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자주노선’의 기수 鄭나라, 후계자 분규로 무너지다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1-25 18: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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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정(鄭)나라의 수장 장공(莊公)은 왕가의 측근임에도 동주(東周) 왕실에 맞서 자주외교를 펼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난 정치가적 자질을 보이던 장공 역시 자신과잉증에 사로잡혀 후계문제를 매듭짓지 못한 결과 그의 사후 정나라의 운명은 신임했던 측근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만다.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자주노선’의 기수 鄭나라, 후계자 분규로 무너지다
    천도(B.C. 770) 후 동주(東周) 왕실의 권위를 거듭 추락시킨 것은 제후들의 ‘자주노선’이다. 그 선구자는 제후국인 정(鄭)나라의 장공(莊公)이었다. 귀족 서열을 따지는 위계로 보면, 세 번째인 백작(伯爵)에 해당했으니 왕실과 퍽 가까운 혈통이었다.

    당시 귀족의 작위는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등급으로 구분했는데, 후세에 일제가 이를 모방하기도 했다. 얼른 보아 왕가에서 분가한 제후국이 감히 왕가, 즉 종가에 맞서 자주노선을 추구했다니 퍽 고약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나, 비정한 권력의 세계는 원래 그런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군주 혹은 독재자, 개혁자는 신변 안전을 위해 우선 측근부터 경계해야 한다.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야당세력에 대한 사찰은 그 다음의 일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부왕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측근 파우사니아스에게 시해당했다.

    현대에 와서도 한국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기가 직접 중용한 동향이자 동문·동지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저격당해 파란 많은 이승을 하직했다. 부언한다면, 경호 책임자를 고를 때는 절대로 권세를 즐기거나 오만하거나 질투심이 매섭거나 주의력이 산만한 자를 기용하지 말아야 한다.



    정나라 장공의 부친은 무공(武公)이고, 모친은 무강(武姜)으로 장공은 그 장남이다. 동생은 공숙단(共叔丹)이라 불렸다. 그런데 장공은 거꾸로 태어난 아이였다. 발이 머리보다 먼저 나왔으니 모친의 산고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반면 아우는 순산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 무강은 장공을 몹시 싫어했으며, 공숙단을 편애했다. 자고로 형제 중 한쪽을 편애하면 어김없이 그들 사이에 불화와 투쟁이 초래되게 마련이다.

    편애가 빚은 형제싸움의 비극

    나아가 무강은 공숙단을 태자로 세우려 무공에게 자주 진언했으나, 무공이 들어주지 않았다. 무공이 사망하자 종법대로 장공이 즉위했다. 그러자 무강이 장공에 대해, 아우 단에게 제(制)라는 요지를 영토로 떼어주라고 강권했다. 장공은 거절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제 지방은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그 점이 화를 불러 이전에 제를 수비하던 혁숙이 적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전사했지요. 다른 고을이라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수비 시설이 견고하다는 경성(京城)을 내주시오.”

    이 대화에서 젊은 장공의 두뇌활동이 보통 이상이며 이에 맞서 거절의 이유를 역이용하는 무강도 비상한 여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장공은 모친의 요구를 계속 거절할 수 없어서 아우 단을 경성의 영주로 삼았다. 그러자 대부(大夫)인 제중(祭仲)이 장공에게 간하였다.

    “수도가 아닌 고을임에도 성벽의 길이가 300장(丈)을 넘으면 국가에 해롭습니다. 종래의 제도를 볼 적에 성벽이 아무리 길다 해도 수도의 3분의 1을 초과해서는 안 됩니다. 보통 고을이라면 5분의 1, 작은 고을이면 9분의 1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경성의 성벽은 유별나게 길어서 고래의 제도에 위반합니다. 그대로 방치하다간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친의 각별한 소망이시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모후님의 바람엔 한계가 없습니다. 이쯤에서 막아야합니다. 모두 들어주시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나중엔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잡초는 발호하고 나면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주공의 귀한 동생에게 과오의 기회를 제공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다지 걱정할 것 없겠지. 좋지 못한 행위를 꾸미는 놈은 반드시 자멸하게 마련일세. 좀더 두고 봅시다.”

