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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정파, 색깔 그리고 파워

  • 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민주노동당의 정파, 색깔 그리고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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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MS 프로그램으로 5만여 진성당원 관리와 재정의 일체화
  • ● 6~7월중 ‘싱크탱크’ 격인 당 정책연구소 개소해 본격 정책 개발
  • ● 북한식 국가사회주의, 서구식 사민주의 아닌 ‘제3의 사회주의’ 추구
  • ● 2006년 지방선거 20% 득표 → 2008년 18대 총선 제1야당 비약
  • ● ‘거대한 소수정당’ 전략…2012년 대선 집권 프로젝트
  • ● ‘비례대표의원 2년 순환제’ 전격 도입 가능성
  • ● 느린 의사결정, 정보유통의 폐쇄성 등이 내부적 한계
민주노동당의 정파, 색깔 그리고 파워
“원내에 의석이 하나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정당의 정체성과 관련해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은 2004년 17대 총선의 사전포석으로 이번 2002년 16대 대선에서 지역성 심화지역인 영·호남에서 제1야당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2002년 9월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노회찬(48) 사무총장은 ‘의석 없는 정당’이란 민노당의 핸디캡에 대한 우려와 함께 17대 국회의원총선거를 향한 기대감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이런 입장의 기저엔 정당이 이념 및 정책, 당원, 정책수단으로 구성돼야 함에도 민노당은 정책수단인 의석(입법권)과 정치권력(행정권)을 확보하지 못한 비(非)정상정당이라는 ‘갈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당시 기자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테마로 한 ‘노풍(勞風), 2002 대선 찍고 2004 총선 간다’ 제하의 기사(‘신동아’ 2002년 10월호) 취재를 위해 서울 여의도 두레빌딩 9층(민노당 구당사)에서 그를 만난 터였다. 노 총장의 ‘우려 섞인 기대’는 그로부터 만 2년도 채 안돼 고스란히 현실이 됐다.

주지하듯, 민노당은 이번 17대 총선에서 정당득표율 13%를 전국적으로 고루 얻어 비례대표 8명을 포함, 10명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원내진출과 동시에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자리매김하는 기염을 토했다.

요즘 여의도 한양빌딩 4층 민노당 당사(2003년 7월 당사 이전)엔 연일 취재진과 각계 방문자의 출입이 끊이지 않는다. 권영길(63) 대표와 노회찬 사무총장에 대한 언론매체 인터뷰만도 10∼20분 간격으로 이어질 만큼 분주하다. 외부단체의 방문도 잦다. 4월26일에는 거대 외국계 투자그룹인 모건스탠리 관계자 방문, 5월7일엔 보수 성향의 연구소인 미국 헤리티지 재단 관계자 방문…하는 식이다.

당사 분위기도 활기차다. 2년 전만 해도 자못 엄숙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원내진출 이후의 상황변화에 대해 당직자들 스스로도 놀라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2002년 9월8일 민노당 대통령후보로 확정됐을 당시 권영길 대표가 “민노당은 진보정당이자 국내 유일의 정책정당임에도 언론의 ‘무풍지대’”라며 언론에 홀대받고 있다는 불만을 줄곧 강도 높게 토로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풍경이다.

그럼에도 민노당을 속속들이 안다는 이는 예상외로 많지 않다. 17대 총선 이후 최대 ‘뉴스메이커’로 급부상한 민노당의 실체는 무엇인가. 또한 그 무엇이 ‘민노당의 힘’인가.

44년 만의 진보정당 원내진출

민노당 창당은 2000년 1월30일 이뤄졌다. 이날 서울 올림픽역도경기장에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초대위원장이 대표로 선출됐다.

민노당은 ‘창당선언문’을 통해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 빈민 중소상공인의 정당이며, 여성 청년 학생 진보적 지식인의 정당’이라 규정하고, ‘한국사회의 다양한 진보세력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개인의 총화를 이루어내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 선언함으로써 그 역사적 탄생을 알렸다.

그러나 같은해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21명의 후보가 전원 낙선, 군소정당으로서의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심지어 기대주였던 울산 북구의 최용규 후보마저 500여표 차로 떨어지자 경선과정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당내 책임논란이 일기도 했다. 민노당은 16대 국회 원내진출 실패의 원인을 뒤늦은 준비와 내부 분열 때문으로 분석한다.

민노당은 2001년 4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소환을 위한 결사대를 프랑스에 파견하는 파격적 행보로 잠시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줄곧 원외정당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어 여론의 큰 관심대상이 되진 못했다. 그러나 이번 17대 총선에서 ‘대약진’해 그런 ‘상대적 박탈감’은 말끔히 씻겼다.

민노당의 태동은 1997년 ‘국민승리21’ 시절 이미 예고됐다. 당시 재야 및 노동계 연합체였던 ‘국민승리21’은 같은해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권영길 후보를 내세웠으나 전체 유권자의 1.2%에 해당하는 30만6026표를 얻는 데 그쳤다.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진보정치연합, 전국연합 등 거의 모든 진보세력의 결집을 이뤄냈지만 그만큼 급조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민노당 스스로는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창당 직전까지의 시기를 ‘당 준비기’로 부른다.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가 출신 386세대 상당수가 ‘국민승리21’을 떠나는 아픔도 겪었다. 그중 일부는 기성 정치권으로 흡수돼 현재 민노당엔 노동운동가 출신 386 몇 명만 남아 있다. 당시 기성 정치권행을 택한 386세대로는 열린우리당 17대 총선 당선자(구로 갑) 이인영(40)씨가 대표적 케이스로 꼽힌다. 이씨는 ‘국민승리21’의 조직국 부국장 출신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은 되레 진보정당 창당 의지를 담금질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99년 8월29일 진보정당 창당발기인대회(발기인 2000명)를 거쳐 이듬해에 마침내 민노당이 창당된 것이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의석 15석, 정당투표율 15% 획득’이라는 내부 기대치엔 조금 못미쳤지만, 어쨌든 민노당은 1960년 4·19 직후 국회의원 7명을 배출한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등 혁신정당들이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44년 만에 진보정당의 독자 원내진출을 일궈냈다. 제도권 진입 성공과 함께 ‘스타정당’으로 떠오른 민노당의 기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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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수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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