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호

“나라 위해 흙탕물 뛰어든 지도자, ‘흙 묻었다’고 깎아내려서야…”

‘개발독재 선봉’ 남덕우 전 총리

  • 글: 조성식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4-09-22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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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위해 흙탕물 뛰어든 지도자, ‘흙 묻었다’고 깎아내려서야…”

    남덕우 전 총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가경영의 기본원리를 충실히 지킨 현실적 지도자였다”고 회고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 치적은 그에 대한 온갖 부정적 평가를 희석시켜왔다. 박 전 대통령을 맹렬히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부분만큼은 인정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 정도로 박정희 정권하의 고도성장신화는 한국인의 머릿속 깊이 각인돼 있다. 평균적인 한국인은 이렇게 말한다. ‘박정희가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한 건 맞다. 그러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았나.’

    5공 초 총리를 지낸 남덕우(80)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은 박정희 정권 때 5년간 재무부 장관을 맡았고 4년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했다. 또 1979년엔 1년간 청와대 경제특보로 일하면서 박 전 대통령의 최후를 지켜봤다. 가히 개발독재의 주역이라 할 만하다.

    한국경제 근대화의 산 증인인 만큼 9월10일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의 초점은 개발독재의 공과(功過)에 맞춰졌다.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힘이 있고 여유가 있었다. 차분하게 자신의 논리를 펴는 데서 원로학자의 경륜이 느껴졌다. 인터뷰에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과오와 개발독재의 부작용을 인정하면서도 경제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상황논리를 내세웠다.

    그가 박 정권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61년 미국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했어요.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펴나가던 때였지. 서강대 교수로 있으면서 평가교수단 일원으로 대통령에게 경제문제에 대해 자문했어요. 그때만 해도 정부관료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요. 그저 교수를 천직으로 여기고 있었지요. 그런데 자꾸 정부에서 부르는 통에 시간을 뺏기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회의가 생겼어요.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미국에 돌아가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맘먹었죠. 그래서 교수초청 프로그램에 지원했어요.”



    1968년 6월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 교환교수로 부임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평가교수단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가 끝난 후 그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박 대통령이 따로 방으로 불렀다. 평가교수단 회의는 총리실에서 열렸는데, 박 대통령은 매번 참석해 경제문제에 대해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곤 했다.

    “청와대에 들어가니 박 대통령이 묻더군요. 아주 가냐고. 1년 후 돌아온다고 대답하자 처자와 부모는 어떻게 하냐고 물어요. 두고 간다고 하자 비서실장에게 지시해 내가 없는 동안 가족들의 생활을 돌봐주도록 조치했습니다.”

    1969년 6월 그는 미국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석 달 후 재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박 대통령의 제 일성이 ‘거 남 교수, 정부정책을 많이 비판하던데 이제 맛 좀 봐’였어요. 실제로 그 후 13년 동안 쓴맛 단맛 다 맛봤지요.”

    “여러분은 부인과 정답게 살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첫인상은 어땠습니까. 또 인간적 면모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요.

    “강직한 군인 타입이지. 정말 청렴한 사람이고. 정치자금을 많이 거뒀지만 자신을 위해 축재한 건 없어요. 장관 시절 청와대에 보고하러 들어가면 한복 차림의 육 여사가 직접 주스를 쟁반에 담아 내왔지요. ‘이 더운데 얼마나 수고 많냐’고 따뜻한 인사말을 건네곤 했습니다. 육 여사가 서거한 후 빈소에서 밤을 새우는데 박 대통령이 비통한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살아있을 때는 저놈의 여편네 없어졌으면 했는데 일을 당하고 보니 정말 통절함을 금할 수 없다. 그러니 여러분은 부인과 정답게 살라’고.”

    -박 전 대통령의 치적을 꼽는다면요.

    “한마디로 북쪽의 무력적화통일을 거부하는 안보태세를 확립하고 이 나라 국민을 전통적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점입니다. 1960년대 초 우리 현실은 경제적 빈곤과 침체 속에서 북쪽의 적화통일전략의 함정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그런데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력과 지도력이 보이지 않았죠. 이런 위기에서 5·16 정변이 일어난 겁니다. 그 후 불과 18년 만에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각광받는 산업국가로 탈바꿈한 거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권위주의 정권에서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 등 과오가 있었던 건 사실이죠. 경제적으로도 지역간 격차, 노동3권 제약 등 폐단이 있었던 게 사실이고. 하지만 박 대통령의 철석 같은 신념과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경제개발과 근대화가 이뤄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아요. 무릇 역사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공존합니다. 역사의 주역을 맡은 대통령에게도 양면이 있지요. 부정적 측면을 합리화할 필요성도 없지만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죠.”

