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후에도 진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갇혀 있다. 한마디로 ‘깔끔한’ 증거가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다. 녹음테이프는 진실에 다가서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 보긴 어렵다. 비밀녹음이라 객관성이 떨어지는 데다 관련자들이 부인하기 때문에 법적 증거능력도 없다.

    그렇다면 김대업씨는 왜 녹음테이프 얘기를 꺼내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켰는가. 정치적 시각을 배제하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그 테이프가 수사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정연씨의 병역기피 의혹을 검찰이 공식 수사하도록 압박하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써 녹음테이프의 소임은 끝났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밝히는 것은 테이프가 아니라 검찰 수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씨의 ‘작전’은 기막히게 성공했다.

    사건의 진실 여부 못지 않게 관심을 끄는 것은 김대업씨의 행적이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한 남자의 진실이다. 도대체 그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을 추적한 것일까. 그가 확보한 ‘증거’들은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그리고 그가 여권 또는 검찰의 지원으로 ‘이회창 사냥’에 나섰다는 의혹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김대업씨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지금 그가 제기하는 의혹과 ‘증거’의 신빙성을 자연스럽게 검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김씨의 행적과 사건의 진실은 구분해야 마땅하다. 즉 김씨가 현 정권과 연계해, 또는 검찰의 지원으로 이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을 추적했다는 혐의(?)와 이회창 후보 아들이 청탁이나 고의감량 등의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했다는 혐의(?)는 별개인 것이다. 다시 말해 김씨와 현 정권의 유착(?)이 이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김씨의 수사관 자격시비와 불미스러운 사생활 전력이 사건의 본질과 별개인 것과 같은 이치다.

    ‘신동아’는 지난 3년 동안 병무비리수사에 대해 심층취재를 해왔다(2000년 4월호, 2001년 6월호, 2002년 7월호 참조). 김대업씨를 비롯해 청와대, 정치권, 시민단체, 군검찰, 검찰, 군정보기관 관계자들을 여러 차례 만나 취재하는 과정에 병무비리수사의 내막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경찰과 검찰, 법원 관계자들을 통해 김씨의 과거 범죄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한 김씨가 제기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과 관련해 국방부, 검찰, 군검찰, 군병원, 병무청 등의 전·현직 관계자와 군부대 관계자들을 만나거나 통화함으로써 김씨의 주장을 검증했다.

    김대업씨를 잘 아는 사람들, 이를테면 그를 정보원으로 활용했던 군검찰, 검찰 관계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는 얘기는 그가 병무비리를 적발하는 데 탁월한 감각과 능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김씨가 지금까지 병무비리에 관한 한 근거 없는 얘기를 한 적은 없으며 병무비리수사, 특히 초기 수사과정에 상당한 공을 세웠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김씨의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언행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그가 병무비리 적발에 집착한 나머지 조그마한 의혹을 큰 의혹으로 부풀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탓에 입증이 어려운 사안에 대해 무리한 주장을 펴는 등 종종 ‘오버’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병무비리수사에 참여했던 국방부 법무과장 고석 대령 같은 이는 김씨를 사기꾼 취급하기도 한다.

    김대업씨의 ‘이회창 추적’은 지난 3년 여 동안 군·검 합동으로 진행된 병무비리수사 초기부터 시작됐다. 창군 이래 최대의 병무비리수사가 촉발된 계기는 이른바 ‘원준위 사건’이다. 1998년 5월 국방부 검찰부는 원용수 준위(당시 국방부 인사참모부 소속 병무청 모병연락관)를 병무비리 혐의로 구속했다.

    군검찰은 수사과정에서 대규모 병무비리 커넥션의 꼬리를 잡았지만, 수사능력의 한계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병무비리의 대부’라는 박노항 원사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도 이때의 일이다. 박원사는 원준위 체포 직후 잠적해버렸고 병무비리수사는 벽에 부딪혔다.

    군검찰 수사가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998년 7월 협박죄로 1년 실형을 살고 막 출소한 김대업씨가 합류하면서다. 군검찰은 의정하사관 출신으로 병무비리 전과자이기도 한 김씨의 능력과 병무비리 근절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의욕을 높이 사 정보원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한나라당에서 문제 삼고 있는 그의 전과를 철저하게 검증하는 절차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제1차 군·검병역비리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가 탄생한 것은 그로부터 5개월 후인 그해 12월. 김대업씨의 자료분석과 비리적발 능력에 고무된 군검찰이 천용택 국방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청와대에 민간 검찰과의 합동수사를 건의한 결과였다.

