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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12개 도시의 여관, 빈민촌 전전했지만 임정은 성공한 정부”

  • 글: 조창완 중국 전문 프리랜서 chogaci@hitel.net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주경로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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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이 선언된 상태에서 한국 임시정부가 겪은 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본은 임시정부가 폭탄 제조 등 폭력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 임시정부를 프랑스 조계지에서 퇴출시켜달라고 프랑스에 요구했다. 일본에 공조할 수밖에 없었던 프랑스는 1919년 10월17일 임시정부에 “48시간 이내에 모든 인원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다.

임시정부는 급히 하이얼(白爾 : 현재는 重慶中)로 18번지로 옮겼다. 기나긴, 불안한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3년 뒤인 1922년 3월28일 김익상(金益湘), 오성륜(吳成倫)의 다나카(田中) 암살사건이 발생하면서 임시정부는 다시 이사했다. 일본이 암살 요인을 보내, 임시정부 파괴공작을 하자 임정은 1922년 10월 영미 조계지로 갔다가 1923년 초 다시 화이하이로 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8월 6개월 집세인 500위안을 내지 못해 모든 물품을 팔고 재무부장이었던 이시영(李始榮)의 집으로 옮겼다. 일본의 임정 파괴공작과 재정난으로 임시정부는 그 힘을 잃어갔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이승만의 면직안이 의결되는 등 임정 내부 분란도 심화됐다. 가장 큰 갈등은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였다.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이동휘(李東輝)와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이승만(李承晩)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 이런 와중에 박은식, 이상룡, 안창호, 홍진이 잇따라 임시정부의 수반 격인 국무령에 선임됐다.

그러나 항상 위협에 쫓겨다니는 타국살이를 이끄는 일이 쉽지 않았다. 김구선생의 경우 1924년 1월1일 부인 최준례(崔遵禮) 여사가 김신을 낳은 후 폐렴에 걸려 영면했다. 2~3년 후에는 어머니 곽락원(郭樂園) 여사와 인과 신 두 아들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1927년 3월 임시정부는 3차 개헌을 통해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면서 김구 선생을 국무위원에 선출했다. 임시정부 유적지로 보호되는 지금의 바오칭(寶慶)리(里) 4호 김구 선생 집이 임시정부의 청사 역할까지 겸하게 됐다.



바오칭리는 첫 임시정부 자리에서 작은 길인 마탕(馬當)로를 따라 300m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들어서 200m쯤 걸으면 마탕로는 싱예(興業)로와 만나는데 그 길에서 다시 왼쪽으로 50m만 가면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인 중국공산당 1차회의 장소가 나온다.

원래는 왕즈(望志)로 106호(현재는 싱예로 76호)였던 이곳은 당시 상하이 공산당 대표인 리한쥔(李漢俊)의 형 리수청(李書城)의 집이었는데, 1921년 7월23일 이곳에 마오쩌둥을 비롯해 둥비우(董必武) 등 13명의 대표가 모여서 회의를 열었다. 순경의 탐문 소식이 있어서 급히 자싱(嘉興) 난후(南湖)의 배로 장소를 옮겼는데, 첫 회의 장소와 자싱 난후의 역사는 우리 임시정부 역사와 연결되어 각별한 느낌을 준다.

이 마탕로와 싱예로의 교차로에서 100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있다. 1993년 4월13일에 수리되어 개방한 이 청사는 상하이를 들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역사 명소가 됐다.

바오칭리 청사 시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힘든 때였다. 고국이나 해외에서 보내오던 지원금이 줄어들었고, 상대적으로 독립의 희망은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보수되어 잘 갖추어져 있지만 상하이 임정 청사는 작은 숙소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씩만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 3개의 침대만으로도 꽉 차는 숙소, 초라한 부엌 등은 당시 임정의 곤궁한 삶을 보여준다.

‘백범일지’에는 당시의 상황을 “본국 동포들의 비밀 연납(捐納)과 미주, 하와이 한인 동포들의 세금 명목 상납으로 충당됐는데, 왜의 강압과 운동의 퇴조로 원년(1919)보다 2년(1920년)의 숫자가 적고, 그 후 점점 더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의 직무도 정지되고 총장, 차장 중에서 투항하거나 귀국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러한 지경이니 그 아랫사람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며, 그 중요 원인은 경제적 곤란이었다”고 쓰고 있다.

1931년 7월2일 벌어진 만보산(萬寶山)사건으로 한중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자 임시정부는 더욱 곤경에 빠진다.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의 만보산 지역에서 수로를 둘러싸고 일본의 보호를 받는 한국인과 중국 농민들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중국인들의 몇 차례 요구를 거부하고, 일본 경찰은 오히려 중국인을 대상으로 발포했는데, ‘조선일보’ 등이 이 사건을 일본의 입장에서 감정적으로 보도해 인천, 경성, 원산, 평양 등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나 수백 명이 죽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훗날 이 사건의 배후에 중국 내 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일본의 음모가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일본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한편 이후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정치적 사건으로도 이용했다. 사건 3일 후 고하 송진우 선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라는 글을 통해 사건의 진실을 파악해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도록 충고했는데, 이런 노력 후에야 중국인에 대한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물론 중국에서 한국인에 대한 감정도 약간은 누그러졌지만 적지 않은 앙금이 생긴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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