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호

개성에서 서울로 휴대전화… “선물은 뭘 사갈까?”

공약으로 본 ‘노무현 대통령’ 시대 2007년 봄,30대 여성방송인 K씨의 하루

  • 글: 김신명숙 소설가 wolib@hanmail.net

    입력2003-01-03 12:0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개헌과 정계개편, 행정수도 이전, 국가정보원을 대신하는 해외정보처 신설, 대학입시 제도 등을 내건 파격적인 개혁공약대로라면 대한민국엔 커다란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4년 후 우리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까. 시간은 흘러 2007년 어느 날 아침, 30대 중반의 여성 방송 진행자 정현씨의 하루가 시작된다.
    개성에서 서울로 휴대전화… “선물은 뭘 사갈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애틋하고 아주 진한 사랑이었다. 뭐랄까, 늘 꿈꾸던 판타지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기껍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세포 하나 하나의 전율을 감지하면서 상대와 사랑을 나눴다. 온 몸이 달뜨면서 충만하게 차 올라 보름달 같은 절정에 다다른 순간, 불꽃이 터지는 듯한 희열 속에 어딘가로 녹아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편안하고 따뜻할 수가 없었다.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완전의 상태가 왔다. 부드럽고 농밀하고 가득 찬, 혹은 아낌없이 한 점 후회도 없이 다 타버린 ‘완전’. 그 충일한 만족감 속에서 정현은 자꾸만 살아나려는 의식을 애써 주저앉히고 있었다.

    ‘안 돼. 깨면 안 돼. 이 느낌 그대로 있어야 해.’

    그녀는 몸을 돌리면서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리고는 한 팔로 베개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곤 얼굴을 베개에 최대한 묻었다. 마치 새기 시작한 그 충일한 만족감을 더 새지 못하게 눌러버리기라도 하듯.

    그러나 결국 헛된 노력이 되고 말았다.



    따르릉∼∼.

    느닷없는 전화벨 소리가 주저앉히려던 의식을 칼날처럼 들쑤시기 시작한 것이다.

    할 수 없이 몸을 일으킨 정현은 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전화기를 향해 휘청휘청 걸어가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태 잤니?”

    연혜영 선배였다.

    “네에∼”

    “지금 8시 반이야. 방송국 안 늦어?”

    “벌써 그렇게 됐어요?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더니….”

    “너어…. 아직도 진정이 안됐니?”

    탐색하는 목소리였다. ‘아하, 그래서 전화했구나’, 정현은 새삼 연혜영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혼자 살다 보면 조그만 배려에도 유난히 민감해지는 법이다.

    “글쎄, 괜찮아진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마음이 안 잡힌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거다”

    “네?”

    “그럴 거라구. 이따 방송 끝나고 시간 있으면 우리 집에 들러. 술로 풀지 말고 나하고 얘기하면서 풀어라.”

    “상황 봐서 그러죠”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건성이었다. 곧 결혼할 애인이 있는 연선배를 만나 이 웃기지도 않은 감정을 어떻게 푼단 말인가. 차라리 집에서 혼자 좋아하는 음악 틀어놓고 와인이나 마시며 이 허허벌판을 헤매는 듯한 감정과 적나라하게 뒹굴다 쓰러져 잠이 들면, 누가 알겠는가, 다시 꿈속에서 방금 전 놓쳐버린 그 충일한 만족감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될지….

    어쨌거나 빨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정현은 한껏 기지개를 켜면서 오피스텔 현관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여느 아침처럼 바닥에는 조간신문이 얌전한 얼굴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평양에 각 언론사 특파원 상주

    ‘한중일 FTA 체결 합의’. 집어드니 1면 톱기사가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남북 정상회담 올 6월15일 열릴 듯’이라는 제목이 박혀 있고, 아래쪽에는 ‘노대통령, 임기 내 행정수도 착공 반드시 실현’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정현은 재빨리 신문지를 넘기며 지면들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시느라 이메일을 열어보지 않은 탓에 방송국에서 보내 온 자료들을 쳐다보지도 못했으니 신문이라도 훑어야 했다. 정치권은 벌써 차기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주자들이 경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내년인 2008년 4월 대선을 치르기로 돼 있었다. 통치구조도 분권형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한 임기 4년의 중임제로 바뀌었다.

    경제 섹션엔 한중일 FTA 체결 합의와 관련된 기사들이 가장 큰 비중으로 다뤄졌다. 전문가들이 올 경제성장률을 5%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는 기사도 보였다. 여기엔 노대통령이 공약한 평균 7% 경제성장은 결국 지키지 못할 것이 분명해졌다는 해설이 붙어 있었다.

    동북아에서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수치로 보여주는 기사와 함께 이 같은 결과는 무엇보다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남북경제공동체를 향한 노무현 정권의 노력에 힘입은 것이라는 외신 보도가 소개됐다. 남북관계는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지만 꾸준히 발전해 북한 경제만을 다루는 신문 지면도 생겨났다.

    몇 개월 전 평양에 남한대표부가, 서울에 북한대표부가 설치되면서 각 언론사마다 평양에 특파원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오피니언면을 들추니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를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북아철도공사 사업에 대한 전문가의 제언이 실려있고 ‘정보화 선도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오늘 방송에서 다룰 것 같은 내용이 아니다. 오늘 무엇을 다루게 될지는 이메일을 열어보면 금방 알게 되겠지만 정현은 잠시 망설이다 포기했다. 우선 시간이 없고 어차피 방송국에 가서 자료들을 읽으며 방송준비를 하니까 전혀 모르고 가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매일 밤 이메일로 다음날 방송분 큐시트와 자료들을 꼬박꼬박 보내주는 작가들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정현은 현재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운영하는 시민의 소리 방송의 라디오 파트에서 시사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하고 있다. 주말만 빼고 매일 정오부터 2시까지 다양한 시사 이슈들을 대담이나 현장취재 논평 등의 형식으로 다루는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과거 꽤 영향력 있는 시사주간지 기자 시절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던 게 인연이 돼 기자일을 그만두고 프로그램 진행을 맡게 된 지 6개월 정도가 지났다. 그러면서 해도 바뀌어 오늘이 벌써 2007년 2월9일이다. 올해로 정현의 나이도 30대의 중간지점을 지나버렸다.

