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호

YS, 노태우에 “대통령 하야운동 하겠다” 위협해 후계자 낙점

  • 대담: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입력2004-03-29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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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S, 노태우에 “대통령 하야운동 하겠다” 위협해 후계자 낙점
    폰 바이츠제커가 DJ에게 들려준 독일 통일의 비결은 이러했다. “동·서독 접촉은 여야가 함께 추진해야 한다, 對동독 원조는 철저히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DJ는 이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대담·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학 tgpark@snu.ac.kr

    박태균 : 지난호에서 전두환 시대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이번호에서도 계속 이어가기로 하죠. 어쨌든 역사적으로 본다면 1979년 말에 득세한 신군부는 우리 사회를 후퇴시킨 것 아니겠습니까. 그랬기에 세월이 지나 결국 법정에 설 수밖에 없었고요.

    강원용 : 최근 재산을 빼돌린 문제도 불거졌지만 전두환이라는 사람의 부정적인 면은 많이 드러났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사람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사람을 두둔하는 건 아니에요. 박정희씨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전두환이란 사람의 얼굴도 몰랐어요.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뒤 텔레비전에 보안사령관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해병대 군복 비슷한 것을 입고 나왔습디다. 인상이 무시무시하더군요.

    그런데 1979년 12월31일 집으로 전화가 한 통 왔어요. 받아보니 “황 대령입니다” 하더군요. 보안사령부라는 겁니다. 까닭없이 가슴이 뜨끔하더라고. 무슨 일로 전화를 했냐고 했더니 “저희 사령관님께서 내일 목사님 댁으로 세배를 가시겠다고 하는데 몇 시에 가면 좋겠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세배를 시간 약속하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리고 보안사령관이 왜 내게 세배를 하러 오겠다는 거냐”고 되물으니 “15시 정각에 가겠다” 그래요.



    다음날인 1월1일엔 눈이 어마어마하게 왔어요. 제가 세검정에 살 땐데, 오후 3시가 되니까 전두환씨가 들어오더군요. 그런데 그 사람이 오고 나서는 아침부터 찾아오던 세배꾼들이 딱 끊어졌어요. 밖에 나가보니 집 앞에 군인들이 쭉 서 있더군요. 세배하러 왔던 사람들이 군인들을 보고는 제가 잡혀가는 줄 알고 다 돌아간 겁니다. 그날 전두환씨는 “나는 절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자꾸만 했어요. “나는 어려서 아이들하고 놀 때도 군대 놀이를 하던 사람이라 일찌감치 군인이 되려 했다. 군인이 된 후에는 별 몇 개 달고 싶은 생각, 대장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하지만 정치는 아니다. 내가 정치에 뜻이 있었으면 건강한 박정희 대통령을 평생 모시려고 그 밑에서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평생의 꿈은 참모총장이었다. 다른 생각은 없다…”고.

    박 : 왜 목사님을 찾아가서 그런 얘기를 했을까요.

    강 : 그 사람은 “한양대 김연준 총장이 꼭 목사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라고 해서 왔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1시간을 앉아 있다가 갔어요. 하지만 제가 나중에 김연준씨를 만나서 물으니 그런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럴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때 전두환씨가 저를 찾은 것은 당시 미국이 자꾸 자신을 주목하니 자기에게 전혀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제가 미국 사람들과 가깝다는 걸 알고 저를 통해서 미국에 그런 얘기를 전하려 했던 거겠죠.

    사형집행 하루 전 감형

    박 :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후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다시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강 : 그 사람이 대통령 되기 전에 기독교방송의 광고방송을 다 취소시킨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이라 광고를 계속하게 해달라고 하려고 만났지요. 또 제가 잘 아는 목사가 구속돼 있어 그 문제도 해결해야 됐고. 그래서 면담신청을 하고 만났더니 “그때(설날) 저를 만나주신 대가로 이렇게 뵙자고 했다”는 거예요. 대가로 만나준 거지, 아무나 만나주지 않는다는 거지요. 제가 이러이러한 일로 왔다고 하니까 구속된 목사 문제는 이학봉씨에게 얘기해 석방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서 기독교방송 얘기를 꺼냈더니 “우리나라에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되냐”고 물어요. 제가 “1000만명은 넘을 것”이라고 하니까 “아니, 1000만명이 돈을 모아 방송국 하나 못 꾸린다는 거냐” 하더군요. “할 수야 있겠지만, 갑자기 이렇게 광고를 막으니 도리가 없다. 시간을 좀 달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라고 했습니다. 전두환씨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제가 접해본 역대 대통령 가운데 얘기가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후 김대중씨나 광주 시민들 구명 부탁을 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박 : 목사님 책에서도 김대중씨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언급하셨던데, 자세히 말씀해주시죠.