    그러는 동안 공숙단은 정나라 서부와 북부의 인민들로 하여금 장공에게 등을 돌리고 자기에게 귀순하게 만들었다. 대부이며 공자인 려(呂)가 장공을 꾸짖듯이 간하였다.

    “두 사람의 주공을 섬겨야 한다면 인민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대체 어쩔 셈입니까. 만약 아우님에게 양보하실 생각이라면 저도 그쪽으로 귀순하겠습니다. 양보가 아니라면 아무쪼록 화근을 뿌리뽑아야 할 것입니다. 인민이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치하셔야 합니다.”

    “최후 수단에 호소할 필요는 없겠지. 좀더 두고 보면 그쪽에서 스스로 화난을 뒤집어쓸거야.”

    드디어 단은 형과의 공유지마저 완전히 자신의 영지로 전변시키는 등 영토확장에 동분서주했다. 자봉(子封·공자 려의 자(字))이 거듭 말하였다.

    “이제 손써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그의 영지가 넓어지면 세력도 커집니다.”

    그러나 장공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민심은 부정을 일삼는 자로부터 이탈하게 마련이다. 그는 영토를 확대했으나 자멸하고 말 것이다.”

    급기야 단은 성곽을 수리하고 물자를 적립하며 무기를 손질하여 보병에서 병차까지 모든 전투준비를 마쳤다. 언제라도 나라의 수도를 습격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그리고는 무강이 성내에서 내응(內應)할 수순까지 짜놓았다.

    한편 장공은 아우 단과 모친 무강이 주고받은 모략의 밀서를 증거로 압수하자 즉각 대응 행동을 취했다. 공자 려로 하여금 병차 200승을 포함한 2000 병력을 인솔하고 선제공격으로 경성을 급습케 했다. 때를 같이해서 경성 주민들이 단을 배반하고 일제히 귀순, 협력해왔다. 마침내 단은 외국으로 망명했다가 모친을 원망하면서 자살하고 말았다.

    장공은 모친 무강을 지방의 고을로 이사가게 하면서, “이승에서는 다시 만날 생각이 없소. 저승 가면 황천(黃泉)길에서나 만날까요”라고 단언했다. 민심은 그의 심정을 이해했다.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의 일이라고 춘추(春秋)에 썼으니 서기로 치면 기원전 722년의 사건이다.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

    군사 문제가 얽혀 있고, 모친마저 편파적으로 개입한 그 착잡한 형제 분규를 해결한 장공의 솜씨에서 무엇보다 높이 평가할 것은 그의 슬기로운 정치 자세다. 한마디로 때를 기다리는 참을성이다. 그는 무려 22년을 기다렸다. 또 시기적인 성숙을 확인하는 조건 형성의 지표로서, 민심의 향배와 여론의 지지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평가할 수 있다.

    나아가 행동개시 시기가 무르익었음을 보자 번개처럼 달려들어 적을 일거에 협공·섬멸했다. 대기할 때는 신중했으나 기회 포착엔 신속·과감했다.

    아울러 그때그때 사태 발전에 따라 신하와 참모들의 진언을 들으면서 유사시에 중용할 인재를 미리 내정해 두었으니이 또한 장공의 우수한 정치가적 자질을 말해준다.

    종래의 ‘춘추필법’에 의하면, 형을 섬기지 않고 탈권을 노린 아우 단의 잘못이 크다. 하지만 형인 장공도 동생을 훈계·인도하여 정도를 걷게 하는 대신 토벌하여 파멸시켰으니 역시 규탄당해야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치게 도덕적인 설교라 하겠다. 권력의 생리와 정치의 심리를 외면한 비현실적 설교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성인이라면 애당초 권력의 세계에 뛰어들거나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정치에도 이상이 있고, 정치가는 목적과 목표를 설정한다. 그러나 이에 접근하기 위해 힘을 겨냥하는 현실정치 자체는 어차피 현실적 이익을 앞세우게 마련이다.