    40쪽으로 기운 30대 중반. 많은 것들이 달리 보이고 또 달라지는 위험한 시기라고 누가 그랬더라?

    정현은 신문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동시에 리모컨으로 TV를 켠 후 욕실 쪽으로 향했다. 뉴스 전문 채널에서 뉴스를 들으며 서둘러 방송국으로 갈 채비를 하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다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언니, 나야.”

    동생 정미였다. 순간 정현은 자기도 모르게 흠칫 긴장하는 표정이 된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응, 너구나.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별 일은 없어. 지금 엄마한테 가는 길인데 생각이 나서. 어제 엄마가 갑자기 묻더라구. 언니는 왜 안 오느냐고. 그래서 전화해 보는거야.”

    “응, 내가 요즘 좀 많이 바빴어…미안하다. 그런데 엄마가 스스로 그렇게 물었어? 정신이 많이 좋아진 모양이네.”

    “응 괜찮은 편이야.”

    “움직이는 건?”

    “그건 좀 안 좋아. 담당 아줌마가 통 운동을 안 시키니까.”

    “내 참. 그렇게 얘기해도 안 되는구나.”

    “사실 아줌마가 너무 바쁘기도 해. 네 명이나 보니까. 나라도 열심히 시켜야지 뭐.”

    “그래 네가 고생한다. 내가 이번 일요일엔 꼭 갈게.”

    전화를 끊고 나니 새삼 동생과 엄마에 대한 미안함이 몰려와 정현은 잠시 자책감에 빠졌다. 10여일 전 그 날 이후는 계속 마음이 붕 뜬 채 생각이 그에게로만 집중돼서 엄마 생각은 거의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현의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진 것은 2년 전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그녀는 혼자 걸을 수도,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게 됐고 정신마저 약간 분명치 않은 상태가 됐다. 삼남매 자식과 며느리 중 누군가가 옆에 항상 붙어 있어야 했는데 학원 강사를 하던 정미가 직장을 쉬기가 가장 쉬워 간병을 맡게 됐었다.

    일도 못하고 엄마 간병에만 매달려 있는 정미를 볼 때마다 정현은 가슴이 짜안했는데 그런 상황이 바뀐 게 4개월 전이었다. 정미가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에 시설도 좋고 비용도 비싸지 않은 중증 노인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설의 대폭적인 확충은 노대통령의 공약 사항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간병 서비스의 질은 문제가 많았다. 그 요양원만 해도 입원 당시에는 하루에 한번은 꼭 운동을 시킬 거라고 약속을 했으나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정미가 학원에 가기 전 오전 시간에 요양원에 거의 매일 들러 운동을 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하드웨어만 그럴듯하면 뭐하나, 소프트웨어가 잘 돌아가야지.’

    정현은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이 문제를 조만간 꼭 다루고 말겠다는 각오를 하며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나갈 채비를 다 마쳤을 땐 벌써 9시30분이었다. 평소보다 10분 정도 늦은 시간이다. TV부터 끄려고 급한 손놀림으로 리모컨을 집어들던 정현은 그러나 귀에 들려오는 앵커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다혜 장관이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화면에는 장관실에서 걸어나오는 진장관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입가에는 엷은 냉소가 비칠 듯 말 듯 어려 있다. 그 냉소기에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당당함이 야무지게 자리하고 있음을 정현은 한눈에 읽을 수 있었다.

    여성 장관의 간통

    환경운동가로 맹렬한 활동을 벌이다 환경부 장관에 발탁된 진다혜 장관을 정현은 좋아했다. 순수한 열정에 건강한 자신감, 자유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취임초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구설을 겪기도 한 진장관이 가장 큰, 메가톤급 물의를 일으킨 것은 일주일 전쯤이었다. 2001년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계속 환경문제에서 자국이기주의를 앞세워 온 미국이 또 다시 국제환경협약을 무시하고 나서자 화가 난 진장관이 기자들 앞에서 성질대로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전쟁광인 데다 환경의 적이다.”

    이 발언은 한 국내 언론에 보도됐고 이어 세계의 뉴스를 타면서 한미간의 외교마찰로 비화됐다. 미국정부는 즉각 한미우호관계에 타격을 입혔다며 큰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진장관은 ‘표현이 과격한 건 인정하지만 틀린 얘기를 한 것은 아니다’고 버텼다. 친미성향의 야당은 즉각 진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며 노무현 대통령을 압박했는데 며칠 전 나온 노대통령의 반응은 모호한 것이었다.

    “장관으로서 사려 깊지 못한 발언을 한 것은 분명 잘못이지만 장관자리를 내놓을 만큼의 잘못인지는 아직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같이 모호한 입장의 배경에는 진장관을 지지하는 여론이 있었다. 문제가 불거진 후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진장관은 80%가 넘는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모호한 입장 표명이 나온 바로 그 다음날 전혀 뜻밖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유부녀인 진장관이 간통죄로 고소를 당한 것이다. 고소인은 진장관과 소위 불륜 관계를 맺었다는 남자의 부인이었다. 진장관은 이미 과거의 일이라고 짤막하게 해명했으나 고소인은 증거가 있다며 기세를 높였고 이에 야당은 진장관에 대한 사임 공세를 더 강화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녀가 사표를 내버린 것이다. 과거의 일이라고 하더니…. 초강대국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했던 그녀가 그렇게 쉽게 사표를 내다니, 간통죄가 미국보다 더 막강한 모양이었다.