    주지하듯 경제발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대 치적으로 꼽혀왔다. 역대 대통령 인기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늘 수위를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평가는 다르다. 개발독재의 공(功) 못지않게 과(過)에 주목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에 기인한 금융부실, 재벌 비대화에 따른 기업간 불균형, 동서(東西)간 도농(都農)간 경제력 격차 확대, 빈부격차 심화….

    -가시적인 실적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폐해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결국은 관념과 현실의 차이입니다. 관념적으로는 얼마든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 그림대로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폐해라면 지역격차, 분배 불균형, 노동3권 제약, 뭐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것 아닙니까. 지역격차가 왜 생겼느냐. 그때는 수출제일주의였어요. 수출을 해야 경제개발이 된다는 논리였는데 당시로서는 정당한 노선이었죠. 수출을 하려면 인프라를 개발해야 해요. 그럼 적절한 장소가 어디냐. 항만이 있는 부산이죠. 그래서 관련 시설이 다 부산에 집중됐죠. 전라도에는 상대적으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그래서 지역 불균형 문제가 생긴 겁니다. 성장전략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어요.

    다음으로 분배 문제인데, 뭐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경제개발 때문에 분배상태가 악화된 것인지는 한번 따져봐야 해요. 분배 문제를 개선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용을 늘리는 겁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기 전 실업률이 20%였어요. 고용증가가 소득분배의 제1보예요. 제2보는 복지시책 마련이고. 노동3권을 왜 그토록 제약했는가. 국회에서는 최저임금제를 얘기했죠. 물론 좋은 얘기입니다. 그것이 시행되면 기업들은 지킬 수밖에 없어요. 안 그러면 처벌받으니까.

    그런데 현실은 최저임금 이하를 받고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사람이 수두룩하단 말이야. 최저임금제 시행은 그런 사람들의 고용마저 막는 셈이지. 최저임금제는 경제가 어느 정도 발전하고 실업률이 저하됐을 때 시행하는 제도예요.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델을 설정해놓고 현실과 차이가 있다고 늘 비판합니다. 비판하는 건 당연해요. 그런데 현실과 씨름하는 사람 입장은 달라요. 어느 정부나 마찬가지지.”

    “인플레 무서워 성장 포기할 순 없었다”

    -중화학공업의 중복과잉투자가 한국경제를 주름지게 했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어느 정부 어느 대통령이 완전무결한 경제정책을 시행할 수 있겠어요.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난 건 사실이에요. 전혀 예상치 못한 오일쇼크가 발생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생긴 거죠. 그런데 지금 한국경제를 먹여 살리는 게 뭐냐고. 결국 중화학공업 아닙니까. 그때 일으켜놓지 않았다면 이후엔 기회가 없었을 겁니다. 지금 한국경제가 이만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도 다 그 덕분이죠. 역사적 측면에서 경제흐름을 성찰해야지, 특정시기만 보고 비판하면 안 되죠.

    인플레 없이 모든 게 잘됐다면 좋았겠지만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1차 오일쇼크가 난 후 내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에 임명됐어요. 중화학공업을 잔뜩 벌여놨는데 유가가 폭등하니 큰일이 났죠. 물가상승, 국제수지 악화, 성장 둔화라는 3중고의 위기에 빠졌어요. 고민 끝에 유가 폭등으로 물가도 잡지 못하고 국제수지도 방어하지 못하는 마당에 성장마저 희생할 순 없다고 판단했죠. 그래서 성장기조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나갔어요. 결국은 인플레가 일어나고 국제수지가 악화됐어요. 그 점에 대해 비판을 많이 받았지요. 비판은 당연해요. 하지만 실제로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개발독재가 IMF 금융위기의 뿌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인을 제공했지.”

    -관치금융의 폐해로 금융체계가 부실해졌다는 지적인데요.

    “고도성장 정책이 원인이었어요. 산업화 초기 큰 자본가가 있나, 투자재원이 있나. 기업들이 자기자본이 없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자금을 공급하자니 관치금융이 필요했던 거요. 박 대통령은 금융기관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어요. 유흥업 등 쓸데없는 데만 융자해주고 일반기업에는 돈을 잘 빌려주지 않는다는 거지. 수출확대회의가 열리면 재무부 장관은 늘 피고였다고. 수출이 잘 안 되면 재무부의 긴축정책 탓이라 하니. 박대통령은 정부가 금융기관의 재원 배분에 간섭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 금융기관이 자율적으로 기업의 건전성을 평가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됐습니다. 융자를 해줄 때도 건전성보다는 외형으로 판단했지요. 또 정부가 모든 걸 뒷받침하니 일이 잘못돼도 정부가 해결해주겠지 하고 안이한 생각을 갖게 된 거요. 그러다보니 금융기관이 방만해졌지.”

