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X파일’ 후폭풍, 2007년 대선구도 뒤집나

동아일보 정치 전문기자의 ‘도청·연정 정국’ 감상법

  • 김동철 동아일보 정치전문기자eastphil@donga.com

    입력2005-08-25 10: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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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파일’ 후폭풍, 2007년 대선구도 뒤집나
    ‘도청 정국’이 점입가경이다. 8월5일 국가정보원이 김대중(DJ) 정부 시절에도 도청이 이뤄졌다고 발표한 뒤 정치권에서는 음모론이 바로 불거져 나왔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노무현 대통령은 업무 복귀 첫날인 8일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아무런 의도도, 아무런 음모도 없다”며 음모론을 일축했다.

    그러나 야권이 노 대통령의 주장에 의문을 표시하며 음모론을 계속 제기하는 가운데 10일 DJ가 갑작스럽게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함으로써 도청 정국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평생을 인권과 평화를 위해 살았다고 자부해왔고 이를 바탕으로 노벨평화상까지 탄 김 전 대통령이 독재정권 시절 도청의 최대 피해자에서 도청의 가해자로 매도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아간 게 아니겠느냐. 노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국정원의 도청 발표에) 정치적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지만 모독은 국민의 정부가 당한 것 아니냐.”

    DJ 측근의 주장처럼 노령(老齡)의 DJ가 국민의 정부 쪽으로 칼날이 다가오는 도청 수사의 진행상황과 자신에게 쏠리는 의혹에 큰 충격을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여권이 DJ 입원 이후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청와대는 물론 열린우리당에서도 DJ의 역사적, 정치적 역할을 ‘찬양’하는 등 사태 수습에 적극 나선 것은 DJ의 충격과 분노를 읽었기 때문이다.

    사실 7월21일 안기부 X파일이 언론에 처음 보도됐을 때만 해도 정치적 공방은 김영삼(YS) 정부 시절의 불법도청 구조와 도청 내용 공개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따라서 대립전선도 ‘열린우리당 대 한나라당’으로 뚜렷한 편이었고, 초점도 안기부 도청팀인 미림팀의 불법적인 활동과 언론에 공개된 삼성 관련 테이프 외에 다른 내용을 담은 도청 테이프가 있는지에 모아졌다.



    ‘선공’으로 바람 잡는 정치권

    이런 상황은 검찰이 미림팀장 공운영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서 120분짜리 녹음테이프 274개와 녹취보고서 13권(총 3600여 쪽)을 압수했다고 발표한데 이어 국정원이 YS의 문민정부 때만이 아니라 DJ의 국민의 정부에서도 불법도청이 이뤄졌으며 국민의 정부 후반기인 2002년 3월부터 도청이 중단됐고 참여정부에서는 불법도청이 없었다고 발표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치권의 이전투구(泥田鬪狗)식 상호 비난이 더욱 심해지면서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기에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다가올 위기를 미리 의식해 ‘선공으로 바람을 잡아놓는’ 정치권 특유의 선제공격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 시절 여당이었고 현 정권을 창출하는 데 기반이 된 민주당의 반발과 DJ의 분노가 분명히 예상되는데도 국정원이 ‘고해성사’식 발표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김승규 국정원장은 이와 관련해 7월9일 국정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훈시에서 ▲과거 고백을 통해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회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었으며 ▲국회 정보위 등에서 국민을 향해 거짓말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을 종식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국정원의 고해성사에는 노 대통령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은 7월말경 국정원으로부터 “미림팀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도청행위가 국민의 정부에도 이어진 사실이 밝혀진 것 같다. 휴대전화에 대해서도 도청이 있었던 것 같다고 관련자들이 진술했다”는 설명과 함께 그 사실을 발표했을 때 일어날 파장에 대해서도 보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노 대통령은 “파장이 염려되기는 하지만 모든 진실이 공개돼야 한다. 차제에 도청에 대해 의혹이 남지 않도록 규명하라”고 지시했다는 것.

