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6월호

‘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동아지중해’ 모델 발판으로 ‘중핵 조정’ 역할 장악하라!

  • 글: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고구려사 ymc0407@yahoo.co.kr

    입력2005-05-23 18: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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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변하는 동아시아 세력 질서 속에서 한국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의 이른바 ‘동북아 균형자론’과 관련해 5세기 고구려가 차지한 위상과 이를 위해 구사한 전략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시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은 동아시아를 거대한 지중해로 보고 그 위에 펼쳐진 각국 사이의 외교·물류·군사적 관계망을 제어하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진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21세기, 바야흐로 국제질서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초강대국 중심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중간 단계인 지역화(regionalization)가 동시에 추진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은 군사동맹 외에도 경제공동체에 해당하는 블록을 추진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유로화를 발행했고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확보해 나가고 있다. 반면에 동아시아에서는 이른바 ‘IMF 사태’로 인해 강력한 공동체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미 아세안(ASEAN)을 결성한 이 국가들은 ‘ASEAN+3’ 회의를 통해 2020년 경제공동체를 구성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한국, 중국, 일본과 러시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동아시아의 중심(core) 국가’들은 이러한 흐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다른 지역 블록과 경쟁하는 동시에 동남아지역과 협력하는 경제·정치 공동체가 지역 국가들이 그릴 수 있는 미래의 비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상과 별개로 각국이 군사적 역할 강화와 경제력 향상, 정치적 영향력의 확대를 추구하면서 곳곳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열도(釣魚島) 분쟁,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 등은 각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엿볼 수 있는 징후다. 이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간 한국 정부는 여러 가지 이론 틀을 제시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라는 조어를 유포하면서 동북아 중심 국가를 지향했고, 김대중 정부는 북한문제와 연결하고 아세안과 협력할 것을 구체화하면서 동아시아의 허브로서 ‘한반도 중심론’을 내세웠다. 노무현 정부는 최근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균형자’의 선례, 광개토대왕

    ‘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광개토대왕릉. 2004년 중국정부가 대대적으로 벌인 유적정비사업으로 주변의 가옥 400여 채가 철거되고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매력적인 울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구체적인 비전이 드러난 바 없으며, 실천할 정책 제시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실효성과 실패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국가의 미래상이라는 큰 틀을 조정하는 작업임에도 총체적 전략이나 대국민 설득 작업 역시 미진한 것이 사실이다.



    국가의 발전전략, 특히 국제질서의 변화와 연관된 전략을 수립하려면 과거로부터의 연속성 및 다음 정권 혹은 다음 세대를 염두에 둔 연속성을 전제해야 한다. 당연히 가능한 여러 모델을 만들어 이를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공론장을 통해 공유하고 각각의 효율성을 따져보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모델은 무엇인지, 실패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책이 가능한지 시뮬레이션을 거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발전전략 틀을 검토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특히 노무현 정부가 주장하는 ‘동북아 균형자론’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이론적인 배경을 마련하는 작업으로, 필자는 서기 5세기경 고구려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맡은 역할을 염두에 둔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anean sea)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적 관계를 다시 한번 성찰해보고 그 토대 위에서 고구려가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중핵 조정’ 역할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가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간 수천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동아시아 각국의 세력 경쟁은 이 지역이 지중해적 형태와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한다.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동아시아가 서구 중심의 세계화에 대응하며 독자적인 영향력을 형성하려면 먼저 이 ‘동아지중해 공동체’라는 인식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이 인식 틀을 따라가 보면, 약소국인 한국이 그 질서 속에서 단순한 종속변수가 되지 않으려면 최소한 중핵 조정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동아지중해 중핵 조정 역할’을 실현해 지역의 강국이 된 나라가 바로 고구려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한반도에 존재한 국가 가운데 가장 큰 영토와 충실한 정체성을 갖고 있던 성공한 나라다. 장기적으로 한국이 달성해야 할 목표들을 십수세기 전에 추진했고, 실천했으며, 또 실패한 경험도 간직하고 있다. 반 도사관(半島史觀)에 갇혀 외세 의존적인 경향이 심한 지금의 한반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주지하다시피 고구려 중흥기의 초석을 놓고 대들보를 세운 인물은 광개토대왕이고, 이를 계승해 완성한 인물이 장수왕이다.

