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9월호

한국 관료제의 원조, 일본 관료조직 대해부

‘캐리어’ 되면 평생 보장 그래도 ‘진골’은 도쿄대 법학부

  • 글: 조헌주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hanscho@donga.com

    입력2003-08-25 11:0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국가 재건의 기수에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 일본 관료제. 특히 '캐리어'라 불리는 고급 관료에 대한 국민의 시각은 지극히 이중적이다. 한국이 별 반성 없이 답습해온 일본 관료제의 본질,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한국 관료제의 원조, 일본 관료조직 대해부

    도쿄 중심부, 황궁 옆에 위치한 관청 밀집지역 가스미가세키 일대

    ‘경제는 1류, 정치는 3류’.일본에 대한 촌평 가운데 하나다.몸에 밴 검약 정신, 정교하고 치밀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된 일본. 그러나 한편으로 정치판은 정경 유착, 파벌정치, 세습정치의 구태에 안주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세계 속에 자리 잡은 대국, 일본을 만든 것은 부패의 악취가 나는 정치인 집단이 아니라 우수한 행정 관료였다고 보는 것이다.

    패전의 잿더미에서 일류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또 다른 ‘전면전’을 치르는 데 있어 일사불란한 일본의 관료, 관료제는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제는 장기호황에 따른 사회적 피로 현상, 그 결과 생긴 생산성 저하와 목표 상실, 정보기술의 급진전에 따른 경쟁 패러다임의 변화, 지방분권화 등 급변하는 사회적 요구에 제대로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국가발전의 초석’에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한 일본의 관료제도. 별다른 반성 없이 그를 답습해온 한국. ‘관료 왕국’ 일본을 해부하는 것은, 그래서 ‘경제도 2류, 정치도 2류’로 보이는 오늘의 한국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유용한 분석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최고 명문대학인 도쿄(東京)대 캠퍼스 내 공간정보과학연수센터 야쓰다 다쓰오(八田達夫) 교수 연구실. 지난 6월5일 오후였다. 전화 벨이 울렸다.

    “용적률에 관해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내각부 간부의 말에 야쓰다 교수는 잠시 할말을 잊었다. 야쓰다 교수는 행정규제 완화 차원에서 고층주택 용적률 완화에 관한 논의를 진행해온 정부 자문기구 ‘종합규제개혁회의’의 일원이었다.

    규제완화? 누구 맘대로!

    “용적률 건은 국토교통성 도시지역정비국장과 내각부 정책총괄담당관 사이에 이야기가 잘 됐고요, 이미 이시하라 노부데루(石原伸晃) 행정개혁담당 장관 승인도 다 얻었습니다.”

    고층주택에 대한 용적률 완화 건은 개혁회의가 중점을 두고 심도 있게 논의해온 12개 항목 중 하나였다. 해당 분야 전문가인 야쓰다 교수는 그간 책임을 맡아 국토교통성 간부들과 한창 절충을 벌여왔다. 그런데 그도 모르는 새 결론이 났다니 놀랄 수밖에.

    야쓰다 교수는 전자우편을 통해 개혁회의 위원들에게 이 어이없는 상황을 알렸다. 민간 위원들은 의견을 모아 나흘 뒤인 6월9일 이시하라 행정개혁장관에게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최저선에 대해 의견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시하라 장관은 행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이 문제가 조정되길 원했다. 국토교통성 담당 국장은 ‘오쿠라쇼(大藏省=재무성의 전신)’ 출신으로 전직 총리의 비서관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는 이시하라 장관의 뜻이 무엇인지를 오랜 정관계 생활 경험을 통해 잘 알았다. 민간위원들과 관련부처 간부들 간에 의견이 잘 조정되지 않자 그는 ‘해당부처 의견을 무시해서는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다’는 믿음 아래 정부 부처 간부들과만 협의를 계속했다.

    6월12일 오후. 이시하라 장관은 국토교통성 담당국장을 대동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를 방문, “12개 항목 중 10개 항목에 관해 관계부처간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고했다.

    개혁회의 의장인 미야우치 요시히코(宮內義彦) ‘오릭스’ 회장이 그같은 내용을 전해들은 것은 같은 날 밤. 그러한 결론은 민간부문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총리와 담판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그는 다음날 총리 면담을 요구했으나 일정이 다 찼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위기를 느낀 그는 개혁성향의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상과 경제재정자문회의 의장인 우시오 지로(牛尾治郞) ‘우시오전기’ 회장에게 ‘SOS’를 타전했다.

    일요일인 6월15일 다케나카 장관과 우시오 회장이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관방장관에게 규제개혁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후쿠다 장관도 “개혁은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라며 동의를 표시했다. 이것이 전기가 됐다.

    다음날인 16일 저녁. 다케나카 장관이 미야우치 자문회의 의장과 식사를 하면서 전날 전해들은 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를 찾는 전화가 이시하라 행정개혁장관에게서 걸려왔다. 내일 고이즈미 총리 면담 일정이 잡혔다는 것이었다.

    총리 면담시간은 길지 않았다. 미야우치 의장은 관료들이 이미 조정을 끝낸 사항에 대해 언급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관료들이 아직 결론을 내지 못한 2가지 안건, 그 가운데에서도 의약품의 소매점 판매 허용 건에 관해 논의를 집중하기로 했다.

    17일 총리 관저 내 총리 집무실. 미야우치 의장은 책상에 2개의 영양드링크제를 올려놓았다. 똑같은 브랜드였으나 하나는 의약품, 다른 하나는 의약부외품으로 각기 지정된 것이었다. 현재의 제도 아래에서는 후생노동성이 ‘의약부외품’으로 인정한 것만 편의점에서 팔 수 있다.

    “어느 것을 편의점에서 팔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미야우치 의장이 총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총리는 흥미롭다는 듯 드링크 병을 바라보았다.

