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6월호

4·15 총선 통해 본 한국사회의 변화

권위 파괴, 이념 빈곤, 미완성의 세대정치

  • 글: 박길성 고려대 교수 · 사회학 gspark@korea.ac.kr

    입력2004-05-27 18: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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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5 총선 통해 본 한국사회의 변화

    4·15 총선은 열린우리당에 과반 의석을, 한나라당에 개헌 저지선을, 민주노동당에 원내 교두보를 각각 안겨주었다.

    4·15 총선은 한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이번 총선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다. 전후 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보수세력의 권력 독과점체제가 깨졌다. 구래(舊來)의 권위주의가 해체되었다.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는 진보세력이 제도권 정치에 진입했다. 이념경쟁의 시대로 들어섰다. 세대가 정치함수로 등장했다. 탈지역주의의 조짐을 보였다. 오랫동안 유지돼온 보수의 시대가 흔들리면서 무한경쟁의 새로운 정치시대로 진입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대략 이러한 것들이 변화를 약속하는 가능성으로 이번 총선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의미에 걸맞지 않게 선거과정은 낙제점수를 면하기 어려웠다. 우선 선거과정에서 정당의 정체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정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번 총선은 국정 운영이나 각당이 내건 정강정책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다. 정책의 빈자리에는 대신 감성이 들어앉았다. 말이 좋아 감성이지 울고, 절하고, 기고, 굶고, 머리 깎고, 붕대 감고, 무릎 꿇고, 사퇴한 것이 전부다. 현대사회가 내세우는 유연성이니 감성이니 하는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낙후된 전근대성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총선의 결과는 절묘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는 과반수 확보, 한나라당에는 개헌 저지선 확보, 민주노동당에는 교두보 확보라는 결과를 각각 안겨주었다. 그리고 3당은 각각 책임정치, 견제정치, 의회정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승자에게는 ‘불안한 우위’를, 패자에게는 ‘해볼 만한 열위’를 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만할 수도 없고, 낙담할 것도 없는 절묘한 판이 만들어졌다.

    이번 총선 결과는 어느 당이 과반수를 얻고, 약진하고, 퇴조하는 정치적 화젯거리나 뜬금없이 불어닥친 진보·보수의 담론 이전에 한국사회의 전체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음을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4·15 총선은 세계화 정보화 등 지구적 규모로 변화하는 세계사적인 거대전환의 흐름에 동반하여 나타난 1990년대 한국 민주화의 기반구조 구축과 1997년 외환위기를 극점으로 전개되는 한국사회의 재구조화 측면에서 독해를 해보아야 한다.

    외환위기는 우리의 과거를 부인하게 만들었다. IMF의 구조조정 교본은 한국사회로 하여금 과거와의 절연을 강요했다. 이들의 처방은 외환위기와 관련된 경제변수 몇 개에 손대는 정도가 아니었다. 정부, 기업, 금융, 노동은 물론이고 일상의 관행마저 과감히 버릴 것을 요구했다. 한국인의 가치와 태도마저 변화시킬 것을 강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사회 해체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인은 자신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것이면 그것이 민족이든, 전통이든, 국가든, 정치든, 조직이든 상관 없이 훌훌 털어버리겠다는 탈민족, 탈전통, 탈국가, 탈조직, 탈권위의 원리를 빠르게 학습해갔다.

    이 과정에서 종래의 권위주의 질서는 급속하게 해체되었다. 그러나 해체된 권위주의를 대체할 합리적이고 새로운 권위의 패러다임은 제시되지 못했다. 민주화를 경험하면서 억압적이고 일방적인 권위주의 정치를 완전히 청산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사회갈등을 조율할 조정기제로서 합리적 제도와 권위에는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사회는 그 어떤 시기보다 혼란과 갈등이 크게 드러나고 있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조직, 지식세계, 학교, 가정 등 모든 영역에서 한국사회가 크게 요동치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탄핵정국 역시 권위구조의 패러다임적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탄핵정국을 단순히 전근대적인 정쟁과 사회구조의 산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일면적인 분석이다. 탄핵정국은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의회의 도전인 동시에 제도권 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도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자가 대의민주주의에서 의회가 가진 절차상의 권리였다면 후자는 참여민주주의에서 시민사회가 지닌 실질적 권리였다. 탄핵을 둘러싸고 의회의 권위와 시민의 권위가 부딪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사회에서 보수는 한 번도 자신들이 주류에서 밀려난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보수는 기존 권위의 모든 것을 대변하는 세력이 돼버렸고, 진보는 거기에 맞서는 대안 권위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권위의 패러다임을 갈구하는 사회에서 기존 권위의 상징으로서 보수의 운명은 이미 2002년 대선에서 예약되어 있었다. 보수세력이 기득권에 안주한 채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동안 진보세력은 그람시의 표현대로 ‘진지전(陣地戰)’을 펴온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신종무기를 앞세우면서 말이다.