    청와대측이 이후 계속되는 민주당의 음모론 공세에 “국정원의 발표 내용은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DJ)가 도청을 지시했다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힌 것도 ‘진실 공개’와 국정원의 도청행위에 대한 자기반성 차원에서 국정원 발표가 이뤄졌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노 대통령도 기자간담회에서 “이 사실이 노출된 것은 내가 파헤친 것이 아니고 그냥 터져나왔다. 그냥 터져나온 사건이지 우리 정부가 파헤친 것이 아니다. 도청의 일부가 나왔으니까 도청 전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 전모에 대해 정부가 성의를 다해 진실을 밝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 여기다 대놓고 자꾸 정치적으로 음모가 있다, 이런 식으로 선동하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노 대통령과 국정원의 설명 자체에는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평가다.

    X파일과 연정, 별개 사안일까

    그런데도 정치권에서 도청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시(斜視)인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취임 이후 위기상황마다 ‘정치적 도박’을 즐겨온 노 대통령이 향후 정치구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도청 정국을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는 데 철저히 활용할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으로 보인다.

    그 의구심은 크게 두 가닥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구(舊)세력과 구(舊)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를 극대화해 정치판 새로 짜기를 시도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 대통령 자신으로서는 심혈을 기울여 제안했으나 야당이 바로 거부함으로써 딜레마에 빠진 연정(聯政) 구상을 되살리는 승부수로 도청 정국을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먼저 새 판 짜기와 관련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세력은 민주당이다. 민주당이 연일 음모론을 거론하며 도청 수사를 여권의 ‘DJ 죽이기’로 몰고 가는 것은 만일 새 판 짜기가 이뤄진다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세력이 자신들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즉 도청 수사에서 YS·DJ 정부의 치부(恥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구시대, 구정치에 대한 혐오가 심화될 경우 1차적 피해 당사자는 민주당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호남 민심을 역으로 자극해 이번 위기를 판세 역전의 계기로 삼으려 하고 있고, 현 시점에서 이런 시도가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2003년 대북송금 특검 이후처럼 현 여권에 대한 호남지역의 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면서 “DJ 흠결 내기로 끝나게 돼 있는 도청 정국은 DJ의 적자(嫡子)인 민주당에 오히려 힘이 실리고, 현 여권은 예상을 넘는 타격을 받는 국면을 조성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민주당의 기대와 달리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도청 정국은 결과적으로 기존 정치권에 대한 염증을 불러일으켜 지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과거 정치와의 단절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 대목이 야권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다.

    여권으로서는 도청수사에서 과거 정치의 더러운 측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경우 지역주의에 안주해온 구정치세력을 2선으로 후퇴시키면서 상대적으로 지역주의에서 자유로운 새 정치인들로 새 판을 짠다는 시나리오를 구상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이는 200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양김 시대의 확실한 종언을 통해 지역주의를 허물고, 도청이라는 구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청산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여권이 정치판을 새로 짜 정권 재창출을 이룩한다는 ‘그랜드 디자인’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분석과 맥락을 같이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도청 정국이 노 대통령의 연정 구상 되살리기와 연결될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연정과 관련해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은 8월12일 “현 시점에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은 힘들다”며 대연정 포기선언을 했다. 또 열린우리당의 여러 의원도 노 대통령의 연정 집착에 비판적 태도를 취해왔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도청 정국이 진행되면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현실인식 차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민주당은 국정원의 발표에 반발하고 민노당은 도청 문제 해법 등 각종 쟁점에서 시각차를 보였다. 열린우리당으로서는 소연정을 추진할 동력(動力)조차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X파일 쥔 여권이 ‘다른 생각’ 한다면…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12일에도 청와대 소식지인 청와대 브리핑을 통해 9일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자신이 밝힌 연정에 대한 구체적 구상을 뒤늦게 전할 정도로 ‘연정 집착증세’를 보이고 있다.

