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지하철 1급’도 ‘체어맨 1급’도 최대 무기는 폴리티컬 센스

‘관료사회의 꽃’ 1급의 실체

  • 글 :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팀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3-04-25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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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권교체기마다 물갈이 대상이 돼 온 ‘관료 피라미드의 정점’ 1급 공무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한민국 대표 제너럴리스트들의 체험적 고급 관료론, ‘낙하산’론.
    ‘지하철 1급’도 ‘체어맨 1급’도  최대 무기는 폴리티컬 센스
    모 부처 1급 A씨. 얼마 전 그는 30여 년간 몸담은 직장에 사표를 던졌다. 행정고시 동기가 차관으로 승진한 때문이다. A씨가 차관이 됐다면 반대로 그 동기가 사표를 냈을 지도 모를 일이다. 1급은 그런 자리다. 한 번, 두 번만 승진에서 밀려도 옷을 벗어야 한다.

    “공무원으로서 1급까지 했으면 일단 다한 거죠. 로또 복권도 그런가요, 본인의 복이나 운이나…, 시대적 흐름과 맞아떨어지면 정무직을 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집에 가서 건강도 회복하고 공부도 하고 배우자와 같이 놀러 다닐 필요도 있죠.”

    정찬용 대통령인사보좌관의 말인즉슨, 솔직히 맞다. 아니 오히려 너무 정확해 기분 나쁠 정도다. 1급에서 차관 혹은 청장으로 승진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말 그대로 운이요 시대적 흐름과의 조화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장·차관이 바뀌고 관료 사회가 요동을 치겠는가.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것이 있다. 1급 자리를 그만두면 집에서 놀아야 한다?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아니 사실관계에도 맞지 않는다. 지금껏 수많은 1급들은, 특히 경제부처 출신들은 퇴직 후 놀지 않았다. 어디든 갈 곳이 있었다. 마련해놓은 자리의 요모조모를 따져, 혹은 받아들이고 혹은 퇴짜 놓는 여유까지 부리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그도 쉽지 않으려나. 그러나 A씨는 곧 ‘안 주고는 못 배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배려’ 없이 관료조직을 물갈이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괄 사표와 ‘정무직 로또론’

    지난 3월18일, 행정자치부 1급 공무원 11명이 명예퇴직을 신청하거나 사표를 제출했다. 행자부에는 총 12석의 1급직이 있다. 이 중 공석인 차관보를 제외한 전원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해양수산부 1급 3명도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이러자 전 부처 1급 간부가 다 사표를 내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관가에 급속도로 퍼져갔다. 그 와중에 정찬용 보좌관의 이른바 ‘정무직 로또’ 발언이 불거져나온 것이다.

    이전에도 정권 교체기에는 큰 폭의 인사가 이루어지곤 했다. 그럼에도 이번 조처가 남다른 관심을 모은 건 ‘일괄 사표’라는 파격적 방식 때문이었다. “선별 면직시켜도 될 일을 굳이 일괄사표라는 방식을 택해 망신을 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언론 또한 기다렸다는 듯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국가를 위해 평생 봉사했는데 이럴 수 있냐” “한창 일할 나이에 앞길도 마련해 주지 않고 무작정 옷을 벗겨도 되느냐”는 식의 감정적 반응들이 연일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전 부처 1급 일괄 사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기존 1급의 60~70%가 옷을 벗었으나, 그렇다고 ‘충격적’이라는 표현을 쓸 만큼 격렬한 변동이 일어난 부처는 많지 않다. 특히 경제부처는 해양수산부, 국세청 등을 제외하고는 파장이 최소화된 모양새다. 오히려 사회부처 쪽 변화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 역시 행정고시 기수를 2~3회 낮추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렇더라도 파격은 파격이다. 지난 4월11일 중앙인사위원회는 2003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이번 1급 인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공정·투명한 인사를 위한 다면평가 전면 실시 △서열과 기수를 뛰어넘는 능력중시의 발탁인사(연령 : 52세→50세10월, 행시기수 : 14~17회→17~20회) △민간전문가 유치 확대 및 과학기술인력 우대. 이러한 변화는 새 정부의 개혁 성향 및 세대 교체 중시 경향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전·현직 1급 공무원들은 지금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최근까지 모 경제부처 1급으로 근무한 B씨는 “정권 교체기에 1급에 대한 대규모 물갈이 인사가 이루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1급은 부처의 주요 사안을 사실상 조율하고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사람이 ‘정권’과 뜻을 같이하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정권 입장에서야 뜻과 정책 견해가 같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닌가. 그래서 국가공무원법에도 1급만큼은 신분 보장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B씨는 1급 임명장을 받던 날, 장관으로부터 “이 자리는 언제든 그만두실 수 있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정권 교체와 1급 인사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취재 중 만난 8명의 전·현직 1급 모두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답했다. 그런 만큼 이번 인사에 대해서도 “일괄 사표, 다면평가, 발탁 인사 등 도발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정권 자체의 ‘파격성’을 생각할 때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반응이 더 많았다. 달리 해석하면 부처 1급이란 생각보다 훨씬 ‘정치적인’ 자리라는 뜻이다. 실제로 취재에 응한 전·현직 고위공무원들은 한결같이, 1급이 갖춰야 할 필수 자질 중 하나로 ‘폴리티컬 센스(정치 감각)’을 꼽았다. 도대체 부처 1급은 어떤 자리인가.