    강 : 김대중씨 사건보다도 광주 민주화 항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경우가 더 극적이었지요.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된 후의 일인데, 정동년 박노정 배용주 등 사형을 선고받은 세 사람 중 두 사람을 1981년 4월4일 아침에 사형 집행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올라와서 김수환 추기경 방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군부의 일원이던 유학성씨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을 땐데 마침 유학성씨가 가톨릭 신자여서 그 사람과 연결이 됐어요. 몇 차례 전화를 해봤지만 답이 영 신통찮아요. 그래서 “4월3일 이후에는 만날 필요가 없다. 3일 이전에 5분만 만나게 해달라. 이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계되는 문제라고 말씀드려라”고 했더니 3일 오후 3시에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전두환씨는 제가 들어가자마자 노기띤 얼굴로 부들부들 떨면서 “도대체 국가 존망과 관계되는 문제라는 게 뭡니까!”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제가 “광주 사람을 하나라도 죽이면 이 나라는 망합니다”고 했더니 “뭐요?” 하며 눈을 부라리더군요. 여기에서 밀리면 안 된다 싶어 마구 들이댔습니다.

    “광주 사태 때문에 지금 나라 꼴이 어떻게 됐습니까. 유럽에선 한국에 대해 경제봉쇄를 하려 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노조가 한국 물자를 싣지도 내리지도 못하게 하고 있잖아요. 전세계가 이렇게 나오는 마당에 또 사람들을 죽여보시오. 대한민국은 끝장이 납니다. 대통령, 셰익스피어 작품 좀 읽어보세요. 리처드 3세가 조카들을 죽인 후 그 유령들이 자꾸 나타나서 싸움도 못하게 괴롭히지 않습디까.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의 유령이 두렵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더 죽이면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그러니까 전두환씨가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면서 딱 자르더군요. 그러고는 “기왕 만났으니 다른 얘기도 좀 합시다” 그러는 거예요. “약속한 5분이 지났습니다”고 했더니 “괜찮습니다” 하면서 30분쯤 더 대화를 나눴어요. 지난호에서 얘기한 돈 문제 같은 것을 화제로 해서요. 그래서 아, 이제 광주 사람들은 살았구나 했죠.

    전두환씨는 저와 헤어지고 나서 오후 5시에 국무회의를 열어 사형 집행을 취소했다더군요. 저는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있었어요. 청와대에서 나올 때 전 대통령이 “그 건은 비밀로 하시고 저한테 맡기세요”라고 했거든. 그러고 나와서 누군가와 저녁을 먹고 귀가하니 식구들이 들떠 있더라고요. 조금 전까지 광주 사람들이 집에 몰려와서 기다리다가 마지막 버스를 타고 떠났다는 거예요. 그 분들이 김수환 추기경 방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데 유학성씨가 김 추기경한테 전화를 해서 “오늘 강 목사가 다녀간 후 국무회의를 열어 사형집행을 취소했다”고 했대요(1981년 4월4일자 신문들은 ‘5공화국 출범 이후 국민화합 차원에서 감형이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박 : 역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씨도 그렇게 감형됐습니까.

    강 : 상황이 비슷했죠. 다만 그 건은 제가 먼저 나선 게 아니라 미국이 주도했습니다. 당시 미국 대사관의 정보 책임자로 있던 케네디 퍼거슨이 저를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당신이 꼭 해야 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해요. 허화평과 연결해줄 테니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 석방 요청을 하라는 겁니다. 자기들도 애는 쓰고 있지만 미국인의 말이라 그런지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저더러 좀 나서라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최규하 대통령 때부터 저더러 개신교를 대표해서 국정자문위원이 돼 달라고 사람을 보내왔지만 제가 거절했거든요. 퍼거슨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나중에 “강 목사가 자문위원을 수락하지 않았다고 무척 화가 나 있는 것 같으니 일단은 그걸 받아들이는 게 좋겠다”고 하더군요.

