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호

민주화운동 전위대에서 참여정부 개혁 선봉대로

민변

  • 글: 김진원 법률신문 취재부장 jwkim@lawtimes.co.kr

    입력2003-04-25 1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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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변이 노무현 정부 핵심인력의 산실로 떠오르고 있다.
    • 강금실 법무장관, 문재인 민정수석, 박주현 국민참여수석, 고영구 국정원장 내정자, 송두환 특별검사 등이 모두 민변 소속 변호사다. 노대통령도 민변 출신이다. 현 정부 개혁정책의 견인차 노릇을 하는
    • 민변의 역사와 활약상을 살펴봤다.
    민주화운동 전위대에서 참여정부 개혁 선봉대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 참여정부 들어 급부상하고 있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등 청와대 비서진 진출로 시작된 민변 출신들의 새 정부 참여는 강금실 법무부장관을 거쳐 고영구 변호사의 국가정보원장 내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민변이 노무현 정부 핵심인력의 산실로 떠오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변의 목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이라크 파병 등 우리 사회의 주요 현안을 놓고 논란이 일 때마다 민변은 빠지지 않고 의견을 내놓는다.

    올 들어서만 1월13일 ‘노동쟁의행위에 대한 민사책임 추궁은 반인권적 행위’를 시작으로 4월9일 ‘국가인권위원회의 청소년보호법시행령 중 동성애 조항 삭제를 환영하며’에 이르기까지 약 30개의 성명을 내놓았다. 검찰 개혁을 시작으로 사법부·국정원·경찰 및 군사법제도 개혁에 관한 토론회를 잇따라 열어 주요 개혁과제에 대한 여론 수렴에도 앞장서고 있다. 언론엔 민변 관련 기사가 넘쳐나고 있고, 민변은 기자들이 빼놓지 않고 점검하는 단골 출입처가 되었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시중엔 ‘민변 공화국’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민주화 이전의 군사독재시절을 가리킨 ‘육사(陸士)정권’에 빗대 현정부를 ‘육법(六法)정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정당도 아니고 동교동계니 상도동계니 하는 정치권의 특정 집단은 더더욱 아닌 민변이 이처럼 새 정부의 강력한 인재풀로 떠오른 배경은 무엇일까.

    약 390명의 민변 소속 변호사 중 상당수는 지난 대선 때 ‘노무현을 지지하는 변호사들의 모임(노변모)’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노대통령의 당선을 적극 지원했다. 공을 구체적으로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노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 중 하나라고 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변호사인 노대통령도 1988년 5월 민변이 창립될 때부터 회원으로 참여한 민변 출신이다. 그러나 이런 인연만으로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잇따라 새 정부에 참여한 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단견이다. 노대통령이 대선 때 이들에게 빚을 진 것은 사실이겠지만 평생 정치를 함께해 온 측근의 뒤를 봐주는 식으로 이들을 데려다 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공직에서 물러나면 변호사로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정부 요직에 기용되지 않더라도 생활하는 데 큰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노대통령과 민변 출신들 사이에는 이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고 한 단계 높은 함수관계가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첫째는 개혁성이다.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노대통령과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맞붙은 지난번 대선은 보수 대 개혁의 구도였다. 노대통령은 보수보다는 개혁의 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 선거전을 승리로 이끌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대통령은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개혁은 새 정부의 가장 으뜸가는 화두다. 정책과 방향만 그런 게 아니다. 노대통령을 도와 앞장서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새 정부의 각료와 참모 대부분이 개혁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노대통령이 직접 밝힌 적이 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한 달여 전인 1월27일 당선자 신분으로 대구에서 국정토론회를 가졌을 때다. 이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정당이나 정치적 견해, 경제·노사 정책 등에 관해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전부 정부 안에 끌어넣으라고 하는 (주변의) 조언에 대해서는 실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새 정부의 주요 인사 인선과 관련해 이념과 생각이 같은 사람을 우선 발탁해 쓰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이어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가치 지향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정권을 바꾸어 왔다”고 강조하며, “정부 안에 의견이 다른 사람, 이해관계와 기반이 다른 사람이 함께 있으면 정책의 입안 과정부터 도저히 손발이 맞지 않고 잡음만 나와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정부 하지 말라는 것이다”고까지 이야기했다. 노대통령이 내비친 ‘이념과 생각이 같은 사람’이 높은 개혁성을 갖춘 인물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로부터 10일 후인 2월7일에 있은 대통령직인수위 정무분과 및 경제 1·2 분과 인사추천위원들과의 첫 회의석상. 노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고위직 인선 원칙과 관련, “안정적으로 조직을 꾸려가는 능력도 갖춰야 하지만 정책 방향에 있어서는 개혁성이 있어야만 새 정부의 개혁작업을 이끌어 갈 수 있다”며 개혁성을 갖춘 인물의 입각을 명시적으로 주문하고 나섰다. 개혁성을 전제 요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뤄진 정부 고위직 인사에선 개혁성이 인선의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로 등장했다.