    다음날인 18일. 총리는 ‘안전에 문제가 없는 의약품 전부를 소매점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한다’고 결정했다. 일반인의 편의를 고려한 것이었다. 후생노동성 등 관료들이 약제사 등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판매 해금을 막아보려 했던 시도는 일단 좌절됐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약국 외에서도 판매가 가능한 약품의 구체적인 품목과 판매 방법을 검토하는 것은 결국 주무 부서인 후생노동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10개의 안건에 대해서는 사실상 각 부처간 협의가 끝난 터라 더 이상 논의해봤자 아무 성과가 없다. 결국 야쓰다 교수 등 개혁회의 멤버들은 관계부처 간부들이 이미 조정을 끝낸 10가지 안건에 대해서는 자문단의 의견을 별도로 병기해 정부에 보고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는 일본 정부의 개혁이 어떤 과정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정부는 정책을 독자적으로 결정했을 때 생기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민간 자문기구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고 실제 결정은 정부 및 담당 관료가 한다. 민간기구는 결국 정책 실패시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정책, 특히 공무원 조직의 ‘이익’을 건드리는 개혁 정책은 기득권을 누리는 소수와 관의 유착으로 좀처럼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공무원에게 자체 개혁을 맡기면 사회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수준이 아닌, 공무원 조직이 용인하는 만큼의 개혁만 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국파관료재(國破官僚在)’

    한국의 경우도 정부 각 부처마다 제 기능을 못하는 자문기구, 심의기구, 협의체를 숱하게 갖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각 부처는 자문기구 등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문화관광부의 한일문화개방정책과 관련한 한 자문기구에 관여하고 있는 A씨는 “노무현 대통령 방일 전 추가개방 의견을 강력히 제기했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대체 뭐 하러 이런 기구를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관료조직이 갖는 개혁과 변화에 대한 저항, 아니 저항을 넘어선 억압 기구로서의 속성은 권력의 현상 유지와 확대의 수단으로 등장한 관료 기구의 역사적 연원에 비춰볼 때 생래적인 것인지 모른다.  

    항간에서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 해도 국민 개인과 법인으로부터 거둬들인 세금, 국가예산을 이용해 각종 공공사업을 기획·추진하는 공무원들은 위기의식이 희박하다. 나라는 망해도 공무원 조직은 유지될 거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국파산하재(國破山下在)’.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그대로’라는 뜻의 이 말은 전란으로 지새던 중국 고대역사 속에 등장했다. 필자는 정부 부처를 출입할 때 고급 공무원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 취기를 빌려 ‘국파관료재(國破官僚在)’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거 무슨 실례되는 말이냐”며 정색하고 반론을 제기한 공무원도 있었다.

    필자가 그런 말을 한 데에는 나름의 뜻이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역사를 보자. 일제시대에 일반 행정, 사법, 경찰, 심지어는 제국 일본군의 ‘졸개’ 노릇을 한 이들까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대다수 살아남았다. 반민족행위로 지탄받기는커녕 해방조국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던 것이다. ‘대일본제국’의 공무원들이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됐다. 이는 심하게 말하자면 어느 나라, 어느 정치세력에도 봉사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 뜻에서 ‘관료조직의 몰가치성’을 거론한 것이었다.

    이같은 분류는 비록 자의적이기는 하지만 관의 체질이 대국민 서비스보다는 민간 위에 군림하는 기관이란 점을 적절히 꼬집고 있는 것이다. “민원 있는 곳에 부정 있다”는 말이야말로 부처 서열화와 무관치 않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 취임과 동시에 행정부 장악을 시도했다. 성청을 개편하면서 장관 아래 기존에 있던 사무차관, 정무차관(별정직) 외에 부대신 자리를 신설했다. 총무·재무·외무·후생노동성에는 각기 2명의 부대신(부장관, 일본 공식 용어로 副大臣)이 생겼다.

    하지만 관료 중심의 정책 형성과 정책 집행을 정치 주도로 돌리겠다는 목적은 제대로 달성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여권 국회의원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었을 뿐이란 비판도 많다. 부처 공무원 중에는 부대신 이름조차 모르겠다는 사람도 많다. 정치인이 그저 잠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장관이 바쁘면 대신 기념식에 참석하는 보직쯤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성청 개편에도 불구하고 정책 형성의 핵심은 부처의 진정한 실력자인 사무차관이다. 각 성청의 ‘캐리어’는 사무차관의 말 한마디에 좌우된다.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장관은 예나 제나 ‘손님’으로 불린다. 자리만 채우고 있다 때가 되면 떠나는 뜨내기 손님 같은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 것이다. 장관과 함께 총리가 임명하는 정무차관의 별명은 ‘맹장’이다.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되고 괜히 골치만 아픈 존재라는 뜻이다. 부대신 역시 정무차관의 윗자리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존재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아무 일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고 한탄한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거대한 관료조직의 정점에서 융숭히 대접을 받고는 있지만 결국 한 사람의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절망감을 드러낸 말이 아닐까. 좋은 부처, 좋은 자리란 말이 필요 없는 공직 사회는 정말 요원한 것일까.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도요타 정신의 승리

    일본 아이치(愛知)현 앞바다에서는 현재 중부국제공항 건설이 한창이다. 바다에 인공섬을 만들고 3500m 길이의 활주로 1개를 건설하는 것으로 2005년 2월 개항 예정이다. 관제시설과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공사를 제외한 모든 건설 업무를 중부국제공항주식회사가 맡았다. 사장은 도요타(豊田)자동차 계열사 사장 출신인 히라노 유키히사(平野辛久).

    그는 당초 7680억엔이던 건설비를 15%, 1200억엔(약 1조2000억원)이나 절약함으로써 ‘도요타정신이 관료주의를 이겼다’는 제목으로 언론에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국제공항을 7680억엔으로 어떻게 짓는다는 거냐’며 아이치현의 국제공항 건설을 만류해온 정부 관계자들과 토목관계자들은 머쓱해지고 말았다. 히라노 사장은 국가 예산 집행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이뤄져왔는지를 생생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히라노 사장이 한 가장 큰 일은 설계 변경이었다. 우선 날개를 접은 학 모양이던 여객 터미널 설계부터 바꾸었다. 예산이 부족하다면서 멋을 내려는 ‘허위의식’에 대해 그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

    “여객 터미널 천장을 멋있게 짓는다 해서 하늘 위에서 감상할 사람이 몇이나 된단 말이냐.”

    학 모양을 포기하고 직선 형태 설계로 바꾸면서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부품은 규격화됐고 대량공급이 가능해졌다. 공사도 단순해져 공기가 대폭 단축됐다.

    주차장도 우선 계획의 절반만 짓고 방식도 손쉬운 철골 구조로 바꾸었다. 8기를 건설키로 했던 연료탱크도 우선 5기만 짓기로 했다. 필요한 부품은 그때그때 조달한다는 도요타자동차의 유명한 재고관리시스템인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 방식을 원용한 것이다. 히라노 사장은 이밖에도 자재비와 인건비를 미국과 일본의 자문회사에 맡겨 철저히 조사케 한 다음 불황으로 인한 가격인하 요소를 반영해 예산 삭감에 성공했다.