    군검찰의 최고 책임자인 박선기 법무관리관(소장)과 고석 국방부 검찰부장(중령)이 청와대로 찾아가 현재 민주당 의원인 박주선 법무비서관을 만났다. 박비서관은 김태정 검찰총장에게 업무협조를 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서울지검 특수3부의 검사들이 검찰관들과 더불어 합동수사반을 구성했다.

    이 수사의 기본 틀을 짠 사람은 국방부 검찰부의 수석검찰관 이명현 소령이다. 이소령은 김대업씨의 도움을 받아 병무청으로부터 넘겨받은 약 5만 건의 병적카드를 석 달 동안 분석해 그 중 ‘냄새가 나는’ 병적카드 2000건을 선별했다. 합동수사반 출범 전까지 분석작업이 완료된 것은 약 400건. 이것이 1차 군·검합동수사의 기초 수사자료가 됐다.

    ‘김대업 녹음테이프’의 주인공 김도술씨가 병무비리 혐의로 구속된 것은 합수부가 출범하기 한 달 전인 그해 11월. 입영대상자들의 부모로부터 돈을 받고 군의관들에게 병역면제를 청탁한 혐의였다. 당시 김씨는 국군수도통합병원 주임원사였다.

    김도술씨가 이정연씨 병역면제과정에 개입했다는 김대업씨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정황증거’는 크게 네 가지다. 첫째, 김대업씨가 김도술씨를 여러 차례 단독으로 조사했다는 사실. 둘째, 김대업씨가 조사과정에서 종종 녹음기(보이스 펜)를 사용했다는 사실. 셋째, 군검찰 주변에서 김도술씨가 그런 진술을 했다는 얘기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군검찰이 병무비리수사 당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수사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김도술씨는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8월12일 오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한인옥씨로부터 아들의 병역청탁을 받은 적도 없으며 군검찰에서 그렇게 진술한 적도 없다”고 녹음테이프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울러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닐 것이다. 김대업한테는 조사 받은 적 없다”며 조작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하지만 곧 말을 바꾸었다. 당시 군검찰 수사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이 8월12일 기자들에게 “김대업씨는 김도술씨를 수십 번 조사했다”고 말한 직후다. 하지만 이 말은 와전된 것이다. 이소령 얘기를 정확히 옮기면 당시 수사팀이 헌병대 영창에 수감돼 있는 김도술씨를 수십 차례 불러내 조사했는데, 김대업씨도 수사보조 차원에서 몇 차례 그를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소령의 증언을 의식해서인지 김도술씨는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김대업이 가끔 와서 ‘자그마한 것(병역비리)이라도 얘기해달라’고 했다. 두어 차례 얘기한 적은 있다”고 김대업씨한테 조사 받은 사실을 에둘러 시인했다. 이어 KBS와 가진 현지 인터뷰에서는 “김대업이 ‘한 건 불면 봐주겠다’고 말했다”며 김대업씨와 꽤 ‘깊은 대화’를 나눴음을 암시하기도 했다.

    당시 군검찰은 김도술씨를 거물 브로커로 보고 그를 통해 적잖은 병무비리가 밝혀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김씨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당시 수사팀 관계자의 증언.

    “김도술씨는 수통(수도통합병원)에서 신검 업무를 담당했다. 병무비리로 구속된 원용수 준위와 친분이 깊었는데 박노항 원사와도 아주 가까운 관계였다. 조사 당시엔 잘 털어놓지 않아 몰랐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많이 해먹었더라. 재산이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기억 난다. 김씨는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 관련된 군의관 진술을 들이대면 그제야 자신이 저지른 병역비리를 시인하곤 했다. 그것도 공소시효가 지난 것만 골라서. 일부에서는 김대업씨가 김도술씨를 협박해 (이회창씨 관련) 진술을 얻어낸 것 아니냐고 의심하는데 김도술씨는 누가 협박한다고 털어놓을 사람이 아니다.”