    노 대통령은 대연정 제안과 관련한 지난달 29일의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마련한 것은 대연정보다는 선거제도 개혁이다. 선거제도 개혁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니까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꼭 이 선거제도는 좀 고치고 싶다는 그런 뜻을 말씀드린 것이다. 대연정 제안은 소위 말하는 반대급부 내용이고 진정으로 제안한 것은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있는 선거제도를 만들자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는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이 연정 자체가 아니라 지역구도 해소에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도청 정국이 구세력과 지역주의 조장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불러와 여론이 지역주의 해소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노 대통령으로서는 야권의 연정 제안 거부로 이루지 못했던 지역구도 해소의 뜻을 이루는 길을 마련할 수도 있다. 야권에서 일찍부터 도청 테이프의 선별적 공개를 통한 연정 정국 돌파 가능성을 제기했던 것도 이런 점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도청 정국에서 반드시 밝혀져야 할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떻게 도청했고, 정권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했는가”라는 기본적인 내용 못지않게 미림팀장 공운영씨가 보관해온 도청 녹음 테이프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구이며, 어떤 대화내용이 담겨 있는지에 일반 국민의 관심이 더욱 쏠려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문에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여권이 ‘나쁜 생각’을 할 경우 도청 테이프는 여권의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현 여권 인사는 1990년대 중반에 실시된 미림팀의 도청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반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인사 등 구 정치세력은 도청 테이프의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도청 테이프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개연성을 더해주는 대목이다.

    물론 노 대통령은 기자간담회에서 여권의 도청 테이프 악용 가능성을 단호히 부인했다.

    “문제는 수사와 별개로 공개의 문제다. 수사대상이 되는 사실과 되지 않는 사실을 모두 포괄해서 공개해야 될 것과 공개되지 않아야 될 것이 있다. 이것은 법에 따라야 한다. 우리 국민 70%가 지금 공개하라고 하지만 70%가 아니라 100%가 공개하라고 하더라도, 공개하는 사람 스스로 위법을 감행하지 않으면 공개할 수 없게 돼 있다. 처벌을 면제해 주지 않으면 대통령도 공개를 명령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든 국민 70%가 공개하라 그러고 이 안에는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반드시 밝혀져야 될 구조적 비리 문제가 들어 있는 것 같으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결국 국회에서 법을 만들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말대로 현 시점에서 불법적인 도청 테이프는 특별법이나 특검을 포함하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서만 공개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공개된 도청 테이프 녹취록(1997년 당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 비서실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취록)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응에서도 나타나듯이 법과는 관계없이 테이프 공개 이후 상황이 여론재판으로 흐르는 후유증을 낳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또 테이프를 선별해 법에 따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이 테이프에 접근했거나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테이프 내용이 시중에 불법적으로 누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야 4당의 특검법안 공동 발의 이틀 뒤인 11일 특검법안 중 논란이 일고 있는 제2조 2, 3항의 테이프 내용 수사와 공개에 대해 위헌(違憲) 소지를 언급한 것도 이런 위험성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차기 대선 주자도 도청됐나

    ‘X파일’ 후폭풍, 2007년 대선구도 뒤집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입원에 대해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아간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아무튼 도청 테이프의 위력은 그 내용이 공개되고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홍석현 주미 대사가 낙마한 데서도 드러나듯 도청을 당한 당사자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힐 정도다. 특히 지도자급 정치인이 음모를 꾸미는 듯한 대화가 도청돼 공개됐을 때 당사자는 물론 정치권 전체가 폭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치권 일각에서는 차기 대선 유력 예비주자 중 도청 대상이 된 인사가 있느냐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국에서 확인해주지도 않고 현재로서 확인할 수도 없는 이 부분은 그러나 공운영씨에게서 도청 테이프를 회수해 이를 모두 불에 태워 없앴다고 밝힌 이건모 전 국정원 감찰실장이 “도청 자료가 공개된다면 상상을 초월한 대혼란을 야기하고 모든 분야에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옷 벗을 각오로 소각 처리했다”고 말한 점으로 미뤄 그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물론 이는 가능성일 뿐이고 현재로선 확증은 차치하고 소문조차 없다. 하지만 불가측성의 한국정치와도 같이 이런 추측이 만에 하나 현실로 드러난다면 2007년 대선 구도는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고 정치권도 지각변동의 충격 속에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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