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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철저한 서열제, 잘 나가는 ‘왕당파’

  • 글: 한겨레 경제부 기자 ryuyigeun@hani.co.kr

‘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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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8월 사상 최초로 ‘전국 판사와의 대화’가 열려 ‘대법관 제청 파문’은 일단 봉합됐다.
  • 그러나 많은 판사들은 이번 파문의 핵심이 ‘대법관 승진’이 아니라, 서열에 따라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행 법관 인사시스템에 있다고 말한다. 연수원 성적으로 매겨진 서열이 수십년 법관 인생을 좌우하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많은 판사들은 언제쯤 변호사로 전업하는 게 가장 유리할지 고민하며 판결문을 작성하고 있을 것이다.
‘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지난 8월18일 대법원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전국 판사와의 대화’가 열렸다.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 법관이 중대한 신분상의 장해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퇴직하게 할 수 있다”

헌법 제106조에 나와 있는 법관의 신분보장 조항이다. 또 법원조직법에 “판사의 정년은 63세로 한다”고 되어 있으며 “임기는 10년으로 연임할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정년을 채우는 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사법시험 합격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했다. 더군다나 사시를 통과하더라도 사법연수원을 수료해 법관으로 임명되려면 성적이 아주 좋아야 한다. 올해만 해도 지난 2월21일 사법연수원 수료생 798명 가운데 110명만이 ‘법복’을 입을 수 있었다. 대법원은 예비판사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연수원 성적 200등 안으로 제한한다. 이쯤이면 초등학생 열에 한두 명이 장래희망으로 꼽는 판사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판사의 길로 진입하는 어려움과 달리, 하루아침에 판사생활을 접기란 의외로 쉽다. 판사들이 법관을 천직으로 여기며 정년 때까지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승진이다. 경제사정이 어렵다거나 공무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아 법원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승진에서 탈락했거나 승진에서 처질 게 뻔한 경우 변호사로 개업한다. 법관의 승진구조가 판사들로 하여금 개업에 대한 고민을 키우는 것이다.

판사의 승진인사 구조는 해방 이후 큰 틀에서의 변화 없이 줄곧 이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법관 승진 문제가 마침내 법원 안팎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소위 ‘대법관 인사 파동’으로 알려진 지난 8월의 사건은 법관으로서 정년을 꼭 10년 남겨둔 한 부장판사의 사표 제출이 발단이 됐다.

“바뀌지 않을 게 뻔한 인사 시스템”

9월5일자로 서울지법 민사합의28부 박시환 부장판사의 사표가 대법원에서 수리됐다. 사표를 제출한 지 23일 만이다. 그는 이제 변호사다.

박 전 부장판사가 사표를 내기 하루 전인 8월12일 대법원 6층 대회의실에서는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가 열렸다. 9월11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서성 대법관 후임으로 새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날 자문위원회는 사법부와 검찰, 변호사 등 이른바 ‘법조삼륜’의 두 대표인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협 협회장이 중간에 퇴장한 뒤 위원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들 두 사람은 대법관 제청이 대법원장 1인에 의해 사실상 결정된다고 비판했다.

다음날 아침 박시환 부장판사는 “새 대법관 선임이 종전과 아무런 차이 없이 이루어졌다. 이는 사법부의 변신을 기대해온 국민과 법관들의 기대를 저버린 일이자, 시대의 엄숙한 요구에 대한 중대한 외면이다”는 사직의 변(辯)을 남기며 사표를 내던졌다.

변협의 추천으로 대법관 후보에 올랐던 박 전 부장판사가 대법관 인사제청 방식의 폐쇄성을 문제 삼아 사표를 내게 한, 법원 내 모순된 현실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모든 문제는 고등부장 승진을 포함한 법관 인사에 있다”고 정리했다. 박 부장판사가 사표를 제출한 바로 다음날, 159명의 법관들이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제청 재고를 바라며 서명한 성명서에도 이런 인식이 오롯이 담겨 있다.

“대법관 선임이 법관 승진의 최종 단계로 운영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지나치게 동질적인 연령·배경·경험을 가진 법조인들로만 구성되었다. 이러한 인사제도는 법원의 수직적 관료구조를 과도하게 심화시켰다.”

이는 대법관을 정점으로 하는 법관승진 구조와, 이에 따른 수직적 관료구조가 법원에 엄존하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었다. 그렇다면 법원의 현행 인사방식이 한 판사가 사표를 내면서까지 호소할 만큼 절박한 것이었을까.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박 전 부장판사의 의사표현 방식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대법관 임명은 30년 동안이나 기수와 연배에 따라 해왔다. 바뀌지 않을 게 뻔한 인사 시스템인데, 절차를 핑계 삼아 사표를 제출한 게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부장판사나 연판장에 서명한 159명의 판사들과 생각이나 관점이 퍽 달랐다. ‘그냥 이대로가 좋다’며 현행 인사제도의 긍정론 쪽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연판장에 서명한 판사들이나 박 전 부장판사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집단서명’이란 표현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다는 판사도 많았다. 이 때문에 1400여 명의 법관 가운데 10% 남짓만이 서명에 참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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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겨레 경제부 기자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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