    ▶ 김도술에 심리전 펴다

    김대업씨에 따르면 김도술씨의 진술을 녹음한 시기는 1999년 3월∼4월경이다. 이에 대해 김도술씨는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재판을 받고 있어 조사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검찰관은 “김씨의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수사팀은 재판과 상관없이 피의자들을 계속 불러 조사했으며 김씨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합수부는 수사를 시작한 지 한달 반이 지나도록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병무비리를 밝히는 데 ‘최종 관문’이라고 할 군의관들이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군검찰은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후 서울지검과 협의해 수사에 협조하는 군의관들을 면책하기로 했다. 군의관 처벌보다는 군의관을 통해 병역을 면제받은 사람들을 적발하는 것이 수사의 근본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면책 약속 후 군의관들이 자백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입에서 하루에 100여 건의 병무비리가 드러나기도 했다. 수사팀 관계자 표현에 따르면 그때는 ‘너도나도 부는’ 분위기였다. 그 즈음 김도술씨가 불안해하는 기색이 수사팀에 포착됐다. 수사팀은 심리전을 폈다. 일부러 김씨를 부르지 않았다. 그러자 김씨가 스스로 면담을 요청했다. 수사팀은 몇 차례 면담을 거절해 그를 초조하게 만들다가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조사실에 들어선 김도술씨는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옛날에 정치인 것을 처리한 게 있다”며 두 사람 이름을 댔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최근 일부 언론에 공개된 N씨와 S씨다. 두 사람 다 의원과 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두 사람 아들의 병역비리를 조사하지 못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수사과정에 김씨가 자신의 쌍둥이 두 아들의 병역을 면제 처리한 사실도 드러났다. 그의 두 아들은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수사관계자에 따르면 김씨는 두 아들이 징병신체검사를 받지도 않았는데 병적기록표를 정밀신검 기관인 군병원으로 보내는 방법으로 면제 처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류 조작만으로 해결한 것이다. 당시 수사관계자들은 이를 두고 “김도술이 도술을 부렸다”고 말했다.

    김대업씨가 주로 한 일은 병적자료 분석이었다. 하지만 수사관 옆에 앉아 조사에도 참여했으며 때로는 단독으로 피의자들을 조사했다.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는 사람들을 추궁하고 설득하는 역할이었다. 김씨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의학지식이 풍부하고 의무 및 병무행정에 밝았기 때문이다. 그가 조사과정에 보이스 펜 녹음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검찰관들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김대업씨가 병무비리수사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김씨는 검찰에 녹음테이프를 제출하며 “녹취 과정 및 존재에 대해서는 당시 군검찰의 수사 책임자급 인사도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김대업씨에 따르면 ‘군검찰 수사 책임자급 인사’는 당시 국방부 검찰부장이었던 고석 대령을 가리킨 것이다. 당시 중령이었던 고대령은 군검찰의 2차 병무비리수사(1999년 5월∼7월)를 이끌었다. 1차 수사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이 김씨를 중용한 반면 고대령은 그를 불신해 수사팀에서 빼버렸다.

    그 즈음 군검찰은 김대업씨를 수사에 참여시키는 문제와 군정보기관 요원 수사에 대한 의견 차이로 내분에 빠져 있었다. 국방부 수석검찰관 이소령과 그의 직속상관인 고부장이 날카롭게 대립했던 일은 군검찰 주변에서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이소령은 1999년 7월 미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 국방부장관에게 병무비리수사의 문제점을 적은 보고서를 서신 형태로 보내기도 했다. ‘신동아’가 2000년 초에 입수했던 이 문서에는 당시 군검찰 내부의 갈등 양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1999년 11월 김대업씨의 제보를 받은 참여연대에 의해 공무상비밀누설 등의 혐의로 고발당하기도 했던 고석 대령은 지금까지도 김대업씨를 사기꾼으로 보고 있다. 2000년 2∼3월경 3군사령부 법무참모였던 고대령은 병무비리수사 비화를 취재하던 기자와 여러 차례 장시간에 걸쳐 통화한 적이 있다.

    당시 고대령은 “김대업과 이명현 소령이 기자들에게 나를 비방하는 얘기를 흘려 왔다”며 몹시 분개했다. 당시 통화 내용 중엔 이런 얘기가 있었다.

    “하루는 제보자(김대업)가 나한테 찾아왔다. 이회창씨가 서울 송파갑 재선거에 출마했을 때였다. 자기가 이회창 아들 자료를 갖고 있는데 이것을 잘 처리하면 부장(고대령)이 국민회의 공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를 수사팀에 참여시키면 이회창을 잡을 수 있다, 공소시효만 지나지 않았다면 명확히 처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입증자료가 있냐고 물으니 멀리 숨겨 놓아 당장은 줄 수 없다고 하더라.”