    중국사에 대서특필되는 명군인 당(唐) 태종 이세민은 형제를 향해 활을 쏘았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현군 솔로몬 대왕도 이복형을 막다른 처지로 몰아갔다. 이상은 우러러보고, 현실은 바로 보아야 한다. 정나라 장공은 형제분규가 낙착되자 모친과 화해하고 다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장공이 운용한 병법은 이른바 ‘잡기 위한 놓아두기’의 계략이다. 한문으로는 ‘욕금고종(欲擒故縱)’으로 쓴다.

    오늘날 경찰의 상투적인 수사기법 중에 범인을 알고도 모른 체하고 당분간 놓아두면서 미행과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범인의 접촉대상과 행적을 살펴 그 조직을 일망타진하든지 여죄를 추궁하려는 것이다.

    군사에서는 적의 기도를 알고도 모른 체하여 적의 경각심을 해이 또는 마비시켰다가 불의에 기습하는 작전이 있다. 정치에서는 적의 실태(失態)와 태만을 은근히 부채질하여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 뒤 결정적으로 민심이 적으로부터 이반하게 만든다.

    낚시에서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우선 미끼를 던져주고 유혹했다가 달려든 것을 낚아 올린다. 대어가 힘을 내어 도망가려 하면, 우선 릴의 낚싯줄을 풀어주었다가 나중에 힘이 빠질 때 끌어올린다. 장사를 보아도 성공하는 사람은 우선 소비자에 대한 서비스에 주력했다가 나중에 판매실적을 올린다.

    ‘잡기 위한 놓아두기’

    ‘잡기 위한 놓아두기’ 또는 풀어주기라는 전략전술 아이디어는 인간을 치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착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독서인들은 그 고안의 출처가 중국 고전인 ‘역경(易經)’ 혹은 ‘노자(老子)’라고 설명한다.

    ‘역경(주역)’을 보면 수괘(需卦·‘需’는 기다림을 의미한다) 제5에 상응한 계시가 있다. 사태진행의 앞날이 험난할 것으로 느껴질 때는 가장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마음 편히 대기하라는 것이다. 즉 행동할 시기가 성숙하지 않았다면 서둘러 다투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고 한다. 잘 먹고 잘 자되, 조용히 원칙을 지키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가르친다. ‘주역’은 책의 성립연대로 보아 장공도 읽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노자’ 36장은 유사한 철학을 말하면서도 한층 더 구체적이다. ‘상대방의 행동반경을 줄이려면, 우선 당분간은 그의 마음대로 뻗어나가게 하라’고 했다. 사실 뻗을 대로 뻗으면 무리하게 되고 지장이 생기게 마련이다. 국가간 전쟁에서도 ‘공세(攻勢)의 한계’를 예견해두는 법이다. 들떠서 한계를 넘어서면 보급이 닿지 않고 역량 투입도 어려워 패전을 초래한다. 히틀러처럼 자신과잉증에 걸리거나 성격이 경망하여 ‘힘의 한계’를 모르고 ‘밀어붙이기’나 일삼다가는 결론이 좋지 않다.

    이어 ‘노자’는 말한다. ‘상대방을 약하게 만들려면 당분간 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쇠퇴시키려면 당분간 융성하게 만들어준다. 빼앗고자 하면 당분간 내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요컨대 ‘노자’는 전쟁에 이기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통일하려면, 우선 상대방을 세워주고 나서 넘어뜨리는 것이 비결이라고 가르친다.

    이 책의 저작 시기로 미뤄 장공은 ‘노자’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장공은 개인심리는 물론 사회심리에 밝아 인간성의 미묘한 기미를 헤아리고 있었다. 반면 공숙단은 혈기만 왕성해서 몇 차례의 성공에 들떠 있었다. 한계를 헤아리지 못하고 밀어붙이기를 일삼았으니 승패의 가름은 보나마나했던 것이다.

    다수와 싸우는 소수의 전술

    장공은 퍽 오래도록 아우의 반란 가능성에 신경을 썼고 이에 대비하느라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구체적으로는 천도 후의 동주 왕실을 찾아가 조하(朝賀)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경사(卿士)로서 국왕의 측근에서 나라 일을 거드는 직책에 충실할 수 없었다.