    그렇다면 두 임금이 추진한 국가 발전전략은 무엇이었으며, 그 구체적인 모델은 어떠한 형태로 실현됐을까. 중간과정에서 발생한 위기와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이를 살펴보는 일은 21세기의 한국이 앞으로 동아시아의 지역화 과정에서 검토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외교망과 물류망을 통제하라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구려의 왕 고담덕(高談德). 그가 활동하던 4세기 말과 5세기 초의 동아시아는 세계질서와 지역 내 질서가 급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이 지역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 광개토대왕이 통치한 고구려는 단순히 땅이 넓은 국가가 아니라 광범위한 영향력과 다양한 흐름을 하나로 통합해내는 비전을 가진 제국이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미묘한 변화와 시대상황을 간파하고 시대정신을 읽는 데 성공했다. 우선 큰 그림을 그려놓고 정확한 시기를 선택해 필요한 지역에서 단계적으로 정책을 추진했으며, 해당 시기마다 성과를 유효 적절하게 재활용하는 지혜를 보여줬다.

    당시 고구려의 해외활동 가운데 우선 눈여겨볼 것은 북쪽과 요동의 서쪽 지역, 동해와 타타르해로 이어지는 동쪽 방면을 모두 포함해 감행한 ‘북방 공격’이다. 특히 요동지방의 장악은 고구려에 있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가치가 있었다. 이를 통해 잠재적 적국인 화북세력(중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수 있었으며, 몽골 지역에 있는 유목세력과 연계가 가능해져 정치적 조정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서기 402년, 광개토대왕은 요하를 건너 지금의 조양 지역에 있는 연나라 숙군성(宿軍城)을 점령한다. 요서의 조양을 지나면 곧 만리장성의 종점인 산해관을 넘어 북경이다. 지금으로 보면 압록강 하구나 두만강 하구 같은, 사람으로 치자면 목에 해당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한 것이다. 이로써 국제사회에서 고구려가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은 비약적으로 향상됐고 외교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요동은 생산지이자 물류 거점이었던 까닭에 경제적으로도 전략지구였다. 안시성과 건안성이 있던 안산은 지금도 철과 마그네슘 같은 지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철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고, 남방에 수출하는 북방 유목민의 말과 교환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상품이었다. 해양적 가치도 무시할 수 없다. 요동반도의 남단(지금의 다롄, 여순)을 장악함으로써 요동만, 서한만, 대동강 하구, 경기만을 잇는 황해 동안 연근해 항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른바 황해 중부 이북의 바다를 안전한 내해(inland sea)로 만들어 영역권으로 삼고 산둥반도 등 아래의 남부 지역과 해양교섭을 벌이는 데도 유리한 지점이다. 요동을 장악함으로써 광개토대왕은 황해의 외교망과 물류망을 상당 부분 장악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고구려는 직할지인 북부여 일대도 영토로 편입시켰다. 부여는 고구려를 비롯한 한민족 국가의 뿌리였으므로 정통성과 계승성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복해야 하는 원향(原鄕)이었다. 서기 411년 광개토대왕은 친정군을 이끌고 동부여마저 복속시키기에 이른다. 이로써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육지뿐 아니라 연해주 남부 바다 일부와 동해 항로 일부도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됐다.