    히라노 사장의 사례는 과거 관료조직이 민간부문을 이끌어왔으나 이제는 위치가 바뀌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민간부문으로부터 한 수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일깨워준 것이다.

    경제가 고속성장을 멈춘 지 10여 년이 지나면서 일본의 각 분야에는 위기감이 스며들고 있다. 국가공무원시험의 형식이나 내용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검사·판사 등 사법부 인원과 변호사 등 법조인을 내년 4월 신설되는 ‘로스쿨’을 통해 양성하겠다는 것도 다양한 선발 방식을 도입한 예로 볼 수 있다. 공무원과 민간부문 인사교류도 부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경제규모 측면에서 아직 일본에 크게 뒤져 있는 후발주자 한국.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일본보다 훨씬 더 힘을 모아 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개혁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일본 역시 극히 일부에서만 개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 일본의 정치·경제·사회 구조는 한마디로 ‘1940년 체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군 점령 하에 정치·교육 체제 등 일부가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인의 의식세계는 아직도 태평양전쟁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1940년 체제란 이른바 ‘총력전’ 개념으로 만들어진 관료통제에 의한 국가체제다. 이는 생산자 우선 원칙이나 경쟁을 부정한다. 호송선단 방식, 종신고용, 연공서열, 하청제도, 주식·채권 등을 통한 투명한 자금조달 대신 은행차입을 통한 물밑 자금 융통을 선호하는 것, 금융통제를 중심에 둔 관료 통제 하의 경제. 물론 이 체제가 제2차 세계대전 후 고도의 경제성장을 선도해 일본이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대장성과 통산산업성, 그리고 이를 이끈 우수한 경제 관료의 역할 또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일정한 목표를 향해 내닫는 데는 분명히 효율적이었던 총력전 체제, 즉 1940년 체제는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탄력성은 갖고 있지 못하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상황은 ‘1960년대 체제’의 연속이 아닐까.

    1960~80년대에 이르기까지 행정부의 주도, 국가권력의 지원과 배려 속에 급속하게 덩치를 키운 몇몇 재벌이 주도해온 고속성장의 신화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현대그룹과 대우그룹에 이은 SK그룹의 위기가 이를 증명한다.

    저임금을 배경으로 한 중국의 급속한 공업화, 정보기술의 급진전에 따른 경제 패러다임의 세계적 변화 속에서 한국 기업도 일본 기업과 마찬가지로 수익성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사태에 직면해 있다. 산업구조개혁의 진전은 느리며 새로운 분야에 대한 자금 지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농업 등 저생산 부문의 합리화는 훨씬 더디기만 하다. 토지의 효과적 활용도 지지부진하며 일부지역에만 부동산 열기가 쏠리는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를 조정하고 변화를 이끌어야 할 국가조직, 공직사회의 개혁이 절실하다. 이는 집권층의 논공행상용 자리다툼이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지역감정 해소용, 혹은 정권 강화용으로 얼렁뚱땅 해치울 일이 아니다. 공무원을 ‘국민의 공복’이란 제 위치로 되돌려놓는 일이야말로 민족의 흥망이 걸린, 국가 경쟁력 강화의 핵심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 관료제의 원조, 일본 관료조직 대해부

    현장 실습에 나선 국가공무원 1종 시험 합격자. 미래의 ‘캐리어’인 셈이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87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세력을 탄압하며 발악하던 시절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위진압 무술경관부대, 세칭 ‘백골부대’를 진두지휘하며 시위대를 무차별 진압했던 어떤 간부의 표독스러운 얼굴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는 훗날 ‘민주화된’ 정부 아래에서 경찰 조직의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로 승승장구했다. 그가 이처럼 ‘잘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민주화운동 탄압이 소신에 따른 행위가 아닌, 조직의 일원으로서 상관이 시킨 일을 한 것이었기에 ‘당연히 무죄’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84세인 필자의 부친이 남긴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42년 가을 군청 마당에 부친을 포함한 징병자들을 모아놓고 군수가 ‘천황폐하를 위한 성전에 출전하게 된 영예’를 치하하는 치사를 했다. 그 군수는 훗날 국회의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처럼 섬기던 나라, 받들던 조직이 사라졌음에도 공무원들은 기막힌 변신을 거듭하며 살아남은 것이다.

    과거 봉건제에서의 관료제는 논외로 하고, 한국 현대사의 관료제는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세력에 의해 본격 수입된 것이다. 그 영향, 특히 부정적 요소는 지금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야코지마의 ‘황금다리’

    한국 관료제의 ‘원조’ 일본에서도 공무원의 무책임한 세금 낭비 사례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표적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오키나와현에 속하는 작은 섬 미야코지마(宮古島)에는 교량 하나가 놓여 있다. 미야코지마와 부속 섬인 구리마지마(來間島)를 잇는 것으로 길이가 자그마치 1690m나 된다. 착공한 지 10년 만인 1995년 완공한 이 교량건설사업의 총공사비는 91억7800만엔(약 920억원)이었다. 구리마지마 주민은 78가구 175명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리 건설에 들어간 비용을 개인별로 나눠 따져보면 1인당 5244만엔(약 5억2500만원)이 든 셈이다.

    이 작은 마을의 능력으로는 공사비 일부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실제로 주민이 직접 부담한 공사비는 한푼도 없다. 이 도로는 일반 도로가 아닌 농로로 건설됐다. 현이 관리하는 일반 농업용 도로 공사의 경우 80%를 국가가 부담하고 나머지 20% 중 10%는 현이, 10%는 해당 시정촌이 분담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벽지일 때는 예외적 조치로 시정촌 부담분을 현이 내는 것으로 되어 있는 탓이다.

    다리 건설 목적은 농산물 수송체계의 안정이었다. 하지만 구리마지마에서 연간 생산하는 농산물의 총액은 약 3억엔. 실수익은 고사하고 생산물 총액으로만 따져도 무려 30배, 즉 30년간의 농산물 총액에 해당하는 공사비를 들여 이 다리를 지은 것이다. 농업용 도로는 전체 통행량의 절반이 농업용 차량이어야 하지만 다리가 지어지면 그뿐, 과연 사전 예측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표적인 예산 낭비 사례다.