    새 정부의 주요 자리에 속속 진출한 상당수 민변 출신 변호사도 이런 기준에서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개혁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개혁성에서 노대통령 또는 새 정부와 코드가 딱 들어맞는 변호사들이라는 데 대해서는 민변 내부는 물론 바깥에서도 부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도대체 민변이 어떤 단체이기에 개혁성에 관한 한 보증수표처럼 노대통령의 눈에 들어와 있는 것일까. 또 개혁성 외에 민변 출신의 부상을 설명할 있는 또 다른 코드는 없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우선 민변이 어떻게 창립돼 어떤 경로로 발전해왔는지 15년 역사와 그 활약상을 살펴보자. 이와 함께 변호사란 어떤 직업이며, 변호사의 정·관계 진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새겨볼 필요가 있다.

    김대중·김영삼씨의 후보단일화가 실패하고, 또다시 군인 출신의 노태우 정부가 출현해 민주화를 추구하는 진영에 우울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1988년 5월28일. 경기 포천의 베어스타운에 모인 51명의 변호사들은 전부터 활동해오던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와 청변(청년변호사회)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 민변을 출범시켰다.

    정법회가 결성된 것은 5공 말기인 1986년 5월19일로 그 뿌리는 이전부터 활동해오던 인권변호사들에 닿아 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재야 법조계에선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이어지면서 정치적 양심수들에 대한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아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하는 인권변호사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의 이병린 변호사를 시작으로 1970년대의 한승헌 변호사를 거쳐 ‘4인방 변호사’로 일컬어지는 이돈명·조준희·황인철·홍성우 변호사 등이 줄을 이었다. 이들은 그러나 어떤 구심체를 갖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인권변호에 눈을 뜬 젊은층의 2세대 변호사들과 접합되면서 정법회라는 진보적인 변호사 단체가 탄생된 것이다.

    그 계기가 된 사건이 1986년의 구로동맹파업사건이다. 구로공단 지역의 여러 사업장과 학생들이 연대한 이 사건은 노학연대사건이라고도 불렸다. 하나의 사건임에도 공안당국은 재판과정에서의 파란을 우려해 여러 개의 사건으로 나눠 기소했다. 망원동 수재사건 변론 때부터 협력해온 1·2세대 인권변호사들은 이 사건의 변론을 통해 더욱 긴밀히 결합할 수 있었다고 한다.

    1세대 변호사 1명과 2세대 변호사 몇 명이 하나가 돼 한 건의 변론을 맡는 식으로 팀을 짰다. 변론 준비는 2세대가, 법정 변론 투쟁은 1세대 변호사가 맡는 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이때 함께 참여한 1세대 변호사가 홍성우, 이돈명, 조준희, 황인철 씨 등이다. 2세대엔 조영래, 이상수, 서예교, 박원순, 김상철, 김동현 변호사 등이 있었다.