    ‘간통죄 폐지 논쟁이 더 치열해지겠군’.

    오피스텔을 나서며 정현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회자로서 머리를 바삐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보름 전 한 유명 여교수의 이른바 ‘간통현장’ 사진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간통죄 폐지 논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던 와중에 진장관 사건이 불거지면서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돼버렸는데 오늘 사표까지 내버렸으니 논쟁은 더 뜨거워질 게 뻔했다.

    출근 시간을 살짝 비킨 시간이어서 지하철역은 그런대로 한산한 편이었다. 시민의 소리 방송국은 정현의 오피스텔에서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다.

    ‘영화에서처럼 지하철 같은 데서 그 사람을 우연히 마주칠 수는 없는 것일까?’

    반대편 승강장에 그 날 그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감색 롱코트에 붉은 모직 머플러를 두른 중년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면서 정현은 다시 아릿한 심정으로 그를 떠올렸다.

    이것도 병이라면 정말 오랜만에 앓는 열병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정현아. 너 오늘 밤 시간 있지?”

    그러면서 연혜영이 정현을 홍대 근처에 있는 싱글 바 ‘원 나잇 스탠드’로 끌고 간 것이 열흘쯤 전이었다.

    “글쎄, 넌 그냥 내 옆에 앉아 있기만 해. 나도 무슨 사건을 기대하고 가는 건 아니잖아. 그냥 마지막으로 싱글 바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것뿐인데 네가 옆에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이거지.”

    강사장과의 결혼을 코앞에 둔 연혜영은 결혼 전 마지막 기회를 갖고 싶다며 기어코 정현을 끌고 갔다. 정현은 싱글이면서도 싱글 바 같은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독신자들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싱글 바 같은 공간도 따라서 많아졌지만 어쩐지 그런데서 이뤄지는 만남에는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선배, 아무래도 결혼불안 증후군이 심한 것 같아.”

    정현의 핀잔에도 연혜영은 아랑곳없이 단숨에 ‘원 나잇 스탠드’의 문을 밀고 들어가더니 카운터에 있는 젊은 여자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잘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함께 페미니스트 예술그룹에서 작업하는 사이라고 했다.

    “넌 이름 뭐로 할래?”

    코트를 벗어 그 젊은 여자에게 건네자마자 연혜영이 정현을 보고 물었다. ‘원 나잇 스탠드’에는 지켜야 할 규칙이 하나 있었다. 손님 누구나 입장하는 순간 가명을 하나씩 가져야 했고 상대의 이름은 물론 나이나 학력 직업 등 신상과 관련된 질문은 할 수가 없다. 상대에 대한 모든 정보를 차단한 채, 즉 모든 고정관념과 차별, 편견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서의 느낌과 대화만으로 상대를 판단하라는 의도였다.

    “글쎄… 선배는?”

    “난 혜석.”

    “참, 어딜 가도 꼭 티를 낸다니까.”

    “넌 뭐로 할까? 음…그래! 경아. 경아로 해라.”

    이름이 쉽고 만만해야 남자들이 빨리 접근해 온다면서 연혜영은 자기 멋대로 정현의 가명을 정해 가슴에 꽃 모양의 명패까지 직접 달아주었다.

    ‘원 나잇 스탠드’의 내부는 꽤 넓었는데 가운데 마련된 둥근 플로어 위에 걸려 있는 큰 자전거와 물고기 장식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 아래서는 이미 상당수의 남녀들이 몸을 밀착시킨 채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남자의 유혹

    “그 유명한 페미니스트 명제, 남자 없는 여자는 자전거 없는 물고기와 같다, 그거 알지?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저렇게 설치를 한 거야. 여자와 남자는 물고기와 자전거만큼 서로 상관이 없지만 함께 모여 즐길 필요는 있다 이거지. 여기서는 자전거가 물고기도 찾고 물고기가 자전거도 찾는거야.”

    그녀들의 자전거는 별로 오래지 않아 존재를 드러냈다. 웨이터가 와서 알려주는 쪽을 쳐다보니 역시 두 명의 중년남자들이 그녀들을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싸이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정현에게 싸이의 첫인상은 별로 특별할 건 없었다. 약간 마른 몸매에 단정해 보이는 얼굴이 전체적으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가 입을 열기까지는. 카푸치노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풍부한 목소리는 정말 특별해서 정현은 담박에 그에게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넨 건 연혜영이었다.

    “싸이라…. 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가수 이름인 것 같은데 인상은 영 딴판이네요.”

    그가 먼저 관심을 보인 것도 연혜영이었다. 그가 불쑥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혜석? 나혜석과 관련이 있나요?”

    “어머! 나혜석을 아세요?”

    “잘 알죠. 간통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최초의 여류명사 아닙니까?”

    그 말에 연혜영 선배가 뜨악한 표정을 짓자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은 선구자다 그런 얘기죠. 그 당시에 정조는 취미의 문제다,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게 사실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간통죄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데 말이죠.”

    처음에 정현은 그 둘의 대화에 끼어 들지 않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싸이의 일행처럼 맥주만 들이켜며 조용히 듣고 있었다. 싱글인 자신에겐 별로 피부에 와 닿는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던 정현이 갑자기 싸이에게 집중하게 된 것은 어느 순간 그가 손으로 턱을 괴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턱에서 목으로 이어진 실루엣과 튼실한 목 근육이 시선에 잡히면서 정현은 갑자기 몸을 달뜨게 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무언가 몸 속 깊숙이 숨어있던 것이 자력에 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그건 전혀 예기치 않은 사태의 진전이었다. 얼마를 그에게 몰입하고 있었을까, 이미 정현의 심상치 않은 시선을 눈치챘음에 분명한 싸이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경아씨, ‘원 나잇 스탠드’란 영화 보셨어요?”