    고석 대령에게 2년 전에 들었던 얘기를 다시 확인해 봤다. 고대령은 그때와 거의 비슷한 얘기를 들려줬다. 그는 녹음테이프와 관련한 김대업씨의 주장을 완전히 부인했다.

    “당시 김대업으로부터 이정연씨 문제와 관련해 어떠한 보고도 받은 적이 없다. 정연씨니 수연씨니 이회창씨니 하는 얘기는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99년 3∼4월경엔 수사에 관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김대업에게 그런 얘기를 들을 위치도 아니었다. 내가 수사할 땐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문제를 조사한 적이 없다.”

    반면 1999년 3월 중순 이후 수사팀에 합류했던 유관석 소령은 정반대의 주장을 펴 눈길을 끈다. 현재 1군사령부 법송과장인 유소령은 1999년 초 고석 검찰부장 밑에서 김훈 중위 사망사건을 수사했으며 그해 5월부터 시작된 2차 병무비리수사에서도 고부장과 함께 일했다. 유소령은 “시기는 명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김대업씨로부터 김도술씨의 진술 내용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이정연씨의 병역기피 의혹과 관련해 요즘 언론에 나오는 얘기는 대부분 그때 들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꽤 오래 전에 들었다. 오랫동안 김대업씨와 함께 일하고 죽 지켜봐 왔기 때문에 그의 말을 신뢰하는 편이다. 한여사가 어떻게 하고 돈이 얼마가 오고갔다는 등 구체적인 얘기는 아니었지만 이회창씨 아들 병역면제와 관련된 진술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또 은폐시도에 대한 얘기도 들었다. 녹음테이프 존재는 이번에 알았지만 김대업씨가 워낙 주도면밀하기 때문에 별도로 녹음해뒀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김도술씨의 진술이 조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워낙 중요한 인물이니 김대업씨가 김도술씨의 진술을 ‘특별관리’했을 것이다.”

    유소령말고도 김도술씨가 그렇게 진술했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은 또 있다. 1차 합수부에 참여한 수사관계자 A씨는 “지난해 여름 당시 수사팀 관계자로부터 ‘한인옥 여사가 돈 줬다는 진술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A씨는 또 “나중에 확인한 사실인데, 1999년 4월∼5월경 모 방송국의 기자가 이회창씨 아들의 병역 문제를 취재한다며 당시 수사팀 관계자들을 접촉했다. 그 기자는 모 수사관계자로부터 관련 정보를 입수하고 취재에 나섰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2000년 2월 발족한 제3차 합수부에서 활약한 수사관계자 B씨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수사과정에서 김대업씨는 김도술씨에 대해 몇 차례 언급했다. ‘정연이 문제는 김도술이 잘 안다’고 얘기한 것이 기억 난다. 최근 1차 수사팀 관계자로부터 ‘당시 김도술씨의 진술을 받았으며 김씨의 진술이 자술서 형태로 남아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얘기가 김대업씨 입에서 나와 전파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관계자는 녹음테이프의 실체에 대해선 “사안의 성격상 날조된 테이프는 아닐 것이다. 김도술이 얘기해놓고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한편 김대업씨는 고석 대령의 주장에 대해 “없는 얘기를 지어내고 있다”고 강하게 반박하는 한편 “고석 부장에게 김도술의 진술 내용에 대해 보고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고부장과 내가 어떤 사이였는지 군검찰 주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1차 수사팀이 출범할 당시 이미 고부장과는 틀어진 관계였다. 알다시피 99년 4월 하순 1차 수사팀이 해체된 직후엔 고부장이 내 신분을 군의관들에게 노출시킨 일로 멱살 잡고 싸운 적이 있다. 그런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부장에게 찾아가 수사 참여를 요청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고부장에게 분명히 이회창 관련 진술이 있다는 얘기를 했고 그때 고부장이 내게 특별히 한 얘기도 있다.”

    고석 대령도 김대업씨와 1999년 4월 하순에 크게 싸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주장은 크게 엇갈리지만 공통점도 있다. 그것은 김대업씨가 병무비리수사 초기부터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한편 유관석 소령은 8월13일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군검찰의 병무비리수사 당시 정연씨 병적 관련 자료 위·변조 의혹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가 내·외부 잡음 등으로 중단된 적이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1차 수사 당시 군검찰 수사팀장이었던 이명현 소령의 얘기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주장이다.

