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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격론! ‘과거사 전쟁’

진실규명 통해 정의확립해야 사회해체 막는다

  • 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dckim@mail.skhu.ac.kr

진실규명 통해 정의확립해야 사회해체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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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과거사 청산이 필요한가. 5·16 군사정변과 이후 30년간 지속된 군사정권은 식민지 잔재 청산작업과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문제를 뒤늦게 제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최근의 과거청산 거부 태도는 반민특위 당시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런 논리의 핵심은 결국 과거청산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진실규명 통해 정의확립해야 사회해체 막는다

1948년 반민특위가 구성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색출과 처벌활동이 전개됐으나 얼마 가지 않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진은 법정으로 끌려가는 친일파들.

지난 8월15일 노무현 대통령이 제59주년 광복절 기념 경축사에서 ‘포괄적 과거청산 필요성’을 제기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청산의 당위성과 반대론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이 부친의 전력 문제로 사퇴하는 등 올 하반기 정국은 과거사 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거청산 문제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현재 국회에는 13건의 법률안이 제출돼 있는 상태이고, 9월8일에는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반대 속에서 국회 행자위에 제출했다.

사실 5·18 관련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큰 쟁점이 되고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기까지 했던 지난 문민정권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과거청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던 해는 거의 없다. 가까이는 지난 16대 국회에서 친일진상규명법을 비롯하여 ‘과거청산 4대 법안’이 논의될 때부터 국회가 새롭게 구성되면 이 문제가 전면에 부각될 것으로 예상됐다.

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도쿄 재판과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부터 가까이는 남아공화국의 ‘진실과화해 위원회’의 경험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면 과거청산 요구는 혁명, 전쟁 혹은 정권교체, 민주화 이후 예외없이 제기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혁명세력 숙청, 전쟁 책임 규명, 전범재판 등의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했고, 과거 군사독재나 권위주의 정권 시절 각종 공권력의 반인권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 등 온건한 방식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에 비춰보면 한국은 아르헨티나, 칠레, 남아공화국 등지에서 민주화 이후 바뀐 정권에 의해 제기된 과거청산과 현상적으로는 유사하나, 4·19혁명 직후부터 6·25전쟁 당시 학살 피해 유족들의 진상규명, 명예회복 요구가 줄기차게 진행돼온 점을 생각해보면, 사회운동 방식으로 밑에서부터 제기돼왔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정권 시절 의문사 유족들이 400일 이상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을 해 의문사위원회 구성을 이끌어낸 일이야말로 한국이 과거청산의 살아 있는 현장이 된 사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과거청산 최적 시기는 4·19 직후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멀리는 100년 이전의 사안에서 출발하여 가까이는 최근의 군 의문사 사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사안이 한꺼번에 또 정치권에 의해 전면에 부각됐는가.

우선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수많은 인권유린, 국가폭력 사태를 겪어왔지만 한번도 제대로 과거청산을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식민지체제, 전쟁, 독재가 종식됐을 때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갔어야 할 사안이다.

가장 적당한 시점은 바로 4·19혁명 직후 시기다. 당시 6·25전쟁 피학살자 문제와 데모대에 대한 발포 책임자 문제가 전면에 부각됐고, 친일파 문제는 아직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여명의 어린 학생들에게 발포한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은 거의 전원이 일제 때 관리·경찰을 지낸 적극적인 부일협력자들이었다. 이승만 정권 자체가 바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 친일세력 정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실 부일협력자들이 바로 6·25전쟁 당시 양민 학살의 당사자였으며, 또 4·19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였으므로 그 이상으로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기 좋은 시점은 없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이 이 모든 문제를 다시 땅에 묻었다. 이렇게 본다면 5·16군사정변은 부일협력세력, 6·25전쟁 민간인 학살세력, 군사독재 하수인들의 위기의식의 결정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정권의 성장지상주의는 일차적으로 당시 한국사회를 이끌던 세력이 자신의 도덕적 결함을 경제적 성공으로 만회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결국 5·16군사정변과 이후 30년간 지속된 군사정권이 식민지 잔재 청산작업과 6·25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 문제를 뒤늦게 제기하게 된 원인이다. 물론 5·16군사정변이 없었다고 해도 과거청산이 충분히 이뤄질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당시 제2공화국은 4·19혁명 당시 발포 책임자를 거의 무죄로 간주해 석방했으며, 거창 등 유족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반공법을 강화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1949년 반민특위 당시에도 당시 이승만과 한민당은 반민특위가 “빨갱이를 즐겁게 한다”, 반민법이 “우리 경제를 하루빨리 복구시키는 법이 우선이다”라고 과거청산세력을 공격하고, 또 일부 극우세력이 반민특위에 앞장선 인사들에게 협박과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이것은 과거사가 들춰지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판단한 구세력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컸으며, 그들이 과거청산을 방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국론분열론’ ‘경제우선론’ ‘정략론’ ‘진상규명 불가론’ ‘무용론’ ‘학술작업 우선론’ ‘부관참시론’ 등 오늘 한나라당과 주류 언론이 구사하는 과거청산 거부 태도도 과거 반민특위 당시의 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모든 논리는 결국 과거청산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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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dckim@mail.s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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