    이러한 북방 행동은 광개토대왕이 국력을 총동원해 수행한 국가 과제였다. 이 같은 움직임이 단순히 영토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은 당시 만주가 지닌 의미를 되새겨보면 분명해진다. 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에 있어 만주를 확보하는 일은 일종의 수복(多勿) 행위였다. 정치 군사·경제 차원에서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중국은 이 지역을 두고 끊임없는 갈등과 전쟁을 벌여왔다. 만주는 곧 재편될 세계 질서 혹은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모든 나라의 힘이 충돌할 개연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또한 한민족이 통일을 이룬다면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광개토대왕은 대륙의 몇몇 전략적인 ‘목’을 장악하고, 국력을 강화해 고구려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삼핵(三核 혹은 三極), 즉 북방·중국·동방이라는 삼각체제의 한 부분을 확실하게 차지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방은 동아시아의 정치적인 상황과 실질적인 위협 정도, 선대부터 추구해온 국가 목표 등을 고려할 때 가장 급박한 과제였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의 해외활동 가운데 남방으로 진출하기 위한 집요한 시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군사행동과 외교정책을 살펴보면 북방 못지않게 남방에도 국력을 쏟아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남방 진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고구려가 북부전선에서 중국 세력과 경쟁하고 유목종족의 위협을 제거하려면 남부전선의 안정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백제와는 철저히 동맹을 유지하거나 군사력을 동원해 제압해야만 했다. 주목할 것은 당시 국제질서의 판도에서 해양력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세력관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 국가가 주도권을 확보하려면 우선 ‘외교통로를 장악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5세기 고구려는 모든 나라가 교류하는 육로와 해로가 연결되는 지리적인 접점에 있었다. 이 장점을 활용하면 훨씬 수월하게 중핵국가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백제·신라·가야·왜가 중국 지역과 교섭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해상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이를 통해 동아시아의 남과 북이 자국을 통하지 않고서는 경제나 정치 면에서 협력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듯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해양 영토를 확보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즉위 직후부터 백제와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6년째 되던 396년에는 대규모의 수군과 보병, 기병을 활용하는 수륙양면 작전으로 백제의 서울을 공격해 58성 700여 촌을 탈취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 작전으로 고구려는 경기만을 쟁탈하고 서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경기만은 한반도 및 환황해권의 역학관계가 결정되는 거점 핵이다. 중국, 남만주, 한반도, 일본열도를 잇는 황해 연근해 항로가 한반도 중부와 산동반도를 연결하는 황해 중부횡단 항로와 만나는 해양교통의 십자로인 동시에, 각 지역의 강이 바다와 이어짐으로써 물류체계가 일원화되는 거점이다. 또한 백제, 신라, 왜가 중국과 교섭하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요충지이기도 했다(현재도 남한과 북한이 보이지 않는 선을 경계로 경기만을 공유하고 있음은 매우 상징적이다).

    광개토대왕은 경기만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파괴해 백제의 수군 활동을 마비시키는 한편 해양 봉쇄를 통해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백제는 이로 인해 중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으며, 이러한 고립을 타개하는 돌파구로 왜와 동맹을 맺었지만 국제적인 위상은 현저하게 약해졌다.

    1단계 목표를 달성한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향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백제, 가야, 왜군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신라의 요청을 구실로 병자년에는 보병과 기병 5만명을 신라 국경 안으로 진격시킨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해양을 연결고리로 새롭게 부상하는 백제, 가야, 왜를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그해에 곧바로 임나가라를 공격한 후 김해를 발진기지로 삼아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이는 백제 세력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재기를 막으려면 변방의 왜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련의 남방 행동을 통해 한반도 내부의 역학관계는 고구려와 신라가 한편이 되고, 백제와 왜, 가야가 다른 한편이 되는 묘한 힘의 축(軸)을 형성했다. 이러한 지역 내 세력관계는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형성된 국제질서와 복잡하게 얽힌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이 시기 고구려가 추구한 국가적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정치·외교·군사·경제·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지역 내 흐름의 중심이 되어 각국의 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광개토대왕은 국제질서가 급격히 변화하는 상황을 기회로 삼아 이러한 비전을 착실하게 현실화해 나갔다. 전통적인 육지 위주의 질서를 기본으로 새로운 해양 질서를 수용하면서, 대륙의 남부와 한반도 중부 이북의 거대한 육지 영토를 차지하고 거기에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해양 영토를 확보해 명실공히 ‘해륙(海陸)국가’의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곳곳에 전략적인 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질서의 축을 세우고 동아지중해의 중핵(中核, core) 위치를 차지해 모든 나라를 연결하는 거대한 망(網, net)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의 대외정책은 단순한 영토의 팽창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주도권을 확보하는 복합적이고 거시적인 정지작업이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이러한 모델은, 당대의 국제환경이 덜 성숙했고 고구려의 국가 역량 또한 충분하지 못했던 까닭에 그의 생전에 완벽하게 구축되지는 못했다. 그 완성은 그의 아들인 장수왕의 몫이었다.

    장수왕 시기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당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다시 점검해보자. 5세기 전반 동아시아의 동쪽에는 고구려가 있었고, 서쪽은 중국이 북위와 남조(송, 남제)로 분단된 상태였다. 만리장성 너머 북쪽에서는 유연(柔然)이라는 거대한 유목국가가 탄생했다. 유연은 남진하며 북위와 싸우고 있었고, 북위와 송도 간헐적으로 남북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외교가 빈번했고 경제교역과 문화교류 또한 활발했던 까닭에 이 시기 국제관계는 3~4개의 중심 국가를 핵(core)으로 다수의 선이 동시에 연결되는 다중(多重) 혹은 다핵(多核) 방사상(放射狀)으로 변하고 있었다.