    한편 동주의 평왕은 천도 후에 야릇한 고독감과 초조감을 떨치지 못하는 가운데, 장공을 못마땅히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장공의 말 못하는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그에게 절망한 평왕은 새 대안 찾기에 골몰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공은 급거 낙읍의 궁전을 찾아가 문안을 드리면서 평왕의 의도를 알아 내려고 애썼다. 그러자 평왕은 장공을 위무해주면서, 정녕 자기를 믿을 수 없고 안심하지 못한다면 서로 인질을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자기는 태자 고(孤)를 인질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신중치 못한 경솔한 처사였다. 국왕과 신하 사이에 대등한 인질 외교를 벌이겠다니 말이 아니었다. 이는 예법에 어긋난다. 그뿐더러 국왕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리는 그 경망한 처사로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하기야 평왕은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는 후회막급으로 배꼽이 뒤집힐 뻔했다. 얼마 후 평왕은 심장마비 같은 증세로 급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인질로 갔다가 부왕의 급서로 돌아온 태자 고가 즉위했다. 바로 주(周)왕조의 환왕(桓王)이다. 환왕은 부왕의 급서와 임종에 입회하지 못한 모든 책임이 정의 장공에 있다고 여겨 그를 증오했다. 그래서 조정 내 장공의 역할을 박탈하고 냉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장공이 분노할 차례였다. 그 열화 같은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대부인 제족(祭足)이었다. 제족은 장공에게 “우리측도 만만치 않다는 실물 교훈을 보여주고, 일찌감치 견제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진언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제족 자신이 사병을 거느리고 주왕의 직할 영토에 들어가 논밭에서 수확물을 거둬간다는 것, 그리고는 주왕이 격분하되 대응하지는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만약 사태가 의외의 방향으로 비화하면 자기에게 책임을 전가하라고 했다. 장공이 묵인했다.

    드디어 주 환왕은 격분을 가누지 못해 장공을 토벌키로 결심했으며, 제후들의 군대를 동원하되 국왕 자신이 친정(親征)했다.

    운동에 관한 뉴턴의 제3법칙에 의하면, 무릇 ‘작용이 있으면 같은 강도의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그 상호작용이 거듭 치솟으면, 이른바 ‘에스컬레이션’으로 대결의 치열성도 솟구친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 그리고 변수는 무엇인가를 정보기관에만 내맡기지 않고, 스스로 큰 테두리에서 판단하고 미리 내다보는 것이 정치가와 사령관의 통찰력(insight)이다.

    장공은 통찰력 면에서 탁월했으며, 동시에 민의수렴을 위한 지혜 집중에도 우수했다. 식견과 지능이 뛰어난 인재들만 골라 작전회의를 제때에 개최했다. 부족한 사람들이 떠들면 인재들이 침묵하기 때문이다.

    ‘자주노선’의 기수 鄭나라, 후계자 분규로 무너지다

    정나라는 춘추전국시대에 독립·자주노선을 최초로 표방한 국가였다. 오늘날 한국에선 한미동맹 강화를 주장하는 ‘동맹파’와 자주노선을 중시하는 ‘자주파’간의 갈등설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은 2004년 11월 칠레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

    정세를 분석해보면 적군은 왕사를 비롯 채(蔡), 위(衛), 진(陳) 등 세 나라 제후군이 합세했다. 병력은 많으나 약점도 컸다. 명장이 없는 오합지졸(烏合之卒)을 방불케 했다. 하기야 오합지졸이라도 쉬운 싸움에 공명을 세울 기회가 많아 보이면 제법 달려들 것이다. 또 그들은 환왕의 앞보다는 주로 좌우에 포진해 있게 마련이다.

    대응 작전은 환왕이 타고 앉은 병차를 집중 공격해 결판을 낸다는 것. 우선 덩치만 크고 허약한 진나라 군대를 쳐서 혼란의 파급 효과를 극대화한다. 왕사를 고립시키고 나서 이를 집중공격한다는 것이다. 작전치고는 일등 작품이다. 알렉산더 대왕도 소수 병력으로 적의 대군을 칠 때 이와 유사한 작전을 구사했다.