    따라서 이번 총선의 결과는 새로운 권위 패러다임의 모색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권위의 패러다임적 전환은 지난 대선에서 선보였으며, 그 탄력성과 관성이 이번 총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탄핵이라는 시한폭탄의 뇌관을 건드린 상대방의 오만으로 엄청난 반사이익을 얻었다. 열린우리당은 개혁을 표방했지만 여전히 전근대적인 구태에 의존했으며, 개혁적 이념과 정책은 형식 요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여당이 이렇게 정책이나 비전 없이 선거에 임한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한심했다는 비판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의 약점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노출될 것이라는 지적은 상당 부분 설득력을 가진다. 지혜로운 고민이 요구되는 국면이다.

    결국 열린우리당 입장에서는 무한책임에 대한 공격에 맞설 수 있는 국정 능력이 관건이다. 그리고 얼마나 개혁적인 정책을 생산해낼 수 있는지, 또 끊임없이 제기되는 경제위기의 시나리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앞으로의 과제다.

    반면 한나라당은 과거에 안주한 채 부패와 기득권 남용으로 홍역을 치른 끝에 겨우 살아남았다. 또다시 과거에 안주하는 날, 국민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릴 것이다. 과거 안주란 정책적 비전의 부재이며 지나간 권위로의 복귀로 받아들여진다. 시효가 끝난 모델과 권위를 가지고서는 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선거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민주노동당이다. 민주노동당은 한마디로 압축성장한 정당이다. 2000년에 창당한 이래 4년 만에 의회 진출을 이루어냈고, 지금까지 한 번도 의회에 진출하지 못했던 정당이 단번에 13%의 정당지지율을 획득했다. 세계 진보정당사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거대한 양당과는 달리 지역과 무관하게 고른 득표 양상을 보인 것도 한국정치의 현실에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거기에 민주노동당의 고민이 자리잡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사회적 약자의 증가, 구조조정 위기에 놓인 화이트 칼라의 불안 등이 비판적 지식인층의 지지와 맞물리면서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민주노동당의 앞길에는 구조적인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 이를테면 현재 11%에 불과한 한국사회의 노조 조직률은 계급정당으로 나아갈 토대로서 대단히 부족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한 축이 민주노총이고, 민주노총의 중심세력이 대부분 작업과 임금구조가 양호한 대기업 노조로 구성되었다는 점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상대방에게 역공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선 유권자들이 진보정당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투표했지만 다음 총선에선 진보정당이 만들어놓은 성과를 보고 투표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고민이 시작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이념·세대·지역·계급

    정치는 균열의 함수이다. 이번 총선에서 한국 정치는 4가지의 균열 구조를 확연하게 드러냈다. 이념·세대·지역·계급이 그것이다. 한국정치가 1차 단순방정식 함수에서 고차방정식 함수로 변화한 셈이다. 사실 영욕을 거듭해온 현대 한국정치의 역사는 지역주의의 행보와 운명을 같이해온 지역 균열의 정치사에 다름아니다. 정치 현장의 모든 편가름은 전적으로 지역으로 구획되었다. 지역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었던 한국의 정치가 이념·세대·지역·계급을 설명 변수로 설정하는 복잡체계로 변화한 것이다.