    고민 고민하다가 사람 목숨 살리는 일을 놓고 내 명예만 고집할 수 있겠냐 싶어서 국정자문회의 김옥진 사무국장을 불러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어요. 첫째 전 대통령이 나와 한 시간 이상 독대하게 해달라, 둘째 언론에는 일절 보도되지 않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사무국장은 “매스컴은 우리가 다 컨트롤하니까 비보도를 약속할 수 있고, 독대는 들어가서 알아보고 연락하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전 대통령을 만나 김대중씨 얘기를 하게 됐죠. 그랬더니 “목사로서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 하는 건 당연하다. 목사님이 두 사람(김대중·이희호)을 중매하고 결혼식 주례를 선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인정에 사로잡혀 국가적 문제를 처리해선 안 된다”고 하더군요.

    제가 정색을 하고 말을 받았죠.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나는 두 사람을 중매한 일도 없거니와, 주례는 조향록 목사가 섰다. 그저 나와 친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게 아니다. 광주 사태 때 외신기자들을 못 들어오게 했으면 몰라도 다 들어오게 해서 전세계 매스컴에 보도됐다. 그렇게 해놓고 이제 와서 김대중씨를 죽이면 어떻게 되겠냐”고. 그랬더니 화가 단단히 난 표정입디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사님 뜻을 잘 알겠다. 내가 생각을 좀 해볼 테니 기다려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대통령의 뜻이 궁금하다. 비밀을 꼭 지킬 테니 지금 얘기 좀 해달라”고 했더니 “(김대중을)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하는 거예요. “밖에 나가서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렇게 된 겁니다.

    헌데 제가 밖에 나가서 얘기하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딱 한번 어겼습니다. 어느 날 정일형 박사가 위독하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대중이 좀 살려줘, 살려줘” 하면서 내 손을 붙잡는데 손등에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그래서 이 양반한테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다 싶어서 “대중이 안 죽인답니다. 내가 약속받았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정 박사가 꺼억꺼억 소리를 지릅디다. 그러고는 방으로 뛰어들어온 이태영 박사에게 “대중이가 산대, 산대” 하며 기뻐했어요. 정일형 박사 부부가 김대중씨를 그토록 아꼈습니다. 물론 전 대통령이 제 말을 듣고 김대중씨를 살렸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미국이 애를 참 많이 썼어요.

    말 많아진 전두환

    박 : 미국이 상당한 압력을 넣었고, 목사님께서도 어느 정도 중요한 역할을 하신 것 같군요.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사건들이 있을 때면 미국이 세계적인 여론을 감안해서 정권에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죠. 우리의 경우 김대중 납치사건 때도 그랬고, 조봉암 사건 때도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미국이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자료에서 다 밝혀졌습니다. 비록 후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요.

    강 : 제 말을 들었든 아니든 간에 결국 약속대로 김대중씨를 안 죽이고 내보냈다는 점에서 저는 전두환씨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라고 봤습니다. 그 사람이 집권하고 나서 2년 반 정도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었어요. 처음엔 혼자서 뭘 하자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 친구’를 만들었죠. 하나는 원로들로 구성된 국정자문회의-처음 만들어진 것은 최규하 대통령 시절이지만-, 그 다음은 유능한 스태프, 그리고 마지막은 옛 장군들 그룹인데, 장군들이 한 달에 한번씩 모여 술 마시면서 마음대로 얘기하게 했습니다.

    전두환씨가 처음에는 말을 별로 하지 않고 남의 말을 많이 들으면서 메모를 많이 했어요. 그러더니 차츰 말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라고. 언젠가는 제가 “여론이 이러이러하니 저렇게 하셔야 될 겁니다” 하니까 “목사님, 저는 일곱 개 채널에서 정보를 받습니다” 하고는 말을 자릅디다. 그렇게 나오는 사람한테 해줄 말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무렵부터 발길을 끊었는데, 그후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터지면서 사람이 더 변했어요.

    박 : 권력이 오래 가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게 되나 봅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장관을 지낸 분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박 대통령도 1960년대 후반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스스로 주도하는 스타일로 변했다고 하더군요. 공과야 있겠으나 아무튼 전두환씨가 역사와 국민에게 너무나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죠.