    물론 공공사업은 생산성뿐 아니라 복지 차원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공공사업이란 이름 아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효율성과는 상관없이 무리하게 진행된 공사 또한 적지 않다. 이 다리를 포함, 일본에서는 25년간 약 6만㎞의 농로가 건설됐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건설족’ 의원, 지방자치단체 의원, 국토교통성 등 관료조직과 건설회사, 낙하산 인사를 통해 관료조직화한 도로공단 등이 한통속이 돼 세금을 탕진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하루종일 차 몇 대밖에 지나지 않는 시골 농로가 왕복 2차선으로 말끔하게 포장된 경우도 흔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그만인 정책 실패. 관료는 때가 되면 승진을 하고 보직이 바뀌면 그만이다. 이렇게 모든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일본 관료사회는 난공불락의 독자적 왕국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 관료조직 또한 예외가 아닐 것이다.

    뿌리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현재 일본 사회의 개혁 논의 과정을 살펴보면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일본 정부는 내년 3월 규제개혁추진 3개년 계획을 새롭게 짠다. 정부 자문기구인 ‘개혁회의’가 의도하는 대로 이상적인 내용이 담기리라 확신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 그것은 각종 규제 위에 오랫동안 군림해온 ‘관’이 하루아침에 체질을 개선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혁적 조치를 앞장서 시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1996년 ‘관료왕국 해체론’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이보다 한 해 전에는 자민당 내 실력자 야마자키 다쿠, 가토 고이치 등과 함께 ‘신세기 그룹’를 만들고 개혁 기치를 내걸어 당 내외의 주목을 끌었다. 우정성 장관을 지낸 뒤에는 ‘우정성 해체론’이란 책을 내 일본 정·관·재계에 큰 충격을 준 적도 있다. 뿌리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 의식과 굳어진 제도를 타파하자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 그는 열세라는 주변의 예상을 뒤엎고 총재에 당선됐고 이어 총리에 올랐다. 그의 개혁성향을 높이 평가한 당내 소장파와 총재 선거에 참가한 일반 당원들의 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부가 체신상, 부친이 방위청 장관을 지낸 세습 의원으로서 그의 한계는 총리 취임 2년이 지난 지금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그는 30세 때인 1972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출신지역인 가나가와(神奈川)현의 지역구에서였다. 이후 내리 10선을 거두었으니 그 역시 기득권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이제껏 외쳐온 개혁은 구두선(口頭禪)이었으며 정권 획득을 위한 장식품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사법제 제정, 자위대 파병 관련법 제정 등을 보면 방위정책면에서도 개혁은커녕, 냉전 시대보다 더 후퇴한 측면이 많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국민을 향해서는 늘 개혁을 외치면서 결과를 보면 대개 정치적 타협에 방점을 두는 행태를 보여왔다. 그래서 퍼포먼스가 판치는 ‘극장 정치’만 하고 개혁의지는 안 보인다는 비판이 무성하다. 하지만 고이즈미 정권의 개혁 실패 원인을 따져볼 때 무엇보다 큰 것은 역시 개혁 자체를 터부시하는 관료들의 저항이다. 정책·행정 전문가에서 한 발 나아가 사회 계급을 구성하다시피 한 관료 집단의 조직적 저항은 총리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무너뜨리기 어려운 장벽이다.

    일본 관료제는 선발형식만 두고 보면 민주주의의 원리원칙에 잘 맞는 투명한 제도다. 그러나 관료제 도입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신분제적 특징과 속성이 현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메이지(明治)유신으로 입헌군주제 정치제체를 갖추면서 일본 정부는 1887년 문관시험시보 및 견습규칙을 제정, 1893년에는 문관임용령을 제정하고 공개선발시험을 치러 관리를 선발했다. 물론 당시 관리는 ‘천황의 관리’였지 국민의 공복(公僕)은 아니었다. 임용방식에 따라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칙임관, 총리가 천황에 상주해 임명되는 주임관, 각 성 장관이 총리재가를 거쳐 천황에 상주해 임명되는 판임관으로 구분됐다. 이 중 칙임관과 주임관을 고등관으로 총칭했다.

    주임관은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선발하는데, 주로 법률과목 중심의 시험을 치러 선발했다. 도쿄대, 교토대 등 제국대학의 법학부 출신이 합격자의 주류였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출제위원이 대개 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돈 많고 머리 좋아 일본 도쿄 등지로 유학간 조선의 부잣집 자제 가운데 일부는 이 고등문관시험에 죽자꾸나하고 매달려, 식민지 조선의 군수로 임명돼 일신의 영달을 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점령국 미국의 영향 아래 1947년 새로운 공무원제도를 시행했다. 이와 함께 신분제는 폐지됐다. 하지만 현재도 이른바 ‘캐리어(career)’로 지칭되는 ‘고등관’ 지위의 특수 관료계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관료왕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캐리어’로 불리는 고급 관료집단이다.

    일본의 수도, 도쿄의 중심부 지요다(千代田)구의 가스미가세키는 황궁 옆에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는 법무성 검찰청 경제산업성 재무성 국토교통성 총무성 경찰청 문부과학성 특허청 내각부 국세청 금융청 농림수산성 우정사업본부 등이 밀집해 있는 최대의 관청가다. 주요 정부 부처 청사 가운데 여기서 떨어져 있는 것은 현재 공사중이라 임시청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외무성과 옛 자위대 주둔지에 있는 방위청, 황거(皇居) 내에 청사가 있는 궁내청 정도다.

    ‘캐리어’가 이끌어온 사회

    가스미가세키 바로 옆에는 국회와 의원회관, 총리 관저, 집권 자민당과 제1 야당 민주당사 등이 들어선 나가타초(永田町)가 있어 이 일대는 실로 일본 정치·행정의 중추부라 할 수 있다. 우리의 광화문청사, 과천청사, 대전청사를 한군데 모아놓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까닭에 일본에서 ‘가스미가세키’는 지명이 아닌 중앙관청, 혹은 관료사회를 지칭하는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사실 ‘관료’란 간부급 일부가 아닌 공무원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일본의 국가 공무원 수는 2003년 3월말 현재 434만4000여 명. 외국인 거주자를 포함한 총인구 1억2730만명 가운데 0.34%에 해당한다.



    일본 공무원 중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면서도 관료주의를 비판할 때 가장 먼저 매를 맞는 것은 ‘캐리어’라 불리는 집단이다. ‘캐리어’는 국가공무원 1종 채용시험에 합격한 뒤 사무관에 임용된 사람들. 1종 시험에는 법률, 경제, 행정, 이과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외무 공무원도 이 시험 합격자 가운데서 채용한다. 참고로 한국의 사법고시에 해당하는 사법시험은 이와 별개. 해마다 1000명 정도를 뽑는다.