    주 환왕의 병차를 목표로 집중공격을 퍼부을 때의 일이다. 정군의 축담 장군이 쏜 화살이 환왕의 왼쪽 어깨에 꽂혔다. 삽시간에 혼란이 극대화됐다. 근위군은 왕을 에워싸고 우왕좌왕하며 후퇴하기에 바빴다. 제후군들은 그 기미를 알아채자 뿔뿔이 흩어져 싸움터를 빠져나갔다. 왕군의 결정적인 대참패였다. 사기충천한 정군 장병들이 급거 추격에 나서려 했다.

    ‘자주노선’의 명암 쌍곡선

    그러자 장공은 재빨리 ‘상황 끝’을 선포했다. 필승의 추격을 급정거시킨 것이다. 곧이어 푸짐한 예물을 실려 사죄사를 환왕한테 보냈다. 사죄의 글월도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자기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것, 가문을 지키고자 자위하다 보니 뜻밖에 옥체에 상처를 입게 해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라는 것, 조정의 노여움을 초래한 거동을 일삼은 대부 제족에겐 반드시 형벌을 가하겠다는 것… 미흡한 물자를 보내드리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사죄하는 입장에서 천만분의 1이라도… 등등.

    환왕은 글월을 읽자 가까스로 체면을 세운 양 정식으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정나라를 토벌할 생각을 영원히 접은 것이다. 제후들도 멋쩍게나마 그 정도로 납득하고 돌아갔다. 이 정도면 약소국의 ‘자주외교’로서 합격이다.

    그 후 장공은 환왕을 활로 쏜 축담이나 음모를 꾸민 제족 등에게 공개적으로는 표창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는 푸짐하게 논공행상을 했다. 특히 제족을 일등공신으로 대우했는데, 나중에는 제족의 권세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게끔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천하대세에 끼친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지대했다. 우선 왕실의 권위가 완전히 실추됐다. 따라서 제후 열국에 행동 자유가 주어지는 계기가 됐다. 즉 독립·자주 노선이 보급됐다. 그 선구자가 바로 장공인 셈이다.

    물론 독립국가 사이에 방치된 자유는 ‘침략의 자유’와 더불어 ‘멸망의 자유’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독립·자주와 자유 분위기 속에서만, 신경지의 개척과 활발한 발명·발견, 그리고 창조와 발전이 가능하다. 이런 진취적인 면에 대한 고려 없이 고식적인 평화와 정체만을 일삼다가는 비참한 멸망에 이르고 말 것이다. 그것이 민족 기초사회의 흥망과 인류 문명사회의 진퇴에 관한 법칙성이다.

    강유상제(剛柔相濟)의 계략

    그런데 정 장공이 주 환왕을 격퇴한 슬기로운 전후수습의 방식은 병법상 ‘꿋꿋함과 부드러움을 아울러 쓰는 꾸밈새’, 즉 ‘연경겸시(軟硬兼施)’의 계략 또는 ‘강유상제(剛柔相濟)’의 계략이라고 하는데, ‘굳음과 무름을 때에 맞춰 번갈아 쓰는 꾸밈새’란 뜻이다.

    이 계략의 묘미는 상대방을 치되 그 체면을 세워주는 데 있다. 그래야만 승리를 공고히 할 수 있으며, 상대방을 오래도록 순종시킬 수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깊은 인상을 남긴 전통적 계략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승리 후 당시장제스(蔣介石)가 영도하던 중국정부는 패전한 일본에 대해 배상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다. 그뿐더러, 천황제를 유지하려는 일본의 희망에 힘을 보태주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책결정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毛澤東)도 동의했으며, 중국 정치인치고 어느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바 없다. 중국인의 유연한 양면적 사고방식과 포용·동화의 문화전통을 말해주는 실례다.

    그런데 인간심리의 본령과 그 동태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대동소이하다. 우선 잘났건 못났건 자기제일주의이다. 이러한 심리는 생리적 욕구와 마찬가지로 부단히 운동하거나,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조건이 변화하면 반응하고, 도전에는 대응한다.