    강 : 물론입니다. 광주의 비극은 전두환이 책임져야 할 일이죠. 그러나 그것을 막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제가 지난호에서도 얘기했지만, 1979년 12·12 직후 제가 김영삼씨와 김대중씨를 찾아가 “일단 김종필과 손잡고 계엄령부터 철폐한 뒤 선거 채비에 들어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 사람들이 제 말을 들었으면 광주가 그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 12·12 사태가 뭡니까. 군인들이 정권 잡겠다고 일으킨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의미를 간과했고 그후 데모가 대대적으로 일어나 그들에게 구실을 줬어요. 그때 일어난 데모는 대개 김대중 혹은 김영삼 지지 데모였는데, 그 중에는 군부에서 만들어낸 데모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점을 따져보면 양김씨를 비롯한 정치인들에게도 책임이 있는 거죠.

    YS, 노태우 협박해 후계자 낙점

    박 : 같은 군인 출신이자 친구 사이지만 전두환씨와 노태우씨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입니다. 가령 5공화국 청문회에서 장세동씨 등이 끝까지 전씨를 두둔하고 나서 전두환 그룹의 의리가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죠. 노태우씨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아서 술자리 같은 데서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고요.

    강 : 노태우씨도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죠. 그 사람은 전두환처럼 화끈하거나 불끈거리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내가 4시간 반 동안 얘기를 나눈 적도 있는데, 표정도 별로 없어요. 그저 웃기만 하죠. 성품이 무척 부드럽고 순하죠. 하지만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군인 기질이나 강한 장악력, 결단력, 추진력이 없었어요.

    박 : 노태우씨와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습니까.

    강 : 저와 가까웠던 김현욱 전 의원이 노씨를 소개해줬어요. 그런데 김현욱씨가 “노 대통령을 만나면 대통령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중학생을 만난다고 생각하라”고 조언을 합디다. 중학생쯤으로 여기고 얘기를 아주 쉽게, 또박또박 하되 여러 가지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딱 한 가지만 얘기하면 가장 좋고, 많아도 두세 가지를 넘지 말라고 했어요. 전두환씨는 반드시 직접 메모를 하면서 얘기를 듣습니다. 반면 노태우씨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요.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좀 박력이 없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YS, 노태우에 “대통령 하야운동 하겠다” 위협해 후계자 낙점

    1980년 5월31일 국보위 상임위 첫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오른쪽)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왼쪽). 그해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은 7년 후 친구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 사람에게 결단력이 없다는 건 후계자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죠. 노태우씨는 애초에 박태준씨에게 권력을 넘기려고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처남인 김복동씨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생각도 있었죠. 그때야 대통령이 후계자를 임명하던 시절 아닙니까. 경선이라는 게 없었죠. 제가 듣기로는 그때 김영삼씨가 노태우를 찾아가 다짜고짜 “차기 대통령 후보를 누구에게 시키겠냐”고 물었대요. “생각해둔 사람이 있다”고 했대요. 그러자 YS가 “그게 내가 아니라면 그만두겠으니 사표 받으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그 대신 우리 민주계는 전부 탈당해서 야당과 손잡고 즉각 대통령 하야 운동에 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놨다는 거죠. 여소야대인 당시 상황에서 민주계까지 나간다고 하니 노태우로서도 도리가 없게 된 겁니다. 결국 YS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는 거예요.

    박 :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노태우 대통령 재임중에 이뤄낸 북방외교나 남북한 기본합의서 교환 같은 것은 역사에 남을 만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시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것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긴 했습니다만.

    강 : 옳아요. 그 두 가지는 높이 평가해야죠. 특히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한 겁니다. 다만 그 대가로 30억달러를 주기로 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생각해요.

    노무현은 ‘제2대 대통령’

    박 : 얘기를 김영삼·김대중 시대로 옮겨볼까요. 두 분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끈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로부터 존경받았죠. 그런데 이 분들이 정권을 쥔 후에는 국민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예컨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독재정권의 부패척결을 외치던 사람들이 막상 정권을 잡자 부패의 온상처럼 돼버린 겁니다. 이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민주화운동이 폄하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강 : 그 점에 관해서는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영삼·김대중은 정치적으로 한국민주당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의 맨 처음인 미군정에서부터 이승만 정권까지의 주역이 한민당이죠. 한민당은 대통령감으로 내세울 사람이 없어 이승만을 업었고, 이승만도 한민당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자기 세력이 없으니까 한민당을 잡았습니다. 피차 이용한 거죠. 그렇게 서로 이용하려다 부산 정치파동으로 한민당이 깨지면서 자유당이라는 게 나왔습니다. 그러다 4·19 민주혁명이 일어났지만, 그때 우리나라에 정당이랄 게 있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한민당이 정권을 잡은 거예요. 다른 정당이 없으니 무정부가 싫다면 한민당에 투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국민의 76%가 지지해서 정권을 세웠는데, 세우자마자 구파·신파로 갈라지고 또 그 가운데서 노장·소장으로 갈라졌어요(한국민주당은 1949년 신익희 계열과 합치면서 민주국민당으로 확대·개편됐고, 1955년 소위 신파로 불리는 흥사단 계열, 가톨릭 계열, 그리고 원내 자유당 계열과 합해 민주당으로 개편됐다. 한국민주당 계열은 구파를 형성했다. 1955년 이후 민주당에선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 심했으며, 4·19 이후에는 구파가 신민당을 결성해 갈라져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당이 정권을 잡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오고, 북한 학생들 만나러 판문점으로 가느니 어쩌느니 하다가 5·16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박정희가 그런 혼란을 수습하겠다고 나온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5·16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누가 만든 겁니까. 바로 한민당 사람들이 그런 거예요.

