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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특집|충격·혼미·격돌…‘재신임 政局’

노무현 재신임 발언의 수사학

겸손한 척 하지만 오만한 ‘정치 10단’

  • 글: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노무현 재신임 발언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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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신임을 받는 동안’이라는 말은 재신임을 기정사실로 가정하는 오만함을 드러낸다. 국민에게 자기를 심판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겸손해야 하는데, 그는 오히려 국민에게 각성이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노무현 재신임 발언의 수사학

1974년 워터게이트사건에 휘말려 임기중 사퇴한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

한사람이 변호사에게 물었다. “당신이 훌륭한 변호사라고 하는데, 맞습니까?” 변호사는 흔들림 없는 자세로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에 대해서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씀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지요.”

위 상황에서 변호사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의 경우의 수는 “네, 맞습니다”라는 긍정이거나, “아닙니다. 저보다 훌륭한 변호사가 많습니다”라는 부정이거나,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는 유보적인 대답 세 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네, 맞습니다”라고 긍정했을 경우, 변호사는 추가적인 부담을 떠안게 된다. 상대방이 다시 “어떤 근거로 당신이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냐?”고 되물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증거 제시의 책임(a burden of proof)’이라는 공을 떠안게 된다. 이때 스스로 훌륭하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거나 제시한 증거가 빈약해서 납득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긍정의 논리는 빛을 잃게 된다.

그래서 이 명민한 변호사는 생각했다. ‘증거 제시의 책임을 묻는 사람에게 떠넘기자.’ 그리고 답했다. “당신이 말한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지요.” 묻는 사람은 거꾸로 질문을 해놓고 난데없이 자기가 증거를 제시한 꼴이 되어버렸다. 변호사는 자신이 훌륭한 변호사라는 것을 힘들이지 않고 증명했을 뿐 아니라, 상대방 논리를 후하게 받아들여준 너그러운 대화상대로 남았다.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 나날이 떨어지는 지지도와 국정 운영의 난맥상에 고심하다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국민에게 물어보자. 과연 내가 계속해도 되는지.’

위 상황에서 고뇌에 찬 결단의 경우의 수를 찾아보자. 먼저 모든 책임을 지고 깨끗이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순서는 실정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권좌에서 내려가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결정을 내릴 정치인이 동서고금 통틀어 과연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지만, 그의 사임연설은 마지막까지 최고 통치자의 위엄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닉슨은 변호사였다. 그의 현란한 레토릭은 곧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였다. 과잉 사과를 한 후 너그러운 용서를 구하는 동양식 사과에 비해, 서양식 사과는 최소한의 잘못을 인정하는 자기방어술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명백한 법적·금전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 가운데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는 말은 서양에서 찾아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말보다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만 고와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Fine words butter no parsnips)”는 속담이 있을 뿐이다. 닉슨의 자기 발뺌식 사과는 사과를 한다는 행위에 대한 동서양의 수사학적 차이에서도 기인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닉슨은 하야했고, 그럼으로써 책임을 졌다.

말로써 죄가 탕감되고, 겸양의 미덕이 중시되는 동양 문화권의 정치지도자라면 여기서 사과를 함으로써 국면 전환을 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국민 앞에 머리를 조아려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것이다. 반성의 빛이 역력하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고개를 숙이는 최고권력자를 당장 탄핵으로 몰고 갈 정도로 우리 민심은 매몰차지 않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은 자주 사과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용서받고, 임기도 돌려받았다.

두 번째는, 대통령이 국정난맥의 원인을 진단하고, 인사 시스템을 바꾸는 등 자신의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 혹시 근거 없는 논리나 비방에 자신의 정치생명이 묻히지 않도록 열심히 대국민 설득에 나서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아마도 대다수 지도자는 이 방법을 택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의 실력은 그가 난관에 부딪쳤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지도자는 이런 어려운 경우를 대비해 그동안 숱한 노하우를 쌓고, 노련함과 판단력을 길러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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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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