    “아뇨.”

    “재미있는 영화죠. 이 바처럼.”

    그러면서 그는 윙크인 듯 아닌 듯 한쪽 눈에 살짝 힘을 주며 유혹적인 제스처를 취했는데 순간 정현은 거의 자지러질 뻔했다.

    “우리 같은 싱글들의 하룻밤 사랑이 아니라 간통을 다룬 영화인데 위트가 있어요. 특히 내게 인상깊은 것은 남자 주인공의 친구가 한 말이죠.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면서 이런 말을 남기죠. ‘인생은 오렌지다!”

    “인생이 오렌지라구요?”

    “그렇답니다.”

    “무슨 뜻이죠?”

    “무슨 뜻인 것 같습니까?”

    “글쎄요…음…인생은 오렌지처럼 일단 먹어봐야 맛을 안다?”

    정현의 말에 싸이는 아하, 감탄사를 내지르더니 자연스럽게 얼굴을 정현의 얼굴 가까이에 갖다 댔다. 은근한 사향 향수 냄새가 육감을 자극했다.

    “멋진 해석입니다.”

    “맞았나요?”

    “어차피 정답은 없습니다. 영화에선 이렇게 풀이하죠. 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앞에 놓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오렌지다.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봐라. 아들은 커가면서 계속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했죠. 하지만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은 뜻밖에도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맞게 됐죠. 그래서 다급하게 물었어요. 아버지, 인생은 오렌지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러자 아버지 왈, 야 이 녀석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푸 하하하, 정현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 남자라는 생각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참 함축적이네요. 그래도 난 내 해석이 좋아요.”

    “나도 그렇습니다.”

    순간 정현과 싸이의 시선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짝 붙은 두 사람의 얼굴 가운데서 끈끈하게 얽혀들었다. 생전 처음 겪는 듯한 매혹의 열기가 정현을 걷잡을 수 없이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우리 먼저 플로어에 나가서 오렌지를 먹을까요?”

    보기보다 많이 넉넉한 싸이의 품속에서 그녀를 유혹했던 튼실한 목 근육에 얼굴을 묻으며 정현은 그날 밤이 매우 특별한 밤이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정말 그 영화가 주장하고 있는 대로 인생은 오렌지일까?’

    자신의 삶이 그 날 이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스스로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 버린 것만 같았다. 지하철에 올라 탄 정현은 휴대전화를 꺼내 오늘 일정을 확인하며 자꾸 산만하게 흩어지는 마음갈피를 잡으려고 애썼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지만 오후 2시 반에 진대영 선배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원 나잇 스탠드에 한번 가볼까?’

    불쑥 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정현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싸이는 한번 만난 곳에 가서 기다린다고 또 만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토끼를 잡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또 토끼를 잡을 줄 알고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어리석은 농부가 문득 생각나 정현은 피식 웃음을 밀어냈다. 순간 알맹이가 몽땅 빠져나가 버린 듯한 허허로움이 밀려왔다.

    그 날 이른 아침 호텔에서 눈을 떴을 때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언제 갔는지 이미 싸이는 사라진 상태였다. 그만 사라진 게 아니라 그의 흔적도 함께 증발해버린 듯했다. 몸을 감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이 한꺼번에 깨지면서 감춰져 있던 속살이 드러나 가벼운 스침에도 파르르 요동쳤던 지난밤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한데 그 기억을 뒷받침할 흔적은 머리카락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원 나잇 스탠드였을 뿐이야.’

    정현은 곧 시작해야 할 방송 일에 신경을 돌리며 싸이와 관련된 모든 일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It’s changing!’

    마음의 평화가 필요할 때 주문처럼 외우라고 어느 대선배가 말해줬던 구절을 되뇌며 정현은 지하철에서 내렸다.

    “선생님 오셨어요?”

    작가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미란이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로 정현을 맞았다. 임신 9개월째로 몸이 무겁고 불편할텐데도 인상을 찡그리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여자다. 오미란은 서브 작가 한 명, 자료 조사원 한 명을 두고 정현이 진행하는 ‘엔지오 코리아’의 대본 작업과 출연자 섭외 등의 일을 맡아 하고 있다.

    정현은 우선 오미란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큐시트부터 집어들었다. ‘해외정보처 국내사찰 논란’이란 글자부터 눈에 들어왔다. 과거 국가정보원을 폐지하고 신설한 해외정보처가 야당 탄압을 위해 비밀리에 사찰행위를 했다는 야당의 주장으로 정계가 시끄러운데 그 문제부터 다룰 모양이다.

    그리고 대학 입시철이 마무리되는 시점이어선지 교육문제가 크게 잡혀 있었다. 고교 평준화 33년의 성과와 과제를 짚어보는 대담 프로그램, 이번 대학입시를 통해 노무현 정부가 약속한 대학의 자율성 보장이 얼마나 실현됐는지 살펴보는 기자의 현장 리포트, 또 노무현 정부 교육정책의 기본틀인 교육부 기능 축소와 교육지방자치화가 얼마나 실현됐는지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코너 등.