    물론 박정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인 것은 민주당 구파의 김영삼과 신파의 김대중 세력입니다. 그들의 투쟁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그들이 군사독재 정권을 무너뜨렸고 국민의 선거로 정부를 세우는 데 기여했으니 민주화의 주역임엔 틀림없죠.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아직 제대로 민주화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해본 적이 있습니까? 친일파 민족반역자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고, YS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재판 외에는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DJ는 국가인권위원회니 의문사조사위원회 같은 걸 만들었지만 박정희 시대 이후의 사건들만 다뤘을 뿐입니다. 그 이전에 발생한 어마어마한 의문사들에는 손도 대지 않았어요. 경제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래요. 박정희 시대 성장위주 경제정책이 초래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은 오히려 더 심화됐습니다. 결국 한민당의 줄기가 YS·DJ 시대까지 뻗어나가면서 ‘미완성의 민주화’에 그치고 만 겁니다.

    이런 점에서 양김씨는 과거 역사에 속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면 제가 마치 노무현 지지자처럼 비칠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노무현씨가 대통령 되기 전에도 “이번에는 제16대 대통령이 아니라 진정한 제2대 대통령이 나와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양김씨의 공이 적지는 않으나, 역사의 물줄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YS, 노태우에 “대통령 하야운동 하겠다” 위협해 후계자 낙점

    평양을 다녀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1994년 6월18일).

    박 :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정책을 자문하거나 여론을 전달하신 적은 없습니까.

    강 : 그런 일로 만나기는 여러 번 만났죠. 그 중에 제가 면담을 신청해서 만난 경우는 딱 한번 있었습니다. 독일의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 미국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그리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투투 대주교 세 사람을 피스미션(peace mission) 팀으로 해서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게 하자고 제의하려고요. 세 사람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YS와 김일성을 만나 협의하게 하자는 거였죠. 제가 그 일을 주선했는데, 폰 바이츠제커와 카터와는 교섭을 마쳤어요. 양쪽으로부터 다 약속을 받았고. 하지만 북한이 이걸 받아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그래서 북한과 가깝던 일본 이와나미(岩波)서점의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대표를 찾아가서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야스에 사장이 이북에 제안을 넣자 김용순 당시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좋다는 의사를 전해왔어요.

    그런 다음 이홍구 당시 총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국가안전기획부 등 정부 요로에 얘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총리는 대통령에게 직접 말을 하라고 하더군요. 우방국 귀빈들이 좋은 일을 하러 오겠다는데 자유국가의 대통령이 그들을 안 만나면 무슨 일을 하겠냐면서. 그렇게 해서 YS를 만났어요. 1994년 6월12일로 기억합니다. 청와대에 들어가니까 “기도해주십시오”라길래 기도를 하고 난 다음 그간의 사정을 들려주며 도와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YS가 “뭐요? 지미 카터가 온다고요?” 하고 힐난하듯 물었어요.

    박 : 국회에서 YS 제명 사건이 벌어졌던 1979년 초에 카터 대통령이 방한해 박정희와 한바탕 싸우고 나서 김영삼씨를 만나고 간 것으로 압니다. 그런 인연도 있었으니 YS와 카터 두 사람 사이가 나빴을 이유가 없을 텐데요.

