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철저한 서열제, 잘 나가는 ‘왕당파’

  • 글: 한겨레 경제부 기자 ryuyigeun@hani.co.kr

    입력2003-09-25 19:0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지난 8월 사상 최초로 ‘전국 판사와의 대화’가 열려 ‘대법관 제청 파문’은 일단 봉합됐다.
    • 그러나 많은 판사들은 이번 파문의 핵심이 ‘대법관 승진’이 아니라, 서열에 따라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행 법관 인사시스템에 있다고 말한다. 연수원 성적으로 매겨진 서열이 수십년 법관 인생을 좌우하는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한, 많은 판사들은 언제쯤 변호사로 전업하는 게 가장 유리할지 고민하며 판결문을 작성하고 있을 것이다.
    ‘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지난 8월18일 대법원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전국 판사와의 대화’가 열렸다.

    “법관은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감봉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 법관이 중대한 신분상의 장해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퇴직하게 할 수 있다”

    헌법 제106조에 나와 있는 법관의 신분보장 조항이다. 또 법원조직법에 “판사의 정년은 63세로 한다”고 되어 있으며 “임기는 10년으로 연임할 수 있다”고 못박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정년을 채우는 판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사법시험 합격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했다. 더군다나 사시를 통과하더라도 사법연수원을 수료해 법관으로 임명되려면 성적이 아주 좋아야 한다. 올해만 해도 지난 2월21일 사법연수원 수료생 798명 가운데 110명만이 ‘법복’을 입을 수 있었다. 대법원은 예비판사에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을 연수원 성적 200등 안으로 제한한다. 이쯤이면 초등학생 열에 한두 명이 장래희망으로 꼽는 판사가 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하지만 판사의 길로 진입하는 어려움과 달리, 하루아침에 판사생활을 접기란 의외로 쉽다. 판사들이 법관을 천직으로 여기며 정년 때까지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승진이다. 경제사정이 어렵다거나 공무를 수행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아 법원을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승진에서 탈락했거나 승진에서 처질 게 뻔한 경우 변호사로 개업한다. 법관의 승진구조가 판사들로 하여금 개업에 대한 고민을 키우는 것이다.



    판사의 승진인사 구조는 해방 이후 큰 틀에서의 변화 없이 줄곧 이어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법관 승진 문제가 마침내 법원 안팎에서 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소위 ‘대법관 인사 파동’으로 알려진 지난 8월의 사건은 법관으로서 정년을 꼭 10년 남겨둔 한 부장판사의 사표 제출이 발단이 됐다.

    “바뀌지 않을 게 뻔한 인사 시스템”

    9월5일자로 서울지법 민사합의28부 박시환 부장판사의 사표가 대법원에서 수리됐다. 사표를 제출한 지 23일 만이다. 그는 이제 변호사다.

    박 전 부장판사가 사표를 내기 하루 전인 8월12일 대법원 6층 대회의실에서는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가 열렸다. 9월11일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서성 대법관 후임으로 새 대법관 후보를 제청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이날 자문위원회는 사법부와 검찰, 변호사 등 이른바 ‘법조삼륜’의 두 대표인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협 협회장이 중간에 퇴장한 뒤 위원직을 사퇴하는 바람에 파행으로 치달았다. 이들 두 사람은 대법관 제청이 대법원장 1인에 의해 사실상 결정된다고 비판했다.

    다음날 아침 박시환 부장판사는 “새 대법관 선임이 종전과 아무런 차이 없이 이루어졌다. 이는 사법부의 변신을 기대해온 국민과 법관들의 기대를 저버린 일이자, 시대의 엄숙한 요구에 대한 중대한 외면이다”는 사직의 변(辯)을 남기며 사표를 내던졌다.

    변협의 추천으로 대법관 후보에 올랐던 박 전 부장판사가 대법관 인사제청 방식의 폐쇄성을 문제 삼아 사표를 내게 한, 법원 내 모순된 현실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모든 문제는 고등부장 승진을 포함한 법관 인사에 있다”고 정리했다. 박 부장판사가 사표를 제출한 바로 다음날, 159명의 법관들이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제청 재고를 바라며 서명한 성명서에도 이런 인식이 오롯이 담겨 있다.

    “대법관 선임이 법관 승진의 최종 단계로 운영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대법원이 지나치게 동질적인 연령·배경·경험을 가진 법조인들로만 구성되었다. 이러한 인사제도는 법원의 수직적 관료구조를 과도하게 심화시켰다.”