    1급 공무원은 흔히 ‘관료 사회의 꽃’으로 불린다. 장·차관은 ‘정무직’이라는 규정 그대로 정권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1급은 일반 공무원이 순차적 내부 승진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위층으로 여겨진다. 중앙 부처의 기획관리실장이나 차관보가 대표적이다. 1급 간부가 차관으로 직접 승진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표를 내고 퇴직금까지 받은 후 재부임하는 형태다.

    지난 3월 말 현재 우리나라의 1급 공무원 수는 213명이다. 이 중 국가직이 191명, 지방직이 22명이다. 국가직은 다시 일반직과 별정직으로 나뉜다. 일반직은 중앙 정부부처의 경우 ‘실장’ 직위가 많다. 각 조직의 역사에 따라 자리가 만들어지는 까닭에 부처마다 명칭도 제각각이다. 3월말 현재 125명이 근무하고 있다.

    별정직은 차관보와 각종 위원회 상임위원(예를 들어 금융감독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 여당 파견 전문위원 등을 말한다. 실제로는 소속 부처에서 근무처로 파견되는 형태이나, 별정직인 만큼 서류상으로는 사표를 내게 되어 있다. 소임을 다하면 대부분 과거 소속 부처로 재발령이 난다. 현재 66명이 활동 중이다.

    이를 조직도로 그리면 맨 위에는 정무직인 장·차관이 있고, 그 밑에 차관보와 실장(들)이 있고, 다시 실장 밑에 과장들(3개 과 이상)이 있는 형태다. 국가공무원법상 차관보는 하부조직을 둘 수 없게 돼 있다. 그러나 상당수 부처에서 ‘실’에 속하지 않는 ‘국’의 상위직 개념으로 차관보를 활용하고 있다. 특히 재경부가 두드러진다.

    지난 1월말 현재 우리나라 공무원 수는 87만명이다. 이 중 1급에까지 오르는 이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고시 합격자 중에서도 약 20%만이 ‘꽃’을 피울 수 있다. 좁은 문이요 영예로운 자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1급 공무원에게 특별히 ‘폴리티컬 센스’가 필요한 이유는, 업무의 상당 부분이 설득·조정·조절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급 실장에 이어 차관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C씨는 1급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국·과간 정책의 연계성과 우선순위 조정 ②범부처적 업무 및 정책의 수립 ③국·과의 이해가 얽힌 정책 추진 결과의 평가 ④장기적이며 폭넓은 시각에서 정책의 파급효과를 조명’.

    최근 옷을 벗은 경제부처 D씨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그는 “문민정부 이후 1급직이 개방형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큰 변화는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온다면 아무래도 특정 분야의 전문가일텐데, 1급 업무는 전문지식만 풍부하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관련 부처간, 또 기관 내에서의 횡적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급 업무는 복합적이다. 실무에 있어서는 그 전체를 세부 사항까지 사실상 총괄 지휘함은 물론, 위에서부터 보면 장·차관의 역할 일부를 대행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장·차관과 1급이 상하 관계이긴 하지만 보완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1급 간부는 누가 실무에 대해 물으면 이를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업무 파악에 매달릴 시간은 많지 않다. 부처간 업무조정이란 명목으로 열리는 외부 회의가 워낙 잦기 때문이다. 국무회의, 차관회의 등 장·차관이 참석하는 회의 자료도 책임지고 준비해야 한다. 타 부처, 청와대, 국회의원, 시민단체, 언론계 인사 등을 직접 만나 밥 먹고 술 마시며 협조를 구해야 할 때도 많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탁월한 ‘폴리티컬 센스’를 발휘할 수 있으면 능력 있는 1급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1급의 ‘조정역’으로서의 역할이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 청와대 국무총리실 국무조정실 여당 등에서 일하는 일종의 ‘파견직’ 간부들이다. 모 부처 출신의 E씨는 지난 정권 때 민주당 전문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자신의 업무에 대해 “정부-여당 간 정책 협의를 담당했다. 같은 사안이라도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지 않나. 또 출신 부처와 관련한 상임위를 맡아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도 했다”고 밝혔다. 전문위원은 관행상 1급이나 고참 국장(2급)이 맡도록 되어 있다. E씨는 “위에다가는 ‘곧 이런 보고가 올라옵니다’ 하고 포인트를 일러주고, 밑에다가는 ‘이건 하루, 일주일, 혹은 한 달 더 스터디해봐라’ 하고 업무 범위 및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 1급이 할 일”이라고 말했다.