    국가공무원 1종 시험은 올해의 경우 5월5일 1차, 6월1일 2차, 6월3일 면접, 6월27일 최종 합격자 발표로 진행됐다. 응시자격 요건엔 연령 제한이 있다. 만21세 이상 33세 미만이라야 시험을 볼 수 있는 것. 단 21세 미만이라도 대졸 또는 대졸예정자, 대졸에 해당하는 학력소지자로 인정되면 응시 가능하다. 시험과목에는 농학, 심리학도 있어 이과 출신도 합격률이 높다. 이들은 기관(技官)이라 불리는데, 같은 1종 채용시험 합격자이지만 일반직 사무관과 ‘대접’에 있어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곤 한다.

    1종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력은 유력대학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성적이 뛰어난 학생이 유명대학에 진학하고, 공무원 시험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기록해 많이 채용되는 것 자체는 공개채용주의 원리에 비추어 문제될 게 없다. 다만 선발방식이 지식 테스트에 편중돼 있다는 지적은 있다.

    현재 1종 시험의 1차시험은 일반지능 시험으로 일종의 지능테스트 같은 것이다. 가령 미국의 로스쿨입학자격테스트(LSAT)와 비슷하다. 논리적인 사고력과 함께 임기응변으로 합리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소양을 테스트하는 것.

    일반지식시험은 일반교양을 알아보는 시험으로 현재는 선택형으로 바뀌었다. 지원자는 자신 있는 분야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는 데다 기본 사항에 관한 출제가 대부분이어서 지식편중이라 비판할 만한 대목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같은 일반지식 테스트만으로 공무원을 채용, 필요한 교육을 다시 실시하는 것은 비능률적이다. 따라서 법률 등 전문시험이 필요하다. 공무원은 다양한 직무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에야 정책판단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학에서 배운 전문지식을 테스트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2차시험이다.

    2차시험은 전문 지식과 종합적 판단력, 사고력을 묻는 논문식이다. 쓰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은 국정을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해주어야 할 책임을 관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오늘날 절대 필요하다. 끝으로 합격자를 상대로 각 성청이 면접시험을 실시해 최종 채용여부를 결정한다. 이처럼 일본의 현행 국가공무원 채용시험은 지능 지식의 소양과 함께 일정 수준의 전문지식을 테스트한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균형잡혔다고 평할 수 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인원 중 소수를 뽑는 시험이라 한계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짧은 시간 내에 균형 잡힌 결론을 내리는 명석함이라든지, 한참 뒤를 내다보고 일을 처리하는 능력 등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또 지원자 자체가 일종의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될 수 있다. 스스로 회사를 만들어 일찌감치 독립을 하려는 개성이 강한 사람은 아예 공무원 시험 자체를 보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이 공직사회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하려면 중도채용과 같이 민간부문에서 공직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한편 전문대 졸업 이상의 2종 채용시험, 고졸 이상의 3종 채용시험 합격자가 국가공무원의 9할 이상을 차지한다. 그들은 ‘논 캐리어’라고 통칭한다. 캐리어와 논캐리어의 차이는 승진 스피드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캐리어는 4년에 계장, 8년이 지나면 과장보좌, 16년이 지나면 실장, 20년이 지나면 과장이 된다.

    2종 채용시험 합격자의 경우 계장이 되는 데 8년, 과장보좌로 승진하는 데 16년이 걸린다. 3종 채용시험 합격자는 계장이 되는 데만 보통 16년이 걸린다. 물론 이같은 차이를 단지 차별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최종학력을 마치기까지의 기간, 임용 후 일의 강도와 잔업시간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험 합격 동기는 동시 승진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내부 결속이 튼튼하다. 많은 성청이 본청 과장까지는 승진시킨다. 과장은 조직 내부 혹은 관련 업계에 ‘하느님’ 같은 존재다. 그만큼 절대권력을 쥐고 있다. 관료로서 최고 자리인 사무차관에 오르는 것은 ‘캐리어’뿐이다. 동기가 사무차관에 오르면 다른 동료들은 용퇴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이 통용되는 ‘법칙’이다.



    2002년 5월 현재 행정직 초임자의 급여 내역을 보면 과 같다. 여기에 연간 보너스 4.65개월 분, 그러니까 5만~6만엔의 월간 잔업 수당이 더해진다. 그 가운데 공제연금 등을 공제하면 손에 쥐는 월급은 20만~25만엔 가량. 연봉으로 치면 300만엔 정도다(중앙행정부처 공무원 전체를 대상으로 평균을 내보면 연령은 38.9세, 월 평균 급여는 42만8724엔이다). 비슷한 수준의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경우 연 수입은 평균 1000만엔. 그에 비하면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일류 회사 직원과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수재 소리를 듣는 도쿄대 출신 정부부처 과장도 그 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관료 급여가 일반 기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일류가 아닌 일반 기업과 비교하면 비슷한 수준이다. 또 공무원 주택은 월세가 싸기 때문에 일반인보다 생활비 지출도 훨씬 적다. 가령 지요다구 요지에 자리잡은 공무원 주택 월세는 6만엔, 그러나 일반 회사원이 비슷한 평수의 집을 얻으려면 20만엔은 주어야 한다. 흔히 계산하지 않는 혜택이 많은 것이다.

    특히 기업의 도산, 구조조정, 임금 삭감 등이 꼬리를 잇고 있는 요즘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공직자는 신분 안정은 물론 급료에 있어서도 ‘높다’는 표현을 써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좋은 직장이다. 특히 시험에만 합격하면 업무 성과나 능률과 상관없이 대체로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는 매력적인 일터다.

    도쿄에는 국회의원 기숙사가 몇 곳 있다. 지방 지역구출신 의원들은 대개 가족을 지역구에 거주시키고 회기 중에는 혼자 도쿄에서 지낸다.

    국회 회기 중의 어느 날 오후 5시. 도쿄 지요다구 나가타초에 있는 중의원(하원에 해당)회관 앞에 25인승 버스 5대가 나타난다. ‘구단(九段)’ ‘시나가와(品川) 아자부(麻布)’ 방면 등 다섯 방향으로 가는 버스다. 모두 의원기숙사행인 이 버스들은 의원회관 앞에 이르자 속도를 줄이더니 이내 스쳐 지나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대부분 저녁 약속 장소로 향했다. 5대의 버스는 모두 빈 채로 의원기숙사로 향한다. 이들 중참의원의 공용차를 운전하는 사람도 모두 공무원 신분이다. 버스뿐 아니라 국회의원회관 앞에 가보면 종일 차 주변에서 대기하는 운전사가 적지 않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의 한 의원은 “중의원 운전수와 정비요원의 연평균 소득은 833만엔이며 참의원 소속은 무려 915만엔에 이른다. 전국 택시 운전수의 연평균 소득이 334만엔인 데 비해 배 이상 높다. 민간에 위탁해도 좋을 일을 국가 공무원이 계속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라며 한탄을 했다(물론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며 지하철로 국회에 출퇴근하는 의원도 상당수다. 국회의원만 됐다 하면 시커먼 관용 승용차 뒷좌석에 파묻히는 한국 상황은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다).

