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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국회 ‘밀사정치’ 막전막후

  • 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ee@hk.co.kr

17대 국회 ‘밀사정치’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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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부영-김덕룡 전화통화, “박근혜 빼고 가자”
  • 이강래-홍준표 물밑접촉, 국보법 대체안 문구 조율
  • 염동연-이정일 光州행보, 수차례 합당 타진
  •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입법 처리를 놓고 여야는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하게 대치한 끝에 예산안과 이라크 파병연장안을 통과시켰다. 우연이었을까.
  • 아이러니컬하게도, 여야간 충돌이 격화될 때엔 막후 밀사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진다. 최근의 정치상황도 예외는 아니다. 17대 국회 정치권 밀사들의 움직임을 들여다봤다.
2004년12월31일. 갑신년의 마지막 날 저녁, 국회의사당 초시계가 또각또각 돌아가고 있었다. 피곤에 찌든 기색이 역력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 의장석을 둘러싸고 있었고, 열린우리당 의원 몇 명은 주변을 배회했다.

새해 예산의 회기 내 처리는 불투명해 보였다.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원은 ‘불법체류자’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밤 8시15분. 김원기 국회의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과거사기본법’의 처리는 해를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하는 중재안을 발표했다. 4대 법안 가운데 신문법 개정안만 해가 가기 전에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의원총회를 열었다.

단상에 선 김덕룡 원내대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의장님이 중재안을 내셨다. 지금부터 이를 수용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비공개 토론을 갖겠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켠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토론은 무슨 토론, 받으면 되지.”

이재오 의원이었다. 이것이 신호가 된 듯 홍준표 의원 등 이른바 한나라당의 ‘입’들이 일제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의총장이 술렁댔다. “두말할 것 없잖아. 받아야지” “이 정도 했으면 됐어”…. 분위기가 잡히기 시작했다. 2005년 예산안과 파병연장안이 통과됨으로써 파국만은 막을 수 있었다.

하루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기대를 모았던 4인 대표회담이 12월27일 성과 없이 종료됐지만 여야는 이틀을 더 허비했다. 12월30일, 김원기 의장 주재로 원내대표회담이 오전부터 열렸지만 결실을 낙관하기 힘들어 보였다.

오후 2시. 한나라당의 첫 번째 의원총회가 소집됐다. 김덕룡 원내대표가 뜻밖에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의총장에 입장했다. 그의 손에는 ‘쪽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여야간 합의된 내용”이라며 쪽지를 읽어 내려갔다. 주요내용은 4대 법안 가운데 사립학교법 개정안만 이듬해로 넘기고 국가보안법 과거사기본법 신문법 3개 법안은 연내에 처리키로 하는 이른바 ‘3+1’해법이었다. ‘뜨거운 감자’ 국가보안법을 대체입법 처리하기로 합의했다는 발표에 의총장이 술렁댔다.

한나라당에는 불리할 것 없는 내용이었다. 추인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홍준표 의원이 단상에 올라 “원내대표 고생하셨다”며 이례적으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의원총회 직전부터 상기돼 있던 박 대표가 발언대에 올랐다.

“어떻게 입맛에 다 맞게 하나요”

“마음이 슬프고 한계를 느낍니다. 지켜야 할 가치를 꼭 지키려 했는데 그러지 못해 마음 아픕니다…저 혼자 할 일이면 밟고 가도, 죽이고 가도 핵심 가치를 지키겠지만 저는 혼자가 아닙니다…과거사기본법의 경우 김 원내대표는 저와는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합의했습니다. 저는 몰랐는데 많이 진행이 됐습니다. 그래서 안면몰수하고 나가기 힘들어졌습니다. 막자고 할 수 없게 됐습니다…어떻게 다 입맛에 맞게 하겠나요. 한계나 현실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 대표의 말을 풀이하자면 이렇다.

‘김 원내대표가 가져온 합의안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수용하겠다. 하지만 김 원내대표는 나도 모르는 부분에서 합의를 진행시켰고 과거사법의 경우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

김 원내대표와의 이상기류를 드러내놓고 공식화하는 발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단단히 틀어졌음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같은 시각 열린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거부되고 말았다. 협상의 주역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에게 강경파 의원들의 비난이 빗발쳤다.

여야 원내대표는 재협상에 들어갔다. 김 원내대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저녁 식사후 한나라당은 다시 의원총회를 열었다. 김 원내대표는 과거사기본법과 신문법만을 회기 내에 처리하고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을 다음해로 넘기는 이른바 ‘2+2’해법을 아예 합의서까지 써와 의원들 앞에 내놓았다.

하지만 두 번째 합의는 한나라당 쪽에서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박 대표 측근인 진영 대표 비서실장을 시작으로 합의서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이미 첫 번째 합의를 놓고도 김 원내대표에 대한 박 대표의 불쾌한 심경이 확인된 마당이었다. 한 발 더 물러선 합의서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비토를 선언한 한나라당 의원들은 점거농성을 벌이기 위해 곧장 본회의장으로 향했다. 자신의 서명이 선명한 합의서가 면전에서 휴짓조작이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김 원내대표는 얼굴이 붉어진 채 도중에 의총장을 빠져나갔다. 그시각 이후 그는 국회 원내대표실에 칩거했다.

첫 번째 합의에서 이부영 의장이 녹다운됐다면 두 번째 합의에선 김덕룡 원내대표가 궁지로 몰린 셈이다. 본회의장에 모여든 한나라당 의원들의 얼굴에 긴장과 오기가 교차했다. 의장석을 점거하고 자리를 차지한 의원, 자기 자리에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의원…. 그 사이로 분홍 재킷을 입은 박근혜 대표의 얼굴이 보였다. 박 대표도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빛이 역력했다. 맨 처음 박 대표에게 다가간 이는 홍준표 의원. 둘은 선 채 5분 정도 얘기를 나눴다. 이후 박 대표는 중진 의원들과 차례로 머리를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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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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