    강 : 그때 얼핏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얼마 전에 김대중씨가 워싱턴에서 카터를 평양에 보내라고 한 일이 있었거든요. YS와 DJ는 그때도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카터는 아무래도 DJ와 더 가까웠습니다. 저는 그것 때문에 YS가 기분이 상한 줄 알고 “이건 김대중씨의 워싱턴 방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죠. 그런데도 YS는 “카터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에라, 나도 모르겠다 하면서 청와대를 나왔죠. 결국 그 모임도 깨지게 됐고.

    그런데 며칠 후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신문을 보니 카터가 6월13일에 서울에 왔다가 이틀 후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을 만났다는 기사가 났더군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야, 역시 YS는 ‘정치 9단’이로구나. 내가 그런 기밀을 알아챌까봐 카터는 안 된다고 한 거구나…. 그후 제임스 레이니 대사를 만나 “김 대통령이 카터가 서울 온다는 걸 언제 알렸냐”고 물어봤습니다. 6월12일에 알렸다고 하더군요. 저를 만난 직후였던 겁니다.

    박 : 그후 YS와 정상회담을 앞둔 김일성이 돌연 사망하자 이른바 조문 파동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그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강 : 바로 그런 면이 YS의 결정적인 단점이라고 생각해요. ‘주석궁에서 김 주석을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민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상을 당하고 보니 참으로 침통하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요. 김일성 사망 직후 중국 베이징에 갔다가 북한 문제를 연구하는 중국 정부 산하 연구소장을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사람 하는 말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이해할래야 할 수가 없다. 정상회담을 하기로 했던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죽었는데, 조문을 하겠다는 이들을 그렇게 몰아세워서야 앞으로도 무슨 회담이 되겠냐”는 거예요.

    무슨 변명을 하긴 해야겠는데, 할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둘러댔습니다. “당신은 우리나라 사정을 몰라서 그런다. 6·25라는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김일성 아닌가. 그 전쟁으로 남한에서 죽은 사람, 상한 사람의 가족이 얼마나 되는 줄 아는가. 그러니 김일성이라면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데, 대통령이 어떻게 그런 민심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겠나. 그 문제는 그런 국내 사정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다른 나라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죠.

    박 : 김대중 전 대통령을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강 :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것으로는 김대중씨를 당할 사람이 없죠. 한 마디로 폰 바이츠제커가 말하는 ‘정치가(statesman)’라기보다는 정략가’(politician)’예요. 김대중씨를 평가하자면 아무래도 6·15 남북정상회담이라는 큰 업적을 맨 먼저 꼽아야겠죠. 38선이 생긴 이래 남북 정상이 처음 손을 잡았으니 역사적이라고 할 수밖에요. 그러나 몇 가지 유감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김대중씨가 국회의원일 때 제가 폰 바이츠제커를 크리스찬 아카데미로 초청한 적이 있어요. 김대중씨가 폰 바이츠제커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분을 텄는데, 그후 DJ는 신군부에 잡혀들어갔고 폰 바이츠제커는 독일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때 폰 바이츠제커가 주도해 유럽에 ‘세이브(Save) 김대중’이란 게 조직되기도 했죠. 세월이 흘러 DJ가 대통령이 된 후 폰 바이츠제커에게 “한국에 와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동서독 통일의 비결을 말해주라”고 청해 두 사람이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후 폰 바이츠제커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줬는지 잘 압니다.

    첫째, 대(對)동독 문제는 여야간의 협조 없이는 해결할 수 없으니 반드시 여야가 함께 추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독일이라고 여야가 늘 의견이 같았던 건 아니에요. 이 대목에서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중요한 역할을 했죠.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어 동방 정책을 제안하자 기민당이 일제히 이에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민당 출신인 폰 바이츠제커가 이를 지지했어요. 그가 발언을 신청해 동방정책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표명한 덕분에 그 안이 통과됐어요. 그후 선거에서 정권이 바뀌어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수상이 됐습니다. 콜 수상은 빌리 브란트 정부가 추진하던 정책을 죄다 뒤집었어요. 그러나 동방정책만은 그대로 뒀습니다. 여야가 같이 한 것이니까 건드릴 수가 없었던 거죠.

    두 번째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른 원조입니다. 예를 들어 ‘먹을 것을 이만큼 줄 테니 너희들은 사상범 1000명을 석방해라’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민생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이번엔 죄수들을 풀어줘라, 그 다음엔 방송을 개방해라, 또 그 다음엔 이산가족 방문을 허용해라…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간 겁니다. 결코 그냥 주지 않았어요.