    이념정치의 막이 올랐다. 4·15 총선은 2002년 대통령선거 이후 첨예해진 진보·보수의 대립구도를 더욱 뚜렷이 드러냈다. 한국의 정치도 이번 총선을 계기로 이념경쟁의 시대로 진입할 것으로 예견된다. 그러나 진보·보수의 대립각(角)에 대한 얘기만 무성할 뿐 정작 실체가 드러난 것은 없다. 이념 담론에 정작 이념이 없는 셈이다. 한국 정치에서 이념은 이제 겨우 선을 보였을 뿐인데 정치적 기획물, 저널리즘적인 기획물이 과도한 담론을 생산해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최근의 진보·보수 담론에는 과도한 시장주의가 개입되어 있음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진보와 보수에 대한 보편적인 규정은 있을 수 없다. 이념의 정체성은 각 사회의 특수성을 바탕으로 각인되게 마련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이데올로기와 분배 문제 같은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큰 가닥이 잡힌다. 그러나 점점 더 중요성이 커지는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대단히 모호하다. 오히려 서구의 기준으로 볼 때 역방향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사회에서 진보세력은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반면 보수세력이 국제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서구의 기준으로 볼 때는 정반대의 형국이다.

    4·15 총선 통해 본 한국사회의 변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 직후 벌어진 대규모 촛불시위는 의회의 권위와 시민의 권위가 맞부딪친 사건이었다.

    실체야 어떠하든 이념과 노선을 근간으로 하는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가 닻을 올린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각 정당이 진보와 보수의 구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거론하고 있지만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이러한 상황을 거북스러워하고 불편해한다. 중도개혁, 중도보수, 중도진보, 자유보수와 같이 진보와 보수 앞에 붙는 수식어가 이미 각 정당이 정체성의 정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 회색의 수식어가 많을수록 선명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정체성을 밝혀달라는 주문에 독해하기 더 어려운 화법으로 응답하는 셈이다. 당의 정체성을 밝힌다면서 ‘열린우리당은 실용주의를 지향한다’는 다소 뚱딴지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용주의는 정체성의 정치가 요구하는 이념이 아니다. 한나라당도 이 대목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미국식 진보·보수의 구도를 선호하고 나섰다. 열린우리당은 미국의 민주당, 한나라당은 미 공화당에 각기 자신의 정체성을 연결시키려고 한다. 다시 말해 유럽식 좌우 또는 이념대결의 개념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수적인 틀 안에서 좀더 개혁적인가 아닌가로 두 당의 정체성이 구분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민주노동당은 유럽식 좌우 구도를 일관되게 구축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의 정치에서 민주노동당보다 선명성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이란 뽑힌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당선자들이 모여 급조해낸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당선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평균을 낸다고 해서 이념적 정체성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만큼 연역법적인 선언은 애초부터 무리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구체적인 정책 수립과 현안 해결 과정에서 이념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귀납적 접근이 더 적절할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날 필요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민주노동당의 제도권 진입이 기존 정당들에게 엄청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음은 더더욱 분명해 보인다.

    세대정치 장악한 386과 ‘N세대’

    세대정치는 2002년 대선 이후 이번 총선에서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했다. 노무현 후보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특정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는 그동안 한국정치를 지배해온 구도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기존 권위구조가 무너진 상황에서 386세대와 이에 연합한 이른바 ‘N세대’가 세대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세대의 정치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인 지역분열의 정치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예단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그렇게 단순한 이분법의 가로지르기 구도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다.

    386세대는 거리에서 정치성을 키운 운동의 세대이자 의식화의 세대이며 민주화 성공 세대다. 이들 386세대가 지난 대선에서 세대정치의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이들의 성향은 나이가 들더라도 쉽사리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특수한 역사적 경험과 집단적 기억이 만들어내는 세대의 사회역사적 효과다. 이들도 이제는 40대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이들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지지를 통해 자신들의 이념성향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투표 행태는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된다.