    그밖에 정법회 회원으로는 1세대로 강신옥, 고영구, 유현석, 이돈희, 이해진, 조준희, 최영도, 하경철 변호사 등이 있다. 2세대 변호사로는 박용일, 안영도, 유영혁, 하죽봉, 박연철, 박인제, 박찬주, 최병모, 김충진 변호사 등이 정법회에 참여했다. 대표간사는 조준희 변호사였다. 1978년 변호사로 개업해 1981년부터 인권변호사 활동을 해 온 노대통령도 정법회 회원이었다. 민변은 홈페이지(http://minbyun.jinbo.net)에서 “1987년 6월의 민주항쟁 무렵까지 권인숙, 박종철, 김근태씨 등에 대한 고문사건의 폭로와 변론을 담당하는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정법회 활동을 평가하고 있다.

    의식화된 변호사들의 합류

    그밖에도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말지(보도지침)사건, 이돈명 변호사 구속사건, 이상수·노무현 변호사 구속사건 등이 정법회가 변호를 맡아 활약한 주요 시국사건들이다. 노무현 변호사 구속사건은 1987년 6월의 노동자 대투쟁사건 직후인 같은 해 9월 노무현 변호사가 부산에서 가두집회를 주도한 혐의(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돈명·이상수 변호사에 이어 정법회 회원으로서 세 번째 구속된 사건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다고 변호사들은 당시를 회상한다. 노대통령은 당시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수안보에서 열린 정기총회에 참석하는 등 열의가 높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청변은 정법회보다도 더 젊고 진보적인 변호사들로 모임을 시작, 내규와 발기문 초안을 작성하고 여러 차례 세미나를 여는 등 구체적인 활동을 준비하는 단계까지 와 있었으나 정법회와 통합됨으로써 대외적인 활동을 벌이거나 간판을 내걸지는 못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청변이 발기문 초안에서 자주화·민주화·민족통일의 목표를 한국 사회의 역사적 과제로 내걸고 향후 이의 실현을 위해 법조 부문에 요구되는 임무를 수행할 조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등 변호사단체로서는 드물게 급진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변론 등 변호사들의 활동 자체를 하나의 운동으로, 그것도 민족민주운동의 부문운동으로 인식한 측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학창 시절 유신 말기와 광주항쟁 등을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의 모순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탐구해온 세대라고 할 수 있는 78학번에서 82학번에 이르는 변호사들이 주축이 됐다. 이양원, 이석태, 조용환, 백승헌, 유남영, 김형태 변호사 등이 청변의 초기 제안자들이다.

    민주화운동 전위대에서 참여정부 개혁 선봉대로

    2003년 1월28일 서울 무교동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민변 주최의 검찰개혁방안 토론회

    이처럼 신·구세대 변호사의 접합으로 탄생한 민변은 이후 인권변호사들의 구심체로서 발전을 거듭한다. 창립 당시 정법회와 청변의 회원 대다수가 민변으로 흡수돼 51명의 회원으로 출발했는데 15년이 지난 현재의 회원수는 390명 정도다. 창립 당시와 비교하면 8배 가까이 커진 셈이다. 매년 20여 명씩 이던 신규회원도 갈수록 늘어 곧 400명을 돌파할 전망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사법시험 합격 정원이 300명으로 늘어난 게 민변 탄생과도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민변 부회장인 임종인 변호사는 “사법시험 합격 정원이 늘어 다양한 사람들이 합격하게 됐고, 사법연수원을 마친 후 판·검사 대신 곧바로 변호사로 나서는 사람이 늘면서 민변의 저변이 급속하게 확대됐다”고 지적한다.