    이소령에 따르면 당시 군검찰 수사팀은 정치인 기업인 연예인 체육인 등 병무청이 특별관리하는 이른바 사회관심자원의 병역비리를 수사하기 위해 병무청에 관련자들의 병적기록표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 등 몇몇 정치인들의 병적기록표는 병무청이 끝내 내주지 않아 기초 조사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 탓에 1999년 3월 중순 박선기 법무관리관에게 보고한 ‘병무비리 의혹 정치인’ 명단(16명)에 이회창 후보의 이름은 빠졌다고 한다.

    유소령과 이소령의 얘기에 차이가 나는 것은 이소령이 1차 수사 막바지인 1999년 3월 하순 수사팀장 자리에서 물러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석 검찰부장과 유소령이 새로 병무비리 수사팀을 맡았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4월 중순에 예정된 수사결과 발표 준비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유소령과 김대업씨 증언대로라면 그 시기를 전후해 이회창 후보의 아들에 대한 수사를 시도하다 중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동아’는 최근 국군춘천병원 관계자로부터 “1999년 4월경 군검찰 수사팀이 춘천병원에 찾아와 신검 관련 서류를 조사하고 갔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국군춘천병원은 1991년 2월 이정연씨가 최종 면제판정을 받은 곳이다.

    2차 수사팀에서 배제됐던 김대업씨는 1999년 7월 하순 기관(기무·헌병)요원들의 병무비리를 전담한 특별수사팀에 합류했다. 김의형 소령이 수사팀장을 맡았는데, 이 팀은 구 여권 정치인들이 연루된 대규모 병무비리 커넥션을 추적하다 두 달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체됐다.

    김대업씨가 참여연대와 접촉한 것은 그 직후다. 김씨는 참여연대에 군정보기관과 군 고위층 등의 외압으로 병무비리수사가 축소됐다고 제보했다. 참여연대는 김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 청와대에 병무비리 재수사를 요구했다.

    김대업씨는 그 즈음 여권 관계자와 만나 병무비리 재수사에 대비, ‘정치인 리스트’를 만들었다. 여권 관계자는 김씨로부터 건네 받은 자료와 병무비리수사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청와대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의 제목은 ‘고위층 병무비리 재수사의 필요성’이다. 보고서는 군정보기관의 병무비리수사 방해 의혹을 제기하면서 정치인 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 뒷면엔 병무비리 의혹이 있는 정치인 21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보고서는 정세분석 참고자료 명목으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전달됐다.

    비슷한 시기, 같은 제목의 보고서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도 올라갔다. 이 보고서는 정무수석실에 전달된 보고서와 비슷하면서도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성자는 동일인이지만 전달자는 다르다. 민정수석실 보고서에는 ‘추가적인 병무비리 의혹 조사대상 국회의원’이라는 제목의 문서가 첨부돼 있다. 여기엔 모두 45명의 의원과 아들 57명의 명단이 올라 있다(‘신동아’ 2001년 6월호 참조). 당시 김대업씨는 민정수석실 관계자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로부터 한 달여가 지난 2000년 1월19일 반부패국민연대가 기자회견을 통해 정치인 병무비리수사를 촉구했다. 이 시민단체는 제보 받은 것이라며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 명단 세 종류를 공개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총선을 석 달 앞둔 터라 파장이 컸다. 이 기자회견을 계기로 국방부 검찰단과 서울지검 특수1부가 주축이 된 제3차 군·검합동병역비리수사반이 편성됐다.

    사실 군검찰과 검찰은 반부패국민연대가 기자회견을 갖기 전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지휘하에 은밀히 병무비리 재수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반부패국민연대의 기자회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반부패국민연대에 ‘정치인 리스트’를 넘긴 ‘제보자’의 정체였다.

    김대업씨는 일부 언론이 자신을 지목하자 강하게 부인했다. 당시 기자와 만난 김씨는 “정치인 병무비리수사는 은밀히 해야 하는데 명단을 공개한 것은 수사를 방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반부패국민연대의 기자회견을 일종의 공작으로 규정했다.