    남덕우 이사장은 금융기관의 부실에 대해 “우리가 분명히 잘못한 일”이라고 책임을 시인했다. 다만 IMF사태의 본질에 대해서는 “유동성 위기였지 펀더멘털의 문제는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씨를 뿌린 것은 맞아요. 하지만 IMF사태 당시 펀더멘털은 건실했어요. 다만 유동성 부족이라는 문제가 생긴 거지. 금융기관이 자율적 경영을 하지 못하다 보니 그런 화를 입게 된 거요. 국제회의에 나가 이런 얘기를 하면서 IMF가 이에 맞는 치료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완벽을 요구할 순 없겠지만, 언젠가 그런 부작용과 폐해가 나타날 걸 예상치 못했습니까.

    “박 대통령이 죽은 지 몇 년 후에 생긴 일이에요, 그게? 그렇게 되기 전에 경제정책을 수정했어야죠. 김영삼 정부 말기에 금융개혁 관련 13개 입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어요. 그런데 야당이 반대하고 나섰다고. 그러다 외환위기를 맞았지. 경제정책이란 건 여건 변화에 따라 계속 수정해가야 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모든 문제를 박정희 탓으로 돌리는 건 옳지 않아요. 그 후의 정부들이 경제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은 데에 원인이 있다고.”

    국민의 자신감

    박 전 대통령의 대표적인 과오로 거론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장기독재다. 비판론자들은 그가 장기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리한 고도성장정책을 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내실이 탄탄하지 못한 상태에서 몸집만 커진 기형적인 경제발전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남 이사장은 “그건 속설이야”라며 웃었다.

    “정권 안정을 위해 경제성장을 부추겼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당시엔 성장률은 높을수록 좋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었지. 대통령도 장관도 국민도. 아무것도 없던 나라에서 수출이 100억달러가 된다, 200억달러가 된다니까 국민 모두 대견해하고 자신감을 갖게 되고 우리나라가 잘된다고 생각했어요.”

    -좀 더디게 발전하더라도 인권신장이나 노동여건 개선 등 민주화를 병행했더라면 궁극적으로 경제에도 더 좋았을 거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성장 속도를 늦추더라도 민주화를 같이 했더라면…. 당시 세계경제의 흐름과 국내 경제실정을 감안해 판단할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 지적이 옳아요. 후대 사람들이 전대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고 그 자각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자꾸 수정해가면 되는 거요. 처음부터 모든 걸 예견하고 정책을 편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지. 아마도 그런 어려운 일을 잘하지 못했다는 평가겠지.”

    -재벌 문제는 어떻게 보십니까.

    “그것도 우리 경제의 약점입니다. 약점은 고치면 되는데 마치 과거의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잘못된 것처럼 얘기하는 건 문제지요. 잘못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야. 잘못된 것은 고쳐나가고 잘된 것은 계승하면 된다고. 재벌 문제를 어떤 방향으로 개선할 것인가. 뭣보다도 창업자 집안이 독재 못하게 하고 내부거래라든가 상호출자, 상호보증 같은 걸 못하게 해야죠. 이제는 재벌이라기보다 기업집단으로 볼 수 있어요. 기업집단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어요. 과거 재벌이 했던 역할을 인정해주고 문제점을 개선해가면 돼요.”

    -한국 재벌의 특이한 면은 정부와 유착해 정부에 정치자금을 주는 대가로 각종 특혜를 받아 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불가피했다고 보십니까.

    “양면이 있죠. 자본이 축적되지 않은 나라에서 산업을 일으키려면 정부가 기업을 도와줄 수밖에 없지. 성장전략의 일부예요. 그런 기업들이 자라나 조선소도 만들고 제철소도 만들었어요. 경제개발 초기 단계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박정희 정권이 끝난 후) 정부에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자 이제는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정부가 기업에 이래라저래라 해서는 안 된다고. 이제는 시장경제로 가야 한다고. 경제전략은 시대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시대변화에 맞춰 수정해가면 돼요. 그런데 자꾸 과거를 비난하고 심판하는 쪽으로만 가는 거야. 그러니 과거사 청산 얘기가 나오지.”