    2002년 4월 통계를 보면 공무원 평균 연봉은 640만엔. 이에 비해 민간부문은 461만~498만엔이다. 40~44세로 한정해 보아도 공무원 연봉은 510만엔대로 민간부문보다 연간 130만~180만엔이 높다.

    이에 따라 일본 인사원은 2003년도(2003년 4월 시작) 공무원 급여를 약 2.3% 일괄 삭감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공무원 평균 연봉은 각 15만엔(약 150만원) 정도 줄었다. 공무원 봉급 인하 조치는 사상 처음이었다. 한국 같으면 다들 들고일어나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을 상황이지만 겉보기에 일본 공직사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일단 결정되면 따르는 일본 풍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공무원 급여 수준이 너무 높다는 비판이 있다. 정부부처 국장, 사무차관 등의 월급이 일류기업 이사 수준에 달한다는 것이다. 국가공무원은 신분보장이 되는 데다 실업의 위험이 없는 데도 민간부문 급여와 균형을 맞추려는 발상부터가 잘못됐다는 지적이다.



    1종 채용시험 합격자들은 합동 연수를 받은 다음 각 성청에 10~20인 정도씩 채용된다. 기술관료는 800명선, 법률·행정 캐리어는 400명 정도다. 문과계통의 문이 훨씬 좁다. 합격자라 해서 한국처럼 무조건 채용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채용 예정인원의 2.5배를 합격시키기 때문이다.

    일본 인사원 자료에 따르면 2003년도(실제 근무시작은 2004년도이며 시험실시와 합격자 발표는 2002년도에 이루어짐) 합격자 수를 보면 3만1911명이 응시해 1750명(여성 264명 포함)이 최종 합격했다. 전체 평균 경쟁률은 지난해 23대 1, 올해는 18.2대 1로 다소 낮아졌다. 채용 예정인원은 680명이다. 합격자 가운데 1000명 이상이 정부 부처 내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중 일부는 해를 넘겨 자리를 배정받기도 한다.

    대개 8월에 합격자가 발표되는데 올해는 6월로 조금 앞당겨졌다. 이들 합격자는 각 성청을 방문, 면접 과정을 거친다. 과거에는 성청별로 합격자 가운데 시험성적, 대학성적이 높은 순으로 직원을 뽑았다. 그러나 수년 전 초임 사무관이 업자로부터 과잉접대를 받고, 호화아파트를 구입하는 등의 사건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면서 제도가 좀 달라졌다. 관료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을 채용시 조금이라도 반영하기 위해 ‘사람 됨됨이’ 파악을 위한 면접이 도입된 것이다.

    2.5배수를 합격시키는 것 또한 도쿄대 등 명문대 출신이 항상 합격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그 결과 채용도 몇몇 대학이 독점하는 것을 시정해보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 채용시험 성적순으로 취업이 이루어져 실효는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도쿄대 출신 관료의 요직 독점 현상은 내각 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총리를 지낸 자민당 행정개혁추진본부 최고고문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는 지난해 한 강연을 통해 “도쿄대 법학부 출신이 아니면 국가대계를 다룰 능력이 없다는 말인가. 이런 제도운영은 이상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게이오(慶應)대 출신인 그는 (당시) 각 차관들이 전부 도쿄대 법학부 출신인 점을 지적하며 “도쿄대에는 법학부말고 다른 학부는 없냐”는 말도 했다.

    문과 편중 현상도 문제다. 일본에서 경력직 공무원을 뽑을 때 이공계 출신자의 비율은 약 55%다. 그러나 국장급 단계에 이르면 19%로 줄고 차관급의 경우에는 한 사람 정도만 살아남는다. 도쿄대 출신이 고급관료사회의 중추로 자리잡으면서 때로 능력과 무관하게 요직을 도쿄대 선후배 사이에 주고받거나, 도쿄대 외 사립대 출신은 능력이 출중해도 승진이나 보직임명에 있어 불이익을 당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하여튼 이같은 상황으로 인해 고급관료 중 도쿄대 출신 비율을 50% 이하로 한다는 방침을 세운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상 유야무야됐다.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제도 아래서는 뛰어난 성적이 채용의 관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관료를 지향하는 학생이 도쿄대, 그 중에서도 법학부에 입학, 열심히 공부해 1종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는 반론도 있다. 결국 선발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도쿄대 출신이 고급관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현상은 사라지지 않을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서울대 출신이 요직을 독식한다 해 ‘서울대 폐지론’까지 등장하는 상황이다. 도쿄대 독식 현상과 비슷하다. 문제는 요직을 특정대학 출신이 독식하는 데서 오는 폐해, 가령 출신대학별로 파당을 지어 국익이 아닌 특정소수계파를 위해 봉사한다든가 하는 것인 만큼 적절한 견제책이 마련돼야 한다. 부서별로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새로운 선발방식의 도입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무원 채용 루트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1종 채용시험제도는 많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합격=채용’ 식의 한국 행정·외무·기술고시 제도에 비하면 한 발 앞서가고 있다. 결과는 비슷하다 해도 일본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적어도 간부를 뽑는 공무원 시험에 관한 한 한국의 관료조직은 일본보다 더 폐쇄적이라 할 수 있다.

    각 성청은 면접을 통해 합격자 가운데 채용자를 결정한다. 인물 본위라고는 하지만 도쿄대 법학부 출신 등 성적이 뛰어난 사람을 잡기 위해 애를 쓴다. 이때 재무성 등에서는 “우리 부처에 오면 70세까지 뒤를 봐준다” “퇴직 후 낙하산을 타고 내려갈 기관이 수십 곳이다” 하는 식으로 합격자를 설득한다. 일반적으로 캐리어 공무원은 올라갈수록 자리가 적어져 빠르면 40대 중반, 보통 50대 초반쯤에는 관계를 떠나 후일을 도모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힘있는 부서 출신은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시험 최종 합격자 중 약 600명의 채용자는 해마다 4월1일 성청별로 공무원 복무선서를 한다. 올해는 국토교통성이 102명을 채용, 가장 많은 인원을 소화했다. 궁내청은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 일본 공무원 사회에서도 ‘베일에 싸인 조직’으로 불리는 곳이 궁내청이다. 청사도 황거, 과거 쇼군이 살던 에도(江戶)성 안에 있는 데다, 각 성청간 의견 교환이나 공무원연수 등의 제도를 통한 부처간 상호 인사교류 등에서 제외한다는 법령까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궁내청 채용에 관해 관가 주변에는 “명문가 사이에 올해는 어떤 가문의 누가 궁내청에 들어간다는 것이 대강 이야기되는데 만일 그 해당자가 공채시험에 불합격하면 그 해 궁내청 채용은 안 하는 것이 관례”라는 말도 있다. 전통적으로 황실가 자녀들이 다니는 가쿠슈인(學習院)대학 출신 중 명문가 자녀만 채용된다는 소문도 있다.

