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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냉담이 단일화 불렀다

노무현·정몽준 단일화협상 막전막후

  • 글: 박성원 swpark@donga.com 글: 김정훈 jnghn@donga.com

박근혜 냉담이 단일화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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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과 기름 같다던 노무현-정몽준 두 후보, 그래서 애당초 후보단일화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았다. 극적인 결과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보름간의 단일화 합의 과정에 얽힌 뒷얘기들.
박근혜 냉담이 단일화 불렀다
11 월10일 오후 경남 창원에서 열린 경남지역 선거대책본부 발대식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전남 순천을 향해 남해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중간 지점인 섬진강 휴게소에서 순천이 지역구인 김경재(金景梓) 선거대책위 홍보본부장을 만난 노후보는 “후보단일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시간은 없고 고민이 많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김본부장은 “후보께서 이제 승부수를 던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모호하게 답했으나, 노후보가 뭔가 나름의 결단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순천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마친 노후보는 숙소인 호텔 객실에서 김본부장과 함께 MBC-TV 9시 뉴스를 봤다. 마침 전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되고 있었다. 노후보의 지지도는 19.5%. 정몽준(鄭夢準) 후보는 22.7%였다. 지지도 격차가 오차범위 안으로 좁혀지긴 했지만, 여전히 정후보에게 뒤지는 수치였다. 실망스런 표정이 역력한 노후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후보께서 결단을 내리십시오”

“여론조사로 후보를 정하더라도 단일화를 해야겠습니다. 정후보가 국민경선은 못하겠다고 하니까, 여론조사 방식이라도 채택해야 국면을 타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많으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샅바 싸움을 하겠는데,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불리해도 하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김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본부장은 긴말 않고 “후보께서 결단을 내리십시오”하고 동의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노후보는 곧바로 서울에 있던 선대위의 모 핵심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결심했습니다. 여론조사를 하는데, 공신력 있는 여러 개 조사기관을 통해서 하면 됩니다. 권역을 8개로 나눠서 TV토론을 하고, 국민이 누가 후보가 돼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원칙만 지키면서 협상을 해주십시오. 모든 작업은 25일까지 끝나야 합니다.”

11월3일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정후보에게 제안할 때만 해도 노후보는 꼭 후보단일화를 성사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후보단일화를 명분으로 내세운 당내 의원들의 집단 탈당 움직임을 차단하겠다는 전술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일주일 사이에 노후보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국민경선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제안했는데도 의원 20명이 탈당을 결행해버렸고, 반전(反轉)될 듯하던 지지도는 다시 정체상태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선거를 치러본, 그리고 이기기보다는 패배에 더 익숙한 노후보는 본능적으로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노후보 숙소를 빠져나온 김경재 본부장은 곧바로 순천 시내의 한 단란주점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 4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밤 10시경 기자들과 만난 김본부장은 과거 김대중 대통령과 관련된 이런 저런 에피소드를 화제삼아 특유의 입담을 과시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폭탄주가 서너순배 돈 뒤 김본부장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노후보와 함께 있다가 왔는데, 진짜 중요한 기사거리를 주겠다”며 노후보의 결심을 그대로 전했다.

김본부장의 얘기를 전해들은 기자들은 곧바로 전화로 서울에 보고했고, 자정이 다 된 시각에 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심야회의를 열고 있던 선대위 인사들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사는 일순간 벌집을 쑤신 듯 뒤집혔다.

“속옷은 하나 입고 있어야 하는데”

김원기(金元基) 고문은 곧바로 김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뭐라고 떠들었소”라고 벌컥 화를 냈고, 단일화 협상단장인 이해찬(李海瓚) 기획본부장은 노후보와 직접 통화를 하기 위해 분주하게 연락을 취했다. 이해찬 본부장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노후보의 결심이 정식으로 선대위에 전해지면서 선대위 내부에서는 “히든카드를 너무 일찍 꺼낸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왔다. 국민경선을 계속 밀어붙이다가 막판에 ‘여론조사’방안을 최종협상안으로 제시, 협상을 타결짓는다는 전략이 엉뚱하게 전남 순천에서의 ‘천기누설’로 큰 차질을 빚게 된 셈이었다.

정대철(鄭大哲) 선거대책위원장은 “홀랑 다 벗어버린 것 같다. 속옷은 하나 입고 있어야 하는데…”라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고, 발설자인 김경재 본부장을 향해 “돌로 쳐죽이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처음부터 후보단일화 추진에 강력히 반대했던 이상수(李相洙) 총무본부장은 “여론조사로 후보를 정하다니, 이거 웃기는 얘기 아닙니까”라고 흥분했다.

다음날 아침 순천의 행사장에 멋쩍은 표정으로 나타난 김본부장을 본 노후보는 “김선배님, 어젯밤에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인사했다. 김본부장이 총대를 메준 데 대해 우회적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었다. 후보단일화를 강하게 주장해왔던 한광옥(韓光玉) 최고위원도 전화를 걸어와 “김의원이 정말로 큰일을 했다. 잘했다”고 격려했다.

그러나 정작 ‘국민여론에 의한 단일화’를 강조해온 정후보측의 반응은 차가웠다. 11일 아침 노후보의 국민여론조사 제안을 보고받은 정후보는 “노후보가 시시각각 생각이 바뀌고 있으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당내 후보단일화대책위에서 신중히 검토해줄 것을 당부했다.

2시간 남짓한 회의 끝에 이철(李哲) 조직위원장은 당사 3층 기자실로 내려와 “양당 대의원들만으로 단일후보를 가리자는 이른바 ‘대의원 여론조사’를 실시하자”는 역제의를 내놓음으로써 국민여론조사 방식을 사실상 거부했다. 우위를 지켜오던 지지율이 노후보와 같은 수준까지 하락하고 있는 상황에 국민여론조사에 정후보의 운명을 맡길 경우 자칫 ‘낙마’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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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성원 swpark@donga.com 글: 김정훈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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