    실무적 측면에서 부처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에 겪는 어려움도 적지 않다. 부처이기주의로 인한 충돌이 빚어질 때다.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양보를 하는 순간, 그는 조직 내에서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부하직원들에게 전후상황을 잘 설명해 이해와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1급이 해야 할 일 중 하나다.

    결국 부처 1급 공무원이란 전문가보다 제너럴리스트에 가깝다는 것이 중론이다. 소신이나 고집보다는 설득력, 유연한 사고, 시류를 읽는 눈 등을 갖춘 인물이 출세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급 공무원의 재량권은 어느 수준일까. D씨는 이에 대해 “장관이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업무 영역이나 역할 설정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내부승진 장관일 때는 속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일하기가 쉽고 부담도 적다. 웬만한 일은 1급 선에서 전결처리해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장관이 외부인사일 때는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소소한 부분까지 다 보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결정적 순간에 밀리지 않으려면”

    A씨에게 “어떤 사람이 1급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사실 국장급 정도면 실력은 비슷비슷하다고 봐야 한다. 그 때부터는 인맥, 사명감, 친화력, 거쳐온 부서의 면면 등이 성패를 좌우한다. 그러나 어쩌면 더 결정적인 것은 ‘운’일지 모른다. 지역·학교·임용 과정 등 이른바 출신 성분, 인사 적체 여부, 승급 대상자가 됐을 당시의 보직. 한마디로 1급은 능력+운+사명감의 결정체”라는 설명이 되돌아왔다.

    현재 30대 그룹 계열사 임원으로 근무중인 전직 1급 F씨는 “외향적 타입이 유리하다. 묵묵히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승진하기 어렵다. 부처에 충성하고, 아래위로 잘 챙기고, 각종 동아리 활동이나 대외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결정적 순간에 여기저기서 (잘 봐주라는) 말이 들어간다. 자기 일만 아무리 열심히 파면 뭘 하나, 법이 통과 안 되는데. 그저 일이고 법안이고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 미래의 1급”이라고 말했다.

    1급 정도의 위치에 오르려면 기본적으로 워커홀릭(일 중독자)이어야 한다. 사생활, 특히 가족과의 소소한 행복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는 일반 기업체 임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공백을 메워주는 것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해외 근무 혹은 유학의 기회다. 부처 1급 정도 되는 사람들은 반 이상이 해외 장기체류 경험을 갖고 있다. 사회부처 1급을 지낸 G씨는 “그 때가 내가 가족에게 봉사한 유일한 시기”라고 말했다. 자녀들에게 영어를 습득시킬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학자금 지원도 확실해 “다른 건 몰라도 자녀 교육에는 고위 공무원이 그만”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지하철 1급’도 ‘체어맨 1급’도  최대 무기는 폴리티컬 센스

    “1급 파격 인사’의 진원지, 행정자치부의 간부들이 청와대 업무 보고에 앞서 노대통령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1급이 사표를 내는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첫째, 승진에 누락돼 위아래로 눈치가 보이고 자괴심에 빠질 때다. 압력 아닌 압력이 도처에서 들어온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차관이나 바로 아래 기수 후배들로부터 공공연히 “나가달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물갈이’가 절실할 경우 선후배들이 직접 나서 밖의 자리를 알아봐 준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되면 사표를 내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다. 반대로 산하기관장 자리가 공석이 될 경우 부처에서 나서 옮길 사람을 물색해 떠밀기도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인사에 숨통이 트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이른바 ‘용퇴’다. 정권 교체기, 인사철, 혹은 윗 기수가 빠지지 않아 부처 전체가 인사적체에 시달리고 있을 때 1급 한두 명이 스스로 옷을 벗어주면 후배들로부터 “훌륭한 선배” “용감한 선배”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역시 선후배들이 발벗고 나서 괜찮은 자리를 물색해 준다. 그러나 이 역시 속을 들여다보면 밀려 나가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어떤 방식의 퇴직이건 공통된 결말은, 본인은 물론 차관을 중심으로 한 부처 선후배들이 똘똘 뭉쳐 ‘다음 자리’ 마련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취재 중 만난 8명의 전·현직 1급 중 그러한 관행에 대해 “문제 있다”고 인정한 이는 특차로 공무원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던 C씨뿐이었다. 요컨대 그 사람의 성격·품성·소속 부처 등을 떠나, 흔히 ‘낙하산 인사’로 표현되는 ‘퇴임 후 자리 보장’이란 고위공무원들에게 너무도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낙하산은 정당하다?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보상론’이다.