    사회과학을 공부한 의식 있는 젊은 세대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민변에 뛰어 들었고, 선발 인원이 300명을 넘어 1000명으로 확대되면서 민변은 갈수록 규모가 커지고 있다. 민변이 1988년 5월에 창립된 시간적 배경도 사시 정원이 300명으로 늘어난 것과 관련이 없지 않다.

    300명으로 합격 정원이 늘어난 첫 기수는 1981년 사시에 합격한 연수원 13기다. 이들이 연수원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온 해는 1986년이다. 이어 14기가 제대한 1987년부터 의식화된 변호사들이 나타나면서 정법회와 청변이 태동했고 다음해인 1988년 민변으로 통합됐기 때문이다.



    민변의 기수별 회원 명단(2002년 7월 기준)을 보면 사법시험 이전인 고등고시 사법과 3회인 이돈명 변호사를 시작으로 특임 1회의 유현석, 고시 8회 한승헌, 11회 조준희, 12회 고영구, 13회 김창국 최영도 홍성우 변호사 등 각 기수에 골고루 포진하고 있다. 이어 사법시험 8회의 이기영 조성래 변호사를 거쳐 연수원 6기(사법시험 16회)의 최병모, 7기 노무현 박성민, 8기 천정배, 9기 박용일, 10기 이상수 임채균, 군법무관 4기 이기욱 임종인, 군법무관 5기 박오순 변호사 등이 맥을 잇는다.

    연수원 12기에서는 박원순, 송두환 , 임호, 문재인 변호사가 배출되고 사시 합격자 정원이 300명으로 늘어난 연수원 13기에 이르러서는 강금실, 김응조, 김종훈, 김형태, 박영립, 안영도 변호사 등 6명이나 회원으로 가입한다. 그후로는 14기 10명, 15기 12명 등 연수원 13기(사시 23회)를 기점으로 기당 회원 변호사가 급속히 늘고 있다.

    김주원, 박인제, 유남영, 윤종현, 이석태, 정종섭, 조용환, 박승옥 변호사 등이 14기의 주요 회원이며, 15기 이후로는 김한주, 박연철, 백승헌, 유선호, 이원영, 차병직, 박찬운, 안상운, 윤기원, 이오영, 김선수, 박주현, 손광운, 김진국, 이덕우, 전해철, 이용철, 이원재, 한택근 변호사 등이 회원으로 있다. 더 아랫기수로 내려가면 회원이 30명을 넘는 기수가 많다. 연수원 28기의 경우 35명이 민변에 가입해 있다.



    회원 가입은 동료 변호사의 추천을 받아 가입을 신청하면 회원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회장, 부회장, 사무총·차장, 상임위원장 등으로 구성된 집행위회의에서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아직까지 회원 가입을 신청한 변호사 중 승인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회비는 월 10만원이나 1년차일 때는 5만원이며, 공무원이 돼 정부에 진출하거나 학계로 나간 특별회원은 월 2만원이다. 회비 납부율이 매우 높은 편으로 서울 서초동 신정빌딩 5층에 위치한 사무국엔 수석사무차장인 김인회 변호사와 6명의 간사가 상근하고 있다.

    대부분의 단체 이름은 OO회 등 끝에 ‘회’를 붙이는 게 보통이나 굳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라고 기다랗게 설명을 붙여 ‘모임’이란 말로 이름을 끝낸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이 명칭은 조영래 변호사의 발의에 대다수가 찬동해 채택됐다고 한다. 이름이 길다보니 ‘민주사회를 위한…’ 대신 ‘민주주의를 위한…’ 또는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으로 혼동을 일으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영어로는 ‘Lawyers for a democratic society’인데 민변 홈페이지의 도메인은 그냥 minbyun으로 시작한다.