    최근 시민의 소리 방송이 실시한 전문가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을 조감해보는 특집물 ‘2007 대한민국’에서는 미국 앞에서 한국은 얼마나 당당해졌나, 지역감정 얼마나 해소됐나, 빈부격차 축소 얼마나 이루어졌나, 노사갈등 얼마나 줄었나, 고위공직자 재산형성과정 소명 어디까지 확대해야 하나 등의 문제를 다루게 돼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의 현실은 대체로 격차와 갈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외 주5일 근무제가 50명 이상 사업장으로까지 확대됨으로써 본격화된 주5일 근무시대를 맞아 여가활용 인프라가 얼마나 마련돼 있는지를 점검해보는 코너가 있고, 고가 아파트와 주택에 보유세를 강화하라는 주장을 소개하는 민심탐방 코너도 있었다.

    일단 생소하거나 다루기 힘든 주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요즘처럼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어려운 주제가 떨어지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는가.

    “참, 진다혜 장관이 사표를 냈던데 그 문제는 안 다루나?”

    “글쎄요…. 아 참, 그 문제는 ‘시민광장’에서 다루기로 한 것 같던데요.”

    시민광장이란 월·수·금 저녁 8시부터 2시간 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토론 프로그램이었다.

    “그래? 그 토론 재미있겠는데? 미란씨같이 결혼한 사람들은 더 관심이 많겠네?”

    “간통죄는 결혼 안한 사람한테도 해당되는데요?”

    “아 참, 그렇겠구나. 그래도 나하곤 상관없어. 난 결혼한 남자하곤 일을 벌일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일이 어디 뜻대로 되나요? 세상이 뜻대로만 되면 아무 문제없게요? 나도 내 뜻대로라면 지금 이런 배를 하고 여기 있지 않죠.”

    갓 서른인 오미란이 하도 도통한 듯한 얼굴로 말을 해 정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뱃속의 애가 들을라…. 지금 나올 채비하고 있을텐데. 그나저나 애가 나오면 한동안 미란씨 못 보겠네.”

    “네. 석 달은 쉬죠. 이제 우리도 그럴 권리가 있잖아요”

    오미란 같은 방송작가직은 과거에는 특수고용직으로 불리면서 출산휴가, 육아휴직제도의 혜택을 비롯한 노동자로서의 권리에서 소외돼 있었다. 그러나 몇 년 전 방송작가 프리랜서MC와 리포터들이 노조를 결성해 이제는 그들도 노동권을 보장받고 사회보험의 적용도 받게 됐다. 과거에는 많은 차별을 받았던 다른 비정규직들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법제화를 통해 지금은 정규직 노동자와의 격차를 해소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미란씨 쉬는 동안 그럼 누가 대신 일하나?”

    그 질문에 오미란이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데 갑자기 정세현 PD가 급한 얼굴로 눈앞에 나타났다.

    “어, 정현씨! 이거 큰일 났는데.”

    “뭐가?”

    “손석현씨가 갑자기 모친상을 당해서 지금 고향으로 내려가는 중이래.”

    “그래?”

    손석현은 시민광장의 진행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지금 회의를 했는데 오늘 그 프로를 정현씨가 좀 해주면 안될까?”

    “글쎄….”

    정현은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런 경우가 처음 있는 것도 아니었고 평소 토론 프로를 진행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 다른 때 같았으면 금방 오케이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날 이후 정현은 도통 정신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자꾸 일을 피하고만 싶었다. 가능하다면 혼자 며칠동안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은 심정 아닌가?

    그러나 정PD의 얼굴을 본 정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척하면서 결국은 자기의사를 관철하는 묘한 특기가 있는 사람인데다 정말 정현 외에는 대안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정현씨. 그리고…. 내가 이따가 잊어버릴지 모르니까 지금 얘기하는 게 낫겠다. 오늘로 2007 대한민국 특집이 끝나. 끝났으니 마침 오늘이 금요일, 이제 주말이겠다 푹 쉬어…. 요렇게 말하면 나도 참 좋겠는데 보시다시피 아시다시피 봉사정신 빼놓으면 시체인 우리 시민의 소리 방송이 그런 망발을 할 수가 없지. 그래서 다시 투철한 봉사정신 가다듬고 다음주부터 새로운 특집 시작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어이, 미란씨, 그 토론회 자료하고 다른 준비한 자료 다 가져와 봐.”

    새로 시작되는 특집물의 가제로 잡힌 것은 ‘노무현 정부 4년, 약속과 실천’이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공동주최한 ‘노무현정부 4년 공과토론회’가 오늘 끝나는데 그 결과를 기초자료로 해 지난 대통령선거 때 내놓은 공약들이 임기 1년을 남긴 지금 얼마나 지켜졌는가를 점검해 보자는 것이었다.

    금방 오미란이 자료를 들고 왔는데 양이 상당했다. 그걸 다 훑어보려면 머리카락 깨나 빠지게 생겼다. 일을 피하고 싶을 때면 더 따라오는 법이다.

    “후우∼. 미란씨 말이 맞아.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 되나?”

    정현은 쳐다만 봐도 골치 아픈 특집 자료를 밀쳐놓고 우선 오늘 방송분 대본과 자료들을 들고 자기 자리로 향했다.

    “넌 매일 이렇게 늦게 점심 먹니?”

    약속시간까지 정현을 기다리다 배가 몹시 고팠는지, 진대영은 동태찌개 백반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할 수 없죠 뭐. 방송이 두시에 끝나니까. 난 이제 습관이 돼서 괜찮아요.”

    진대영은 정현이 전에 일했던 시사주간지 ‘주간 포커스’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였다. 정현보다 먼저 그만둔 뒤 대학원에 들어가 인권 분야를 공부하더니 지금은 국가차별시정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국가차별시정위원회는 노무현 정부가 학벌차별, 성차별, 장애인차별, 비정규직차별, 외국인노동자차별을 시정하기 위해 만든 기구다.

    진대영과는 사실 별 연락이 없었는데 2주 전쯤 그가 엔지오 코리아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점심 약속을 잡게 된 것이었다.