    셋째, 정치적으로 동독을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엔 소련에 돈을 주고 소련을 시켰습니다.

    폰 바이츠제커는 이런 원칙을 몇 번이나 강조했어요. 그런데 DJ는 어떻게 했습니까. 평양에 김정일을 만나러 가면서 야당 총재인 이회창씨와 충분한 논의도 없이 혼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선 안 되죠, 국민들이 보고 있는데. 정 내키지 않으면 형식만이라도 갖췄으면 괜찮았을 거예요. 비행장으로 가기 전에 이 총재 찾아가서 ‘나는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당신 조언을 좀 들려주시오’ 한다든지, 평양 갔다 오는 길에 이 총재에게 들러 ‘내가 이렇게 하고 왔으니 협조해주시오’ 하면 되는 겁니다.

    또 하나 제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대북 원조에 현대라는 기업을 앞세웠다는 사실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제가 박태준 당시 총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박태준씨의 원래 안(案)은 그게 아니었대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경제관련 다섯 개 분야 사람들과 이회창 총재 등이 의논해서 대북 원조 방안을 짜내기로 했는데, 그게 무산되고 박지원씨를 중간에 끼워넣어 어떻게 하다 보니 한 기업에 모든 걸 다 맡기게 됐다고 해요.

    노벨평화상도 그렇습니다. 중동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두 정상이 노벨평화상을 같이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DJ가 ‘이번에 우리가 정상회담도 했으니 김정일과 함께 상을 받게 해달라. 과거에도 그런 사례가 있지 않냐’고 요구할 만도 하잖습니까.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주장했어야죠.

    윤간에서 똥물 먹이기까지

    박 : 현대가 북한으로 들어가게 된 데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던 듯합니다. 현대 이전에 북한에서 사업을 벌이려던 기업들이 여러 안 좋은 선례를 남기기도 했고, 현대가 들어가지 않으면 특정 종교단체가 깊이 개입할 가능성도 있었거든요. 다른 한편으로 정주영이라는 인물이 해낸 역할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대북사업을 하나의 기업이 독점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들을 모두 덮어두자는 것은 아니지만요.

    강 : 현대가 했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가 큰 틀에서 전체를 관장하면서 여러 기업들에게 역할 배분을 하는 게 바람직했다는 얘깁니다.

    박 :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얘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화제를 돌려보죠. 목사님께서는 때로는 크리스찬 아카데미를 통해, 때로는 개인적인 채널을 통해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신 것으로 압니다. 1970년대 이후 노동문제가 심각해졌고 이것이 급기야 노동운동으로 표출됐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좀 들려주시죠.

    YS, 노태우에 “대통령 하야운동 하겠다” 위협해 후계자 낙점

    2000년 6월13일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오른쪽)이 영접 나온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함께 걷고 있다.

    강 :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하면서 파생된 문제 중의 하나가 기업주들의 횡포였습니다. 정말 엄청났죠. 그런 상황에서 전태일 사건이 터져나왔습니다. 전태일군이 죽은 다음날 제가 교회에서 그와 관련된 설교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죠. 저는 운동권 사람들에게 “전태일에게 ‘열사’ 칭호를 붙이고 마치 독재정권에서 고문치사한 사람처럼 취급하지 마라. 대신 그의 순수한 뜻을 되살려라”고 말합니다.

    전태일은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나선 과격한 젊은이가 아니에요. 청계천에서 힘겨운 노동에 시달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열여덟, 열아홉 살 먹은 아이들이 너무도 고생을 하고 있어 눈물겹더란 말이지. 그래서 자기가 비록 공부는 못 했지만 근로기준법을 찾아 읽어보니까 근로기준법에는 그렇게 안 돼 있거든요. 법대로만 해주면 우리가 이 고생을 안 하겠구나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법을 지켜달라고 했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니까 노동사무소며 시청이며 나중엔 정부까지 찾아갔지만 뜻을 못 이뤘어요. 그러다 결국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분신하고 말았죠. 전태일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고 기려야지, 그저 체제에 저항해 분신 자살했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말해선 안 된다고 봐요.

    전태일 분신 이후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은 반도상사 사건입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노조 지부장 한순임양이었는데, 그때 회사측이 노동자들을 회유하려고 한양을 방에 불러들여선 100만원인가를 건넸지만 받지 않았어요. 돈을 안 받으니까 그때부터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강력범 출신의 전과자들을 동원해 한양을 윤간하려다 근로자들이 현장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실패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르려 한 거죠.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확 들고 일어난 겁니다. 이후 동일방직, YH무역, 콘트롤데이타 등 수많은 사건들이 빚어졌죠.