    장수왕의 해외 군사활동 가운데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북위와 싸우는 북연을 구원하기 위해 수만의 군사를 파견한 일이다. 그러나 후에는 사로잡은 북연의 왕을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장수왕은 북으로는 북만주 일대, 동몽골의 일부, 연해주 지역을 차지했다. 그리고 곧 수도를 평양으로 이전해 남진정책을 추진했다.

    서기 475년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동원해 백제의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이어 신라를 공격해 남쪽은 경기만 전체와 충주를 거쳐 소백산맥 이남의 영주와 풍기를 지나 동해안의 삼척에 이르는 한반도 중부 이북의 땅을 대부분 정복한다. 이를 통해 요동만, 황해 중부 이북, 동해 중부 이북의 광범위한 해역에서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즉 대륙과 한반도, 동해와 황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명실공히 동아지중해의 중핵 국가가 된 것이다.

    이렇듯 장수왕은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를 이용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중핵 국가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성취해 나갔다. 단순히 국제환경과 자국의 영토 팽창을 연결해 활용한 정도가 아니라 분단된 남북조와 자연스럽게 ‘동시 등거리 외교’를 벌이는 균형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송나라가 북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마(軍馬)를 요구하자 800필의 말을 보냈는가 하면(439년), 이어 화살이나 석궁 같은 군수물자를 보냈다. 이후 장수왕이 남제로 파견한 사신선이 북위에 의해 바다에서 나포되는 사건이 벌어졌지만 북위는 어쩔 수 없이 사신들을 고구려에 송환해야 했다. 이 사건 이후로도 고구려는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고 남조와 교류를 지속했다. 남북조 모두 고구려의 교묘한 해양 등거리 외교를 제지할 만한 현실적인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 고구려는 북방의 유연(현재의 러시아 혹은 몽골)과 송을 연결시킴으로써 북위를 압박하는 포위망을 구축하는 다국간 외교를 주도적으로 전개했다. 일종의 ‘Divide & Rule 전략’이라 할 만하다. 479년에는 유연과 외교적 밀약을 맺어 중간지대인 동몽골 지역에 살던 지두우(地豆于)족의 영역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이러한 구도를 현재의 판도에 빗대어보면 그 파격성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한국이 현재의 동몽골 지역을 몽골 혹은 러시아와 동맹을 통해 나눠 갖고 이를 통해 북쪽과 동쪽에서 중국 정권을 압박하는 구조인 것이다.

    또한 장수왕의 고구려는 한반도 내부의 질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경기만의 장악과 해양력을 바탕으로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북중국과 교섭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고, 때로는 남조 정권과 교섭하는 것마저 해상에서 봉쇄하며 통제하는 식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5세기 중엽 고구려의 세력 판도를 정리해보면, 장수왕은 주변국가들과 한편으로는 대결을, 다른 한편으로는 화친하면서 ‘동시 등거리 외교’와 ‘다핵·다중 방사상 외교’를 실천해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이 구상한 동아지중해 중핵 조정 역할을 완성한 것이다. 또한 물류망을 장악해 고구려를 경제 강국으로 만들었고 고조선의 후예라는 국가 정체성에 충실한 제국을 건설했다. 동아지중해 중핵 역할은 단순히 고구려를 강국으로 만든다는 차원을 넘어 지역 내 질서를 구축하고, 선대의 문화를 수복하며, 정통성을 회복해 계승함으로써 ‘조선’이라는 민족의 원형(foundation)을 재정립(refoundation)하는 작업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는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동북아 균형자’ 元祖, 광개토대왕의 교훈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각. 중국 정부가 방탄유리벽으로 둘러쌌다.

    이러한 거대한 구도는 한반도의 수천년 역사 가운데 오로지 5세기 고구려에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원대한 구도를 21세기의 동아시아에서 어떤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느냐는 것이 될 듯하다.