    또 하나의 관심은 ‘N세대’의 향방이다. ‘N세대(Net generation)’는 19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난 세대로 컴퓨터와 인터넷에 친숙하며 쌍방향의 의사소통에 능통하다. 이들은 본디 골방의 세대, 즉 나홀로 세대이다. 동시에 탈정치화된 문화세대이다. 탈정치화된 세대가 어떻게 정치의 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2002년 월드컵과 촛불시위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거리의 맛과 멋을 체득한 온라인 세대가 오프라인에 눈을 뜬 것이다. 이들은 거리라는 현실을 자신들의 문화영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세대의 결속력과 충성도는 386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고 가변적이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언제라도 변하는 다중 정체성을 갖고 있는 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여실히 드러났다. 2년 전 대선에서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켰을 때와는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20대 초반(20~24세)은 40대 후반 내지 50대 초반 유권자와 비슷한 투표 성향을 보인 반면, 20대 후반(25~29세)은 386세대와 거의 비슷한 투표 성향을 보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 세대가 하나의 정체성이나 슬로건으로 묶어내기 쉽지 않은 세대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20대 후반의 진보성향은 여전히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에 의한 정치적 영향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수로 도피한 20대 초반의 탈정치적 성향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대 담론이 과도하게 봇물을 이루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지구적 규모의 거대전환과 한국사회의 탈권위 현상 사이에서 중심 동력으로 떠오른 386세대와 N세대가 실체적인 개념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과장된 측면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대 논의 역시 저널리즘적, 정치적 목적에 이용되고 있는 측면이 없지 않다. 미디어와 정치권에서는 상업적 목적을 위한 것이든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든 간에 이들의 사회문화적 특징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세대상징으로 삼는 무책임성을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연속과 단절이 역동적으로 나타나는 한국사회에서 세대가 매우 중요한 정치 동력의 축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를 과장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가 없다.

    재현된 ‘우리가 남이가’

    4·15 총선은 지역균열의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선거의 전 과정에 지역균열의 정치가 잠복해 있었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지역주의 현상이 완화된 것이 사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정교하게 재현되었으며 재생산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영남과 호남을 가로지르는 준령을 가운데 두고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양극 독점체제로 분할된 것은 여전히 느슨한 형태의 지역주의의 산물이다.

    이번 선거에서 지역정서의 대명사였던 ‘우리가 남이가’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되살아났는가 하면, 전북에서 열린우리당이 완전 석권한 것도 정동영 대표의 연고와 무관하지 않다. 3김 정치의 폐해가 단막극 형식으로 재현된 셈이다. 여기에 영남과 호남은 각각 상대방이 하나로 뭉쳐질 것을 우려하며 결집력을 더욱 높였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지역 ‘할거’주의가 점차 퇴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4·15 총선은 ‘계급(층) 함수로서의 정치’라는 모습을 드러냈다. 계급 투표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것으로, 상층계급은 대체로 보수주의 정당을, 하층계급은 진보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역대 선거에서 계급 변수는 그렇게 두드러지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이념과 지역이 훨씬 큰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는 지역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수도권에서 계급 투표의 양상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배타적인 균열 양상은 아닌 듯하다. 이 부분이야말로 보다 엄밀한 계급, 계층별 투표행태에 관한 경험적 자료가 부족한 만큼 그 어떤 변수보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독해를 요구한다.

    이번 총선에서는 시민단체의 활동에 대한 평가도 빠뜨릴 수 없다. 현실정치에서는 시민단체의 향후 행보에 대해 낙관과 비관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의 관계에서만큼은 일정한 변화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비판적 시민단체와 정부 사이에는 암묵적인 파트너십이 형성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이슈의 선점’이라는 운동방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압축성장을 일구어냈다. 개혁의 이름으로 진행된 그간의 시민단체 활동은 어찌 보면 이슈 선점의 독점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보수의 ‘색깔론’과 진보의 ‘도덕론’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시민단체들이 독점하다시피한 진보적 개혁의제를 민주노동당에 넘겨줄 수밖에 없으며, 비판적 개혁의제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주도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이제 이슈의 선점 못지않게 완결성 있는 정책 제안과 시민에 기반을 둔 운동의 토대를 빨리 구축해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시민단체들이 선보인 낙천·낙선운동에 대해 시민단체 내부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이를 그대로 수긍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이번 총선 결과는 압축성장 과정을 거쳐온 한국의 시민운동에 성찰적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낙천·낙선운동이 계속된다면 철저히 외면받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4·15 총선 과정이 드라마틱했던 만큼 그 결과를 놓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사실상의 양당제 구조를 만들어 정국 불안이 해소될 수 있게 됐다는 평가와 함께 보혁갈등이 심화되면서 전방위적 갈등전선이 고착화될 수도 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역사의 연속과 단절, 낙관과 비관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이념논쟁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와 우려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한쪽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갈등이 이미 위기상황에 이르렀다고 본다. 세계적으로 탈(脫)이데올로기 시대의 도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방 직후의 좌우익간 갈등을 방불케 하는 보혁 갈등을 재생산하고 있는 데 대한 우려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이념과 관련한 정책논쟁을 더욱 활성화해 대안 경쟁을 강화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이라고 주장한다. 세계가 탈이념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생산적인 이념경쟁은 우리 사회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는 것이다.

