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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베를린의 남북첩보전쟁 4반세기

  • 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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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두율은 과연 누구인가.
  • 베를린에 머문 37년 동안 그는 어떤 일을 했으며 北에서의 그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
  • 남과 북의 접점이었던 냉전시대의 베를린에서 대한민국 안기부와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가 벌인 치열한 세력다툼과 그 속에서 혼돈을 거듭한 베를린 교민사회를 통해 ‘송두율 파문’의 진실을 들여다보았다.
안기부 vs 노동당, 프락치 역공작 그리고 송두율
1985년 11월 말의 어느 늦은 저녁, 서베를린의 한 기차역 구내 레스토랑. 창밖에는 하염없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풍경은 평화로웠지만 창가 테이블에 마주앉은 중년부부 두 쌍의 표정은 심각했다.

“○○○에게서 이야기는 이미 들었지만, 나의 권유를 받아주어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통일이 되자면 북도 좀 변해야 하는데, 가시거든 경제학자로서 의의있는 활약을 해 민족자주통일을 앞당기는 일을 열심히 해주기 바랍니다.”

말을 마치고 송두율 교수는 눈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평소 그를 ‘탁월한 좌파 지식인’으로 존경해왔다는 오길남씨도 시선을 돌렸다. 쏟아지기 시작한 눈을 강아지마냥 반기며 뛰어나간 오씨의 두 딸 혜원과 규원, 송교수의 두 아들 준과 린이 눈싸움을 하며 뒹굴고 있었다.

1992년 5월 오길남씨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이하 안기부)에서 작성한 진술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송두율 교수 부부와 오씨 부부의 만남 장면이다. 진술서에 따르면 송교수 가족과의 식사를 마친 오씨 가족은 그날 저녁 전차를 타고 동·서베를린의 경계 지점인 프리드리히 거리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조선 노동당 통일전선부 공작원들의 벤츠를 타고 북한 대사관으로 향한다. 불과 5km 남짓의 짧은 여행. 아무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그의 가족은 북을 택했다.

이후 모스크바를 거쳐 입북해 대남방송요원으로 활동하던 오씨는 1986년 12월 가족을 남겨두고 독일로 탈출해 망명한 뒤 1992년 끝내 한국으로 귀순했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이 사건에 대해 송교수측은 “적극적인 입북 권유를 한 사실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냉전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이 만나는 지구상 유일의 경계도시였던 베를린.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다른 한 쪽을 택할 수 있는 이 ‘불안정한 도시’에서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통일전선부와 남한의 안기부는 지난 사반세기 동안 치열한 세력다툼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군사독재 시기 ‘한국의 비민주적인 상황을 국제사회에 폭로한다’는 목적으로 결성된 재독 운동단체와 관련인사들은 북에는 입북회유와 포섭공작, 남에는 견제와 와해공작의 목표물이었다. 때로는 인맥과 친분을, 때로는 거짓과 속임수를 동원하며 전개된 이 격랑의 한켠에 송두율 교수가 있었다.

북한 이익대표부 vs 한국 총영사관

통일 이후 옛 동베를린 지역이었던 브란덴부르크문 주변 거리는 베를린의 새로운 중심가로 떠올랐다. 이 거리에 있는 연건평 5400m2의 거대한 건물이 바로 ‘주 도이칠란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이다. 통독 직후인 1990년 독-북 수교가 단절되면서 이익대표부(북한식 용어로는 ‘리권사무소’)로 격하되었다가 지난 2001년 복교에 따라 다시 대사관이 되었다.

북한 이익대표부는 공식적으로 비자발급, 무역 및 투자촉진 등의 업무를 담당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동당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들이 파견되어 첩보활동과 교민포섭작업을 펼친 ‘독일내 북한 정보활동의 총본산’이었다.

그로부터 자동차로 10분 남짓 걸리는 서베를린의 중심가 아데나워 광장. 1999년 ‘주 독일 대한민국 대사관’이 본에서 이전하기 전까지, 베를린 지역의 남한 정보기관 활동을 지휘했던 ‘주 베를린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자리잡았던 거리다.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안기부의 백색요원(일명 화이트·재외공관에 소속되어 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는 정보기관 요원)들은 이 영사관을 근거지로 공작을 펼쳤다.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었지만 1980년대 대략 세 명의 요원이 근무했다는 베를린 영사관에는 중정 해외파트 가운데서도 정예요원이 선발됐다.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유지하며 북한측 공작원들과 365일 어깨를 부딪혀야 하는 상황을 감안해 “강한 성격의 전투적인 요원들이 많이 배치됐다”고 전직 국정원 중간간부는 전한다.

양측의 다툼이 격할 수 밖에 없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재독 교민사회의 강력한 활동력. 1960년대 중반부터 박정희 정권의 정책에 따라 서독에 온 광부와 간호사가 1970년대 초반까지 무려 3만명을 헤아렸다. 유럽 어느 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교포사회였다. 특히 이민 초기 가혹한 노동조건과 잦은 사고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은 유학생들의 힘을 빌어 개선운동을 벌여나가며 사회참여적 분위기를 체득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전통이 강한 독일의 분위기는 유학생들로 하여금 북한 인사들과의 접촉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고, 이에 따라 교민사회, 특히 젊은 지식인 계층은 친남한 인사들과 친북한 인사들로 분화되어갔다.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 간첩단 사건’은 이 무렵 젊은 유학생들을 반한 분위기로 돌려놓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윤이상, 이응로 등 예술가·학자 16명이 독일로 급파된 중정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연행된 이 사건은 서독정부와의 외교마찰을 불러일으켰고, 이에 따라 1969년 한국정부는 관련자들을 서독으로 ‘추방’했다. 이 사건 이후 한동안 중앙정보부는 독일내 공작활동에서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고, 젊은 유학생들은 돌아온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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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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