    채용 인원이 많은 성청은 시험점수와 면접결과 우수자가 선서를 한다. 최근에는 언론사 취재를 의식해 일부러 여성에게 선서를 시키는 경우가 많다. 채용자는 선서 다음날 요요기국립올림픽센터에서 총무성과 인사원이 주최하는 1주일의 행정연수에 참가한다. 첫날에는 총리가 출석하는 것이 관례다. 이 합동 연수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각 성청별로 1개월간의 연수를 받는다.

    방위청은 자위대 연습에 참가한다. 농림수산성은 트랙터 타기, 무선조종헬리콥터로 농약 뿌리기, 대형음식점 사장의 강연회 참석 등의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경찰청 근무자는 경찰대학교에서 반년간 사격, 체포술 등을 교육받은 후 경부(警部: 한국의 경위에 해당)에 임명된다.

    연수 중에는 일주일간의 자치체 연수도 들어 있다. 출신지와 떨어진 곳으로 3~4명씩 파견되는 것이다. 전체 연수가 끝난 뒤 곧바로 지방자치단체에 배속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서는 ‘바보상전’연수라고 부른다. 그래도 지방자치단체로 배속되면 시장 이하 공무원들이 대대적인 환대를 한다. 가령 총무성 ‘캐리어’가 우체국 연수를 받게 되면 부장급이 뒤를 돌보아준다. 중앙부처에 계속 근무하는 한 언제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선 행정을 아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접대부터 받는 잘못된 습관을 몸에 익히게 되는 측면도 있다.

    ‘아마쿠다리’의 사회학

    일본에서는 낙하산 인사를 ‘아마쿠다리(天下り)’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의 쓰임새와 마찬가지로 낙하산을 타고 떨어지듯 소관 업무와 전혀 관계 없는, 혹은 관계가 있다 해도 조직 외부로부터 비전문가가 높은 자리를 차고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일본 ‘캐리어’공무원의 정년은 앞에서 말한 대로 대략 50대 초반이다. 관청에서 퇴직 후에도 생활보장을 해주는 것이 오랜 전통이다. 이같은 ‘동양적 미덕’은 한국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재무성은 민간기업을 중심으로, 다른 성청들은 소관단체나 특수법인을 중심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간다. 낙하산 인사는 비판받기도 하지만 옹호론도 있다. 낙하산 인사를 통해 때로는 해당 기관의 개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급료가 높은 것은 공무원 시절의 ‘박봉’을 보상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공무원의 조기퇴직을 없애면 낙하산 인사가 줄어들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공무원 조직이 ‘노후화’하는 단점도 있다.

    일본 사회에서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고급 공무원 가운데 정식 대학교수로 옮겨가는 수가 많다는 것이다. 대학은 사회 명사에게 객원교수니 하는 허울 좋은 이름을 주고 학생을 현혹하고, 명사는 대학교수라는 허명을 탐하는 한국 사회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고급공무원이 퇴직 후 대학교수로 가는 사례를 낙하산 인사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은, 현업 경험을 연구실에서 써낸 논문 한 편 가치만큼 쳐주는 일본 사회의 실학 정신을 일정부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낙하산 인사 체계는 과 같다.



    일본 총무성 심의기관인 ‘정책평가 독립행정법인평가위원회’는 7월1일, 2001년 4월 도입한 독립행정법인제도의 상황을 정리한 ‘독립행정법인 평가연보’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2002년 9월 현재 전체 59개 법인의 상근이사 179인 중 57.5%, 103명이 국가 공무원 출신이다. 직업관료가 낙하산을 타고 착륙하기 가장 좋은 곳이 독립행정법인임을 알 수 있다. 법인을 대표하는 이사장의 보수는 중앙부처 국장급에 해당하는 월 100만~108만엔(약 1000만~1080만원). 과거 통산성(현 경제산업성) 산하 특별기관이던 공업기술원의 후신인 산업기술종합연구소의 경우 이사장이 161만엔, 부이사장이 140만엔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모두 현 정부의 각 성청 사무차관(1342만엔) 월급보다 많은 것이다. 감독관청의 산하기관이었던 과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독립행정법인화해 형식상 분리되면서 월급이 대폭 인상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자민당은 이른바 낙하산 인사로 민간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정부 부처 출신 공무원이 청탁 등의 부정행위를 할 경우 최고 6개월의 징역 또는 5000만엔의 벌금에 처하기로 했다. 이는 공무원의 낙하산 인사를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정부와 자민당은 이번 국회에 제출할 공무원 제도 개혁관련 법안에 이 조항을 넣어 2006년부터 시행한다는 계획이다.

    공무원 낙하산 인사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공무원 이직 후 2년 이내에는 출신 부처와 관계가 깊은 민간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하는 법률도 있다. 중앙 관청에서 민간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공무원은 이직 후 2년간, 이직 전 5년간 재직한 부서를 상대로 청탁 알선 등의 행위를 했을 경우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한국도 비슷한 규제조항을 두고 있지만 낙하산 인사의 전통은 여전하다. 그 이면에는 정년 때까지 머물 수 없는 공직 사회의 고민도 있다. 동기가 차관(일본으로 치면 사무차관)에 오르면 나머지는 조기퇴직하는 전통이 대체로 지켜지고 있는데 그같은 관행이 깨지면 내부조직 통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취임 후 법무부와 검찰 등에서 이같은 관행이 타파될 조짐도 있어 지켜볼 일이다.

    ‘관료 망국론’의 뿌리

    일본 관료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와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경제 부흥의 공로자로 오랜 기간 평가받아왔다. 그러나 관료제 조직 자체가 강력한 정치권력집단으로 변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 집권 정당의 정책실현 책임자인 각 부처 장관의 기능을 침식하고, 나아가 사실상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관료정치’의 경향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 요즘 일본의 현실이다. 정치와 행정의 주종 관계에 있어 ‘하극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각종 법률 제정시 형식상 의회가 심의를 하고는 있지만 내용은 관료가 주도하고 있다.