    경제전략은 시대상황에 따라 수정해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싱가포르와 대만도 우리처럼 독재라는 정치환경에서 고도성장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오늘날 저비용 고효율의 선진형 경제구조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고 대만은 재벌 의존도가 높은 우리와는 달리 중소기업 중심의 탄탄한 경제력을 갖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방법으로 고도성장을 이룬 나라들인데 오늘날 차이가 난다는 거죠. 이런 걸 보면 우리나라의 독재에 유독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싱가포르나 대만이 우리처럼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경제개발을 했던 건 맞아요. 그런데 그들은 그 후 국제여건 변화에 부단히 적응해나갔습니다. 재작년에 싱가포르에 가서 11개 기관을 둘러봤어요. 그 사람들은 지금 세계화다 개방화다 무한경쟁 시대다 해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물류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집중하고 기업활동을 가로막는 쓸데없는 규제를 다 풀었어요. 그래서 더욱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대만은 사실 우리보다 못하죠.”

    -국부(國富)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글쎄, 거긴 중소기업 중심으로 성공한 나라지요. 우리는 대만의 좋은 점을 배우자고 하고 저들은 한국이 부럽다고 말합니다. 대만으로부터 배울 점은 중소기업의 부품생산을 적극 지원하는 것입니다. 중소기업에서 기술센터도 운영하고. 대만의 중소기업은 어떤 기술적 문제가 발생해도 반드시 해결하는 능력이 있어요. 어떤 부품에 문제가 있어 찾아가면, 자체 연구소에서 해결이 안 될 경우 다른 기업의 연구소에 맡기고 그것도 안 되면 외국 기업까지 연결해 어떻게든 해결해줍니다.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요. 남이 잘하는 건 배워야죠. 우리 약점은 보완해야 하고.”

    남 이사장은 “세계적인 경제흐름에 적응하지 못해 발생한 현재의 경제위기와 관련된 문제를 박정희 탓으로 돌리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워낙 오래 집권한 탓에 경제정책을 수정할 기회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만약 당시에 민주정권이 들어서서 경제개발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비록 고도성장은 못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지금 민주화시대에 살고 있는데, 지금의 상태를 고스란히 그때로 옮겨놓는다면 당시의 세계환경과 우리가 처했던 척박한 환경 속에서 경제개발이 가능하기나 했겠어요?

    -지금의 정치권을 당시로 옮겨놓는다면 말이죠?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고도성장은 아니더라도 경제성장 자체가 가능했겠는지.”

    -그 말씀은 경제발전을 위해 민주주의 유보가 불가피했다는 개발독재 논리와 연결되는데요.

    “정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요. 그건 과오야. 과오가 아니라는 건 아니라고. 그러나 대만이라든가 싱가포르라든가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들을 보면 다들 강압적인 측면이 없지 않았지.”

    남 이사장은 “효율성 측면을 말하는 건가요”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엔 그 방법이 유효했다는 거지”라고 대답했다.

    -장면 정부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놓았죠.

    “세워놓았지만 그것을 집행할 능력이 없지 않았어요?”

    -그 정부는 억울하지 않을까요. 기회를 빼앗긴 것이죠. 5·16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때 정치상태가 어땠소?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 모든 질서가 잡히고 경제개발도 착착 될 거라 생각했지만 과연 그랬는지.”

    여기서 남 이사장은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화가 나요, 지금의 시국을 보면. 친일파 청산이니 과거사 진상규명이니, 지금 그런 데 국력을 소비할 때냐고.”

    -학자들이 평가할 부분이라는 거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이나 좌익활동도.

    “그럼요. 역사기록의 진부(眞否)에 관한 논쟁은 역사만큼이나 길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해요. 현 집권세력의 문제는 관념론에 치우쳐 있다는 겁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요.

    “우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은 권위주의적 정치관이죠. 배워야 할 것은 투철한 사명의식과 헌신이고. 박 대통령 리더십의 강점은 첫째 정책의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경제개발과 국방이었어요. 민주주의는 고의로 뒤로 미뤘다고. 또 경제개발 목표 달성을 위해 효율적인 제도적 장치를 강구했어요. 장치를 만든 다음엔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도록 행정조직의 능률을 극대화했습니다. 어떤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어디에 맡겨 무엇이 안 된 건지 몸소 살폈어요. 또 정책을 시행한 다음엔 반드시 사후평가를 했지. 기업정신이 그런 것 아닌가. 기업경영이나 국가경영이나 마찬가지지. 그는 국가경영의 기본원리를 충실히 지켰어요. 그 점은 민주화된 정권의 지도자도 배울 점이에요.”