    “인권위원회나 여성부하고 업무가 중복되는 게 많지 않아요?”

    “처음엔 많이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꽤 조정이 된 셈이야…. 아 참, 그리고 며칠 전에 길에서 우연히 양대호를 봤다.”

    개성에서 서울로 휴대전화… “선물은 뭘 사갈까?”
    양대호는 정현과 입사동기로 정현과 비슷한 시기에 주간 포커스를 떠났다.

    “그래요? 양대호씨 지금 뭐 한대요?”

    “대전에서 지역언론 사업을 시작했나 봐.”

    “와 역시 빠르네. 이제 행정수도도 옮겨가고 지방분권, 지역발전도 가속화되면 지역언론도 많이 좋아지겠죠?”

    “그렇겠지. 또 그렇게 돼야 하고. 나도 여건만 되면 지방에 가서 살고 싶어. 고속철도로 가면 시간도 얼마 안 걸리고, 집 값도 싸고 공기도 좋고.”

    “그래도 애들 교육 문제가 있잖아요. 내 주위에도 지방에 살고 싶어도 애들 때문에 못 가겠다는 사람이 많아요.”

    “당장은 그렇겠지만 앞으로 차차 좋아지겠지. 정부가 학벌차별을 감시하고 공무원 채용 때 지방할당제도 실시하고 있잖아? 지방대학 지원도 많이 늘리고 있기 때문에 여건이 좋아질 거야.”

    “와 진선배, 정말 공무원 다 됐네.”

    진대영과의 대화는 자연스레 함께 일했다 그만둔 사람들의 근황에 대한 얘기로 이어졌다. 전체적으로 사람들의 직장이동이 잦아져서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강인구는 작년에도 사법시험에 떨어졌다던데요.”

    “그래? 이제 로스쿨도 문을 열었으니 상황이 더 좋지 않겠네. 그 친구는 사실 법관 타입이 아냐. 내가 보기엔 오히려 기자가 더 적성에 맞아. 이제 더 이상 사시가 출세의 등용문도 아닌데 말야. 이 정부가 특권과 차별을 시정하겠다고 했는데 행정고시 폐지하고 로스쿨 제도를 도입한 건 특권의식을 없앤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일 한 거야.”

    “이제 학교 앞 지나가다 몇 회 동문 누구누구, 무슨 고시 합격 이렇게 써 놓은 플래카드 더 이상 안 봐도 되겠네요.”

    “그런 건 빨리 없어져야지. 그리고 난 강인구보다… 그 또래였던 그 똑똑했던 애.”

    “아, 소정이요?”

    “그래, 이소정. 걘 시집 안 갔나?”

    “민노당에 시집갔어요.”

    “민노당? 그 친구가 정치판에 뛰어들었어?”

    “아주 열심이에요. 아마 몇 년 후에 의원배지를 달게 될지도 모르죠.”

    “그 정도야?”

    “네. 상당히 인정을 받고 있나봐요.”

    정현의 예측은 작년 지방선거에서 민노당의 약진을 근거로 하고 있다. 내년 총선은 1인2표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중대선거구제로 치러질 게 확실한 상황이니 민노당에겐 또 한번의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나저나 선배는 계속 이 일을 할 거예요?”

    “글쎄… 계약기간은 1년 남았는데.”

    “내가 보기엔 선배는 공무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선배처럼 착하고 욕심없는 사람들이 공무원 해야 나라가 좋아지지. 개방형 임용도 많아졌으니까 중앙부처에도 한번 도전해보지 그래요?”

    “난 그런 욕심 없어.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건….”

    “뭔데요?”

    “스웨덴이나 독일 같은 데 가서 인권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여건이 안 돼서 문제지.”

    돈도 별로 없고 딸린 가족 생각도 해야 한다며 씁쓸하게 웃는 진대영을 보다가 정현은 자기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진선배, 인생은 오렌지예요.”

    ‘보라! 간통죄는 미국의 음모닷!’

    진대영을 만나고 다시 방송국으로 돌아온 정현은 우선 저녁에 진행할 토론 프로그램 큐시트부터 살폈다. 진다혜 장관 사건 때문에 더욱 격렬해진 간통죄 폐지 논쟁이 주제로 잡혀 있었다. 출연자는 폐지 찬성쪽에 변호사 한 사람과 간통죄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 대표가, 폐지 반대쪽에 여교수 한 사람과 가족사랑 아버지회 총무가 나오기로 돼 있었다. 원래는 대표가 나오기로 돼 있었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총무가 대신 나올 거라는 작가의 말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이름이 웃겨요. 박달재. 울고 넘는 박달잰가봐. 김변호사님 이름도 그렇고 오늘 진행하시면서 이름 부르다 웃으실까봐 겁나네.”

    유난히 웃음이 많아 남들은 썰렁해하는 개그에도 폭소를 터뜨리곤 하는 정현을 잘 아는 작가가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김치국 변호사님, 박달재 총무님 하다가 저도모르게 웃음이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선 요즘 마음이 안정이 안 돼 활기가 많이 죽어 있는 상황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진행하다 웃음 좀 나오면 또 어떠랴. 보기에 따라 인생이란 한바탕의 코미디일 수도 있다. 21세기로 들어선 지 7년이나 지난 지금, 사회 각 분야에서 자유와 자율, 개인의 행복에 대한 욕구가 분출하고 있는 요즈음에도 근대적 개인을 부정하는 간통죄가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도 코미디고, 그 당당하고 능력있는 진다혜 장관을 코미디 같은 간통죄가 한 방에 날려보낸 것은 차라리 농담에 가까울 것이었다.

    인터넷에 쏟아진 글들이라며 작가가 가져다 준 자료에도 코미디가 넘쳐났다.