    동일방직 사건은 회사측이 이총각이라는 여성 노동자가 노조지부장을 하지 못하게 탄압했는 데도 지부장이 되니까 깡패들을 시켜서 끌어내고는 강제로 입을 벌려 똥물을 먹인 사건에서 비롯됐습니다. 이총각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노동운동하는 수녀나 마찬가지예요. 전혀 과격한 사람이 아니죠. 그런데도 회사가 이런 짓을 저지르니까 단식투쟁에 들어갔어요. 17일 동안 단식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김수환 추기경과 제가 단식 현장엘 갔습니다. 형편없는 몰골로 쭉 늘어져 있더군요. 그래서 “일단 살고 보자. 우리가 나설 테니까 이러지 말아라”라고 한 다음 정부측과 협상해 몇가지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첫째, 이 사건과 관련해 누구라도 해고나 징계를 하지 않는다. 둘째, 근로자들이 심하게 지쳤으니 닷새 동안 휴가를 준다. 셋째, 이번에 지부장선거 할 때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는다. 김 추기경이 “우리가 이 세 가지 약속을 받고 너희들에게 왔다”고 근로자들을 달랬습니다. 그렇게 해서 근로자들을 동일방직까지 버스에 실어갔는데, 회사가 약속을 하나도 안 지켰어요. 그래서 사건이 더 확대됐습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대했으니 노동운동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저임금은 차치하더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판이니…. 봉건시대의 머슴 취급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현대사 증언’ 쏟아져야

    박 : 1970년대는 농민운동도 표출되기 시작했는데요.

    강 : 당시 농민들에게는 조합이라는 게 없었어요. 4H 운동 같은 관제운동만 있었지, 민간운동은 없었습니다. 때문에 농민운동을 할 사람들을 교육하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래서 수원에서 농민지도자 교육을 했는데, 지금 열린우리당 의원인 이우재씨가 담당자였어요. 그후 1980년 2월에 전국농민운동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계획을 세워놨는데, 1979년 3월9일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죄다 잡혀들어가는 바람에 무산됐습니다. 그 사건이 없었으면 최초로 농민들의 전국 조직이 구성됐을 겁니다. 이우재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 사람은 농민운동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 사람 부인이 우리 교회 교인인데, 하루는 내게 와서 “저 결혼합니다” 하더라고. 그래서 남편 될 사람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미친 사람입니다” 하는 거예요. “뭐에 미쳤냐”고 물었더니 “농촌에 미친 사람이에요”라고 합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농촌에 미친 사람이더군요.

    박 : 말씀하신 것처럼 목사님께선 1970년대 농민운동,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셨고 또 일부 교단에서도 긍정적인 역할을 많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종교들이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과정에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강 : 그 시절에도 기독교 운동 중에 노동자, 농민을 위한 URM(도시농어촌선교) 운동 같은 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껏 우리 종교들이 너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이진 못했죠. 지금이야 종교간에 대화도 이뤄지고 하지만, 그때야 어디 그런 게 있었나요. 과거보단 좀 나아졌지만 지금도 서로 배척하고,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기업화해 있는 것이 한국의 종교 현실 아닙니까. 자주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눠야죠. 그런 면에서 40년 전인 1965년 10월18일 6대 종교 지도자 회의를 가진 것은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6대 종교 최고지도자들이 함께 숙식하며 협력을 도모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사상 최초였지만 국제적으로도 유례가 없어요. 그런데 당시 이것이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죠. 특히 우리 기독교계에서 말이죠. 그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발전한 겁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서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박 : 지금까지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종교와 관련해서는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시겠지만, 그 얘기는 다른 자리를 빌려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대담인 만큼 이 시리즈를 마치면서 한 말씀 해주시죠.

    강 : 저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혹은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료에 나와 있지 않은, 제가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었어요. 신문이며 자료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들 중엔 그저 웃고 넘겨버리면 되는 것도 많지만, 때로는 역사적으로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적지 않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저뿐만 아니라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를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합니다. 그래야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박 교수처럼 문헌을 통해 현대사를 공부하는 분들의 연구를 보충해줄 수도 있을 테고요.

    ※대화 사이의 괄호 안에 있는 설명은 대담자 박태균 교수가 붙인 것임(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는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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