    역사를 살펴보면 한 국가 주체의 역할과 능력은 사건의 방향을 결정짓고 성패를 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관계나 세력질서의 전환기에는 주체의 능력보다 주변상황과 판도가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 역할’은 기본적으로 이상적인 발상일 수 있지만 현실화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우선 외부적 상황, 즉 천시(天時)의 문제가 있다.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추진하고 나서기에는 지역 내 상황이 터무니없이 불리한 것이 현실이다. 우선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중국의 상황이 불리하다. 중국은 오랜만에 한족을 중심으로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뤘고,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가장 성공했다. 이를 주도한 중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제국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내몽골, 운남, 위구르족 영토, 티베트 등 주변국가나 종족을 억압해 종속시킴으로써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도 거물로 떠오른 지 오래다. 철, 석탄, 석유, 천연가스 같은 풍부한 자원에 전세계 곳곳에 포진한 화교 네트워크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규모에서 세계 5위권에 드는 중화경제권은 앞으로 홍콩과 대만이 점차 통합됨으로써 ‘대중국(Greater China)’이라는 정의에 걸맞은 위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강력한 중화연방의 완성을 지향하는 중국이 통일한국의 출현을 원치 않으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북한에 정치적 이상사태가 발생할 경우 그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해 국경지대에 15만의 인민해방군을 배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의 이러한 의중을 반영한다. 또한 중국은 석유수송로를 보호하고 동남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해군력도 강화하고 있다. 이 같은 중국의 정책은 과거 진시황이나 한무제, 수양제 등 강력한 황제들의 움직임이 그러했듯이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흔들고 있다.

    한편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늪에서 아직 허우적거리고 있다. 일본의 동아시아 전략은 19세기 말의 조선 침략, 1931년의 ‘일만(日滿) 블록’ 구상, 여기에 중국이 덧붙여진 1933년의 ‘일만지(日滿支) 블록’ 구상이 1938년 중일전쟁과 1940년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으로 확장됐다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바 있다. 이른바 대아시아주의(Pan-Asianism) 실험이다. 그러나 경제부흥을 통해 재기한 일본은 1970년대부터 엔화 경제권 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해양도서 연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 흐름은 이렇듯 실패한 자신들의 동북아 구상과 중국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중국과 대결하면서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미일동맹이 더욱 중요하며, 동시에 안으로는 일본적인 힘, 즉 국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주변국들의 반감과 우려를 무릅쓰고 계속되는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과격한 행보, 최근 독도문제와 관련해 나타난 일본 정부의 태도 또한 그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한반도의 세력 상황은 열악하다. 19세기 말 조선은 통일국가를 이루었는데도 소멸했다. 이에 비해 반세기 이상 지속된 남북의 분단과 사실상의 적대관계는 국가적 역량을 심각하게 훼손해온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 긴장상태를 내부 정치에 악용하는 기제마저 여전한 현재 상황에서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기란 간단치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내부의 갈등은 대외적 긴장이 발생할 때 봉합되거나 연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현재 대외관계를 둘러싸고 한국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논란은 도리어 균형자 역할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게임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 공산이 크다. 내부에서 흔드는 세력이 있는 한 줄타기는 몇 발자국 못 간 채 추락하고 만다.

    미국이라는 변수도 간과할 수 없다. 지리적으로 보면 변방에 불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심에 있고, 또한 세계질서의 중심에 서 있으므로 지역 내부의 메커니즘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관계를 설정해야 한다. 이 변수를 놔두고 지역 내에서 세밀한 균형의 비율을 설정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당장 미국은 북한의 핵 문제로 인해 한국의 기대와는 다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너무나 복잡하다. 중국, 대만, 일본, 남·북한, 러시아, 미국 등 각국은 다자적 혹은 양자적으로 매우 미묘한 관계에 얽혀 있다. 어느 한 나라도 다른 한 나라에 대해 간단치 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동남아와 인도, 유럽까지 염두에 두면 방정식은 5세기와 달리 거의 해결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고도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해양 군사력 확보는 필수조건