    “진장관님, 당신마저….” “보라! 간통죄는 미국의 음모닷!” “나는 진장관이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소위 잘난 여자들의 바람기에 대하여” “미국과 유부녀의 간통, 무엇이 더 거악인가….” 등등.

    더 이상 볼 흥미를 못 느낀 정현은 오전에 오미란으로부터 받은 특집물 자료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먼저 어떤 자료들인지 대강 훑어볼 요량이었다. 빠른 손놀림으로 자료들을 넘기던 정현은 한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간통죄와 관련된 노무현 대통령의 공약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2002년 11월 대통령후보 노무현은 간통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간통죄 폐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쳇, 처음부터 발을 빼고 있었군. 그러다 지금 자신이 발목을 잡힌 꼴이었다. 현재 야당은 장·차관 등의 인사를 잘 하겠다고 만든 고위직인사위원회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거냐, 이 정부가 시장기능과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면서 정부조직만 잔뜩 키워놓고 쓸 데 없는 간섭이나 하고 있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고 주요언론도 이에 동조하는 기미다.

    어쨌거나 이번 특집은 꽤나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정현은 골치아픈 자료더미를 뒤로 밀어놓고 우선 정PD가 남겨놓은 메모부터 집어들었다.

    ※아래 공약들 중심으로 일단 살펴보기 바람(분야별 분류는 더 세분화할 예정).

    ▽정치 행정 - 책임총리제 실천, 고위공직자 비리조사처 설치, 대통령 친인척 부패 척결, 검찰총장·경찰청장·국세청장·해외정보처장 인사청문회 실시, 대통령비서실 권한 축소, 국민참여경선제 제도화, 당정분리, 중앙당의 원내 중심 정책정당화, 상향식 공천 제도화….

    ▽경제, 과학 - 친재벌도 반재벌도 아닌 공정거래와 공정경쟁이 중요(이 부분은 재벌개혁이란 관점에서 중점적으로 살필 것), 250만개 신규 일자리 창출, 기업규제 완화, 중소기업 지원체제 혁신, 노사정위원회의 합의기구화, 외국인 투자유치, IT BT NT 등 미래 신산업 육성, 기초과학 투자비율 25% 수준 확대, 이공계 인력 우대정책….

    ▽사회 - 근로자 조세부담 경감, 40~50대 고용불안 해소, 250만호 주택공급, 국민기초생활보장제 확대, 국민 평생건강관리체계 확립, 대기와 수질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 지역문화기반 시설 확충, 농어업예산 10% 확보, 농어촌복지특별법 제정….

    이렇게 잔뜩 모아놓고 ‘일단 살펴보라’니… 대북정책 관련 공약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더 볼 생각이 없어 정현은 메모지를 밀어냈다. 메모지 끝에는 ‘오늘밤 데이트 좀 합시다’라는 글이 매달려 있었다. 없는 돈, 모자라는 인력에 의욕은 앞서다 보니 항상 일이 넘쳤다. 오늘은 밤늦게까지 특집 때문에 정PD와 함께 골머리를 앓아야 할 것 같다. 내가 PD야 MC야 하고 정현이 한숨을 짓는데 박자라도 맞추듯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야, 나와라. 아무래도 네가 우리 집엔 안 올 것 같고 저녁 사줄게.”

    연선배였다.

    “그럼 좀 빨리 만나죠. 방송이 있어서. 지금 라 스트라다로 올래요?”

    라 스트라다는 시민의 소리 방송국 옆에 있는 이태리 음식점이었다.

    “너 그 날 아침 나한테 전화 걸어 처음 한 말이 뭔지 아니? 연선배, 선배가 말한 성적인 자아실현이 뭔지 이제 알겠어요.”

    연혜영이 정현의 말투를 과장해서 흉내냈기 때문에 정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야, 흔히 자아실현 자아실현 하는데 그게 자기 일만 갖는다고 끝나는 게 아냐. 성적인 자아실현도 자아실현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구. 너 그렇게 일만 하고 네 몸을 내팽개치고 있으면 반쪽 인생만 사는 거야, 그러다 네 인생 봄날이 다 간다….”

    어쩌구 저쩌구 말을 이어가며 연혜영은 정현을 ‘원 나잇 스탠드’로 끌고 갔다.

    “내 생각엔 말이야….”

    스파게티를 입에 넣으면서 뜸을 들이고 나서 연혜영은 말을 이었다.

    “지금 널 힘들고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건 싸이 그 남자가 아니라 네 몸인 것 같애.”

    순간 정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네 몸이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 거지. 사실 너뿐이겠니? 최근 들어 유명한 여자들까지 연이어 간통죄로 걸려들고 있는 것도 다 같은 이유 아니겠어?”

    “어쨌거나 진다혜 장관이 사표 냈는데, 속상하지 않아요? 여성단체에서는 가만히 있을 건가?”

    “글쎄…기껏해야 간통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우려한다 뭐 그런 수준이겠지.”

    “이전과 달리 결혼한 여자들이 자꾸 걸려드는데 여성단체들도 이젠 입장을 분명히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연선배가 결혼하는 것도 위험해 보이네. 어느 날 경찰서에 있다면서 나한테 전화하는 거 아냐?”

    “푸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앞날을 누가 알겠니?”

    “왜 선배같이 타고난 페미니스트가 결혼은 결심한 거야?”

    “호주제가 폐지됐으니까.”

    “핑계 한번 좋네. 참, 말이 난 김에 물어보죠. 내가 이 정부가 공약을 얼마나 지켰나 따져보는 특집물을 해야 하는데 여성정책도 다루거든. 몇 가지 좀 적어왔는데.”