    이는 대법관을 정점으로 하는 법관승진 구조와, 이에 따른 수직적 관료구조가 법원에 엄존하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었다. 그렇다면 법원의 현행 인사방식이 한 판사가 사표를 내면서까지 호소할 만큼 절박한 것이었을까.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박 전 부장판사의 의사표현 방식에 공감하지 않았다. 그는 “대법관 임명은 30년 동안이나 기수와 연배에 따라 해왔다. 바뀌지 않을 게 뻔한 인사 시스템인데, 절차를 핑계 삼아 사표를 제출한 게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부장판사나 연판장에 서명한 159명의 판사들과 생각이나 관점이 퍽 달랐다. ‘그냥 이대로가 좋다’며 현행 인사제도의 긍정론 쪽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연판장에 서명한 판사들이나 박 전 부장판사의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집단서명’이란 표현방식에는 공감할 수 없다는 판사도 많았다. 이 때문에 1400여 명의 법관 가운데 10% 남짓만이 서명에 참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대법관 제청 파문 때 판사들이 가장 갈등했던 문제는 바로 집단적으로 뭘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고 말했다. 판사들은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판단하면 됐지, 어떤 의견에 대한 동의여부를 내놓고 밝히길 꺼린다는 것이다.

    ‘집단서명을 할 필요까지 있느냐’며 인식의 정도를 달리하는 법관도 많았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문제제기에는 동감이지만 지금 따라갈 만한 사안은 아니다”고 했다. 서울지법의 한 형사부장판사도 “대법관 인사뿐만 아니라 법원 인사개혁이 필요하지만, 사표나 서명의 의사표현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보탰다.

    밀리면 사표 제출

    이번 사태에 대한 판사간의 인식 편차는 법원행정처 출신 대 비(非)법원행정처 출신 구조에서 더욱 커졌다. 행정처 출신의 한 판사는 “대법관 제청 파문에 따른 갈등은 면밀히 따져봤을 때 행정처 출신과 그렇지 않은 출신의 문제로 요약할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법관 경력 12∼13년차 판사가 행정처 심의관을 거치는지 여부에 따라 법관인사 등 법원내부 문제에 대해 상당히 엇갈린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행정처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판사들이 간다’는 게 법원 내부에서도 정설이다. 사실상 행정처 경력은 고등부장 승진의 보증수표다. 행정처 심의관은 통상 사법고시와 사법연수원 성적에 따라 뽑았는데, 최근에는 근무평정을 고려해 발탁하고 있다. 행정처 출신들은 재학중이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판사인 경우가 많다.

    법원 내에서는 행정처 출신을 종종 영국의 청교도 혁명시대에 찰스 1세를 지지한 ‘왕당파’에 빗댄다. 왕당파처럼 대법원장의 결정이나 정책방향에 충성하는 무리란 뜻이다. 이들 행정처 출신 판사들은 사실상 현 인사제도가 유지될 경우 가장 큰 수혜자로 남는다.

    그래서일까? 대법관 제청 파문이 불거졌을 때 상당수 행정처 법관들이나 행정처 출신 법관들은 판사들의 연판장 서명을 두고 “대다수 판사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며 파문을 진화하거나 현 제도의 당위성과 부득이함을 법원 안팎에 알리는 데 애썼다.

    이번 서명이 비행정처 출신들이 주도한 ‘비주류의 외침’이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행정처 출신의 한 판사는 “행정처와 비행정처 출신의 정서가 갈리는 게 사실이다. 나는 판사를 하다 관두고 싶지 변호사 개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비행정처 출신에다 서열이 중간이 안 돼 지방으로 초임을 나가는 절반 이상의 판사들은 언제 개업하는 게 좋은가를 두고 술자리에서 상의도 하고 고민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개업을 고민하는 같은 기수의 동료 판사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할 만큼 판사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인식이 크게 다르다. 개업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판사와 개업할 때를 저울질하는 판사 사이에는 고등부장 승진이 놓여 있다. 법원행정처 근무를 ‘고등부장 승진의 터잡기’란 차원에서 봤을 때, 사실상 모든 문제의 뿌리는 고등부장 승진 여부로 이어진다.

    고등부장 승진비율은 임관 동기 현직 법관 중 57%로, 해방 이후 거의 같은 수준이다. 지난 2월에 이어 9월에 있은 사시 11기의 고등부장 승진도 이와 비슷했다. 따라서 현행 승진 제도에 절반은 만족하고, 절반은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 임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법관들은 중간 이탈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승진 인사 구조에 불만을 갖는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다.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서는 최고 엘리트들이 법관이 되기를 희망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엘리트들이 법관을 지원하는 현실이 고등부장 승진탈락 이후 법관들을 사직으로 몰아가는 아이러니한 정서적 환경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한 판사는 “판사들은 엘리트 의식이 무척 강해 동료한테 밀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밀리면 자연스럽게 사표를 낸다”고 말했다.