    연경겸시(軟硬兼施)의 계략 운용에서 특히 유심할 것이 있다. 꿋꿋함과 부드러움, 굳음과 무름, 엄격함과 관대함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집착할 것이 아니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경험적 교훈은 이미 언급했다. 엄하기만 하면, 원망이 늘고 자발적 협조가 없어진다.

    한편 관용에 치우치면 으레 태만하거나 문란해진다. 그래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도 집권 후 정치질서가 어지러워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속을 강화하다가 결론이 어설프게 되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치심리의 기미는 원칙적으로 알 수 있다지만, 운동의 방향 설정에서 순서와 조정의 문제가 남는다. 특히 새로운 집권이나 부임에 즈음해선 당장 결정할 양자택일의 문제가 제기된다.

    ①선엄후관론(先嚴後寬論) : 마키아벨리는 강조하기를, ‘우선 자기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잔인하게 행동하되, 그 후에는 꼬리를 끌지 않고, 되도록 준민(浚民)들을 보살피는 것’이 현명하다고 했다(‘군주론’ 8장).

    ②선관후엄론(先寬後嚴論) : ‘손자병법’은 가르치기를, ‘사병들이 아직 친근하게 따르지 않는데도 징벌을 일삼으면 그들이 심복하지 않으므로 쓰기 어렵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손자’ 행군편).

    손자가 말한 ‘심복’의 조건은, 현대라면 이념과 기대 그리고 임무부여라고 해석함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직에 새로 취임하면, 원칙적으로 행동하며 말을 적게 하여 개인적 자질을 불가측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위신을 증대하는 길이다.

    중용(中庸)의 선택이 있다지만 운동에는 변화과정의 비축을 의미하는 휴식은 있으나 정체(停滯)는 없다. 정체는 일찍이 아이젠하워가 갈파한 대로 후퇴나 파멸을 초래한다.

    후계자 분규와 정(鄭)의 몰락

    정(鄭)나라는 장공 때 제법 ‘자주적’인 ‘중원의 패자’로 급부상해 위세를 떨쳤으나, 그가 기원전 701년에 병사하자 급전직하 형편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가장 큰 원인은 후계자 분규였는데, 그 내분에 간휼한 권신 제족이 개입하여 문제를 더욱 복잡다단하게 만들었다.

    후세의 일이지만, 중국의 독재자 마오쩌둥은 후계자 문제를 가리켜 “우리 당과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또 “제국주의 예언자들은 소련에서 일어난 변화를 논거로 삼아 이른바 ‘평화적 이행’에 관한 희망을 중국당의 제3대 혹은 제4대 사람들에게 걸고 있다”고 경고했다(‘인민일보’ 1964년 7월14일자).

    하지만 그가 1976년 9월9일 사망하자, 한 달도 못 된 10월6일에 벌써 ‘4인방 소탕’ 등 새로운 권력투쟁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에 열린 11기 3중 전회 이후로는 ‘개혁과 개방’ 노선이 대다수 중국인의 환호 속에 마침내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덩샤오핑(鄧小平)과 그 추종자들이 추진해온 시장경제와 폭넓은 개방정책은 이미 불퇴전의 것으로 정착되었음을 헤아리게 한다.

    본디 독재정권이 후계자 문제를 유루(遺漏) 없이 해결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이 반드시 충족돼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①독재자가 생전에 후계자를 확정짓고, 의문의 여지가 없도록 공지해야 한다.

    ②그리고 생전에 인사권을 넘겨줘야 한다.

    ③후계자가 군대와 정치경찰 및 핵심 조직을 장악토록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 정나라의 장공과 마오쩌둥은 자신과잉증에 걸려 자기가 급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이럭저럭 주저하다 이승을 떠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특히 장공의 경우 관례상 장남이 태자였으나 차남이 더 똑똑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종법상의 고려와 현실정치 간의 모순을 풀기 어려웠다. 게다가 자신이 젊을 때 장남으로서 겪은 형제싸움의 심층심리가 미묘하게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차피 모순이 심각하게 얽히면 한국의 속담대로 ‘갈 데까지 가야 한다’는 도리를 되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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