    B씨는 “경제적인 것만 생각하면 벌써 수십 번 그만뒀다. 30여 년 동안 남들 받는 급여의 반만 받고 한결같이 일했다. 평생을 봉사하며 오로지 보람과 책임감, 사명감만으로 살아왔는데 그 정도의 보상은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참고로 연봉제가 적용되는 1급 연봉은 상한이 7003만원, 하한이 4669만원이다.

    경제부처 1급 출신으로 모 위원회에 재직중인 I씨의 반론은 더욱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다.

    “우리 공직사회가 조직은 미국식을 따왔지만 사람을 뽑고 운용하는 방식은 일본식이에요. 권위·권한은 인정하되 청렴·책임·평균 이상의 격무 등 많은 희생을 요구하지요. 그러다 50대 중반 정도가 되면 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서 ‘그동안 우리를 위해 고생했으니 잘 모시자, 후배 공무원들이 모델로 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돕자’는 취지에서 좋은 자리를 만들어 데려갑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은 방식이라고 보면 돼요.”

    그는 지금과 같은 관행이 통용될 수밖에 없는 근본원인을 행정고시라는 채용 시스템에서 찾았다.

    “미국처럼 일반기업과 공직 사이를 들락날락할 수 있으면 이런 얘기를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회·문화의 성숙도라든가 ‘견제와 균형(check & balance)’이 미국하고 많이 다르잖아요. 예를 들어 증권사 간부가 재경부 국장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엄청난 모럴 헤저드가 발생하겠죠. 그래서 행시라는 관문을 통해 사람을 뽑고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문화를 다져온 겁니다. 그 대가로 신분과 정년을 보장해주는 거구요.

    하지만 그냥 가만 놔두면 조직에 피가 돌지 않거든요. 나갈 사람은 빨리빨리 나가고 또 새 사람을 들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에 걸맞은 보상을 제공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그런 시스템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과장이고 국장이고, 승진이 안 돼도 정년까지 그냥 버틸 것 아닙니까. 아니 오히려 1급으로 승진을 안 하려 하겠지요. 그러니 후배와 조직을 위해 용퇴하는 이들에게 뭔가를 챙겨줘야지요. 솔직히 공무원은 그 마지막 보상을 보고 평생을 봉사하는 것 아닙니까.”

    C씨도 비슷한 맥락의 설명을 곁들였다.

    “무조건, 아무 데나 집어넣자는 게 아닙니다. 나름대로 원칙을 갖고 선별해야죠. 사실 행정부에서 1급으로 일한 정도면 관리 경험 풍부하죠, 전문가일테고, 정책조율 경험도 많은 고급 인력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경력과 업무영역에 걸맞은 곳에 근무하는 것은 서로 나쁠 것 없는 선택이죠.”

    이런 논리의 뒷받침을 받아, 부처 실·국장급이 되면 슬슬 산하단체나 대학, 공공기관 등에 대한 ‘관리’를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돼버렸다. 그러나 ‘논리’가 같다 해서 상황도 동일한 것은 아니다. 어떤 부처에 근무하느냐에 따라 자리보장에도 하늘과 땅 차가 나기 때문이다.

    F씨는 “퇴직자들이 욕을 먹는 건 다 재경부, 산자부 때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부처를 보세요. 일단 국가보훈처나 환경부, 국방부, 여성부 같은 데는 갈래야 갈 곳이 없어요. 그런데 재경부는 아니죠. 1금융 갔다 2금융으로 갔다…. 산자부도 기획예산처에서 관리하는 유관기관만 32개나 됩니다. 그런 산하단체들이 상위 부처들과 한 몸이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예요. 예를 들어 국감 시즌이 되면 우리(모 사회부처)같은 사람들은 운동회 시작됐다고 구두끈 졸라매고 산하단체에 좀 도와주십사 읍소하고 다니는데, 경제부처 간부들은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또 보통 산하단체로 가면 임기가 3년 정도거든요. 근데 자리가 많은 재경부나 산자부 출신들은 2번, 3번씩 거푸 맡기도 해요. 정말 불공평하죠.”