    승진이 되지 않더라도 명예롭게 법원에 남아 근무할 수 있는 인사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관급 대우를 받는 고등부장이 누리던 혜택을 이번 기회에 아예 없애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고등부장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절반만이 차관급 혜택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응답했다.

    ‘대법관 제청 파문’ 계기로 본 판사의 세계

    승진하지 못하더라도 법원에 남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 한, 절반의 판사는 ‘예비 변호사’이다.

    관용차량 유지비와 운전사 비용 등 고등부장판사 한 명당 매달 250만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간다. 한 고등부장판사는 “드물게 감정(鑑定)을 나갈 때 차량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대개 출퇴근 용도로만 쓴다”며 “차관급 대우를 고집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고등부장은 법원 내 기득권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기득권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한 고등부장판사는 “고등부장 승진을 포함한 법관인사 개혁이 필요한 때”라는 의견을 보였다. 또 다른 고등부장판사는 “고등부장을 기득권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며 “고등부장제 폐지 등 사법개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이미 법원 안에 폭넓게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현 고등부장 승진이나 법원행정처 심의관 발탁, 대법원 재판연구관 선발은 법관 근무평정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고등부장 승진 이전까지는 판사 개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연수원(60%)과 사법고시 성적(40%)에 따른 서열대로 근무지를 옮긴다. 다만 대법원 행정처나 행정법원 등을 지원할 때는 근무평정이 따라 붙는다.

    근무평정은 수십여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원장이 부장판사의 의견을 들으면서 직접 작성한다. 고등부장 인사도 근무평정에 따라 대법원장이 하게 돼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올해 고등부장으로 승진한 연수원 11기뿐만 아니라 그에 앞선 8∼10기 판사들의 근무평정과 서열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실제 지난 2월 고등부장으로 승진한 11기 8명은 전부 서열 순서대로 이뤄졌다.

    이 제도는 지난 1995년 3월1일부터 시행돼왔는데, 이에 앞서 1990년도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법관들의 76%가 근무평정 실시에 반대했다. 지난해 3월 서울지법 문흥수 부장판사는 “현행 근무성적평정에 의한 법관 인사제도가 인격권, 행복추구권, 평등권, 공무담임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문부장은 이번 9월 고등부장 승진인사에서 배제됐다. 연수원 성적 등에 따른 서열을 고려할 때 문 부장판사는 승진대상 0순위였지만, 근무평정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문부장은 “대법관 자리에 다양한 법관들을 임명하기 위해 기수와 서열을 파괴해야 하지만 일반 법관은 인사에 신경 쓰지 않고 재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신분이 안정돼 본연의 재판업무를 소신껏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법개혁의 첨병노릇을 해온 문부장이 기수·서열의 보장에 따른 인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모순처럼 비쳐졌다. 그는 줄기차게 고등부장 승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서열’을 “연령이나 가나다 순으로 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할 때는 과연 그가 주장해온 사법개혁이 무엇인지 아리송해진다.

    서울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들 중에는 자질이 떨어지는 판사들도 있게 마련이다. 최소한도의 평가를 통해 이들을 솎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관들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는 말이다.

    서울고법의 다른 판사는 “연수원 성적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고등부장 승진에 필요한 법관경력인 22년 동안이나 판사생활을 하게 할 수 있느냐”며 “근무평정과 같은 평가가 고등부장 승진 이전에도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근무평정은 많은 판사들에게 ‘내가 평가받고 있다’는 감시로 작용해 부정적인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지법의 한 단독판사는 “대법원에서 신속하게 재판하라거나 조정을 늘리라는 지침이 내려오면 그에 맞춰 재판을 진행하려고 발에 땀이 난다”며 “솔직히 근무평정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근무평정이 대법원의 방침과 지시에 맞춰 법원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줄 세운다’는 법원 내 불만이 높다. 한 판사는 “많은 판사들이 근무평정이나 서열에 따른 이 시스템이 나름대로 합리적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동시에 심리적으로는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판사들이 제도를 바꿨으면 한다”고 말했다.