    합수부가 수사의 기초 자료로 삼은 것은 반부패국민연대가 제공한 명단이다. ‘신동아’가 최근 확인한 바에 따르면 반부패국민연대의 기자회견이 있기 전 민정수석실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병무비리 재수사를 건의하는 보고서를 올렸다. A4 용지 4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앞서 소개한 여권 관계자가 민정수석실에 전달한 두 종의 보고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보고서에는 군정보기관의 병무비리수사 방해 혐의와 더불어 박노항씨와 구 여권 정치인들의 병무비리 커넥션 의혹이 제기돼 있다. 한편 여권 관계자가 작성한 두 종류의 보고서와 ‘정치인 리스트’는 반부패국민연대를 거쳐 합수부에 고스란히 넘어갔다.

    김대업씨는 군검찰 수사팀에 복귀하면서 “명예회복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군검찰은 김씨의 전과를 의식해 “수사기간중 잘못을 저지르면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또 병무비리수사 과정에 김씨를 두고 벌어진 군검찰 내부의 갈등과 군정보기관과의 마찰을 감안해 그의 역할을 ‘수사보조원’에 국한시켰다. 군검찰은 서울지검 측과 협의해 김씨에게 전과 말소, 곧 사면 복권을 약속했다.

    요란하게 출발한 정치인 수사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소환에 응하지 않은 정치인을 강제로 수사할 만큼의 증거가 확보되지 않은 데다 혐의가 드러난 경우에도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나 사법처리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당시 합수부 관계자에 따르면 수사방향을 두고 군검찰과 검찰 사이에 미묘한 갈등 기류가 흐르기도 했다. 청와대로부터 압박을 받은 검찰이 무리를 해서라도 의혹이 있는 정치인 전원에 대해 소환조사를 강행하려 한 데 반해 군검찰은 정치적 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2000년 3월 합수부는 수사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청와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도 수사하라는 것이 고위층의 지시였다. 그에 따라 서울지검 특수1부의 모든 검사가 이 수사에 투입됐다.

    합수부는 총선이 끝난 후에도 정치인 수사를 계속했다. 그 결과 병무비리 혐의를 받은 정치인 아들 75명 중 4명을 빼곤 다 조사했다. 이정연씨도 불려와 조사를 받았다. 주임검사였던 송찬엽(현재 원주지청장) 검사의 증언.

    “정치인 관련 비리는 잘 포착되지 않았다. 그나마 발견된 것도 공소시효가 걸렸다. 이회창씨 아들 병역문제도 공소시효가 지난 것이라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한편 김대업씨는 이 무렵 수사관계자들에게 김도술씨 얘기를 몇 차례 했다. “김도술을 잡으면 박노항과 이정연을 잡을 수 있다” “김도술이 많은 걸 알고 있다” 따위의 주장이었다. 검찰 관계자도 회의석상에서 비슷한 얘기를 꺼내곤 했다. 하지만 미국의 아들 집에 체류하고 있던 김씨는 검찰 조사에 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 김대업씨는 군검찰 소속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검찰, 즉 서울지검 특수1부 수사팀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검찰 고위관계자가 특별히 김씨를 챙겼다는 얘기도 들린다. 김씨는 이정연씨의 병역기피 의혹을 입증할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국군춘천병원과 의무사령부를 찾아가 관련 서류를 조사하기도 했다.

    합수부는 이번에 김대업씨가 공개한 녹음테이프에 등장하는 헌병대 준위 출신 B씨를 조사하기도 했다. B씨는 병무비리세계에서 박노항씨의 ‘사부’로 통하는 인물. 김대업씨는 수사팀에 B씨를 꼭 잡아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당시 수사관계자의 증언.

    “B씨를 조사할 때 애를 많이 먹었다. B씨는 김도술씨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상당한 거물이다. 현역 시절 말이 준위지 장군이나 참모총장급과 어울렸다. B씨 손에서 헌병감이 결정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그를 조사하려고 하자 주변에서 견제가 심하고 권력기관에서 압력이 들어왔다. 힘들게 소환해 몇 건의 병역비리 혐의를 조사했는데 공소시효가 지난 것들이라 처벌할 수 없었다.”

    2001년 2월 중순 합수부가 해체됐다. 비록 정치인 수사는 실패했지만 1년 동안 327명을 적발, 그 중 159명을 구속기소하는 실적을 올렸다. 정치인 중 병역비리로 사법처리된 사람은 한나라당 김태호 의원 한 명뿐이었다.

