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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비핵화공동선언, 한국은 북한에 속았다

北, 재처리 포기 동의했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shamora@donga.com

1992년 비핵화공동선언, 한국은 북한에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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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이 약속을 맺었다.
  • 그러나 그 중 한 사람은 절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렇다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 사람과 그걸 모르고(혹은 정확히 따지지 못하고) 약속을 맺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결국 전자는 교활했고 후자는 어리석었다. 1992년 1월20일 대한민국 국무총리 정원식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이 서명한 ‘한반도 비핵화선언’이 바로 그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었다.
1992년 비핵화공동선언, 한국은 북한에 속았다

1992년 2월17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남북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1992년 1월1일 새해 첫 아침 신문을 펴든 이들은 ‘남북 비핵화선언 합의’라는 제목의 1면 기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전날 저녁까지도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보도됐던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됐기 때문. 그간의 남북협상 과정이 지지부진하기 일쑤였던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빠른 합의였다.

사실 19일 전인 1991년 12월13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등 화해무드는 정점에 달해 있는 듯했다. 핵문제 관련협상만 해도 10월 4차 고위급회담에서의 첫 논의를 시작으로 11월8일 노태우 대통령의 ‘핵무기 및 재처리시설 보유 포기 선언’, 12월18일의 ‘핵무기 부존재 선언’ 등이 이어지면서 북한 또한 이에 호응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무르익고 있었다.

‘남과 북은 한반도를 비핵화함으로써 핵전쟁 위험을 제거하고…’로 시작되는 비핵화공동선언문은 여섯 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세 가지 항목은 핵무기를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하지 않는다는 첫째 항, 핵 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셋째 항, 남북이 상호사찰을 실시한다는 넷째 항이었다. 특히 1991년 들어 북한의 핵 재처리시설 건설 의혹이 크게 불거진 까닭에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세 번째 항목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1월 중에 두 차례에 걸쳐 양쪽 총리가 서명한 공동선언문을 판문점에서 교환하고 비준 등 각자 필요한 내부절차를 거치도록 돼 있었지만, 이는 사실상 요식행위나 다름없었다. 공동선언에 따라 새로 구성되는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에서 세부절차를 논의해 사찰을 실시하면 그동안 제기되어온 북핵 관련 의혹들이 해소되고 핵 없는 한반도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공동선언문은 한반도 비핵화의 시작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 문서였을까. 물론 11년이 지난 지금 북핵 문제가 여전히 첨예한 이슈로 남아 있는 것만 봐도 비핵화선언의 현실적인 한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공동선언문의 핵심조항이 애초부터 성립 불가능한 것이었다면 어떨까. 북한은 그 조항이 성립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남한은 이를 몰랐거나 신경쓰지 않았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무렵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의혹과 관련해 논란의 중심에 있던 것은 1987년 가동을 시작한 영변의 5MW 원자로였다.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흔히 흑연감속로, 줄여서 흑연로라 부르는 이 원자로는 열효율이 비교적 낮은 까닭에 주로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한국에는 흑연로가 없다). 영국은 이 원자로에서 수년간 태우고 꺼낸 폐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 400kg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5MW 흑연로의 경우 마그네슘 합금(Magnox)으로 피복된 연료봉을 사용한다. 문제는 이 피복관이 쉽게 부식한다는 사실. 원자력공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 사용한 폐연료봉을 원자로에서 빼내어 열을 식히기 위해 수조에서 보관하는 경우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재처리를 하거나 공기 중으로 빼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료봉에서 갖가지 핵종이 흘러나와 방사능이 유출되기 때문. 이렇게 되면 저장소 일대는 방사능에 오염되어 근무자는 물론 인근 주민들도 피해를 당하게 된다. 공기 중으로 빼내 건식보관하는 경우에도 문제가 있다. 핵연료인 우라늄 금속이 노출되면 자연발화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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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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