    동아시아의 지리적인 환경도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다. 북쪽과 서쪽에는 십수세기 동안 지역 내 종주국 노릇을 해온 중국이 있고, 아래에는 또 다른 잠재 적국인 일본이 강력한 해양력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방향을 포위하고 있다. 또한 남북 분단으로 인해 대륙으로 연결될 수 없는 고립된 섬이나 다름없는 처지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시적으로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 혹은 평화와 협력구도가 지속되는 경우에만 허브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5세기 고구려가 추진했던 중핵 조정 역할을 살펴보면, 한반도가 이 같은 한계를 넘어 본격적인 허브 구실 혹은 이를 바탕으로 하는 균형자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남북이 통일되어 기본적인 형태의 반도라도 완성하고 대륙으로 뻗어나가는 교두보를 차지해야 한다. 그러자면 압록강 하구나 두만강 하구를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신의주 경제특구 설치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또한 중국이나 일본을 능가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해양력이 확보돼야만 한다. 황해 북부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고조선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고구려와 백제는 당나라의 해양기습작전에 타격을 입고 멸망했다. 동아시아 지역 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해양력은 필수적이다. 21세기에도 주요 항로의 배타적 관리권을 놓고 해양력의 대결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다. 한일간 독도분쟁, 일본과 러시아의 북방 4개 도서 분쟁,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 열도 분쟁, 중국과 동남아 국가 사이의 난사군도 분쟁은 모두 해양 영토의 확보라는 측면과 함께 해양 수송로(sealane)에 대한 권리와 확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한국의 해양력은 일본과 중국에 견주어 턱없이 열세에 있다. 일본은 국방비 지출 세계 4위의 군사 대국이고, 해군력은 2위이며 해양 영토는 5위에 달한다. 더구나 일본은 타타르해협 일부에서부터 대만에 이르기까지 해양으로 한반도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다. 중국의 군사력은 통계에 따라 세계 3위에 달한다는 보고도 있다. 스톡홀름의 국제평화연구소가 2003년 펴낸 연감을 보면 중국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세계에서 무기를 가장 많이 사들인 나라다. 중국이 최근 해군비를 증액하고 항공모함을 건조하는 등 해양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니 한국의 군사력, 특히 해양력에 대해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한국의 군사력은 통일시대와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을 전제로 군사력의 질과 양, 시스템을 결정하고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당장에는 한국에 불리한 지리적인 환경이지만 해양력이 강화된다면 동아시아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다. 지역 내의 물류망을 적극적으로 우리 구심권 안으로 끌어들여 보호하고, 주변국가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을 때 최소한의 해상 봉쇄나 해상 시위 등을 통해 이익을 확보할 수 있어야 비로소 역내 균형자 역할이 가능해진다.

    동아시아는 ‘지중해’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는 철저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 필요하고 또한 철저한 역할분담이 이뤄져야 한다. 한 국가가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면 패권국가나 맹주 노릇을 하고픈 유혹에 빠지기 쉽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는 심각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그 과정에서 중국과 한국은 불평등한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 사이의 갈등과 경쟁, 충돌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는 것이 한국이 수행할 수 있는 ‘동북아 균형자’ 역할의 이상적인 형태일 것이다.

    이렇듯 동아시아의 갈등을 최소화해 상생형 공동체로 만드는 과정에 앞서 언급한 동아지중해 모델을 적용하면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우선 육지 위주의 관점과 달리, 모든 나라를 해양 질서와 육지 질서를 공유하고 어떤 지역에서든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권역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지역 내 역학관계의 본질이 쉽게 드러나고 그에 따라 국가간 역할분담이라는 형식도 명확해진다. 다음으로는 지역 내 국가들의 공질성(共質性)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주는 효과가 있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수천년 동안 지정학·지경학·지문화학적으로 공동의 활동권역을 형성해왔다. 동아지중해 모델은 이러한 3국의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내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중해적 질서를 현실에 적용해보면, 지역 내 한국의 위치와 이른바 균형자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 그림이 보인다. 이는 곧바로 21세기 한국의 국가발전전략으로 연결된다. 즉 한반도는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남해-황해-동중국해 전체를 연결하는 해륙 네트워크의 허브가 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통일한국이 중요 해로를 장악해 해양 조정력을 확보하고, 여기에 TCR(중국횡단철도), TSR(시베리아횡단철도)과 해양수송로(sealane)를 연결한다면 교류의 주도권 장악은 물론 정치적 갈등도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건설해 활용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하나뿐인 물류체계의 허브로 교통정리가 가능하고 동아시아의 경제구조나 교역형태를 조정하는 역할까지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역할을 하더라면 단순한 소프트 파워 차원이 아니라 해양력으로 대표되는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지중해라는 구도에서 중핵 조정 역할을 수행했던 5세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략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 나름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문화나 경제에서는 물론 군사력으로도 주변국에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많은 한계가 있음에도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할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한 측면이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전략과 전술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지만, 이를 해결해 나가려면 떠들썩한 말보다 구체적인 행동을 조용히 취할 필요가 있다. 당장은 외부의 불필요한 주의를 끌지 않도록 하는 신중한 자세가 요구되고, 안으로는 국민의 합의를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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