    유아보육료 50% 국가지원, 여성 일자리 50만개 창출, 지역구 30% 비례대표 50% 여성의원 할당제, 5급 이상 공무원관리직 여성비율 20%로 확대 등이 적힌 메모를 정현이 건네자 연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봐 얘가 스파게티 맛 떨어지게 하네. 나도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지. 다 지켜졌을 리는 물론 없겠지만 하여간에 일하는 여자들이 꾸준히 늘어났고 여자 정치인도 꽤 많아졌잖아. 일하는 엄마들 애 키우기도 여건이야 과거보다 나아졌지. 남자들이 안 변해서 문제지.”

    “또 남자들이 문제야?”

    “그럼. 남자들 의식이 여자들 의식변화는커녕 법이나 제도가 바뀌는 것도 못 따라오잖아.”

    “강사장도 그래요?”

    “그 사람 의식은 지금 개성에 가 있다.”

    꽤 탄탄한 섬유업체를 경영하는 강사장은 현재 개성공단에 새로 건설한 공장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다고 했다. 그 때문에 지난 가을 연혜영은 개성관광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금강산 관광과는 전혀 다른 운치와 멋이 있다며 흡족해 했었다. 특히 경의선을 따라 기차로 가는 길의 풍광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연선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는 옛말이 틀리진 않나 보다. 개성에 가 있다는 강사장이었다.

    “자기? …응 …에이 뭘, 난 선물 같은 거 필요 없어. 자기만 있으면 돼.”

    닭살이 따로 없다. 결혼을 준비하는 여자는 저렇게 바뀌나보다. 페미니스트건 아니건.

    짧게 전화를 끝낸 연선배는 무안한 듯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다음 주엔 금강산에서 국제적인 여성모임이 있는데. 너도 가면 좋을 텐데 방송 때문에 안되지?”

    “안되죠. 매인 몸이라. 무슨 모임인데요?”

    “국제여성평화대회. 평화운동 환경운동가들 작가 언론인 예술가들이 함께 모여 한반도 평화를 비롯한 국제 평화문제를 논의하고 행동계획을 짜. 잘 되면 올 여름 비무장지대에서 대대적인 국제평화캠프를 열 수 있을거야. 진다혜 장관 말대로 ‘전쟁광에다 환경의 적’인 부시행정부에 항의하는 동아시아 여성 반전 시위도 서울에서 벌일 계획이야.”

    연혜영의 말을 들으면서 정현은 정말 세계가 좁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 연대가 다방면에서 강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금강산과 비무장지대가 국제적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 정현은 다행스럽다. 개성에서 서울로 휴대전화 통화가 가능해진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조금씩 가다 보면 통일의 길도 보이겠지.

    정현이 시민광장을 진행하는 B스튜디오로 들어선 건 방송시작 40분 전인 7시20분경이었다. 스튜디오 안에는 이미 출연자 두 명, 김치국 변호사와 간통죄 유지를 주장하는 나이든 여교수가 와서 담당PD,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현은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한쪽 구석에 따로 마련된 자리로 가서 큐 시트와 대본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 시작했다. 토론 프로그램을 몇 번 진행해 본 경험이 있어 형식 자체를 다루는 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으나 내용을 어떻게 충실하고 재미있게, 또 가능한 한 도발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우리 사회도 여성해방의 새로운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 아닐까? 여성이 해방된다는 것이 여성의 존재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면 여성들이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일터로, 사회속으로 나온 것은 아마 그 첫 단계에 불과할거야. 해방을 위한 물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지. 의식의 해방, 몸의 해방은 또 다른 얘기야.

    특히 순결이다 정조다, 여성의 몸에 들씌워진 수 천년 묵은 억압은 너무나 강고해서 지금까지 많은 여성들의 몸은 침묵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어. 입은 말을 하기 시작했지만 몸은 계속 벙어리였던 거지. 그러다 최근 들어 벙어리 상태였던 여성들의 몸이 비로소 깨어나 말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아.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나선거지. 내가 보기엔 그 때문에 요즘 너도 그렇게 힘든 것이고.

    왜 요즘 이렇게 간통으로 걸리는 유부녀들이 많아졌을까? 남자들이 말하는 성개방, 성해방과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볼 필요가 있을거야. 어쨌든 남편들한테는 위협적인 상황이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간통죄 폐지 문제를 놓고 여론조사를 해 보면 똑같이 반대하는 쪽이 약간 우세해. 그러나 그 내용은 달라지고 있지. 간통죄를 유지하자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는거야. 물론 명분으로는 보다 고상한 걸 내세우지. 가족의 가치라거나 가족사랑이라거나 하는. 아내의 정조의무가 훨씬 더 엄격한 사회에서 간통죄가 갖는 사회적 기능, 여성의 몸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변화, 그리고 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 이런 것들이 모두 고려돼야 할 것 같은데?”

    연혜영의 말을 떠올리며 정현은 저만큼 떨어져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두 출연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이구, 나도 여자지만 요즘 젊은 여자들 정말 문제야 어쩌구 하고 있는 여교수는 물론이고 김치국 변호사의 입에서도 그런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나올 가망은 없어 보였다. 기대해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간통죄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 대표가 유일한데 남자여서 아무래도 기대난망일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연선배의 관점을 토론내용에 끌어들일 수 있을까? 정현은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큐 시트를 다시 꼼꼼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을까, 정현은 불에 덴 듯 화다닥 놀라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는 작가가 아, 박달재 선생님이시죠 하며 한 중년남자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감색 롱코트에 붉은 모직 머플러, 카푸치노 같은 목소리.

    “네, 박달잽니다. 좀 늦었죠.”

    작가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하는 가족사랑아버지회 총무 박달재의 목소리가 정현에겐 전혀 엉뚱하게 들려왔다.

    “인생은 오렌지죠.”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