    그래서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1급이라고 다 같은 1급이냐”는 말이 공공연히 떠돈다.

    “업무협의 같은 걸 할 때 주눅 들고 말발 안 서고 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재직중이나 퇴직 후나 대우가 너무 달라요. 소위 잘 나가는 부처 공무원들은 과장 시절부터 몇 달치 골프 약속이 밀려 있곤 하죠.

    하지만 사회부처나 외청들은 그렇지 못해요. 퇴직 후에도 경제부처 쪽 사람들은 거의 100% 자리가 마련되는 데 비해 소외부처들은 30% 남짓이나 소화가 될까말까 합니다. 그래서 경제부처 물갈이는 빨리빨리 되는 반면 교육부나 국방부나 뭐 그런 부처에는 직위와 상관없이 정년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체어맨 1급’이 있는가 하면 ‘지하철 1급’도 있는 거죠.”

    그 자신 정년을 거의 다 채우고 퇴직한 G씨의 말이다.

    이와 관련 F씨는 재미있는 말을 했다.

    “정찬용 비서관은 ‘집에 가 건강도 추스리고 하라’는 말을 했는데 그건 일종의 낙향을 뜻하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1급 퇴직자에 낙향은 없어요. 다음 자리가 필요하든, 더 나아가 장·차관 자리에 욕심이 있든, 누가 부르면 바로 호텔로 뛰어나갈 수 있는 거리에 살아야죠.”

    사실 낙하산 인사를 당연시하는 고위 공직사회의 풍토는 바깥사회로부터 ‘철밥통’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딱 좋다.

    업무상 경제부처 출입이 잦은 그룹사 간부는 “일반 기업은 40대 중반만 돼도 명퇴를 생각한다. 부장에서 상무, 상무에서 전무가 되지 못하면 대책 없어도 그냥 나가는 거다. 이런 세상에 사표를 걸고 다음 자리를 협상하거나, 1급까지 오르고도 정년 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또 공무원들이 박봉이라고 하지만 어디 자기 돈 쓰나. 물 좋은 부서일수록 접대받는 경우가 많고 사소한 지출도 다 비용 처리를 한다. 그런데 마치 평생을 희생만 해 온 것처럼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비난했다.

    “계급의식이 ‘철밥통’ 만든다”

    이와 관련 김광웅 전 중앙인사위원장은 “공무원 조직이 아직 계급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공무원들에게는 위로 올라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승진이 불가능하거나 오를 곳이 없으면 그것으로 관료 인생을 마감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친분있는 1급들을 만나면 ‘고유 프로젝트를 가지십시오, 전화·회의·도장찍기에만 매몰되지 말고 자기만의 일을 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비슷한 맥락입니다만, 퇴직 후에 대해서도 발상의 전환을 하면 국가나 개인 모두 큰 이득을 볼 수 있습니다. 정년 후에도 계약직으로 일하는 거예요. 물론 그러려면 개인이 전문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많은 배려를 해야지요. 또한 공무원들이 ‘봉사의 보상’을 퇴직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금전적 이익을 바랐다면 공무원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해야 했겠지요.”

    하지만 김 전 위원장은 “문제의 근본 원인은 고급 관료 개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있다”며 “고위공무원단 운영이나 전문성 향상을 위한 최소 보직기간 설정, 장기적으로는 행시 제도 개선 및 인턴제 도입, 민간전문가 경쟁 채용 확대 등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C씨 또한 “장기적으로 부처 1급은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전문가로 육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만 되면 퇴직을 앞둔 1급들이 산하기관뿐 아니라 사기업, 대학, 전문연구기관 등으로부터도 적극적인 러브 콜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조직이 유연해지고 개인 만족도도 커지겠지요. 사실 산하 기관장으로 간다 해도 3년 후면 앞이 막막한데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밑에서 치받는 후배들에 밀려 그 임기마저 못 채우고 짐을 싸야 하는 일이 적지 않거든요. 1급 출신들이 한계가 뻔한 산하기관에서 능력을 사장당하거나 기업체의 값싼 로비스트로 활용당하지 않도록 관료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개선과 개혁이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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