    이처럼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민변이 그동안 거둔 성과는 무엇일까. 먼저 민변의 활동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강령부터 살펴보자. 목적을 정하고 있는 민변 회칙 2조에 따르면 ‘이 모임은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연구, 조사, 변론, 여론형성 및 연대활동 등을 통하여 사회의 민주적 발전에 기여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언뜻 보면 평범한 내용이다. 변호사법 1조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변호사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첫째 항에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기본적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해선 안 될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변호사의 본질, 존재 이유에 관한 고민이다. 이와 관련, 임종인 부회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변호사는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이 모토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일지 모르지만 변호사법 1조에 가장 충실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조직이 민변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일제시대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했나. 또 1970∼80년대는 어떤가”라고 되물으며 “그 시대 과제를 충실하게 이행하려는 사람들이 바로 민변 변호사들”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실제로 민변 회원들 중 상당수는 시국사범을 변론하고 악법 개폐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민주화라는 우리 사회의 근본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그 실현을 위해 싸워왔다. 민변의 주된 변론대상이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여성 등 사회적 약자나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란 점만 봐도 민변 또는 민변 변호사들이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민변이 그동안 관여한 시국사건 변론 활동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1990년 10월의 ‘남한사회주의노동당동맹(사노맹)사건’, 1990년 10월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사찰사건,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 1991년 5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군내 부정투표를 폭로한 이지문 중위 사건(1992년 3월) 등이 대표적인 것들로 특히 6공 후반기에 큰 사건이 많았다.

    변론활동만이 아니다. 민변 활동의 개혁성은 오히려 회칙 2조에도 명시돼 있는 연구, 조사 및 여론형성, 연대활동 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나중에 의견서가 책으로 출간되기도 한 악법개폐운동이 대표적이다.

    1989년 1월 국가보안법 등 반민주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10여 개의 법령을 대상으로 민변 변호사들이 나눠 맡아 연구한 끝에 의견서를 작성, 발표했다. 한승헌, 이돈희, 황인철, 최영도, 고영구, 안영도, 김동현, 백승헌, 박원순, 김선수, 유남영, 윤종현, 김갑배, 이상중, 정미화, 조용환, 김형태, 김원일, 이석태, 안상운 변호사 등이 의견서 집필과 검토에 참여한 변호사들이다.

    주요 사건이나 인권유린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활동도 했다. 또 창립 초기에는 재야민주운동단체들의 연대 제의에 신중하게 반응했으나 점차 이들과 폭넓은 연대활동을 벌였다. 현재 민변의 활동범위는 법조 개혁 주장은 물론 국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다.

    간첩사건 변론 고민

    정법회 시절부터 핵심적으로 관여해 왔으며,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로 있는 박원순 변호사는 “민변은 법률가단체로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크게 이바지해왔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민변도 그동안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정사건의 변호 여부를 놓고 내부에서 의견이 갈리는 등 노선 갈등도 없지 않았다.

    1992년 9월 적발된 황인오 등이 관련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과 김낙중씨 등이 연루된 간첩사건이 단적인 예다. 이 두 사건에서 조선노동당에 가입해 간첩활동을 한 사람을 민변의 이름으로 변론하는 게 타당한가를 놓고 내부에서 의문이 제기됐다.

    이 문제를 표결에 부친 결과는 참석자 38명 중 가21, 부15, 기권 2명. 그러나 민변 집행부는 이같은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서는 회원들간 완전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에 따라 민변은 공식 수임을 하지 않고, 회원 변호사 중에서 희망자를 알선했다. 결국 이 사건들은 민변 회원이 개별적으로 맡아 변론을 수행했다.



    군사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지는 민주화과정에 시국사건이 급속도로 감소하자 민변 회원들은 향후 활동방향을 두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했다. 민변의 활동영역이 초기의 인권변론에서 공익소송 또는 기획소송 수행을 거쳐 개혁입법으로 옮겨진 것도 이런 시대상황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엔 입법과 제도개혁 쪽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지난 1월 1년간 심포지엄 등을 열며 논의를 완성한 ‘한국사회의 개혁과 입법과제’를 책으로 펴낸 데 이어 2월 초엔 대통령직인수위에 ‘노무현 정부의 인권정책에 관한 제안서’를 전달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5월 정기총회에선 ‘악법개폐와 개혁 입법을 실패 없이 추진하자’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15년차 사업계획을 채택한 바 있다.