    모든 법관에게 1등부터 꼴찌까지 등수를 매기는 서열제가 사실상 카스트제도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있다. 연수원을 졸업하면서 법관으로 지원할 때 각자 희망하는 부임지가 따로 있게 마련이지만, 실제 발령받는 부임지는 서울부터 저 아래 남도 끝까지 성적 순대로 거리에 반비례해 정해진다. 이러한 서열에 따른 인사원칙이 무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지난 2월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고 지방 발령을 받은 한 예비판사는 “여기 계속 눌러앉아 있을지 개업을 할지 고민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아직 정식 법관도 되지 않은 예비판사 입에서 이런 고민이 나왔다는 것은 그리 뜻밖의 일도 아니다. 그의 서열은 중간 아래 정도라 지방으로 초임 발령이 났고, 법관으로서의 장래도 그리 밝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이 ‘운명’을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일부 판사들은 지방으로 첫 발령이 났더라도 본인이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고등부장 승진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울 초임 법관과 지방 초임 법관, 1등으로 시작한 법관과 꼴찌로 출발한 법관의 두터운 벽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극복되지 않는 게 냉혹한 현실이란 사실을 판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 판사는 “지방으로 초임 발령을 받은 법관 중 법원행정처로 가는 경우는 기수당 한두 명에 불과하다”며 “이들은 서열이 중간 이하 정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등부장 승진도 어렵다”고 말했다. 승진이나 발탁인사에서 소외된 이들이 법관으로서 장래를 불안하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난 2월 법관 정기인사 때 지방법원 단독판사로 있다 서울 인근 법원으로 간 한 판사의 고민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자신의 서열로 갈 수 있는 부임지 2∼3곳을 저울질하며 서울에서 먼 곳으로 발령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다행히도 이번엔 운이 좋아 서울 근처로 갈 수 있었지만, 앞으로 2∼3년 뒤 또다시 어디로 가게 될지 불안하다. 그보다 서열이 높은 동기들의 선택에 밀려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대법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판사들 가운데 80%가 서울에서 근무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동네 판사’에 만족하는 유럽이나 일본 등과 달리 우리의 판사들은 거의 모두 서울로 올라오려고 한다. 오죽하면 ‘지방부장, 고등부장, 법원장 등 사실상 승진할 때만 지방으로 나가려 하겠느냐’는 말이 나돌 정도다. 승진하는 맛에 그나마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잠시 참는다는 것이다.

    판사들의 ‘서울 집중’ 경향은 인사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고 있다. 모두들 서울 근무를 원하는 상황에서 1등 서열자에게 서울을 내주고 꼴찌에게 지방의 한적한 법원 자리를 내주는 일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선택인지도 모른다.

    “서울이 좋아요”

    1979년 이전에는 연령을 서열 기준으로 삼았다. 때문에 최근에 성적 대신 연령으로 서열을 매기자는 주장이 나오고도 있다. 그러나 성적이든 연령이든 줄을 세운 다음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인사상 혜택을 주는 것이라면 문제는 풀리지 않을 게 뻔하다.

    서열이 외풍을 막고 인사를 예측할 수 있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의 법관들에게 등수(等數)라는 ‘멍에’를 숙명처럼 짊어지게 하고 얻은 것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열이 중간 이하로 지방에 내려가 법관을 지내다 고등부장 마저 되지 않는다면 장래는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이는 사실상 판사들의 신분보장을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요인인 셈이다.

    기수와 서열에 따른 인사 제도를 둘러싼 갈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누적되어오다가 이번 대법관 제청 파문을 발화점으로 해 불이 붙었다는 게 대다수 판사들의 얘기다. 가까이는 지난 2월 사실상 기수대로 고등부장 승진을 단행해, 기수와 서열에 따른 인사 파괴를 주장해온 법원 내 개혁적 목소리를 무시한 것이 이런 사태를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사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이 심화된 것은 변호사 개업 환경이 1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6100여 명의 변호사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 변호사 개업을 한다는 것은 ‘모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판사는 “고등부장 승진이 안 돼 섭섭하기는 하겠지만, 나가서 워낙 돈을 많이 벌기 때문에 나중에는 누가 더 잘됐는지 모를 만큼 좋았던 시절은 더 이상 없다”고 잘라 말했다.

    법관의 임용 숫자는 점차 늘고 있는 추세여서 최근엔 100명을 넘어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승진 인사구조가 그대로 유지될 경우 승진에서 탈락하는 법관들의 숫자도 그만큼 많아질 게 틀림없다.