    합수부 해체 직후 군검찰은 김대업씨를 수사팀에서 내보냈다. 김씨는 수사팀을 떠나기 직전까지 김도술씨와 B씨, 그리고 박노항씨 추적에 대한 의욕을 주변에 내비쳤다. 그래서인지 그는 돌연 김도술씨를 찾으러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김씨를 만나지는 못했다.

    군검찰 관계자는 “왜 그때 김도술씨를 만나러 갔는지 의문”이라며 “이번 일을 지켜보면서 이정연씨 관련 진술에 대한 보강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에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대업씨는 “박노항 추적과 관련해 찾아갔다. 그때는 관심이 박노항뿐이었다”고 부인했다.

    김대업씨가 사기혐의로 경찰에 긴급체포된 것은 지난해 3월말. 군검찰과 검찰 고위관계자는 손을 써보려다 포기했다. 김씨는 “군정보기관의 공작”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수사관을 보내 사건 내용을 자체적으로 파악한 결과 김씨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김씨를 다시 병무비리수사 현장으로 불러낸 것은 서울지검 박영관 특수1부장이었다. 그해 7월 진정사건의 피진정인 자격으로 검찰에 불려간 김씨는 이듬해인 올 2월까지 약 8개월간 거의 매일같이 검찰에 출두해 병무비리수사를 거들었다. 지난해 4월 박노항씨가 검거된 후 김대업씨는 서울지검 특수1부의 배려로 몇차례 박씨를 조사하기도 했다.

    서울지검 특수1부는 이정연씨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은폐대책회의 혐의를 받고 있는 관련자들을 조사했다는 사실이 그런 의혹을 뒷받침한다. 김길부 전 병무청장이 그렇고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박아무개씨와 수행비서를 지낸 김아무개씨가 그렇다.

    이들은 모두 병무비리가 아니라 인사비리 혐의로 불려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혐의와는 상관없는 이정연씨 문제와 관련된 질문을 받았다. 그중 특히 김 전 청장의 수행비서였던 김씨는 검찰에서 이정연씨 병적기록표 존폐 소동이 벌어졌던 1997년 7월에 당시 김길부 병무청장이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의원들과 만났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됐다(‘신동아’ 2002년 7월호 참조).

    또 1997년 당시 병무청 징모국장이었던 Y씨도 조사하려 했으나 그가 미국에 가 있는 탓에 소환하지 못했다. 김대업씨 주장에 따르면 Y씨는 은폐대책회의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주임검사였던 노명선 검사(현재 주일 한국대사관 파견)의 얘기대로라면 김대업씨는 서울지검 수사팀에도 꾸준히 이정연씨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 노검사는 “김길부씨가 은폐대책회의와 관련해 진술했다는 보고는 받은 바 없지만 평소 김대업씨로부터 그 비슷한 얘기를 몇 번 들었으며 국군춘천병원 관련 얘기도 들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올 2월 노검사가 일본으로 떠난 후 검찰의 병무비리수사는 중단됐다. 4월초에 출소한 김대업씨는 그 달 중순 참여연대를 찾아갔다. 그리고 즉석에서 기자회견을 제의했다.

    몇 차례 연기됐던 기자회견은 7월31일 서울지검 기자실에서 열렸다. 참여연대 대신 민주개혁국민연합이라는 시민단체가 나섰다. 김씨가 명예훼손 혐의로 한나라당 관계자들을 고소한 직후 검찰은 이정연씨 병역기피 의혹에 대해 수사를 시작했다. 2년전 반부패국민연대가 기자회견을 하자 검찰이 정치인 병역비리수사에 나섰던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김대업씨는 언젠가 “내게 이회창씨는 병무비리사범 중 한 명일 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 “도대체 당신은 왜 그토록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문제에 집착했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렇게 답변할 것이다. 그는 김도술씨의 진술과 녹음테이프에 대해 “특정인을 잡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조사하다 보니 우연히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김도술씨는 8월15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 말을 바꿨다. “녹음테이프에 있는 목소리가 내 것일 수도 있다”고 한 발 물러선 것이다. 물론 단서를 달았다. 한인옥씨와 이름이 비슷한 사람으로부터 병역면제를 청탁 받아 해결해준 적이 있는데, 김대업씨가 그 얘기를 녹음해뒀다가 조작했다는 것이다. 김대업씨는 “어떤 편집이나 조작도 없었고 한 번에 녹음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죽느냐 죽이느냐’. ‘병무비리 족집게’ 김대업씨의 아슬아슬한 진실게임은 이제 최후의 한판을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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