    이런 와중에 회원 변호사들 중 상당수는 시민단체나 정계의 문을 두드리는 등 다른 영역으로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참여연대의 경우 민변 소속 변호사 수십 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등 정치권으로 진출한 변호사도 적지 않다. 국회의원을 거쳐 대통령이 된 노대통령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국정원장에 내정된 고영구 변호사도 한때 민한당 의원으로 금배지를 다는 등 몇 차례 선거에 나갔다.

    민변 회원인 현역 의원으로는 민주당의 천정배·이종걸 의원과 한나라당 오세훈 의원이 있다. 유선호 전 의원도 민변의 핵심 회원이다. 민주당의 송영길·이상수 의원과 한나라당의 심규철 의원도 한때 민변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탈퇴한 상태다.

    정당별로는 민주노동당에 가장 많이 진출해 있다고 한다. 참여정부 출범 후 상당수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행정부로 진출한 가운데 정치권에선 이들의 내년 총선 참여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현 정부와 코드가 맞는다고 할 수 있는 민변 사단이 개혁성을 등에 엎고 총선에 대거 출사표를 던질 경우 그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외부 진출 못지않게 재야 법조계 내에서의 자리매김도 민변이 신경 써야 할 점이다. 민변 출신이 정부요직에 잇따라 기용되는 등 민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변호사들 사이에서 민변에 대한 견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변의 형님뻘이라 할 수 있는 대한변협에선 회장 등 집행부가 교체되기 전인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민변 출신의 잇따른 행정부 진출을 놓고 소외감을 느끼는 분위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민변은 지난 1월 치러진 변협 회장 및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선거 때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서초동 법조타운에서는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만만치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선거 결과 변협 회장엔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사퇴하고 서울회 추천 후보로 출마한 박재승 변호사가 선출됐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엔 천기흥 변호사가 당선됐다.

    민변의 활동을 변협을 비롯한 변호사 단체의 위상과 관련지어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변호사 단체는 원래 보수적이다.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개혁적으로 맞서 싸워야 했으니 민변의 입지가 돋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개혁 정권이 들어선 지금 변호사 단체마저 개혁 일색이면 균형이 안 맞지 않느냐. 이제는 민변도 본연의 모습인 보수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같은 맥락에서 민변 출신이 지나치게 정부에 많이 진출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여기엔 민변을 시샘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개혁성이 만능은 아니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판사는 “개혁성은 필요조건에 불과하다. 전문성과 업무능력은 두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민변 내부에서도 민변 출신이 정부 요직에 많이 기용된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변의 한 간부는 “정부에 들어간 민변 출신들은 모두 개혁성과 도덕성, 그리고 역량이 뛰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게 돼 있다”며 “솔직히 좀 부담스럽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또 “전직 회장, 부회장 등 실질적 역량들이 잔뜩 빠져나갔다”며 “민변 활동이 위축되지 않을까도 걱정”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현재 민변엔 빈자리가 많다. 강금실 변호사의 법무부장관 임명으로 3명의 부회장 중 여성 몫인 한 자리가 공석이다. 공직기강비서관으로 청와대 비서진에 합류한 이석태 변호사가 맡았던 미군문제위원회 위원장, 문재인 변호사가 오랫동안 이끌어온 부산·경남지부의 지부장 자리 등도 비어 있다.

    민변은 5월로 창립 15주년을 맞는다. 5월 말로 예정된 정기총회에선 정부 요직에 기용되는 바람에 빠져나간 집행부 임원을 충원하고 앞으로의 활동을 가늠할 수 있는 16년차 사업계획을 정할 예정이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회원변호사 출신 대통령을 배출한 민변은 창립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큰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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