    법관으로 근무하고 싶은 만큼 근무할 수 없는 법원의 현실에 대한 판사들의 불만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한 판사는 “지금 젊은 판사들은 고등부장이 안 되면 개업해도 돈도 벌기 어려울 판이라며 장래에 대해 크게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불안은 판사들 사이에 대법관 제청 파문과 맞물려 법관 인사개혁을 바라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일부 판사들은 이번에 크게 바꿔보기를 기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관 제청 파문을 둘러싼 판사들 사이의 갈등은 박시환 부장판사의 사표에 이은 소장판사들의 집단서명을 ‘의도된 작품’으로 보는 의심도 낳았다.

    한 판사는 박 부장판사의 사표를 두고 “이건 꼬투리였다. 대법원 의중은 이전부터 분명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 박범계 법무비서관과 사법개혁을 희망하는 판사들이 서로 상의하다 공감대가 형성돼 여기까지 온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그 증거로 청와대와 대법원이 공동으로 사법개혁 추진기구 실무위원회를 구성한 점을 들었다.

    우리법연구회와 청와대의 합작품?

    상당수 판사들은 집안 일에 남이 관여하게 됐다는 사실을 떨떠름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법원이 기존 대법관 제청 방식을 그대로 고집한 채 사태를 마무리지었기 때문에 법원 스스로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명분을 잃고 만 셈이다.

    때문에 이번 파문의 해결 양상이 법원이 내부 문제를 스스로 풀어나갈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는 말도 나온다. 박 전 부장판사와 일부 판사들이 대법관 제청 파문을 주도한 뒤 청와대에 법원 내 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줬다는 음모설은, 그가 ‘우리법연구회’ 좌장인데다 연판장 서명을 주도한 서울지법 북부지원의 이용구 판사 등이 같은 연구회 회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법원 안에서 급속히 퍼졌다.

    연판장 서명 참여자 대부분이 우리법연구회 회원이라는 얘기까지 돌았다. 청와대 박범계 법무비서관이 이 연구회 회원 출신이고,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에서 중간퇴장을 한 뒤 위원 사퇴를 한 강금실 법무장관 역시 같은 연구회 출신이라는 점이 이런 의혹에 날개를 달았다.

    그러나 우리법연구회 회원인 한 부장판사는 “연구회 회원들이 집단서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맞다. 그러나 서명에 참여한 것은 평소 사법개혁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기 때문이지, 청와대나 다른 어디와 줄이 닿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회원들 중 생각이 달라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많다”며 ‘합작 기획’ 음모론은 터무니없다고 주장했다.

    어찌됐든 법원 울타리 밖으로 실체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법연구회는 이번 대법관 제청 파문을 계기로 공공연한 모임이 됐다. 때문에 이 연구회의 회원인 판사들은 정치적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 당장 사법개혁추진기구 실무위원회 6명 중 이광범 법원행정처 건설국장과 유승룡 서울가정법원 판사, 박범계 법무비서관 등 3명이 우리법연구회 회원 혹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서열제의 대안은 있는가

    사법개혁의 핵심과제 중 하나인 법관인사제도의 대안은 과연 있을까.

    한 판사는 “별 수가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실제 많은 판사들이 현 제도의 대안에 대해서는 다들 ‘어려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이번 대법관 제청 파문으로 예비판사부터 고등부장, 대법원장에 이르기까지 현 제도를 그대로 안고 갈 수는 없다는 공감대를 이뤘다는 점은 큰 수확으로 보인다.

    물론 문제는 ‘어떻게’, 즉 방법에 있다. 1978년 연령에서 성적으로 서열 기준을 한번 바꾸었을 뿐,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었던 서열제와 고등부장 승진문제를 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법관 인사제도 개선의 일환으로 국회에 계류중인 법관 단일호봉제 법안이 통과되고, 법관 대우를 똑같이 한다 해도 승진이라는 개념이 그대로 남게 된다면 인사 때 옷을 벗는 판사들은 줄지 않을 것이다. 또 선발 승진시스템을 완전히 없앨 경우 보직을 어떻게 순환할지 등 또 다른 문제가 생길 것이다.

    무엇보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제도를 통해 앞날을 보장받은 상당수 판사들이 변화된 제도에서 자기 권리가 흔들릴 경우 이를 쉽게 받아들일지도 의문이다. 서열 차이만큼이나 판사들의 이해도 각기 다른 게 엄연한 현실이다.

    헌법 제103조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법관들이 ‘양심에 따른 재판’에 몰두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게 법원의 현실이다. 피라미드식 법원 조직의 한 구성원에 불과한 법관을 옭아매는 족쇄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법개혁은 이러한 족쇄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변호사 개업 여부를 두고 항상 고민한다”는 어느 판사의 고민이 과거형에 불과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