    “죽은 사람한테 책임 물어서야”

    남 이사장은 건강을 묻자 “늙으니까 여기저기 고장이 난다”며 웃었다. 심장이 좋지 않은데 요즘은 허리까지 아파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그가 한 얘기의 핵심은 과거는 과거대로 인정하거나 과거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박정희 정권이 너무나 많은 사람을 아프게 했던 일을 과연 과거의 논리만으로 풀 수 있을까.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그에게 물었다.

    -그 시대, 발전과 성장의 이면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데요. 그들에게 할 말씀이 있다면요.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선 보상해야죠. 그것은 지금의 우리가 할 일이야. 죽은 사람한테 책임을 물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것이 발전의 개념이야.”

    ****************

    남덕우 이사장은 인터뷰와 별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 과에 대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 글을 기자에게 건넸다. 자신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글이므로 기사 작성시 인용해달라고 했다. 다음은 그 글의 요지다.

    - 5·16쿠데타를 어떻게 보는가.

    민주주의 시각에서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면 당시의 현실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당시 민주주의 경험이 없는 신생국가의 국민은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또 대의정치 경험과 전통이 없는 정치권은 정쟁의 혼란에 빠져 빈곤에 찌들고 공산당의 위협에 떨고 있던 국민을 이끌 만한 지도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불행한 현실이 없었던들 군인들이 자신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모험을 했겠는가. 박정희와 그의 동지들은 구국의 대의를 위해 궐기했다고 믿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는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매도하면서 무지막지한 김일성-김정일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3권분립이 이뤄져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정부를 비판하는 국회와 언론이 있고 학생 데모가 끊이지 않던 나라를 독재국가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외국의 학자들은 박정희 정권을 독재정권이 아니라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표현한다. 독재라기보다는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해 후진적인 대의정치를 하는 과정에 크고 작은 불상사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짓밟지 않았는가.

    박 대통령의 통치 목표는 ‘일면 국방, 일면 건설’이었다. 정치적 민주화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박 대통령은 내가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임을 의식해서인지 사석에서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하고 반문한 일이 있다. 그는 절대적 빈곤과 한국적 정치문화의 토양에서는 서구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박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모르거나 부정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새마을사업의 계획과 집행을 마을사람들의 토의와 합의에 맡겨 새마을운동이 민주주의의 도장이 되게 하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의 정당정치에 혐오와 불신을 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정치는 자신이 맡을 테니 경제장관들은 오직 경제개발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대통령의 강압정치 때문에 정치는 항상 불안정한 상태였지만 행정은 질서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개발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다.

    -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공유한 대통령을 어떻게 봐야 하나.

    지도자는 이념적 지도자와 실천적 지도자로 구분할 수 있다.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해공 신익희 선생 등이 이념적 지도자다. 실천적 지도자로는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이념적 지도자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드높인다. 반면 실천적 지도자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 때로 그 이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영국 청교도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철권통치를 폈다. 그가 죽은 후 왕정을 복구한 찰스2세는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했다. 그러나 영국 백과사전은 크롬웰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확립, 경제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 확대, 사회정의 실현 등이 포함된다.’

    나는 영국 의회 마당에 있는 그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 일이 있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글과 말로 좋은 소리를 하는 지도자에게는 존경을 표시하지만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흙탕물에 뛰어든 실천적 지도자는 옷에 흙을 묻혔다고 해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이 아닐까.

    - 과거사 진상규명 논쟁을 어떻게 보나.

    관념주의와 현실주의의 싸움이라고 본다. 관념주의자들은, 김일성은 북한에서 해방 직후 친일파를 숙청해 민족정기를 바로세웠는데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기용해 민족정기를 말살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이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나라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현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소련 공산주의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 민족의 장래를 위한 최우선 과제라고 인식했다.

    이 대통령이 신생국가의 행정기구를 만드는 과정에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사실이다. 친일파 외에는 행정경험과 지식이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 데다 좌익과의 투쟁을 위해서는 친일인사들을 숙청하는 것보다 포섭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MBC가 방영한 ‘만주의 친일파’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국군 창설 당시 얼마 되지 않는 광복군 장성(이청천 장군과 같은) 외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일본 육사출신이나 만주군 말고 누가 있었나. 그래서 이들이 국군 창설의 주역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사망한 일제하 친일 군인과 경찰을 조사하겠다고 한다. 그들이 유죄라면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당시의 지도자가 문제가 되고 그 지도자의 지도자도 문제가 될 것이다. 결국 한없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책임의 소재를 가릴 수 있을 터인데 정치권은 자신의 잣대로 과거를 심판하겠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연구와 판단은 역사가가 할 일이지 정치권이 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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