    한국 역시 정치판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관료의 힘이 날로 커지고 있다. 필자는 모 청을 출입할 때 통과된 법안의 제정경위를 취재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을 실감한 적이 있다. 특정 이익단체의 이익 확대를 위해 만들어놓은 법안을, 거기 몇억 원을 ‘투자한’ 해당 상임위 소속 국회의원이 자기 이름으로 국회에 제출한 것. 그 국회의원은 다음 선거 때 활발한 입법활동의 사례로 그 법안 제안을 자랑스레 팸플릿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래서야 관료들이, 국회의원 앞에서는 “의원님, 의원님” 하며 굽실거리다가도, 돌아서면 손가락질하며 그들을 깔보는 것을 나무랄 수만도 없지 않겠는가.

    어쨌든 일본, 한국 할 것 없이 관료의 기능이 커지면서 ‘관료 망국론’ 또한 만연하고 있다. 특히 ‘관료 왕국’이랄 수 있는 일본의 상황은 자못 심각하다.

    첫째는 목적의 전이 현상이다. 공무원은 당연히 규칙과 규율에 맞는 행동을 요구받는다. 그러다 보니 흔히 스스로를 행정규칙 문구를 준수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로 착각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목적의 전이 혹은 수단의 자기 목적화로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번문욕례(繁文縟禮), 레드 타입(red type)이란 말이 생겨난 데서도 알 수 있듯, 행정규칙 그 자체에 집착해 민간에 대한 서비스 기관임을 잊고 각종 신청·보고·신고 등을 과다하게 요구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규제 개혁에 대한 국민의 당연한 요구는 무시된다.

    둘째는 ‘법대로, 규칙대로’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이다. 사안이 같으면 누구나 똑같이 대한다는 비인격적 사무처리는 불친절, 거만, 무관심 등으로 이어진다.

    셋째, 각 부처·부서간 섹셔널리즘이다. 사무가 중복되는 것을 피하고 재정 부담도 줄이기 위한 것이라곤 하나, 부국간 이기주의, 이른바 ‘나와바리(張り)’ 다툼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탁구공 넘기듯 귀찮은 업무는 다른 부서로 떠넘기고, 이권이 개입된 영역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며, 새로운 영역은 서로 차지하려 부서를 신설하는 등 조직확대 경쟁을 벌인다.

    마지막으로 명확한 계층구조를 통해 명령을 집행하다 보니 권위주의가 팽배하고 신분을 보장해주는 임용제도로 인해 특권의식을 갖게 되는 점이다. 권위주위와 특권의식은 공직사회에 무조건적인 상명하복(上命下服) 관계만을 강요하게 된다. 공무원은 상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공직 내부의 범죄 행위조차 조직을 위해 감싸는 의식이 당연시된다. 국익을 위한 조직인 공무원 사회에서 내부 부정은 곧 국익을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무원의 내부고발은 국익을 위한 것이지만 이를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무조건적인 복종, 그 대가로 주어지는 특권 때문이다.

    1류 부처, 3류 부처

    일본의 행정 조직은 2001년 1월, 1부(총리부) 10성 2청(궁내청 방위청)으로 재정비됐다. 조직을 정리해 행정업무 효율을 높이려는 뜻에서 추진한 행정개혁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우선 이전에는 총리부 산하에 있던 환경청이 환경성으로 승격됐다. 대장성, 즉 오쿠라쇼(大藏省)는 재무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또 후생성과 노동성이 후생노동성으로 통합되었으며, 건설성과 운수성, 총리부 산하 국토청이 국토교통성으로 통합됐다.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은 문부과학성으로 통합됐다. ‘일본주식회사’로 불릴 만큼 민관 협력으로 세계경제 무대를 휩쓸었던 과거 통산성 시절 관료들은 이제 ‘관료망국론’의 핵심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본이 부처간 이기주의의 벽을 넘어서 행정조직을 과감하게 통폐합한 것은 우리나라의 상황과 대조적이다. ‘작은 정부’를 내걸고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조차 한국 행정부는 이러저러한 명분을 들어 그 외연과 조직을 넓혔다. 일본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조직은 금세 흉내내면서도 조직을 없애는 것은 본체만체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각 부처간에 나름의 서열이 존재한다. 2001년의 행정 개편은 이 순위에 약간의 변화를 가져왔다.

    세칭 1류 부처, 그 중에서도 누가 봐도 1위인 부처는 예산·금융·재정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재무성(구 대장성)이다. 조직 개편 전에는 유명무실했던 총리부, 경제기획청, 오키나와개발청 등 3개 기관을 합해 탄생한 내각부도 1류 부서로 꼽힌다.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긍심 측면에서 재무성에 뒤지지 않는 곳이 외무성이다. 본봉의 최소 1.5배에 달하는 재외근무수당, 주택수당, 배우자 수당, 부임지에서의 면세특권, 관용차량 이용 등의 각종 혜택을 받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이와 관련, 최근 주목을 끄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7월15일 일본 외무성은 호텔과 관련업체를 시켜 물타기 청구를 하도록 해 조성한 비자금을 단체회식 등으로 유용하다 적발된 사건과 관련, 조치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회계검사원이 지난해 말 적발한 사건으로 비자금 액수는 총 2억9000만엔(29억원)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무차관 등 39명이 징계를 받았다. 뒤처리 방식은 “일본인답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꼼꼼하다. 대사급은 50만엔, 과장보좌(대우)는 3만엔 하는 식으로 2000여 명의 간부직원이 3억3000만엔을 모금해, 이자까지 포함한 전액을 국고에 반납했다. 그러고도 약 300만엔이 남아 1인당 300∼5000엔을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어쨌건 평소 멋을 부려온 외무성 관료들의 긍지와 자존심에 먹칠을 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일본 언론은 외무성뿐 아니라 다른 부처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해왔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국토교통성은 예전의 건설성·국토청·운수성 홋카이도개발청을 합한 부서다. 도로·댐·항만·철도·공항·토목사업 예산을 한 손에 거머쥐고 있다. 산하에서 취급하는 인허가권이 2500여 개에 이르는 이권 부서다.

    2류 부처로는 총무성(전 자치성, 우정성)·후생노동성·법무성·금융청·경찰청·방위청이 거론된다. 3류 부서로는 농림수산성·문부과학성·환경성을 꼽는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