    정치는 상식이다. 이번 4·15 총선은 한국사회의 문제와 욕구가 그대로 반영된 극히 상식적인 결과를 낳았다. 각자 최선을 다하는 가운데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 상식이다. 상식 수준에서의 권력은 주거니받거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상생의 정치를 운운하는 것은 가식이요 구호에 불과하다. 넘겨주기도 하고 넘겨받기도 하는 성찰적 자세가 필요하다. 수십 년간 독점한 권력을 넘겨주면서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이나, ‘어떻게 쟁취한 권력인데’ 하는 생각에 영원히 끼고 놓지 않겠다며 20~30년의 장기집권 플랜을 만들려는 것 모두 상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새로운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덫에 기생하는 보수의 ‘색깔론’과 도덕지상주의의 함정에 빠진 진보의 ‘도덕론’을 극복하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보수세력은 아직도 ‘개혁 피로’ 운운한다. 이는 ‘여전히 우리가 한국사회의 주류이고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는 이런 생각을 버리고 한국사회의 재구조화 과정에서 자신들이 과연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할 때다.

    반대로 진보세력은 얄팍한 도덕적 우월성에 도취해 제도권내 게임의 룰을 존중하지 않는 인기영합주의와 같은 섣부른 정치를 펼 경우 현재의 불안한 우위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진보·보수 대결구도는 전근대적인 권위주의 질서가 해체된 공간에서 양자 중 어느 쪽이 먼저 합리적 권위를 생산해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기업·시민사회의 鼎立구조 필요

    이처럼 어느 쪽이 먼저 합리적 권위의 모델 창출에 성공하느냐에 따라 민심의 이동 역시 불가피해질 것이다. 한나라당은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고 열린우리당은 ‘개혁적 진보’를 외치지만, 양자 모두 현시점에서 민심이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권위구조의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려면 한나라당은 당의 정책이나 구성원의 도덕성을 탈골하는 수준을 넘어 자기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개혁적 보수’로 방향을 잡아야 하며, 열린우리당은 게임의 룰을 지키며 책임지는 정권의 모습을 보여주는 ‘합리적 진보’로 거듭나야 한다.

    보수는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두 번의 선거에서 잇따라 패배한 것은 과거의 정치 관성을 고집하고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데 따른 결과다. 탈권위주의의 시대에서 구래의 권위를 움켜쥐고 있는 한 그 말로는 자명하다. 한편 진보의 생명력은 선명성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선명성을 견지하기 위해 진보는 끊임없이 분열의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사회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외면할 때의 말로 역시 자명하다.



    이제 한국사회는 성숙한 정치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배구조(governance)를 만들어내야 한다. 현실 정치권에서 보수·진보의 성찰적 구조가 필요하듯, 사회운영의 중심축으로서 정부·기업·시민사회의 성찰적 정립(鼎立)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압축성장 과정에서 불균형적으로 만들어진 지나친 국가개입주의, 기업의 과도한 시장근본주의, 시민단체의 일방적 시민사회화는 모두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정부·기업·시민단체가 상호 균형 속에 긴장하는 새로운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4·15 총선은 한국 정치사의 한 획으로서, 소용돌이 정치를 종식하고 한국사회 발전의 대서사를 향한 전주곡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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